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원(朴聖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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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성원 |
한글표제 | 박성원 |
한자표제 | 朴聖源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학자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후기 |
왕대 | 영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사수(士洙) |
호 | 겸재(謙齋) |
시호 | 문헌(文獻)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97년(숙종 23) |
사망 | 1767년(영조 43) |
본관 | 밀양(密陽) |
주거지 | 양주(楊州) |
증조부 | 박승임(朴承任) |
조부 | 박현주(朴玄冑) |
부 | 박진석(朴震錫) |
모_외조 | 정씨(鄭氏): 정명한(鄭溟翰)의 딸 |
형제 | (형)박행원(朴行源) (동생)박경원(朴敬源) |
처_장인 | (첫째부인)창원유씨(昌原柳氏): 유겸일(兪謙一)의 딸 (둘째부인)연안이씨(延安李氏): 이담로(李聃老)의 딸 |
자녀 | (1자)박종상(朴宗相) (2자)박종식(朴宗植): 박최원의 양자 (3자)박종간(朴宗幹) (4자)박종빈(朴宗彬) |
저술문집 | 『예의유집(禮疑類輯)』, 『돈효록(敦孝錄)』,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성원(朴聖源) |
총론
[1697년(숙종 23)~1767년(영조 43) = 71세]. 조선 후기 영조 시대 활동한 문신·학자. 행직(行職)은 병조 참판(參判)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자는 사수(士洙)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박진석(朴震錫)이며, 어머니 정씨(鄭氏)는 정명한(鄭溟翰)의 딸이다. 존성재(存誠齋)박미(朴楣)의 후손이다. 이재(李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영조 시대 활동
1721년(경종 1) 사마시(司馬試) 생원(生員)과 진사(進仕)에 모두 합격하였고, 1728년(영조 4)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1730년(영조 6)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 정자(正字)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영조 16) 6월 지평(持平)이 되었고, 1742년(영조 18) 10월 정언(正言)이 되었다. 1744년(영조 20) 7월 다시 지평이 되었는데, 그는 이때 대간에 나아가서 11조목을 아뢰었다. 그 계본(啓本)이 들어가자,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진신(搢紳)들을 모두 쫓아내려고 하는 계책이다.”하고, 매우 노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그 해 8월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되었다가 2년 뒤인 1746년(영조 22) 1월에 방송(放送)되었다. 1754년(영조 30) 6월 장령(掌令)이 되었고, 8월 세자시강원 (世子侍講院) 필선(弼善)이 되었다. 1759년(영조 35) 3월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10월부터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의 관원(官員) 즉 익선(翊善)·좌익선(左翊善)·유선(諭善)을 역임하면서 세손인 정조를 보도(輔導)하였다. 1766년(영조 42) 9월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10월 병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치사(致仕)하여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1767년(영조 43) 1월 임금으로부터 선마(宣麻)를 받았다. 같은 해 세상을 떠나니 나이 71세이다. 그는 당시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다.
『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38년 4월 25일(무자)조를 보면 영조는 세손 정조에게 말하기를, “세손 학문은 바로 박성원의 힘이다. 스승을 존경하고 벗과 친한 것은 『소학(小學)』의 도리이며, 어진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어 하라[賢賢易色]는 것은 공문(孔門)의 가르침이다. 네가 후일 박성원을 경애(敬愛)하겠는가?”하였다. 또 영조는 “왕세손의 덕기(德器)가 성취하였으니, 바로 교도(敎導)한 소치이다. 그 누가 교도 하였는가? 바로 남유용(南有容)과 박성원이다. 지금 늙은 나이에 어찌 그 포장(褒獎)함이 없었는가? 모두 특별한 자급(資級)을 가하여 나의 뜻을 보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영조실록』영조 42년 8월 22일(기미)조 참고.)
정조는 즉위 후 그가 찬술(撰述)한 『예의유집(禮疑類輯)』을 보고, 그 책이 의례(疑禮)의 고증에 도움이 됨을 아름답게 여겨, 친히 서문(序文)을 지어 교서관(校書館)에 지시, 활자(活字)로 인출하였다. (『정조실록(正祖實錄)』정조 7년 12월 24일(신사)조 참고.) 또 정조는 박성원이 옛 사람의 언행 중에서 모아서 찬집(撰輯)한 『돈효록(敦孝錄)』의 서문을 친히 지어 주었고, 이어서 경상도관찰사에 지시하여 이 책을 인간하였다. 그의 저서는 위의 두 책 외에 『보민록(保民錄)』, 『돈녕록(敦寧錄)』, 『겸재집(謙齋集)』 등이 더 있다.
성품과 일화
박성원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자질이 성실하고 청백한 성격에 효우를 행실의 기본으로 하였다. 그는 효가 화민성속(化民成俗)의 근본이 됨을 들어서, 이를 백성들을 보호하고 국기를 다지는 원동력이 되도록 정책적인 차원에서 실시해보고자 하였다.
한편, 그는 빈한(貧寒)한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영조는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후에도 제수를 도와주어 “나의 뜻을 표하라” 하였고(『영조실록』영조 44년 1월 24일(계축)조 참고.) 정조는 즉위하던 해 하교하기를, “고 유선 박성원은 곧 나의 사부(師傅)인데 청빈하게 지내는 아들이 있다고 들었다. 현인(賢人)의 후손은 녹용(錄用)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름을 물어 녹용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호와 증직
1783년(정조 7) 나라에서 문헌(文獻)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 해에 이조 판서(判書)로 증직되었다. 첫째 부인 창원유씨(昌原柳氏)는 유겸일(兪謙一)의 딸이고, 둘째 부인 연안이씨(延安李氏)는 이담로(李聃老)의 딸이다. 모두 4남을 두었는데, 1자는 박종상(朴宗相)이고, 2자는 박종식(朴宗植)이며, 3자는 박종간(朴宗幹)이고, 4자는 박종빈(朴宗彬)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