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망(金公望)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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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김공망 |
한글표제 | 김공망 |
한자표제 | 金公望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위수(渭叟)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82년(성종 13) |
사망 | 1528년(중종 23) |
본관 | 안동(安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사관(蛇串) |
증조부 | 김환(金丸) |
조부 | 김종손(金宗孫) |
부 | 김성(金城) |
모_외조 | 풍산 임씨(豊山任氏) : 임치(任治)의 딸 |
형제 | (형)김공량(金公亮), 김공석(金公奭) |
처_장인 | 경주 이씨(慶州李氏) : 이복형(李復亨)의 딸 →(자녀)4남 1녀 |
자녀 | (1자)김순(金淳) (2자)김이(金洢) (3자)김운(金沄) (4자)김준(金浚) (1녀)조섬(趙銛)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공망(金公望)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6년 4월 9일, 『중종실록』 7년 9월 15일, 『중종실록』 10년 2월 3일, 『중종실록』 13년 7월 11일 |
총론
[1482년(성종 13)∼1528년(중종 23) = 47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해주목사(海州牧使) 등을 지냈다. 자는 위수(渭叟)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오위부장(五衛副將)김성(金城)이고, 어머니 풍산 임씨(豊山任氏)는 별좌(別坐)임치(任治)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김종손(金宗孫)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김환(金丸)이다. 주계군(朱溪君)이심원(李深源)의 문인이며, 조원기(趙元紀)와 절친한 사이였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506년(연산군 12) 병인(丙寅) 별시(別試) 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5세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의정부(議政府)주서(注書)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다. 그 뒤에 승문원 교검(校檢)을 거쳐, 공조 좌랑(佐郞)과 형조 좌랑, 호조 좌랑, 예조 좌랑, 병조 좌랑을 두루 역임하고, 1511년(중종 6)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다.(『중종실록』 6년 4월 9일),(『중종실록』 7년 9월 15일) 이어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다가, 공조 정랑(正郞)과 형조 정랑, 예조 정랑을 역임하고, 1515년(중종 10)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중종실록』 10년 2월 3일) 그 뒤에 훈련원(訓鍊院)첨정(僉正)과 봉상시(奉常寺) 첨정, 상의원(尙衣院) 첨정, 군기시(軍器寺) 첨정을 거쳐 1518년(중종 13)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과 선공감(繕工監) 부정을 거쳐 제용감(濟用監)정(正)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 13년 7월 11일) 1521년(중종 16)에 내자시(內資寺) 정으로 옮겼다가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는데, 그때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였다.[『이암유고(頤庵遺稿)』 권2 「해주목사김공묘갈명(海州牧使金公墓碣銘)」]
1523년(중종 18) 상복을 벗고 장악원(掌樂院) 첨정이 되었다가 사도시(司導寺) 정을 거쳐 해주목사(海州牧使)가 되었는데,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는 증 선정을 베풀었으므로 연임되었다. 해주목사로서 5년 동안 지내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1528년(중종 23) 7월 14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가 47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여 지조를 굳게 지켰다. 구차스럽게 남이 하는 대로 따라서 순종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다. 또 벼슬길에 나가서 일을 할 때에는 정성과 마음을 다하였다. 그가 해주목사가 되었을 때, 백성들의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공평하게 하여 원한을 풀어주고 간교한 자들을 꼼짝 못하게 하자, 한 도(道)의 사람들이 바람에 나부끼듯 그를 따랐다. 그러자 근방의 고을 수령으로 의롭지 못한 짓을 하려던 자들은 사사로이 서로 알리고 경계하면서 혹시라도 그가 이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였다.
그의 둘째형 김공석(金公奭)이 보성군수(寶城郡守)로 있으면서 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체직(遞職)되어 떠나자, 김공망이 즉시 청원하여 나주목사로 나갔다. 그는 어머니가 계시는 곳과 가까워진 것을 기뻐하고 정성을 다하여 봉양하려고 하였으나, 그가 나주에 도착하여 수레에서 내리기도 전에 어머니의 병이 위독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지름길로 달려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을 극진히 보살폈으나, 곧 어머니의 상사(喪事)를 당하였다.[『이암유고』 권2 「해주목사김공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치소(治所) 동쪽 사관(蛇串)에 있고, 송인(宋寅)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주부(主簿)이복형(李復亨)의 딸인데, 4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순(金淳)은 종사랑(從士郞)을 지냈는데 부모 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김이(金洢)는 현풍현감(玄風縣監)을 지냈으며, 3남 김운(金沄)은 부사직(副司直)을 지냈고, 4남 김준(金浚)은 만호(萬戶)이다. 1녀는 습독(習讀)조섬(趙銛)의 처가 되었다.[『이암유고』 권2 「해주목사김공묘갈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이암유고(頤庵遺稿)
- 고봉집(高峯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허백당집(虛白堂集)
- 구전집(苟全集)
- 우고집(雨皐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