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수(金允壽)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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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김윤수 |
한글표제 | 김윤수 |
한자표제 | 金允壽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세조 |
집필자 | 이현숙 |
시호 | 호양(胡襄)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87년(우왕 13) |
사망 | 1462년(세조 8) 11월 24 |
본관 | 선산(善山) |
주거지 | 서울, 선산 |
묘소소재지 | 경상도 선산 |
형제 | (동생)김윤집(金允集), 김윤덕(金允德) |
처_장인 | 성산 이씨(星山李氏) : 이계흥(李繼興)의 딸 →(자녀)2남 2녀 |
자녀 | (1자)김구정(金九鼎) (2자)김만정(金萬鼎) (1녀)김상형(金尙亨)의 처 (2녀)이철환(李鐵丸)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윤수(金允壽)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2년 4월 11일, 『세종실록』 1년 5월 20일, 『세종실록』 9년 8월 30일, 『세종실록』 15년 5월 28일, 『세종실록』 15년 6월 10일, 『세종실록』 17년 1월 18일, 『세종실록』 17년 2월 7일, 『세종실록』 17년 6월 13일, 『세종실록』 17년 7월 19일, 『세종실록』 17년 9월 18일, 『세종실록』 18년 6월 22일, 『세종실록』 20년 5월 20일, 『세종실록』 21년 8월 9일, 『세종실록』 24년 8월 3일, 『세종실록』 25년 2월 13일, 『세종실록』 27년 7월 1일, 『세종실록』 27년 11월 3일, 『세종실록』 29년 3월 10일, 『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 『문종실록』 즉위년 8월 11일, 『문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문종실록』 1년 1월 5일, 『문종실록』 1년 4월 5일, 『문종실록』 1년 4월 20일, 『문종실록』 1년 6월 26일,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단종실록』 1년 10월 8일, 『단종실록』 2년 2월 9일, 『단종실록』 2년 11월 11일, 『세조실록』 8년 7월 21일, 『세종실록』 1년 6월 20일, 『세종실록』 7년 11월 27일 |
총론
[1387년(우왕 13)∼1462년(세조 8) = 76세]. 조선 전기 세종(世宗)~세조(世祖) 때의 무신. 함길도병마절제사(咸吉道兵馬節制使)와 경상도안무처치사(慶尙道按撫處置使) 등을 지냈다.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선산이다. 동생 김윤집(金允集)·김윤덕(金允德)과 함께 3형제가 모두 무재(武材)에 뛰어나서, 김종서(金宗瑞)가 6진(鎭)을 개척할 때 두만강 유역의 5성(城)을 축성하고 방어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1409년(태종 9) 23세 때 갑사(甲士)에 예속되었고, 그 뒤에 25세가 되던 1411년(태종 11)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부사직(副司直)·사정(司正) 등 안팎의 관직을 두루 거쳤다.[「김윤수묘표」],(『태종실록』 12년 4월 11일) 그는 완력이 남보다 세고, 활 쏘고 말 타는 무예에 뛰어났다. 그리하여 항상 궁중을 수비하는 갑사에 소속되어 궁중의 각종 무술 시합에서 우승하였으므로, 세종이 그의 무재를 잘 알고 있었다. 1419년(세종 1) 세종이 이종무(李從茂)를 3군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최윤덕(崔潤德)을 3군 도절제사(都節制使)에 임명하여 대마도(對馬島)를 정벌할 때 김윤수는 도절제사의 진무(鎭撫)에 임명되어, 중위(中尉)의 군사를 직접 지휘하며 대마도의 왜구(倭寇)를 정벌하였다.(『세종실록』 1년 5월 20일) 그 뒤에 경력(經歷)·호군(護軍) 등의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는데, 1427년(세종 9)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시종관(侍從官)에 임명되어 마침내 청요직(淸要職)에 올랐다.(『세종실록』 9년 8월 30일) 1432년(세종 14) 부친상을 당하여 동생들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였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32 「김윤수(金允壽)」 이하 「김윤수묘표」로 약칭]
1433년(세종 15)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최윤덕이 파저강(婆猪江)의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정벌할 때 그는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하경복(河敬復)이 “여연군지사(閭延郡知事)신득해(辛得海) 등은 모두 파저강 싸움에 나가서 적을 죽이고 돌아왔는데, 지금 만약 야인의 경계에 가까이 있으면 야인들이 반드시 원한을 품고 있을 것이니, 신득해를 대신하여 김윤수를 임명하도록 하소서.”라고 하여, 세종은 상중에 있는 김윤수를 여연군수(閭延郡守) 겸 절제사(節制使)로 임명하였다.(『세종실록』 15년 5월 28일) 이때 김윤수가 하직 인사를 하자, 세종이 그에게 활과 화살, 옷 한 벌을 내려주었다.(『세종실록』 15년 6월 10일)
1435년(세종 17) 1월 오랑캐 대추장 이만주가 복수를 하려고 오랑캐 군사 2천 7백여 명을 이끌고 평안도에서 가장 후미진 여연성(閭延城)을 침입하였는데, 여연군수김윤수가 도진무(都鎭撫)상호군(上護軍)이진(李震)·도안무사(都安撫使)군관(軍官)김수연(金壽延) 등과 더불어 군관민을 이끌고 성문을 굳게 잠그고 오랑캐 군사와 대치하였다. 김윤수와 이진이 군사들에게 성곽 위에 올라가서 성가퀴에 몸을 숨기고 활과 포(砲)를 적에게 발사하게 하여 오랑캐 군사 90여 명과 그들의 말 60여 필을 쏘아 명중시키니, 오랑캐 군사들이 어쩔 수 없이 후퇴하였다. 적이 물러간 이튿날 김수연이 정예병 1백 명을 인솔하고 강변까지 적을 추적하였다. 김윤수도 이 사실을 급히 보고하고, 병력을 증강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싸움에서 김윤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화살을 맞았고, 군졸 4명도 적의 화살을 맞아, 그 중에 1명이 죽었다.(『세종실록』 17년 1월 18일) 이후 세종은 오랑캐와 싸운 김윤수의 전술을 높이 평가하여, 오랑캐를 방어하는 기본 모델로서 항상 언급할 정도였다.
그해 2월 세종이 이조 정랑(正郞)조강(趙講)을 평안도로 보내어, 평안도도안무사(平安道都安撫使)최윤덕,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이각(李恪), 여연군수김윤수에게 향온(香醞) 30병을 내려주고, 김윤수를 특별히 정4품상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품시켰다.(『세종실록』 17년 2월 7일),[「김윤수묘표」] 그러나 그해 6월 파저강 여진이 귀화해 와서 말하기를, “지난 정월에 이만주가 홀라온(忽剌溫) 우디케와 더불어 여연 지경을 침범하여 남자 두 사람을 죽이고, 남녀 7명과 말 6필과 소 5마리를 사로잡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하므로, 세종이 평안도 도절제사이각으로 하여금 사실을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김윤수는 이를 알고도 여섯 달 동안이나 보고하지 않다가, 이때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실토하였다. 세종은 영의정황희(黃喜)·좌의정최윤덕과 상의한 후, 김윤수에게 내려준 4품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그대로 유임시켰다.(『세종실록』 17년 6월 13일)
그해 7월 여연(閭延) 소훈두(小熏豆)에 오랑캐가 침입하자, 여연군수김윤수는 군사를 거느리고 진무(鎭撫)장사우(張思祐)의 군사와 함께 오랑캐를 협공하여 적 7명을 쏘아서 죽이고, 그들이 노략질해 가는 가축과 재산을 모두 되찾았다. 이에 세종은 김윤수와 장사우에게 활과 의복을 내려 주고, 김윤수에게 빼앗은 4품의 고신을 되돌려 주었다.(『세종실록』 17년 7월 19일),(『세종실록』 17년 9월 18일) 이듬해인 1436년(세종 18) 5월에는 오랑캐 군사 5백여 명이 여연의 조명간 구자(趙明干口子)에 침입하여, 남녀 14명을 납치하고 우마(牛馬) 85두를 약탈하여 갔다. 그 결과 김윤수는 여연군수에서 파직되어 충군(充軍)이 되었다.(『세종실록』 18년 6월 22일) 그러나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김종서가 김윤수를 추천하여 6성을 구축하고 방어하는 일을 맡겼다. 한편 김윤수는 여연군수로 부임한 후 3년 동안 여러 차례 오랑캐의 기병(騎兵)의 침입을 받았으나, 기묘한 계책을 써서 변화에 대응하고 오랑캐를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에 세종은 그의 공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여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하였다.[「김윤수묘표」]
1438년(세종 20) 5월 함길도도절제사김종서가 아뢰기를, “도내의 수령 가운데 경원을 지킬 만한 자를 추천한다면, 김윤수가 좋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세종은 김윤수를 경원도진무(慶源都鎭撫)로 임명하였다.(『세종실록』 20년 5월 20일) 이듬해인 1439년(세종 21) 8월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김종서(金宗瑞)가 “길주목사(吉州牧使)장우량(張友良)이 임기가 차서 지금 교대하게 되었는데, 김윤수는 오랫동안 변방 지역에 있어서 적의 허실(虛實)을 두루 알고 또 무예에도 능하니, 장우량을 대신할 사람은 김윤수보다 나은 자가 없습니다”라고 하니, 세종이 김윤수를 길주목사에 임명하였다.(『세종실록』 21년 8월 9일) 그리고 1442년(세종 24) 김윤수는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회령절제사(會寧節制使)에 임명되었다.(『세종실록』 24년 8월 3일) 이어 1443년(세종 25) 경원절제사(慶源節制使)에 임명되어 임기를 채우고, 1445년(세종 27) 중추원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12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다.(『세종실록』 25년 2월 13일),(『세종실록』 27년 7월 1일) 그해 경상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로 나가 경상도 연안의 왜구 침입을 방어하였다.(『세종실록』 27년 11월 3일) 이어 1447년(세종 29)에는 김종서와 이징옥의 뒤를 이어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되어, 세종 말년까지 4년 동안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하는 총책임을 맡았다.(『세종실록』 29년 3월 10일) 세종은 김윤수에게 여진족을 방어할 사목을 일일이 지시하였는데, 그때 몽고의 야센부카가 명(明)나라를 침입하면서 우리 국경을 쳐들어온다고 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방어가 초긴장 상태였기 때문이다.
문종~세조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김윤수는 중추원 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가 인수부(仁壽府) 윤(尹)으로 옮겼으며, 그해 말에 함길도도순문사(咸吉道都巡問使)에 임명되어 함길도 지방의 여진 방어를 점검하였다.(『문종실록』 즉위년 8월 7일),(『문종실록』 즉위년 8월 11일),(『문종실록』 즉위년 12월 13일) 1451년(문종 1) 경기조전절제사(京畿助戰節制使)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인수부 윤이 되었고, 다시 함길도도절제사가 되었다가 인수부 윤을 거쳐 경상우도도절제사(慶尙右道都節制使)가 되었다.(『문종실록』 1년 1월 5일),(『문종실록』 1년 4월 5일),(『문종실록』 1년 4월 20일),(『문종실록』 1년 6월 26일) 1452년 5월 문종이 세상을 떠나고, 어린 단종(端宗)이 즉위하자 수양대군(首陽大君) 일파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킬 때 김윤수는 중추원 지사(知事)로 있었다. 권력의 핵심에서 떨어져 있었던 김윤수는 계유정난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는데, 세조는 다수의 관료층을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봉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리하여 김윤수는 좌익 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동생 김윤덕(金允德)은 3등에 각각 책훈되었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이후 김윤수는 1453년(단종 1) 10월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명나라에 가서 조선의 정세를 알렸고, 1454년(단종 2) 2월 정조사(正朝使)에 임명되어 북경(北京)에 가서 신정(新正)을 하례하고 돌아온 후 명나라 정세를 자세히 보고하였다.(『단종실록』 1년 10월 8일),(『단종실록』 2년 2월 9일) 1454년(단종 2) 충청도처치사(忠淸道處置使)에 임명되어 지초토사(知招討事)를 겸임하였다.(『단종실록』 2년 11월 11일)
1455년(세조 1)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으나, 나이가 70세에 가깝다고 하여 치사(致仕)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뼈를 묻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침내 세조의 허락을 얻어 고향 선산(善山)으로 돌아온 후에는 강호(江湖)에서 여생을 보냈다. 1462년(세조 8) 7월 21일 노병으로 선산의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6세였다.(『세조실록』 8년 7월 21일)
성품과 일화
사람됨이 뜻이 크고 기개가 있었으나, 재물을 늘이거나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였다. 그가 북쪽 국경을 지킨 20여 년 동안에 여진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우리나라에 복종하였다. 처음에 북방으로 떠나갈 때에 아내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나이 18살 때에 함길도로 아버지를 찾아가서 비로소 부자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2』]
김윤수는 젊었을 때부터 용맹과 지혜가 뛰어나서, 활 쏘기와 말 타기를 익히고 병법(兵法)을 배웠다. 1419년(세종 1) 6월 정종(定宗)이 더위를 피하여 모화루(慕華樓)로 피서하자, 태종과 세종이 가서 문안하였다. 그때 장사(壯士)를 뽑아 모화루 아래에 수박희(手搏戲 : 태견도의 일종)를 시키고 세 임금이 관람하였는데, 진무김윤수가 8명의 장사를 모두 이기자, 세종이 그에게 상을 주었다.(『세종실록』 1년 6월 20일)
1425년(세종 7) 11월 세종이 동교(東郊)에 거둥하여, 화포를 시험하였는데, 세자 문종이 배종(陪從)하였다. 이보다 앞서 미리 군기감(軍器監)에서 갑주(甲胄)를 입힌 풀로 만든 사람[草人] 3백 명을 만들어 장막의 서쪽 1백 50보의 위치에 세워 놓았는데, 먼저 화약수(火藥手)로 하여금 화포를 쏘게 하고, 다음으로 대호군권복(權復)과 호군김윤수 등 6명으로 하여금 풀로 만든 사람에게 활을 쏘게 하였다. 그리고 화포를 쏘았을 때와 활로 쏘았을 때 어느 쪽이 갑옷을 더 깊게 꿰뚫었는지를 세종이 직접 실험하고, 화포를 연구 개발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27일) 이리하여 세종 시대 ‘4전(箭) 화통(火筒)’⋅‘8전 화통’이 발명되어 화차(火車)를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세종 초기에 김윤수는 갑사로서 세종을 측근에서 호위하였으므로, 세종이 김윤수의 무예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종 후반기에 6진(鎭)을 개척할 때 김윤수를 회령절제사와 경원절제사에 임명하였다가, 세종 말년에 4년 동안 함길도도절제사로 삼아 북방의 최일선에서 오랑캐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겼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호양(胡襄)이다. 묘소는 경상도 선산(善山) 동쪽 15리 냉산(冷山)에 있는데, 성종(成宗) 때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김성경(金成慶)이 지은 묘표(墓表)김윤수가 남아있다.
부인 성산 이씨(星山李氏)는 이계흥(李繼興)의 딸로,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다. 장남 김구정(金九鼎)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고, 차남 김만정(金萬鼎)은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장녀는 호군김상형(金尙亨)에게, 차녀는 사정이철환(李鐵丸)에게 각각 시집갔다.[「김윤수묘표」]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동사강목(東史綱目)』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해동잡록(海東雜錄)』
- 『옥천집(玉川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