송인수(宋麟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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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송인수 |
한글표제 | 송인수 |
한자표제 | 宋麟壽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미수(眉叟) |
호 | 규암(圭菴) |
시호 | 문충(文忠)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9년(연산군5) |
사망 | 1547년(명종2) 9월 20일 |
본관 | 은진(恩津) |
주거지 | 충청도 회덕(懷德) |
묘소소재지 | 충청도 문의(文義) 저자산(楮子山) |
증조부 | 송순년(宋順年) |
조부 | 송여해(宋汝諧) |
부 | 송세량(宋世良) |
모_외조 | 유씨(柳氏): 유승양(柳承陽)의 딸 |
형제 | (형)송귀수(宋龜壽) (4촌)송기수(宋麒壽) (8촌)송남수(宋柟壽) |
처_장인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박(權博)의 딸 →(자녀)1남 1녀 |
자녀 | (1자)송응경(宋應慶) (1녀)권이(權頤)의 처 |
저술문집 | 『규암집(圭菴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송인수(宋麟壽) |
총론
[1499년(연산군5)∼1547년(명종2) = 49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피화인(被禍人).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세거지는 충청도 회덕(懷德)이다. 자는 미수(眉叟), 호는 규암(圭菴)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송세량(宋世良)이고, 어머니는 승사랑(承仕郞)유승양(柳承陽)의 딸이다. 도승지송기수(宋麒壽)의 4촌형이고, 상주목사(尙州牧使)권박(權博)의 사위이다. 모재(慕齋)김안국(金安國)의 문인(門人)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1년(중종16)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가서 정자(正字) · 저작(著作) · 수찬(修撰)으로 차례로 승진하였고, 그 사이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26년(중종21) 모친상을 당하여 3년 상을 끝마치고, 1528년(중종23)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이듬해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사헌부에 있을 때, 중종이 사돈 관계인 전 이조 판서김안로(金安老)를 다시 등용하려고 하자, 극렬하게 반대하다가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좌천되었는데 부임하지 않고 낙향하였다. 1531년(중종26) 홍문관 부응교(副應敎) · 교리(校理)가 되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임하였으나, 김안로 일파는 그가 임의로 제주목사로 부임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아서 경상도 사천(泗川)으로 유배시켰다. 1537년(중종32) 좌의정김안로가 실각하자, 중종의 특명으로 예조 참의에 임명되었다가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539년(중종34)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병조 참판이 되었고, 이어서 예조 · 형조의 참판을 두루 거쳤다. 부친상을 당하여 상례를 끝마친 뒤 1541년(중종36)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윤원형(尹元衡) · 이기(李芑)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중종38) 전라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관찰사로 있을 때 영암에 ‘기영정(耆英亭)’을 세우고, 이곳에서 면앙정(俛仰亭)송흠(宋欽)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또 남평현감(南平縣監)유희춘(柳希春), 무장현감(茂長縣監)백인걸(白仁傑) 등을 불러서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1544년(중종39) 형조 참판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서 중국 북경에 다녀왔는데, 명나라 사람들이 그의 고결함를 보고 ‘빙옥(氷玉)’이라고 칭찬하였다.
인종 · 명종 시대 활동
1544년 인종이 즉위하자, 다시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때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이 도승지로 있다가 인종의 특명으로 공조 참판으로 승진하였는데, 대사헌송인수가 두 달 동안 그 부당함을 탄핵하여 끝내 윤원형을 시골로 추방하였다. 또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도 형조 판서로 있었는데, 거리낌없이 그를 탄핵하다가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으로 전임되었다. 1545년 인종의 묘호(廟號)를 정할 때, 어질 ‘인(仁)’ 자를 쓸 것을 적극 주장하였다. 그해 윤원형이 윤임 일파와 사림파(士林派)를 몰아내기 위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는데, 그도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여 청주(淸州)의 마암리(馬巖里)로 돌아가서 은거하였다. 1547년(명종2) 9월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나자, 송인수를 비롯하여 사림파의 여러 인물들이 사사(賜死)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유배되었다. 그 달 20일에 그가 사약을 받게 되자, 목욕하고 의관을 갖추고 나서 친구에게 서신을 보내기를, “하늘과 땅이 내 마음을 알 것이다.” 하고, 아들에게는 “내가 이렇게 죽었다고 해서 착한 일 하는 것을 게을리 말라.” 하였다. 그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조용히 사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향년이 49세였다.
그는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여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으며, 저서에 『규암집(圭菴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송인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평상시에 거처할 때에 그의 행동은 단아하고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용모는 화평하고 순수하였다. 사림파가 <기묘사화(己卯士禍)>에서 피해를 입고난 뒤 선비들의 기운이 저상(沮喪)하여 암담해 할 때에도 그는 분연하게 ‘조문석사(朝聞夕死)’(『논어(論語)』)의 뜻을 지니고 성현(聖賢)의 서적을 손에서 떼지 않았으며, 학문 탐구에 몰두하여 성현의 가르침을 독실하게 믿고 힘써 행하였다. 일에 있어서는 옛것을 스승으로 삼았고, 행동에 있어서는 옛날의 법도에 따랐다. 1526년(중종21) 모친상을 당하여 그 형 송귀수(宋龜壽)와 함께 여막살이 할 적에 흰 제비가 여막(廬幕)에 와서 깃들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 일이 그들의 효성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남의 말을 잘 받아들였다. 그러나 윤원형을 탄핵할 때는 그렇지 않았는데, 『동각잡기(東閣雜記)』에 따르면, 이때 4촌 동생 송기수와 매부 성제원(成悌元)이 앞날을 걱정하여 탄핵을 중지하기를 바라는 외부의 여론을 알리고 설득하였지만, 그는 뜻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546년 명종이 즉위하여 윤원형이 권력을 잡자, 송인수는 <을사사화>의 화를 당하였다. 송기수는 송인수를 설득하기도 하였으나, 그를 구하지 못하고 <을사사화>로 공신(功臣)이 되는 바람에, 당시 사람들로부터 “형을 모함한 공신”이라고 지탄을 받았고, 그 자신도 그 일을 평생 한스럽게 여겼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묘소는 충청도 문의(文義) 서쪽 저자산(楮子山)에 있는데, 부인의 묘소 오른쪽이다. 4촌 동생 송기수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상주목사(尙州牧使)권박(權博)의 딸로,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선조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회덕(懷德)의 숭현사(崇賢祠), 문의(文義)의 노봉서원(魯峰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전주의 화산서원(華山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규암집(圭菴集)』
- 『추파집(秋坡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계집(桐溪集)』
- 『면암집(勉菴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간이집(簡易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완당집(阮堂集)』
- 『월정만필(月汀漫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경일록(朝京日錄)』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퇴계집(退溪集)』
- 『포저집(浦渚集)』
- 『학봉전집(鶴峯全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