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구취회
금구취당(金溝聚黨)
금구취당’은 1893년 3월 21일(음력) 이전에 이뤄지고 있었다. 이 시기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던 때이다.≪일성록≫高宗 30년(1893, 癸巳) 3월 27일자 기사는 새로운 전라감사에 부임하는 金文鉉이 고종에게 辭陛하는 자리에서 나눈 대화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고종이 가로되 ‘湖南은 왕조가 일어선 터전이고 御眞을 모신 慶基殿이 있어 다른 지방과 달리 소중하고 나라 살림의 창고와도 같은 곳이다. 근래에 이르러 어찌된 까닭인지 풍속이 타락하고 인심이 간사, 교활해져 일종 동학의 무리가 창궐하여 날뛴다 하니 백성들을 안도하게 할 계책과 없애버릴 방책을 경이 판단하여 처리토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신의 역량이 보잘 것 없어 제대로 보답하지 못할 듯하오나 이른바 비도들이 준동한다는 것은 참으로 변괴라 할 것입니다’ (중략) 고종이 이르기를 ‘말이란 한 번 두 번 옮기다 보면 터무니 없는 말을 지어내게 되는 것이니 족히 믿을 것이 못된다. 호남에서도 金溝에 가장 많다 하니 전주 감영에서 어느 정도 거리인가. 먼저 그 소굴을 격파하여 금단하고 일소하는 방도를 삼도록 하라.’ 文鉉이 답하기를 ‘30리 가량 되는 데 금구, 원평에 과연 취당하고 있다 하옵니다.
금구취당을 확인해 주는 또 다른 보고서는<討匪大略>이다. 1894년 11, 12월의 농민군 토벌기사가 주로 실린<토비대략>에는 “계사년(1893년) 4월 동학군 4, 5만 명이 일부는 湖西의 報恩 帳內에서 屯據하고 있었고 일부는 湖南의 金溝·院坪에 둔거해 있었다”0644)며 보은취회와 더불어 금구에서도 일정한 규모의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금구 원평집회에 모여든 동학교도들은 1만 명이 넘었던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임 전라감사 김문현이 전주감영에 도착했을 때 軍司馬 崔永年으로부터 “금구에 운집한 東徒가 거의 만여 명이나 된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충청도 沔川에 유배돼 있던 金允植의 ‘沔陽行遣日記’에도 “또 금구 원평취당 수만 인은 장차 제물포로 直走하겠다고 聲言했다고 한다” “전라도에서는 금구 원평에서 도회하였는 데 그 괴수는 보은에 사는 黃河一·茂長접주 孫海中(孫化中의 誤記)이며, 만여 인을 거느리고 21일 도착한다는 뜻을 私通했다고 한다”며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동학교도들이 집결, 세를 과시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렇다면 금구취당은 과연 누구에 의해서 주도됐으며 이들은 어떤 형태의 시위를 벌였을까. 금구취당의 주도인물은 全琫準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대체적인 견해이다.≪日省錄≫등의 자료에 의하면 보은취회 해산 이후 ‘湖西의 徐丙鶴, 湖南의 金鳳集·서장옥(徐章玉)을 該道의 감사로 하여금 營獄에 체포 구금토록 하라’는 주모자들에 대한 체포령이 의정부로부터 발령됐는데 ‘金鳳集’은 全琫準의 가명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김윤식의 ‘면양행견일기’, 吳知泳의 ‘東學史’ 등이 金鳳集을 ‘全哥나 全琫準으로 고쳐 기록하고 있으며, 전봉준이 ‘金鳳均’ 등 여러 가명을 실제 사용했다는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동학교문측의 기록인≪侍天敎歷史≫에서도 “법소에서는 교도의 난동을 금하였다. 이것이 전봉준이 교도들을 사사로이 빼앗아서 전라도 금구 원평에 주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며 금구취당을 전봉준이 거느리고 있던 집단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했던 자료에는 금구취당이 현지에서 보인 행동들이 전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러므로 실제 이들은 가시적인 시위를 벌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금구취당은 보은취회에 일부가 직접 참여, 일련의 급진적 행동을 보였으며 전봉준도 참여를 시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따라서 院坪에 모여 있되 별도의 행동은 하지 않고 보은취회 세력과 聲氣를 통하면서 보은쪽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이 있다. 금구취당이 보은취회에서 벌인 행동들은 서병학이 선무사 어윤중에 보낸 密報에서 간접 확인되고 있다. 보은취회의 주모자였던 서병학은 보은취회의 해산을 종용하는 어윤중에게 “湖南聚黨은 얼핏 보면 우리와 같지만 종류가 다르다. 통문을 돌리고 방문을 게시(發文揭榜)한 것은 모두 그들의 소행이다. 그들의 情形은 극히 수상하니 원컨대 공께서는 자세히 살피고 조사 판단하여 그들과 우리를 혼동하지 말고 玉石을 구별해 주시오”라고 했다. 이같은 徐의 ‘밀고’에 따르면 보은취회에서 내걸린 척왜양의 기치들은 지도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모두 금구취당의 의도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徐의 이러한 진술이 전적으로 사실이라면 금구취당은 교조인 水雲의 伸寃을 위해 계획 실행된 종교적 성향의 보은취회를 척왜양의 슬로건을 전면에 내세우는 정치집회로 변질시킨 動力으로 작용했다는 엄청난 정치적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학계에서는 실제 이러한 방향의 연구가 진행돼 금구취당의 성격을 脫종교적이며 보다 투쟁적이고 정치적 지향을 지닌 세력으로 규정하기도 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금구취회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 대체적으로 두 가지 논의가 전개되고 있다. 첫째는 금구취회가 보은취회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열렸으며 척왜양과 지방관의 탐학금지 등 강한 정치적 성향을 지녔다고 보는 시각이다. 이와 함께 일련의 교조신원운동의 과정에서 전봉준이 동학지도부와는 별도의 세력을 갖추고 금구취회를 계기로 완전히 성장,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주도케 된다는 견해이다. 둘째는 금구취회가 ‘전봉준에 의해 주도된 정치성 강한 집회’라는 데는 일단 동의하되 보은취회와 성격을 완전히 분리하거나 지나치게 정치성을 부여하는 데 대해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연구이다.
첫번째 견해에 따른 연구에서는 ‘동학농민전쟁의 최대 지도자인 전봉준이 어떤 경로로 고부민란에서 갑자기 지도자로 출현하고 1893년 11월 사발통문 서명자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금구취당’이라는 열쇠로 풀어 놓고 있다. 즉 김봉균이라는 가명으로 전봉준이 주도한 금구취당은 이미 1893년 2월 중순에서 2월 말 사이 서울서 척왜양방문 게시운동(이른바 괘서사건)을 전개했고 2월 말에서 3월 초까지는 전주에서 비슷한 운동(3월 1일경 전라감영문에 붙여진 榜文)을 벌였으며 3월 7일에는 서울에서 외국선교사, 상인의 축출과 지방관리의 압제와 탐학 제거를 위한 일대 정치공세를 벌이자고 선동하는 등 강도높은 척왜양 반압제운동을 전개한 집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응집돼 늦어도 3월 초에는 내부적인 규율을 갖춘 집단으로 성립되었고 적어도 3월 중순에는 금구에서 독자적인 집회를 가질만큼 완강한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견해이다. 이처럼 전봉준을 주축으로 한 금구취당은 이른바 북접지도부와 노선을 달리하면서 투쟁의식을 강화해 동학농민전쟁의 주도세력으로서의 잠재력을 갖춰 나갔다는 것이다.
이같은 논증은 탁월하고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나 신진학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몇가지 반론에 부딪혀 있다. 즉, 금구취회가 비록 독자적으로 會集하고 척왜양이라는 정치적 목표를 강하게 내세웠다고는 하나 공주-삼례-광화문-보은으로 이어지는 동학교단의 신원운동과 투쟁의 연장선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들은 서울에서 벌어진 괘서사건을 금구취당의 동학교도들이 주도했고 금구취당의 總代 20명이 서울에서 운동을 벌이다 포도청에 구류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사료의 오독이거나 지나친 추리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또한 ‘금구취당이 남접과 합세해 보은취회를 좀더 정치적으로 몰고 가기 위해 보은에 집단적으로 참여하려 했으나 취회가 해산해 버리자 선발대 천여 명이 忠州로 방향을 돌려 上京하려 했다’는 해석은 명백히 사료를 오독한 것이라는 반박을 받고 있다. 4월 2일 보은취회가 해산하면서 ‘사잇길로 원평에서 충주로 간 자가 천여 명’이라는 한 報恩 將吏의 보고서가 전하는데 이는 서울에서 별도 계획을 실행하려고 상경하려던 금구취당의 선발대가 아니라 보은취회에 참여했다가 충주쪽으로 돌아가던 보통의 동학교도들이었다는 것, 여기서 나오는 원평은 보통의 전라도 금구 원평이 아니라 현재 ‘忠北 報恩郡 山外面 院坪’이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는 금구에서 보은과 별도의 취회가 이뤄진 것은 단순히 참여 교도들의 식량조달의 한계 때문에 집회를 분산시킨 것 뿐이라는 주장도 있다. 즉, 보은·금구취회는 동일한 목적 아래 분산적으로 열렸던 신원집회라며 금구취당에 대한 별도의 의미 부여를 차단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금구취당은 동학교도들이 최대 규모의 세를 과시한 보은취회의 시기에 별도로 열리고 있었다는 점과 이를 전봉준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따라서 금구취회에 관한 배경과 올바른 성격 규정은 동학농민전쟁의 전반을 재조명하는 데 중요한 연결고리인 것이다. 1893∼1894년 사건 전반에 걸친 안타까움이긴 하나 특히 금구취회에 관해 직접적으로 관련된 문건이 단 한 건도 발견되지 않고 있음은 큰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서인주(徐仁周)
동학의 지도자. '남접(南接)'이라는 세력을 구축하고 서포(徐布)의 지도자로서 전봉준과 함께 봉기를 주도했다. 동학 의식의 제정에 깊이 참여했는데, 서병학이 유교 의식의 도입을 주장한 것과 달리 불교 의식을 많이 수용하게 했다.
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호 일해. 수원 사람이라 전해진다. 원래 30여 년간 불교 수양을 하였으나, 1883년(고종 20) 강원도 인제에 있던 최시형(崔時亨)을 방문한 이후로 동학의 지도자가 되었다. 1889년에 서울에서 체포되어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가, 최시형이 식사때마다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행하고 김연국(金演局)으로 하여금 750냥을 마련하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 석방되었다.
1892년 서병학(徐丙鶴)과 함께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제의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제시한 교도 탄압중지 요청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교도를 모아 삼례 집회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경 노선을 펼쳐 온건한 교단 지도부와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전라도의 손화중·김개남·김덕명·전봉준을 제자로 거느리고 새로이 '남접(南接)'이라는 세력을 구축하였다.
1894년 이른바 서포(徐布)의 지도자로서 전봉준과 함께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6월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났다. 그뒤 남접의 봉기에 호응치 않고 도리어 압박하는 형세에 이른 북접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충청도에서 농민군을 규합한 것으로 보인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 위에 2차 봉기가 일어나자 청주 병영을 공격한 이후 행적을 감추었다가, 1900년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 의식의 제정에 깊이 참여하였는데, 서병학이 유교 의식의 도입을 주장한 것과 달리 불교 의식을 많이 수용하게 하였다.
서장옥은 수운최제우가 남원 은적암에 은둔하는 동안 만난 동승(童僧)으로 후에 최시형과 함께 동학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동학의 양대 조직 중 하나인 남접(南接)의 대도주(大道主)로서 삼례집회를 비롯한 동학도들의 집단적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장옥은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 자랐으며, 30여 년 동안 승려로 있다가 동학에 입교했다. 입교한 시기는 1883년경으로 보이며, 입교 후 동학교문의 여러 법식 등을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오지영은 그의 “신체는 비록 작았지만 용모가 특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지심(敬畏之心)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도승(道僧), 이인(異人), 진인(眞人), 궁적(窮賊)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하였다”고 전했다.
서장옥이 1889년에 서울에 갔다가 관아에 체포되자 최시형이 전 교단의 힘을 기울여 석방운동을 벌였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서장옥은 석방 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포교는 물론 교조신권운동을 주도하였고, 갑오농민전쟁 시기 내내 강경파로 활약하였다.
1893년 동학교단 북접에서 준비한 복합상소 때, 서장옥을 중심으로 한 남접 세력은 상경한 동학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시켜 궁궐을 습격하여 중앙고관들을 제거하고 조정을 개혁하는 혁명적인 항쟁방법을 구상했다. 그 뒤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古阜)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서장옥은 1894년 6월에 붙잡혀 갑오농민전쟁의 전반에는 옥중에 있었다가 이후 석방되었다.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9월에 다시 농민군 규합에 나섰다. 그 후 약 5년 동안 행적은 알 수 없지만, 1900년에 경군에 체포되어 동지 손사문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12세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16세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17세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18세 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
19세 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
20세 서할(徐劼. 진사(進士)
21세 서몽린(徐夢麟 진사)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
22세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
서달증(徐達曾 학자)
서학증(徐學曾 진사)
23세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
24세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
목차
가족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큰증조할아버지 :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 큰증조할아버지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 큰증조할아버지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 증조할아버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할아버지 :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 작은할아버지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삼례집회(參禮集會)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
금구집회(金溝集會)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북도 금구에서 개최한 집회.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