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후(朴世煦)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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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세후 |
한글표제 | 박세후 |
한자표제 | 朴世煦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중온(仲溫) |
호 | 인재(認齋), 눌재(訥齋) |
봉작 | 낙성부원군(洛城府院君)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3년(성종24) |
사망 | 1550년(명종5) |
본관 | 상주(尙州) |
주거지 | 경기도 남양(南陽)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흑현리(黑峴里) 천마산(天磨山) 낙성곡(洛城谷) |
증조부 | 박안의(朴安義) |
조부 | 박미창(朴美昌) |
부 | 박사화(朴士華) |
모_외조 | 영산신씨(靈山辛氏): 신복담(辛福聃)의 딸 |
형제 | (형)박세훈(朴世勳), 박세도(朴世燾), 박세희(朴世熹) |
처_장인 | 순흥안씨(順興安氏): 안처선(安處善)의 딸→(자녀)3남 1녀 |
자녀 | (1자)박충은(朴忠誾) (2자)박충간(朴忠侃) (3자)박충렴(朴忠廉) (1녀)이여회(李如晦)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세후(朴世煦) |
총론
[1493년(성종24)~1550년(명종5) = 58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중온(仲溫)이고, 호는 인재(認齋)· 눌재(訥齋)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경기도 남양(南陽) 출신이다.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박사화(朴士華)의 아들이고, 송촌(松村)박세훈(朴世勳)과 도원재(道源齋)박세희(朴世熹)의 아우이다. 정암(靜庵)조광조(趙光祖)의 문인(門人)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16년(중종11)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14)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림파(士林派)가 모두 제거되어 정국이 어수선한 가운데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 1522년(중종17) 겨울에 모친상을 당하여, 큰형 박세훈(朴世勳)과 함께 상례를 다하고 여묘살이를 하였다. 상기를 다 마치고 성균관박사(博士)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가을에 파직되었다. 1527년(중종22) 다시 성균관 박사로 복직되어 전적을 거쳐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이 되었다. 1528년(중종23) 광양현감(光陽縣監)으로 나가서 해상의 방어와 어민들의 생활 안정에 힘쓰며, 향교(鄕校)를 새로 짓고 교육에 힘쓰는 등 경내를 크게 변화시켜 백성들이 편리하게 살도록 하였다.
1533년(중종28)에 임기가 만료되자 공조좌랑이 되었다. 예조낭관으로 옮겼고 1535년(중종30)에 호조낭관이 되었다. 1536년(중종31)에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으로 좌천되었다가, 간관(諫官)의 탄핵을 받아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 이는 그가 훈구파 김안로(金安老)의 청혼을 거절하여 그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뒤 교서관(校書館)교리(校理)로 복직되었고, 형조낭관, 성균관사예(司藝)를 거쳐 종부시(宗簿寺)첨정· 봉상시(奉常寺)첨정을 지냈다. 1540년(중종35) 밀양부사(密陽府使)로 특별히 선임되어 광양현(光陽縣)을 다스릴 때와 같이 국방· 산업· 학문의 치적을 남겼다. 1544년(중종3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다가, 곧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하였다.
인종~명종 시대 활동
1545년(인종1) 장례원(掌隷院)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제의 탄생일을 축하하였다. 청간(淸簡)하고 엄명(嚴明)하므로 감히 범하는 자가 없었다. 1546년(명종1)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1548년(명종3)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나갔다. 강원도관찰사 재직 시절에 훈구파 이기(李芑)의 가까운 친족인 양구현감(楊口縣監)신난수(愼蘭秀)의 비행을 적발하여 중앙에 보고하였다가, 도리어 파면되어 고향 남양(南陽)으로 돌아왔다. 그 뒤에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고향에서 은둔 생활을 하다가, 1550년(명종5) 9월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다. 3남 1녀를 두었는데, 2남 박충간(朴忠侃)이 크게 출세하였다.
성품과 학문
박세후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자질이 빼어나고 성품이 굳세어서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다. 8세에 『소학(小學)』 등의 서적에 통달하였으며, 이미 형들로부터 효우(孝友)의 도리를 본받아서 스스로 깨달았다. 그는 어려서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다가, 겨우 11세가 되던 해인 1504년(연산군10) 여름에 아버지를 여의었는데, 항상 뜻이 커서 대가(大家)에게 가르침을 받기를 바라는 뜻이 있었기 때문에 중형(仲兄) 박세희의 소개로 그 친구인 조광조(趙光祖)에게 수학하게 되었다. 기묘사화 때 도원재박세희는 희생되었으나, 그는 정암조광조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겨우 화를 면하였다.
묘소와 제향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화도면 흑현리(黑峴里) 천마산(天磨山) 아래 낙성곡(洛城谷)에 있는데, 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뒤에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고 낙성부원군(洛城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경기도 광양(光陽)의 봉양사(鳳陽祠)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상주박씨세보(尙州朴氏世譜)』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청음집(淸陰集)』
- 『정암집(靜菴集)』
- 『면앙집(俛仰集)』
- 『부사집(浮査集)』
- 『범허정집(泛虛亭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