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경당(寶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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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내전 영역의 건물로, 조선초기에는 정치 공간으로 쓰인 건물.

개설

창덕궁 창건 시기에 태종의 서별실로 영건되어 세조시기에 공식적으로 당호를 부여 받았다(『세조실록』 7년 12월 19일). 세조는 이 전각에서 신료들과 함께 정치를 논하며 술자리를 베풀었다(『세조실록』 13년 9월 28일). 성종대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신료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정사를 보던 회동 장소로 이곳을 썼다. 정희왕후가 승하한 후 성종은 이곳 보경당을 거려청(居廬廳)으로 사용하며 오랫동안 머물렀다(『명종실록』20년 7월 29일).

숙종 이후에는 후궁의 처소로도 전용되었는데,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가 이곳에서 영조를 출산했고(『영조실록』 40년 9월 13일)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가 이 집에서 승하하였다(『순조실록』 22년 12월 26일). 정조 역시 정치 공간으로 보경당을 자주 사용한 기록이 보인다(『정조실록』 8년 9월 7일). 이처럼 보경당은 창덕궁 내전 영역이나 외전 영역에서 필요에 따라 전용하여 쓰던 전각이었다.

위치 및 용도

보경당은 창덕궁 내전 건물 중 하나로 창덕궁 선정전(宣政殿)의 북서쪽에 놓여 있다. 동쪽으로 태화당(泰和堂), 재덕당(在德堂)이 행각을 사이에 두고 연이어 배치되어 있는데, 창건 초기 선정전의 북쪽 동서로 소덕당(昭德堂)과 보경당이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변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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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보경당은 태종이 창덕궁을 창건할 때 조성되었으며 광해군·인조·순조 때 중건되었다. 중건 때 모두 새로이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동궐도(東闕圖)」와 「동궐도형(東闕圖形)」에 나타난 보경당의 배치 및 전각의 형태는 조금 다르다. 이는 1834년(순조 34) 순조대 대대적으로 창덕궁을 수리했을 때 변화된 것으로 보인다. 1917년 창덕궁 화재로 대조전(大造殿)·희정당(熙政堂) 등의 일곽을 정리하면서 보경당은 더 이상 복원되지 못하고 지금은 후원 뜰만 남아 있다.

형태

창건 초기에는 3칸 규모의 집으로 좁고 더위에 취약한 장소였다. 연산군은 이러한 보경당을 꾸미는 화계(花階) 공사를 일으켰고, 이 외에도 작은 규모의 전각을 증설하는 역사를 시작하여 신료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 작성된 「동궐도」에 의하면, 보경당의 화려한 화계는 물론 신료들과 술잔치를 벌이던 너른 뒷마당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보경당의 뒤로 담장을 둘러쳤고 담장 너머 섬돌 위에 옹기가 가득하다. 보경당 안 서측 마당에도 옹기가 가득해 이곳이 여성 공간인 내전임을 추측케 한다.

「동궐도」와 「동궐도형」에서 보이는 보경당의 형태는 확실히 다르다. 「동궐도형」에서는 뒷마당의 담장이 없어지고 정면 6칸, 측면 3칸의 집 서측 툇간이 누마루로 되어 있다. 또한 그 옆에 방이 1칸 있고, 2칸의 대청마루와 그 동측에 다시 2칸의 방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보경당에서 소대(召對)와 경연을 일삼던 연산군이 갑자기 “보경당은 내전에서 가까우니 사대부를 접견할 수 없다”며 경연을 정지시켰다.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연산군의 후궁이었던 장녹수(張綠水)의 재산이 이곳 보경당에서 발견되었다. 이때 내시들에게 들어가 찾아내라고 명하는데, 이것은 보경당을 내전의 영역으로 여겼기 때문이라 생각된다(『중종실록』1년 9월 16일)

영조는 보경당에 ‘탄생당팔십서(誕生堂八十書)’라는 글자를 직접 써서 걸었다. 보경당이 자신이 탄생한 기념비적인 집임을 현판으로 표시한 것이다(『영조실록』 49년 10월 11일).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동궐도(東闕圖)」
  • 조옥연, 「조선 궁궐의 동조건축에 관한연구: 17~18세기 동궐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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