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행(金係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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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1년(세종 13)∼1517년(중종 12) = 87세]. 조선 중기 성종(成宗)~연산군(燕山君) 때 활동한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고, 이조 판서(判書)에 추증되었다. 자는 취사(取斯)이며, 호는 보백당(寶白堂)이고,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경상도 안동이다. 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김삼근(金三近)이고, 어머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삭령현무(朔寧縣務)김전(金腆)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합문(閤門)봉례(奉禮)김혁(金革)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전농(典農) 정(正)김득우(金得雨)이다.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고문과 형신(刑訊)을 받은 후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47년(세종 29) 정묘(丁卯)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17세였다. 그러나 대과(大科)에는 합격하지 못하여 성주(星州)·충주(忠州)의 향학(鄕學) 교수(敎授)를 지내다가, 성주에 낙향하여 있던 김종직과 만나 학문을 강론하면서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였다. 1480년(성종 11) 식년(式年)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0세였다.[『방목(榜目)』]

1490년(성종 21) 과거 출신자를 성균관의 관원으로 임명하여 성균관 유생(儒生)들의 사유(師儒)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김계행도 후보자가 되었으나, 학문은 훌륭하나 나이가 많다고 하여 임명되지 못하고,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성종실록』 21년 1월 24일),(『성종실록』 21년 7월 21일) 1493년(성종 24) 마침내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유생들의 사유(師儒)가 되었는데, 이는 그의 형의 아들인 ‘학조(學祖) 스님’이 성종의 어머니 인수대비(仁粹大妃)에게 간청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성종실록』 24년 10월 24일)

1498년(연산군 4) 연산군이 보경당(寶慶堂)에서 경연관(經筵官)에게 강론을 시험하였는데, 김계행은 경학(經學)과 훈고학(訓詁學)에 정통하여 ‘약통(略通)’의 점수를 받았다.(『연산군일기』 4년 5월 6일) 이에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어 여러 직언을 하였으나,(『연산군일기』 4년 7월 25일) 연산군이 번번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임하는 글을 올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연산군일기』 5년 1월 21일) 그리고 풍산(豊山)의 사제에 ‘보백당(寶白堂)’이라는 서실을 지은 후 학생을 모아 글을 가르쳤다.[비문] 그러나 얼마 후 무오사화가 일어나면서 김종직의 사림파(士林派)가 숙청당할 때 김계행 또한 김종직과 교유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는 유자광(柳子光)의 변호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으나, 1504년(연산군 10) 발생한 갑자사화에 다시 연루되었다.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廢妃尹氏)의 폐출과 관련이 있는 성종 때의 구신(舊臣)들이 이때 참혹한 형벌을 받았는데, 김계행도 당시에 승정원 승지(承旨)로 있었다고 하여 1505년(연산군 11)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형신을 당한 후 유배되었다.(『연산군일기』 10년 11월 9일),(『연산군일기』 11년 1월 6일) 그로부터 1년 뒤인 1506년 9월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유배 생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으며, 이후 그는 나이가 많다는 핑계로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연산군의 신하였기 때문에 새로운 임금에게 벼슬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연산군의 폐출과 죽음을 애도하기도 하였다. 1517년(중종 12) 12월 11일 노병으로 안동의 고향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87세였다.[『눌은집(訥隱集)』 권11 「보백당김선생묘갈명(寶白堂金先生墓碣銘)」 이하 「김계행묘갈명」으로 약칭]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성품과 일화

김계행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강인하고 행동은 방정(方正)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남보다 뛰어나, 어려서부터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므로, 부모가 특이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이 아들이 우리 집 문호(門戶)를 유지할 것이다” 하였다.[「김계행묘갈명」]

김계행은 벼슬이 영달(榮達)하였으나, 청렴하고 검소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짓기를, “우리 집에는 보물이 없지만[吾家無寶物], 보물은 오로지 청렴과 결백뿐이로다[寶物惟淸白]”라고 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냈다. 그리하여 병이 들자 아들과 조카와 여러 손자들을 불러서 경계하기를, “청렴과 결백, 효도와 우애를 가지고 우리 집안을 유지하도록 하라. 교만하고 사치하면,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또 이어서 유언하기를, “나는 경악(經幄)의 근신(近臣)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아 한 시대를 구제할 수 없었으니, 내가 죽거든 장례를 갖추어 지내지 말고 명문(銘文)을 지어 비석을 세우지 말도록 하라. 착한 행실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착하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였다.[「김계행묘갈명」]

성품이 산수(山水)를 좋아하였다. 평소에 묵촌(黙村)의 조용하고 외진 것을 좋아하였으므로, 무오사화가 일어난 뒤로 자주 왕래하다가, 1500년(연산군 6)에 낙향하여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만휴정(晩休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기에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 삼았다. 그는 만휴정 앞의 시내를 보고 본래 거묵역(居默驛)이었던 마을 이름을 묵계(默溪)라고 고쳤다.

그의 형 김계권(金係權)의 맏아들 김학조가 일찍이 속세를 떠나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등곡선사(燈谷禪師)’라고 불렸는데, 사람들은 그를 ‘학조 스님’이라고 불렀다. 세조(世祖)가 불교를 깊이 믿고 ‘학조 스님’을 국사(國師)로 삼았으므로 그의 위세도 대단하였다. 김계행이 성주교수(星州敎授)로 있을 때, 조카인 학조 스님이 그곳을 지나가다가 그에게 문후(問候)하려고 하였다. 그때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승려 학조를 예우한다며 삼촌인 김계행에게 조카를 보러 감영(監營)으로 오도록 청하였으나, 김계행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학조 스님이 삼촌을 찾아가서 만났는데, 김계행이 노여워하며 하인을 시켜 거의 피가 나도록 학조의 종아리를 때렸다고 한다.[「김계행묘갈명」]

그 뒤에 학조 스님이 김계행을 찾아가 은근히 말하기를, “숙부께서 오래도록 곤궁함이 심한 것 같은데, 뜻이 있으시면 제가 좋은 자리를 얻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하자, 김계행이 노여워하며 “내가 너로 인하여 벼슬을 얻게 된다면 무슨 낯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겠는가” 하고, 하인을 시켜 종아리를 때렸다. 이때 사림(士林)의 여론이 이것을 통쾌하게 여겼다고 한다.(『성종실록』 24년 10월 24일) 김계행이 조카 학조가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국사가 된 것을 미워하여 종아리를 때린 것이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헌이다. 묘소는 경상도 안동 학가산 아래 직곡(稷谷)의 선영에 있는데, 그가 죽은 지 2백 15년 뒤에 이광정(李光庭)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김계행묘갈명」] 현재 무덤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직리에 있다. 1859년(철종 10)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1687년(숙종 13) 안동의 사림에서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창건하고 제향하였는데, 1706년(숙종 32) 나라에서 사액(賜額)하고 전토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첫째 부인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현감(縣監)서운(徐運)의 딸인데, 2녀를 낳았다. 장녀는 찰방(察訪)박눌(朴訥)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진사(進士)유자온(柳子溫)의 처가 되어 유공작(柳公綽)·유공권(柳公權)·유공석(柳公奭)·유공계(柳公季) 4형제를 낳았는데, 유공작의 손자가 유성룡(柳成龍)이다. 둘째 부인 의령 남씨(宜寧南氏)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남상치(南尙治)의 딸인데, 5남을 낳았다. 장남 김극인(金克仁)은 영릉참봉(英陵參奉)을 지냈고, 차남은 김극의(金克義)이며, 3남 김극례(金克禮)는 생원(生員)이다. 4남은 김극지(金克智)이고, 5남 김극신(金克信)은 군수(郡守)를 지냈다.[「김계행묘갈명」]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보백당실기(寶白堂實記)』
  • 『소산집(小山集)』
  • 『점필재집(佔畢齋集)』
  • 『경산집(經山集)』
  • 『대산집(大山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밀암집(密菴集)』
  • 『옥천집(玉川集)』
  • 『눌은집(訥隱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경산집(經山集)』
  • 『사호집(思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