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朴永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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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0년(중종 5)~1576년(선조 9) = 67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은 우찬성(右贊成)이다. 자는 언이(彦而)이고,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박인효(朴仁孝)이고, 증조모 서씨(徐氏)는 서진(徐晉)의 딸이다. 조부는 박계간(朴季幹)이고, 조모 권씨(權氏)는 권기(權紀)의 딸이다. 아버지는 진위 현령(振威縣令)박조(朴稠)이며,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윤간(尹侃)의 딸이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진사(進士)가 된 다음에 1540년(중종 35)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 1) 8월에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고, 그 해 9월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547년(명종 2) 8월에 호조 정랑(正郞)이 되었고, 그 해 10월에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이조 좌랑이 되었다. 1548년(명종 3) 9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 1549년(명종 4) 4월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그 해 7월에 병조 정랑이 되었으며, 그 해 11월에 이조 정랑이 되었다. 1550년(명종 5) 9월에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과 『인종실록(仁宗實錄)』 편찬이 완료되었는데, 이때 그는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직함은 봉정대부(奉正大夫) 행 이조 정랑(行吏曹正郞)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여러 관직을 거치는 동안 청렴결백하다 하여 1551년(명종 6) 염근리(廉謹吏)로 뽑혔다. 1552년(명종 7) 2월에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그 해 사복시(司僕寺)정(正)이 되었다. 1553년(명종 8) 7월에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고, 1554년(명종 9) 2월에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1555년(명종 10) 3월에 청홍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그 해 7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고, 그 해 8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으며, 그 해 윤11월에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가 되었다. 1557년(명종 12) 7월에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어 그 해 11월에 부임하였다. 1559년(명종 14) 2월에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때 그는 명(明)나라 사신에 대한 접대 등으로 인한 조폐로 황해도 일대에 피역자(避役者)가 많고 관속(官屬)들마저 유리되고 있는 실정을 들어 그 대책의 시급함을 간하였다. 그는 그 해 8월에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1560년(명종 15) 7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561년(명종 16) 4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고, 1562년(명종 17) 3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563년(명종 18) 2월에 예조 참판이 되었고, 그 해 8월에 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으며, 그 해 10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564년(명종 19) 2월에 병조 참판이 되었다가 그 해 3월에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그 해 6월에 이조 참판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7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10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565년(명종 20) 8월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1566년(명종 21) 3월 중순에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가 되었다가 그 해 같은 달 하순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그 해 4월에 중추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그 해 5월에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고, 그 해 8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10월에 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1567년(명종 22) 1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 이조 판서로 있다가 이듬해인 1568년(선조 원년) 5월에 책봉태자진하사(冊封太子進賀使)로 허엽(許曄)과 함께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다. 그는 북경에서 돌아와 참찬(參贊)되었다가 1571년(선조 4) 6월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였다. 1572년(선조 5)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 1573년(선조 6) 1월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그 해 3월 초순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가 같은 달 3월 중순에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그 해 6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그가 신병으로 세 번이나 정사(呈辭)하니, 임금이 갈라고 명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지사(知事)가 되었다가 그 해 10월에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그 해 12월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1574년(선조 7) 2월 그는 공조 판서의 직을 신병으로 세 번이나 정사하니 체직시키게 하였다. 그 해 3월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고, 그 해 11월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 1575년(선조 8) 6월에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그 해 11월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그 뒤 그 해 의정부 우찬성(右贊成)이 되었는데 그 다음해인 1576년(선조 9) 1월 2일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는 67세이다.

성품과 일화

박영준의 성품과 자질에 대하여는 실록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가 명종 때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을 때 기록에는, “인물이 자상하고 민첩하나 선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서 청의(淸議)에 용납되지 않았으므로 논사(論思)하는 직책의 장관에는 합당치 않다는 논평이 있었다.” 라고 하였다.(『명종실록(明宗實錄)』 명종 15년 7월 3일) 또 박영준이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을 때 기록에는 “타고난 천성이 비록 화평 간략한 것 같았지만 처신과 입심(立心)이 오로지 벼슬자리나 지키려는 계책을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번 헌부의 장(長 )이 되었었지만 꺼리지 않고 바른말을 하는 기풍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라고 하였다.[『명종실록』명종 21년 10월 25일] 그가 이조 판서가 되었을 때 기록에는 “외모는 아담하고 소졸한 듯 하였으나, 일신(一身)을 꾀하는데 공교하여 시세(時勢)를 잘 따랐다. 그리하여 권간(權奸)에게 붙지 않았어도 그들에게 거스름을 받지 않고 여러 조정을 거쳐 벼슬하였으니, 하나의 구신(具臣)에 불과했다. 무엇을 취할 것이 있겠는가? 전조(銓曹)의 장(長)이 되어 뇌물을 많이 받았으므로 여론이 비루하게 여기었다.” 라고 하였다.[『명종실록』명종 22년 1월 4일] 그가 세상을 떠나던 날 기록에는, “젊어서부터 청환(淸宦)과 현직을 차례로 거치면서 한결같이 시세를 따르고 관망하는 것으로 일삼았기 때문에, 권신이나 귀척(貴戚)들에게 미움을 받지 않았으며 공의(公議)에 거스름을 당하지 않고 부귀를 누린 채 세상을 떠났다.”라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선조 9년 1월 2일 「박영준 졸기」]

묘소와 가족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洲)에 있다. 부인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신수함(申水涵)의 딸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국인(韓國人)의 족보(族譜)』
  • 「가정 7년 무자 2월 24일 생원진사 방목(嘉靖七年戊子二月二十四日生員進士榜目)」
  • 「정덕 2년 정묘 9월 초7일 사마방목(正德二年丁卯九月初七日司馬榜目)」(하버드옌칭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