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부여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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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 (渤海)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

발해는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이다.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하였고, 초기 국명은 진국이다. 건국 초에는 신라와 교류하며 대아찬 직을 받았고, 이후 신라도를 설치하였다. 713년에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을 받은 뒤 국명을 발해로 변경하였다. 제3대 문왕 대에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고, 9세기에는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925년 12월에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926년 초에 멸망하였다.

698년에 고구려 옛 장수인 대조영(大祚榮, ?∼719)이 발해를 건국하였다. 초기 국호는 진국(振國 또는 震國)이다. 대조영은 당나라에 의해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遼寧城〕 차오양〔朝陽〕에 해당하는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에 강제로 옮겨가 살았다. 대조영과 그 가족이 언제 영주로 끌려갔는지는 논란이 있다. 주로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나라가 고구려 유력층을 당나라 내지로 끌고 갈 때 영주에 남겨졌다는 설과 679~681년에 요동에서 보장왕이 말갈과 반당(反唐) 모의를 한 것이 드러나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이 다시 당나라로 끌려갈 때 남겨졌다는 설이 유력하다.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 도시로, 주변 지역에서 귀순해 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러한 이민족에는 고구려 유민을 비롯하여 거란족〔契丹族〕, 해족(奚族), 말갈족(靺鞨族) 등이 있었다.

당나라는 변경 이민족 지역에 기미주(羈靡州)주1를 두고 지배하였는데, 요서와 요동지역에서는 나당전쟁 이후 기미 지배 체제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682년에 동돌궐 제국이 재건에 성공하자 동북지역 여러 민족의 반당 활동을 자극하였다. 693년경에는 흑수말갈과 실위주2의 반란이 있었고, 696년에는 요서에서 거란족을 중심으로 해족, 고구려 유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이 연대한 대규모의 반당 전쟁이 일어나 요동지역으로 확대되었다.

696년 5월에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營州) 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유주(幽州: 지금의 베이징)와 허베이〔河北〕 지역을 공격하여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 반란에는 영주에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참여하였다. 대조영의 아버지인 사리(舍利) 걸걸중상(乞乞仲象)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은 영주를 떠나 요동지역에서 반당 전쟁에 참여하였는데, 말갈의 걸사비우(乞四比羽)주3 집단도 함께하였다.

허베이 지역으로 남하하였던 거란족 중심의 반당 세력은 이듬해에 겨우 진압되었다. 그러나 요동지역의 반당 세력은 친당 세력을 압도하며,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있던 신성(新城), 그리고 요동성(遼東城), 마미성(磨米城) 등의 전투에서 상당한 세를 떨쳤다. 따라서 당나라는 걸걸중상에게 진국공(震國公)을,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을 주어 이들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하자 당나라에 투항하였던 거란 장수 이해고(李楷固)가 측천무후주4의 명령을 받아 걸사비우를 공격해서 죽이고, 이어 대조영 집단을 뒤쫓았다. 이 무렵 걸걸중상도 사망하여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을 이끌고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추격해 온 당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이해고는 겨우 몸만 피하여 돌아갔고, 곧바로 요서지역의 거란이 돌궐에 투항하며 길이 막히게 되자, 당은 더 이상 대조영 집단을 토벌할 수 없었다.

천문령 전투를 마지막으로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 멸망기부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요동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東牟山)에서 건국하였다. 동모산은 지금의 지린성〔吉林城〕 둔화〔敦化〕주5에 있는 청산쯔산성〔城山子山城〕으로 여겨진다. 건국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었으나 일본 『유취국사(類聚國史)』에 기록된 698년이 정설이다.

대조영은 나라를 세우고 곧바로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였다. 신라는 나당전쟁 이후 당나라와 사이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최치원의 글에 따르면 이때 신라는 대조영에게 대아찬(大阿飡) 관등을 주었다고 한다.

발해 건국 이후 당나라는 발해를 포섭하기 위하여 먼저 사신을 보냈다. 당시 당나라는 서쪽의 토번(吐蕃)주6과 북쪽의 돌궐, 동북쪽의 거란 등과 계속해서 무력 충돌을 하였다. 당나라 중종은 돌궐 및 거란과 우호 관계에 있었던 발해를 끌어들여 이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705년에 사신을 파견하고 대조영을 위무하였다. 대조영은 그 보답으로 아들 대문예(大門藝)를 당나라로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였다.

713년에 당 현종이 최흔(崔訢 또는 崔忻)을 파견하여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 홀한주도독(忽汗州都督)으로 책봉하면서 발해와 당나라는 정식으로 국교를 맺었다. 이후 발해는 점차 진국 대신 발해를 국명으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중국 학계 일각에서는 『신당서(新唐書)주7』 발해전에 발해군왕 책봉 이후 “말갈 칭호를 버리고 발해로만 불렀다”는 기록을 근거로, 발해의 초기 국호를 ‘말갈’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당나라의 입장을 반영한 기록으로, 당나라의 지배를 벗어나 건립한 독립 국가인 진국을 인정하지 않고 말갈로 낮추어 불렀기 때문이다.

발해는 대조영이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을 받으며 당나라와 조공(朝貢) · 책봉(冊封)주8 관계를 맺지만, 당의 지배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대조영이 719년에 사망하자 고왕(高王)이라는 시호를 사용하였는데, 당서(唐書)에는 이를 두고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시호를 삼았다고 하였다. 대조영의 장자인 대무예(大武藝)가 지닌 계루군왕(桂婁郡王)은 당나라에서 책봉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을 동급의 군왕(郡王)으로 삼는 것은 이례적이고, 대무예를 당나라에서 계루군왕으로 책봉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발해 자체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모든 시기에 걸쳐 연호와 시호를 독자적으로 사용하였고,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던 것을 보면 발해가 독립국가임을 알 수 있다.

대조영이 건국하고 난 뒤에 주변에 흩어져 살던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빠르게 결집하며, 발해는 초기에 10여만 호에 정예병이 수만 명이나 될 정도로 성장하였다. 독립국가로서 당시 국제 정세를 잘 이용하여 주변 말갈 세력의 대외 활동을 통제하며 빠르게 왕권을 안정시켜 나갔다.

발전 제1대 고왕의 뒤를 이은 제2대 무왕(武王, 재위 719∼737) 대무예와 제3대 문왕(文王, 재위 737∼793) 대흠무(大欽茂) 시기는 발해 역사의 전반기에 해당하며, 영토 확장과 제도 ‧ 문화면에서 큰 발전을 이룬 시기이다.

무왕은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시호에서 알 수 있듯이 무치(武治)주9에 큰 업적을 남겼다. 무왕이 727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는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가졌다고 하였다. 『신당서』에는 발해가 부여 ‧ 옥저 ‧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얻었다고 하였다. 이렇듯 무왕의 활발한 영역 확장은 필연적으로 주변국과 마찰을 야기하였고, 마침내 발해가 당나라와 무력 충돌하는 원인이 되었다.

무왕 대에 발해는 지금의 헤이룽강〔黑龍江, 러시아 아무르강〕 주변에 살던 흑수말갈 지역까지 세력을 확대해 갔는데, 여기에 압박을 느낀 흑수말갈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견제하려 하였다. 당나라 역시 북방을 위협하던 돌궐 ‧ 거란 등과 연대하고 있던 발해를 견제하기 위하여 726년에 흑수말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장사(長史)를 설치하였다.

무왕은 이것을 흑수말갈이 당과 손을 잡고 앞뒤에서 발해를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고, 친동생인 대문예와 장인 임아(任雅 또는 任雅相)를 보내 흑수말갈을 치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에서 숙위한 경험이 있던 대문예는 흑수말갈을 공격하는 것이 당나라를 배반하는 일이고, 군사의 열세를 들어 반대하였다. 대문예가 군사를 이끌고 국경에 이르러서도 반대 글을 올리자 화가 난 무왕은 대문예를 불러들여 죽이려 하였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대문예는 당나라로 망명하였다. 이후 대문예의 송환을 둘러싸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었다.

한편 발해는 727년에 일본에 사신을 처음 파견하여 국교를 수립하고, 만약에 있을 당과 신라의 연계에 대비하였다. 신라의 경우 발해가 팽창하는 것에 맞서 북경의 방어 시설을 정비하고, 당나라와의 관계를 강화시켰다. 이로써 발해는 돌궐 ‧ 거란 ‧ 일본과 연합하고, 당나라는 신라 ‧ 흑수말갈과 연합하는 형세가 구축되었다.

동북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무왕은 732년 9월에 대장 장문휴(張文休)를 보내 당나라의 등주(登州)를 공격하였고, 이듬해에는 돌궐 및 거란과 연합하여 마도산 등 하북 지방을 공격하면서 국제전을 벌였다. 당나라는 발해를 격퇴하기 위하여 신라를 끌어들여 발해의 남쪽 경계를 협공하였다. 이때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735년경 신라는 참전 공로로 패강 이남의 영유권을 당으로부터 인정받았다. 그리고 735년 전쟁이 종식된 이후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양국 간의 국교가 회복되었다.

무왕이 사망하고 문왕이 즉위한 뒤에는 정복 전쟁을 통하여 외부로 발산하던 국력을 내부로 수렴하여 문치(文治) 중심의 체제 안정에 집중하였다. 문왕은 즉위 직후 당나라로부터 국가의례를 정한 『개원례(開元禮)주10』 및 역사서를 수입하는 등 유학과 불교를 진작시켰다. 중앙 행정 기구와 중앙 군대, 관리의 등급 제도와 복장 제도가 정비되었고, 지방에는 부(경)-주-현의 3단계 행정 체계가 갖추어졌다.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5경 15부 62주가 언제 완비되었는지는 논란이 있다. 발해는 756년 초에 현주(顯州, 지금의 지린성 허룽〔和龍〕)에서 상경(上京, 현재의 헤이룽장성 닝안〔寧安〕)으로, 780년대 후반에는 동경(東京, 현재의 지린성 훈춘〔琿春〕)에 천도하였던 사실과 776년 일본에 파견한 사신이 남해부(南海府)의 토호포(吐號浦)에서 출발하였던 기록을 통해 문왕 대 후반에 부주현제와 5경제가 성립되었다고 본다. 한편 초기 수도인 구국(舊國)에서 현주로 천도한 시기에 대해서는 기존에는 문왕 대로 보았으나 최근에는 무왕 대의 일로 본다.

문왕은 당나라에서 여러 번 책봉을 받아 762년에는 발해의 국왕(渤海國王) 겸 검교태위(檢校太尉)로 승격하였고, 774년에는 연호를 대흥(大興)에서 보력(寶曆)으로 개원하였다. 신라와의 사이에는 상설 교통로인 신라도(新羅道)를 설치하여 교류하였고, 일본과의 교섭은 이전의 군사적 목적에서 점차 문화 ‧ 경제 외교로 전환해 갔다. 문왕은 56년의 장기 집권으로 왕권을 안정적으로 강화하여 황제국 체제를 구축하였다.

문왕은 존호로 금륜성왕(金輪聖王)을 사용하여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였으며, 황상(皇上) ‧ 황후(皇后) 칭호나 조고(詔誥)주11 등 황제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하였다. 국력 신장과 황제국으로서의 자신감을 토대로 771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이 천손(天孫)임을 자처하고, 양국의 관계를 구생(舅甥)주12 관계로 설정하여 일본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정체 발해 제4대 폐왕(廢王) 대원의(大元義, 재위 793~793?)부터 제9대 간왕(簡王, 재위 817?~818) 대명충(大明忠)까지는 불과 25년간 6명이 왕위를 이어, 발해 내부에서 정치적 분쟁이 있었던 시기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시기를 내분기라고 일컫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내분은 일시적이며 정체기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문왕의 왕위 계승자인 대굉림(大宏臨)은 문왕보다 일찍 사망하였는데, 문왕의 사후에 문왕의 자손이 아닌 족제(族弟)주13 대원의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 1년 만에 성격이 의심이 많고 포악하여 지배층이 그를 죽이고, 대굉임의 아들 대화여(大華璵)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대화여가 발해의 제5대 왕인 성왕(成王, 재위 793?794?)이다. 성왕은 곧바로 동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고 중흥(中興)을 연호로 삼았다. 그러나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 사망하고, 문왕의 작은 아들인 대숭린(大嵩隣)이 제6대 강왕(康王, 재위 794809)으로 즉위하였다.

강왕은 폐왕을 축출하고 성왕의 즉위와 상경 환도를 주도하며 권력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조카인 성왕을 이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왕은 왕권의 정통성 확보와 상경 환도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하여 당과 일본에 잇달아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발해의 내분과 강왕이 조카를 이어 즉위한 것이 알려지며, 당은 강왕을 국왕이 아닌 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이에 그 다음 일본에 사신을 파견할 때는 강왕을 문왕의 고손(孤孫)이라고 하였다.

강왕은 15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빠르게 국정을 안정시켰고, 앞선 시기와 마찬가지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드러내었다. 연호는 정력(正曆)이라고 하였다. 강왕 이후 제7대 정왕(定王, 재위 809812) 대원유(大元瑜), 제8대 희왕(僖王, 재위 812817?) 대언의(大言議), 제9대 간왕 대명충이 잇달아 왕위를 이었다. 정왕 ‧ 희왕 ‧ 간왕은 각각 영덕(永德) ‧ 주작(朱雀) ‧ 태시(太始)를 연호로 사용하였다.

발해는 한차례 짧은 내분을 거친 뒤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9세기로 넘어가면서 주변부에 대한 통제력과 영향력을 강화하였다. 당시 당나라와 회흘주14의 정세가 계속 불안정한 상태에서 거란, 실위, 말갈 등 동북방 민족에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발해와의 교역은 매우 중요하였다. 발해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높아질수록 발해의 영향력은 증가하였다.

기존에 내분론에 입각하여 802년과 815년에 보이는 월희, 우루, 흑수말갈 등의 당 조공을 발해의 세력 약화에 따른 독자적인 활동으로 보았으나, 발해의 말갈 지배 강화와 영역 확장에 대한 반대급부로 당나라 조공 무역의 기회를 얻은 것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815년의 흑수말갈의 당 조공을 『당회요(唐會要)』 발해전에 수록한 것은 발해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

융성 발해의 제10대 선왕(宣王, 재위 818∼830) 대인수(大仁秀)는 고왕 대조영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세손으로, 그가 즉위하면서 발해의 왕계가 바뀌었다. 선왕은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삼았고, 문왕 사후의 침체기를 완전히 벗어나 중흥을 이루었다. 선왕은 즉위하자마자 당나라로부터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검교비서감도독(檢校秘書監都督) 발해의 국왕에 책봉되었다.

선왕은 “자못 바다 북쪽의 여러 부락을 토벌하여 영토를 크게 여는 데에 공이 있어” 820년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검교사공(檢校司空)으로 승격되었다. 선왕 대에는 대외 확장을 통해 월희말갈 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헤이룽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흑수말갈을 통제하였다. 또한 서남쪽으로는 요동지방을 아우르고 남쪽으로는 대동강과 원산만 방면으로 남하하여 신라를 압박하였다. 이로써 발해의 정복 활동은 거의 마무리되었고, 사방 5,000리의 경계가 확정되어 5경, 15부, 62주가 완비되었다.

대외관계도 안정되어 재위 12년간 당나라에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에도 다섯 차례나 사신을 파견하였다. 견일본사는 규모도 크고 상업적 성격이 강하여, 사신 접대에 경제적 부담을 겪은 일본은 방문 기한을 12년으로 제한하고 사신단의 사무역을 금지하는 등의 조처를 취하기도 하였다.

선왕의 사후 아들 신덕(新德)이 일찍 죽어 손자인 대이진(大彛震, 재위 831∼857)이 제11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대이진은 연호를 함화(咸和)라고 하였고 시호는 전해지지 않는다. 대이진 대에는 관제를 크게 개편하여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를 두었다. 이 시기 발해에 다녀간 당나라 사신 장건장(張建章)은 『 발해국기(渤海國記)』를 저술하였다.

대이진 이후의 왕들은 연호와 시호 모두 전하지 않는다. 제12대 왕인 대건황(大虔晃, 재위 858871)은 대이진의 동생이며, 제13대 대현석(大玄錫, 재위 872894?)은 대건황의 아들이다. 제14대 왕인 대위해(大瑋瑎, 895?~906?)는 발해 왕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근대 중국학자인 진위푸〔金毓黻〕가 『당회요(唐會要)』에서 그 존재를 발견하며 알려졌다. 대위해의 연호 ‧ 시호 ‧ 가계는 알 수 없다.

발해는 선왕 이후 융성기를 맞으며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해동성국(海東盛國)주15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당나라와 신라가 내분에 휩싸이면서 해동성국의 모습을 전하는 기록을 제대로 남기지 않았다. 더욱이 발해 스스로 남긴 기록도 전해지지 않아 9세기 발해의 발전상을 잘 알 수가 없다. 다만, 일본과의 경제 ‧ 문화 외교 모습이나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모습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872년에 발해 사람 오소도(烏炤度)는 당나라 빈공과(賓貢科)주16에서 신라인을 제치고 수석을 차지하였고, 906년에는 그 아들이 차석을 차지하며 신라와 우열을 다투었다. 897년에는 발해 왕자가 신라 사신보다 윗자리에 앉기를 요구한 쟁장사건(爭長事件)이 벌어졌는데, 당나라 황제가 “국명의 선후는 본래 강약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거절하였다. 이것은 발해가 9세기 말 신라를 능가하는 국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멸망과 부흥운동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선(大諲譔, 907?~926)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 각국의 정세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후삼국으로 분열되었고,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멸망하고 5대 10국이 번갈아 일어났다. 이 기회를 타고 거란족이 크게 발흥하였는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주17가 거란 부족을 통일하고 사방으로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발해는 부여부(扶餘府)에 정예병을 주둔시켜 거란을 대비하였는데, 거란은 발해 서북 경계의 소황실위(小黃室韋), 월올(越兀), 오고(烏古) 등과 동북여직(東北女直)을 공격하여 복속시키고, 부여부 일대를 고립시켜 나갔다. 그리고 거란은 요동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하여 발해와 수십 년간 치열한 혈전(血戰)을 치렀다.

왕 대인선은 후량 · 신라 · 일본 등에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펼치고 거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외교적인 고립을 피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야율아보기는 924년에 숙원하였던 소위 ‘양사(兩事)'라고 불리는 서방과 발해의 정복 가운데 하나인 서방 정벌을 단행하였고, 925년 12월에 발해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926년 정월에 발해를 무너뜨렸다.

발해가 갑자기 무너진 것에 대해 거란이 “마음이 갈라진 것을 틈타서 싸우지 않고 이겼다”는 기록 등을 통해 한때 ‘내분설’이 정설로 여겨졌고, ‘백두산 화산 폭발설’이 주목받았다. 그러나 최근에는 대인선 시기에 적극적인 외교 활동과 멸망 전쟁에 관한 연구, 그리고 백두산 화산 폭발 시기가 멸망 이후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두 설 모두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근에는 한족(漢族)으로 거란에 투항하였던 진만(陳滿)의 묘지명을 통해, 거란이 923년과 925년에 두 차례나 더 발해를 공격하였고, 최소한 멸망 전쟁이 기록보다 수개월 전에 시작된 것이 밝혀졌다.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킨 뒤 동단국(東丹國)주18을 세우고 홀한성(忽汗城)을 천복성(天福城)으로 고쳐, 맏아들인 야율배(耶律倍)주19에게 통치를 맡겼다. 발해가 멸망한 직후부터 안변부(安邊府), 막힐부(鄚頡府), 정리부(定理府) 등지에서 반란이 잇달아 일어나고, 동생인 야율덕광(耶律德光)주20과 황제 자리를 두고 갈등을 빚던 야율배가 후당에 망명하면서 동단국은 혼란에 휩싸인다. 이에 당 태종은 928년에 동단국 우차상 야율우지(耶律羽之)의 건의를 받아들여 동단국의 발해인을 요양(遼陽)으로 이주시켰다. 사실상 동단국 자체가 서천(西遷)한 것으로 요동 동쪽의 발해 땅에 대한 거란의 통치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발해의 부흥운동 사례는 먼저 후발해가 있다. 후발해는 정식 국호는 아니며 이전 발해와 구분하기 위하여 이렇게 부른다. 고정사(高正詞)가 후당(後唐)에 발해의 사신으로 929년에 갔던 무렵에 건국한 것으로 보지만, 정확한 건국 연대와 멸망 시기는 알 수 없다. 왕은 대씨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10여 년 정도 존속하다가 정안국(定安國)에 흡수되었다는 견해와 올야(兀惹) 세력을 후발해로 보아 11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중심지 역시 상경 용천부(龍泉府) 지역과 압록강 유역 설로 나뉜다. 정안국은 970년에 국왕 열만화(㤠萬華)가 처음 송나라에 표문을 보내면서 기록에 등장한다. 『송사』 열전에는 정안국이 본래 마한의 종족으로 거란의 공격을 받아 남은 무리가 서쪽 변경에서 건국하고 개원하며 자칭 정안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 뒤 981년 국왕 오현명(烏玄明)이 송나라에 표문주21을 보냈는데, 이로서 열씨에서 오씨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보낸 표문 말미에는 원흥(元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가 나온다. 991년에 왕자 태원(太元)이 여진을 통해 송나라에 표문을 보낸 뒤에는 정안국의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오사국은 975년에 발해의 부여부 지역이었던 거란 황룡부(黃龍府)에서 위장(衛將)주22을 지내던 발해 유민 연파가 거란에 반기를 들었다가 올야성(兀惹城)으로 패주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 확인된다. 올야성은 오사국의 중심지인 오사성으로 발해의 수도였던 홀한성, 또는 부여부에서 가까운 곳으로 추정된다.

왕은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烏舍城浮渝府渤海琰府王)’ 또는 ‘발해염부왕’, ‘발해왕’ 등으로 불렸고, 오소도(烏昭度) · 오소경(烏昭慶)이 확인된다. 1004년 여진이 오소경의 처자를 사로잡아 요나라에 보내고, 철리국이 1012년과 1022년에 오사국 사람을 붙잡아 요나라에 보낸 기록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세력을 잃었던 것으로 보인다.

흥료국(興遼國, 1029∼1030)은 대조영의 7대손(혹은 11대손)인 대연림이 요나라 동경 요양성에서 세운 나라이다. 연호는 천경(天慶) 혹은 『고려사』에 기록된 천흥(天興)이다. 대연림은 건국 직후인 1029년 9월 초에 고길덕(高吉德)을 고려에 보내 건국을 알리고 여러 차례 지원을 요청하였으나 도움을 받지 못하였다. 요나라 토벌군에 의해 포위되어 약 1년 만에 성이 함락되고 대연림이 사로잡히면서 멸망하였다.

그 뒤 1116년 1월 1일에 요양에서 다시 발해 유민 고영창(高永昌)이 대발해를 세웠다. 국명은 『고려사』에는 대원국(大元國)으로,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대발해국(大渤海國)으로 나타나 차이가 있다. 연호도 『고려사』 등에는 융기(隆基)로, 『거란국지』에는 ‘응순(應順)’으로 나온다. 고영창은 건국 초에 요동의 50여 주를 함락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였으나, 5월 요나라의 군대에 패하였다. 고영창은 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으나, 오히려 역공을 받고 도망 중에 붙잡혀서 건국한 지 불과 5개월 만에 멸망하였다.

<발해의 왕계>

1. 고왕 대조영(698∼719) 2. 무왕 대무예(719∼737) 3. 문왕 대흠무(737∼793.3) 4. 폐왕 대원의(793.3∼793?) 5. 성왕 대화여(793?∼794?) 6. 강왕 대숭린(794∼809) 7. 정왕 대원유(809∼812) 8. 희왕 대언의(812∼817?) 9. 간왕 대명충(817?∼818) 10. 선왕 대인수(818∼830) 11. □왕 대이진(831∼857) 12. □왕 대건황(858∼871) 13. □왕 대현석(872∼894?) 14. □왕 대위해(895?∼906?) 15. □왕 대인선(907?∼926.1)

  • ?은 즉위년, 퇴위년이 확실하지 않음
  • 10대 왕까지는 즉위년 칭원법, 11대 왕부터는 유년 칭원법에 따름

접기/펼치기 발해의 통치 제도 왕실 제도 발해의 왕실 제도는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 사람들이 왕을 가독부(可毒夫), 성왕(聖王), 기하(基下)라고 부르고, 왕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노왕(老王), 태비(太妃)로, 왕의 아내는 귀비(貴妃), 장자는 부왕(副王), 다른 아들들은 왕자(王子)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제3대 문왕의 두 딸인 정혜(貞惠)공주와 정효(貞孝)공주의 묘지명에 따르면 왕의 딸은 공주라고 하였으며, 공주들은 출가하기 전 왕실에서 여사(女師)에게 교육을 받았다. 왕위 계승자는 동궁(東宮)이라고 하며, 왕의 자녀들이 왕을 부를 때는 부왕(父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묘지명에는 문왕의 존호로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이 보이는데, 왕의 재위 시기에 존호(尊號)가 불렸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왕과 왕실 가족이 사망한 뒤에는 시호(諡號)가 사용되었다.

발해는 문왕 대에 정치 · 제도 면에서 황제국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발해는 거의 전 기간에 걸쳐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였고, 문왕 이후 왕을 황상, 왕비를 황후라고 하였다. 정혜, 정효 두 공주의 묘지명에 문왕을 대왕(大王), 황상(皇上)이라고 하였고, 2005년 중국 롱터우〔龍頭山〕 고분군에서 발견된 문왕과 제9대 간왕의 왕비 묘지명에는 왕비를 황후(皇后)라고 한 것이 확인된다.

『신당서』 에는 왕의 명령을 교(敎)라고 하였다고 하는데, 중앙기구인 선조성(宣詔省) 등의 이름을 통해 황제의 명령인 조(詔)를 함께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발해왕 아래에 계루군왕(桂樓郡王)과 허왕(許王)의 책봉호가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발해가 대외적으로는 왕을 내부적으로는 황제를 표방한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띠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중앙 관제 발해는 건국 초기에 통치 조직과 관료 제도를 정비할 여력이 되지 못해 수령(首領) ‧ 대수령(大首領)과 같은 수장층을 국정 운영과 대외 교섭 등에 활용하였다. 그 뒤 제2대 무왕 대부터 본격적으로 통치 제도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제3대 문왕 대에 완비하였고, 제10대 선왕에서 제13대 왕 대현석 대에 재정비를 하였다.

발해의 중앙 관제는 3성(省) 6부(部)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3성은 선조성(宣詔省), 중대성(中臺省), 정당성(政堂省)이다. 선조성은 정령(政令)주23과 조서(詔書)주24를 심의하고 국정 자문을 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좌상(左相) · 좌평장사(左平章事) · 시중(侍中) · 좌상시(左常侍) · 간의(諫議)를 두었다.

중대성은 정령과 정책을 기초하고 조칙이나 명령의 초고를 작성하는 업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우상(右相) · 우평장사(右平章事) · 내사(內史)주25 · 조고사인(詔誥舍人)을 두었다.

정당성은 행정기구로 국왕의 정령을 집행하였으며, 3성 가운데 권한이 가장 커서 그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이 선조성과 중대성의 장관인 좌 ‧ 우상(左‧右相)보다 위에 있었다. 그러나 정당성의 차관인 좌사정(左司政)과 우사정(右司政)을 선조성과 중대성의 차관인 좌 ‧ 우평장사의 아래에 두어 3성이 서로 권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정당성의 좌 ‧ 우사정은 성격이 당나라의 복야(僕射)와 비슷하고, 사정 아래에 있는 좌윤(左允)과 우윤(右允)은 이승(二丞, 즉 좌 ‧ 우승)과 비슷하였다.

6부는 정당성 아래에 있었는데, 충부(忠部), 인부(仁部), 의부(義部), 지부(智部), 예부(禮部), 신부(信部)의 6부를 지사(支司) 6부와 함께 반으로 나누어 좌육사(左六司)와 우육사(右六司)로 구분하였다. 본 6부에는 각기 경(卿) 1명을 두었고, 정당성 사정 아래에 두었다. 지사 6부에는 각기 낭중(郞中)과 원외(員外)가 있었다. 6부 명칭으로 충 ‧ 인 ‧ 의 ‧ 지 ‧ 예 ‧ 신 등 유교 덕목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이 밖에 중앙 관제로 1대(臺), 7시(寺), 1원(院), 1 감(監), 1국(局) 등이 있었다. 중정대(中正臺)는 관리의 감찰을 담당하였고, 대중정(大中正)과 소정(少正) 각 1명을 두었다. 대중정의 지위는 사정 아래 두었으며, 성격은 어사대부(御史大夫)와 비슷하다. 7시 가운데 전중시(殿中寺)는 국왕의 생활과 행차 의례 등을 담당하였고, 종속시(宗屬寺)는 왕족의 사무를 관장하였다. 각기 대령(大令)과 소령(少令)을 두었다.

태상시(太常寺)는 예제주26와 제사를 관장하고, 사빈시(司賓寺)는 외교 사절의 접대와 빈례(賓禮)를 담당하였으며, 대농시(大農寺)는 전국의 창고와 농경 관련 업무를 담당하였다. 각기 경(卿)을 두었다.

사장시(司藏寺) · 사선시(司膳寺)는 각종 재정과 주례(酒醴)주27 ‧ 선식(膳食)과 관련한 일을 담당하였고, 각기 령(令)과 승(丞)을 두었다. 문적원(文籍院)은 경적 ‧ 도서 관리와 문장을 담당하고, 감(監)과 소감(少監)을 두었다. 주자감(胄子監)은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감 ‧ 장(長)을 두었다. 항백국(巷伯局)에는 상시(常侍) 등을 두었는데, 왕실과 후궁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환관들이 속해 있던 관청으로 보인다.

<발해의 중앙 관제>

3성(省) 명칭 부서 선조성(宣詔省) 좌상(左相), 좌평장사(左平章事), 시중(侍中), 좌상시(左常侍), 간의(諫議) 중대성(中臺省) 우상(右相), 우평장사(右平章事), 내사(內史), 조고사인(詔誥舍人) 정당성(正堂省) 대내상(大內相), 좌‧우사정(左‧右司政), 좌‧우윤(左‧右允)⋅우윤(右允) 6부(部) 명칭 부서 좌육사(左六司) 충부(忠部)⋅인부(仁部)⋅의부(義部) 각 경(卿) - 지사(支司) 작부(爵部)⋅창부(倉部)⋅선부(膳部) 각 낭중(郞中), 원외(員外) 우육사(右六司) 지부(智部)⋅예부(禮部)⋅신부(信部) 각 경(卿) - 지사(支司) 융부(戎部)⋅계부(計部)⋅수부(水部) 각 낭중(郞中), 원외(員外) 1대(臺) 명칭 부서 중정대(中正臺) 대중정(大中正), 소정(少正) 7시(寺) 명칭 부서 전중시(殿中寺) 대령(大令), 소령(少令) 종속시(宗屬寺) 대령(大令), 소령(少令) 태상시(太常寺) 경(卿) 사빈시(司賓寺) 경(卿) 대농시(大農寺) 경(卿) 사장시(司藏寺) 영(令), 승(丞) 사선시(司膳寺) 영(令), 승(丞) 1원(院) 명칭 부서 문적원(文籍院) 감(監), 소감(少監) 1감(監) 명칭 부서 주자감(冑子監) 감(監), 장(長) 1국(局) 명칭 부서 항백국(巷伯局) 상시(常侍) 관료 제도 발해의 관료 제도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실제 직무를 맡는 직사관(職事官)과 산관(散官) ‧ 봉작(封爵) ‧ 훈관(勳官) 제도 등 관료에 관한 여러 등급 제도가 확인된다.

직사관의 등급인 관품(官品)은 9등급으로 구분되며, 질(秩)이라 불렀다.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던 9품 관등제는 일반적으로 정 · 종(正從) 또는 상 · 하(上下)로 구분되었지만, 발해에서 이런 구별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리의 복장은 3질 이상은 자주색 옷〔자의(紫衣)〕에 상아홀〔아홀(牙笏)〕과 금어대(金魚袋)주28를 하였고, 45질은 짙은 붉은색 옷〔비의(緋衣)〕에 상아홀과 은어대(銀魚袋)를 착용하였다. 67질은 옅은 붉은색 옷〔천비의(淺緋衣)〕에 나무홀〔목홀(木笏)〕을, 8~9질은 녹색옷〔녹의(綠衣)〕에 나무홀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발해의 관복제도>

품계 복색 홀 어대 1∼3질 자주색 상아홀 금어대 4∼5질 진 붉은색 상아홀 은어대 6∼7질 연 붉은색 나무홀 8∼9질 녹색 나무홀 벼슬의 직위와 품계가 일치하지 않을 때에는 행수법(行守法)주29을 시행하였고, 임시직인 검교관(檢校官) 제도를 두었다. 외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에는 대사(大使), 부사(副使), 판관(判官), 녹사(錄事), 역어(譯語), 사생(史生), 천문생(天文生), 의사(醫師), 수령(首領), 뱃사공 등으로 임시 조직이 편성되었는데, 사신의 격을 높이기 위해 원래의 직위와 품계를 높여 상위의 직을 가수(假受)하였다.

산관에는 문산계(文散階)와 무산계(武散階)가 있었지만, 구체적인 등급 체계는 알 수 없다. 문산계로는 자수대부(紫綬大夫), 청수대부(靑綬大夫), 영서대부(英緖大夫), 헌가대부(獻可大夫), 광간대부(匡諫大夫) 등이 확인된다. 무산계로는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 위군대장군(慰軍大將軍), 운휘장군(雲麾將軍), 귀덕장군(歸德將軍), 충무장군(忠武將軍), 영원장군(寧遠將軍), 유장군(游將軍) 등이 보인다.

봉작 제도와 관련해서는 개국공(開國公), 개국자(開國子), 개국남(開國男)이 확인되며, 공(公) · 후(侯) · 백(伯) · 자(子) · 남(男) 등 5등급의 봉작제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군사적인 공훈을 기리기 위한 훈관 제도를 시행하였는데 구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다. 발해에서는 당나라 훈관 제도에서 사용되었던 상주국(上柱國) ‧ 주국(柱國) 등은 확인되지 않으며, 상주장(上柱將)이라는 고유한 명칭이 확인된다.

군사 제도 발해의 군사는 건국 초기에 이미 정예병인 승병(勝兵)이 수만 명이었고,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군사 제도의 정비가 필요하였다. 군사 제도의 정비는 중앙 관제의 정비와 함께 진행되었다. 3성의 하나인 정당성 아래에 있었던 우육사 지부에서 군대를 관리하고, 군수 물자를 담당하였고, 그 지사인 융부(戎部)와 수부(水部) 등에서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에는 발해의 무관(武官)으로 좌맹분위(左猛賁衛) · 우맹분위(右猛賁衛), 좌웅위(左熊衛) · 우웅위(右熊衛), 좌비위(左羆衛) · 우비위(右羆衛), 남좌위(南左衛) · 남우위(南右衛), 북좌위(北左衛) · 북우위(北右衛)가 있었고, 각각 대장군(大將軍) 1인, 장군(將軍) 1인을 두었다고 전한다.

발해의 중앙군사 조직은 남좌우위와 북좌우위를 각기 하나의 명칭으로 보고 2위로 보느냐, 남좌위 ‧ 남우위, 북좌위 ‧ 북우위로 나누어 4위로 보느냐에 따라 10위제 설과 8위제 설이 있다. 10위(또는 8위)는 주로 궁궐과 수도 방어를 담당하고 지방의 부병(府兵)을 관할하였다. 발해의 수도인 상경성터 서남쪽에서 "천문군지인(天門軍之印)"이 새겨진 인장 1점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위군이 각 성문을 지켰던 사실을 보여준다.

지방군사 조직은 확실하지 않지만, 과의도위(果毅都尉), 낭장(郎將), 별장(別將)과 같은 직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지방 부(府) ‧ 주州) ‧ 현(縣)에 당나라 부병제도(府兵制度)와 비슷한 부병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군사 제도는 9세기 전반에 가서 한 차례 변화를 보인다. 제11대 왕 대이진 때인 832년에 당나라 사신 왕종우가 발해에 다녀간 뒤 당 문종에게 “발해에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이 있고, 좌우삼군(左右三軍)과 120사(司)가 있다”고 하였다. 이후의 변화는 알 수 없다.

지방 제도 건국 초기에는 사방 2,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확보하였고, 전성기에는 사방 5,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지녔다. 넓은 영토를 유지하고 여러 계통의 주민 집단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일찍부터 지방 제도를 정비해 갔다. 처음에는 지방의 토착세력을 촌(村)의 규모에 따라 대촌, 소촌 등으로 구분하였고, 토착 지배층을 수령, 대수령으로 구분하여 이들을 통한 간접 지배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고 점차 이들을 일원적인 지방 행정 체제로 흡수하여 대촌은 도독(都督)을, 소촌은 자사(刺史)를 두어 다스렸다. 8세기 중반까지는 약홀주(若忽州), 목저주(木底州), 현도주(玄菟州)와 같은 고구려식 행정구역 명칭이 사용되었다.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5경(京), 15부(府), 62주(州)와 같은 지방 제도가 완비되는 시점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9세기 전반에 확정되었다고 보는 것이 통설이다. 문왕 대에 이미 5경이 설치되었고, 부(경)-주-현의 3단계 지방 행정 체계가 갖추어졌다. 그러나 제10대 선왕 대에 발해의 영토가 크게 확장되면서 이후 『신당서』 발해전에 보이는 모습이 갖추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숙신의 옛 땅으로 상경(上京)을 삼아 용천부라 하고, 용주(龍州) ‧ 호주(湖州) ‧ 발주(渤州)의 3주를 거느렸다. 그 남쪽의 중경(中京)은 현덕부(顯德府)라 하고, 노주(盧州) ‧ 현주 ‧ 철주(鐵州) ‧ 탕주(湯州) ‧ 영주(榮州) ‧ 흥주(興州) 6주를 거느렸다.

예맥(濊貊)의 옛 땅을 동경(東京)으로 삼아 용원부(龍原府) 또는 책성부(柵城府)라 하고, 경주(慶州) ‧ 염주(鹽州) ‧ 목주(穆州) ‧ 하주(賀州) 4주를 거느렸다. 옥저(沃沮)의 옛 땅을 남경(南京)으로 삼아 남해부라 하고, 옥주(沃州) ‧ 정주(睛州) ‧ 초주(椒州) 3주를 거느렸다.

고구려의 옛 땅을 서경(西京)으로 삼아 압록부(鴨綠府)라 하고, 신주(神州) ‧ 환주(桓州) ‧ 풍주(豊州) ‧ 정주(正州) 4주를 거느렸다. 장령부(長嶺府)라 하고, 하주(瑕州) ‧ 하주(何州) 2주를 거느렸다.

부여(扶餘)의 옛 땅은 부여부로 삼아 항상 굳센 군사를 주둔시켜서 거란을 막게 하였고, 부주(扶州) ‧ 선주(仙州) 2주를 거느렸다. 막힐부는 막주(鄚州) ‧ 고주(高州) 2주를 거느렸다. 읍루(挹婁)의 옛 땅은 정리부로 삼아 정주(定州) ‧ 심주(瀋州) 2주를 거느렸다. 안변부는 안주(安州) ‧ 경주(瓊州) 2주를 거느렸다.

솔빈(率濱)의 옛 땅은 솔빈부(率濱府)로 삼아 화주(華州) ‧ 익주(益州) ‧ 건주(建州) 3주를 거느렸다. 불열(拂涅)주30의 옛 땅은 동평부(東平府)로 삼아 이주(伊州) ‧ 몽주(蒙州) ‧ 타주(沱州) ‧ 흑주(黑州) ‧ 비주(比州) 5주를 거느렸다.

철리(鐵利)주31의 옛 땅은 철리부(鐵利府)로 삼아 광주(廣州) ‧ 분주(汾州) ‧ 포주(浦州) ‧ 해주(海州) ‧ 의주(義州) ‧ 귀주(歸州) 6주를 거느렸다. 월희(越喜)의 옛 땅은 회원부(懷遠府)로 삼아 달주(達州) ‧ 월주(越州) ‧ 회주(懷州) ‧ 기주(紀州) ‧ 부주(富州) ‧ 미주(美州) ‧ 복주(福州) ‧ 사주(邪州) ‧ 지주(芝州) 9주를 거느렸다.

안원부(安遠府)는 영주(寧州) ‧ 미주(郿州) ‧ 모주(慕州) ‧ 상주(常州) 4주를 거느렸다. 또 영주(郢州) ‧ 동주(銅州) ‧ 속주(涑州) 3주는 독주주(獨奏州)로 삼았다. 속주는 그것이 속말강(涑沫江)에 가깝기 때문이니, 대개 이른바 속말수(粟末水)이다”라고 하였다.

발해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하여 왕이 상주하는 수도를 포함하여 15부 가운데 중요한 거점에 5경을 두었다. 15부에는 다시 관할 주를 두었고 모두 62주라고 하였으나 『신당서』 발해전에는 60개의 주 이름만이 나온다. 이 가운데는 부를 통하지 않고 중앙에 곧바로 보고하는 직할 주인 ‘ 독주주(獨奏州)’ 3곳이 있었다.

기록에 빠진 2주에는 『요사(遼史)』 등에 보이는 집주(集州), 녹주(麓州), 빈주(賓州), 신주(愼州) 등이 거론된다. 『요사』 지리지에 보면 주를 군(郡)이라고도 하였다. 발해 후기에 지방 행정 체제의 변화가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의 명칭은 영녕현(永寧縣) 등 일부만이 확인되는데, 실제 200~250개 정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에는 책임자로 도독을 두었고, 주에는 자사를 두었으며, 현에는 현승(縣丞)을 두었다. 발해가 지방 제도를 운영할 때 부주현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새로 복속된 지역에는 부족제와 기미(羈縻) 지배 등 간접 지배 방식을 병행하였다는 견해가 있다.

지방 행정 구역의 비정과 관련해서는 논란이 많다. 특히 『요사』 지리지는 발해의 주현 이름과 위치에 관한 정보가 많다. 그러나 연혁 기록에 오류가 많아 지명 비정에 큰 혼란을 주었다. 현재 가장 확실한 것은 발해 수도였던 3경의 위치이다. 상경은 중국 헤이룽장성 닝안〔寧安〕 상경성(上京城) 터이며, 중경은 지린성 허룽의 서고성(西古城) 터, 동경은 지린성 훈춘〔琿春〕의 팔련성 터가 확실시 된다. 남경은 함경남도 북청 청해토성(靑海土城)으로, 서경은 지린성 린장〔臨江〕 지역으로 비정된다.

<발해의 지방 행정 조직>

5경(京) 명칭 소속 경 5경(京) 상경, 중경, 동경, 남경, 서경 15부(府) 명칭 소속 주(州) 용천부 용주, 호주, 발주 현덕부 현주, 노주, 철주, 탕주, 영주(숭주), 흥주 용원부 경주, 염주, 목주, 하주 남해부 옥주, 정주, 초주 압록부 신주, 환주, 풍주, 정주 장령부 하주, 하주 부여부 부주, 선주 막힐부 막주, 고주 정리부 정주, 반주(심주) 안변부 안주, 경주 솔빈부 화주, 익주, 건주 동평부 이주, 몽주, 타주, 흑주, 비주 철리부 광주, 분주, 포주, 해주, 의주, 귀주 회원부 달주, 월주, 회주, 기주, 부주, 미주, 복주, 사주, 지주 안원부 영주, 미주, 모주, 상주 독주주 - 영주, 동주, 속주 기타 - 집주, 녹주, 빈주, 신주

발해의 사회와 경제

사회 구성과 신분 구조 발해의 종족 구성은 고구려계, 말갈계, 거란계, 실위계, 투르크계(돌궐 ‧ 회흘 ‧ 소그드) 등 다양하였다. 발해의 건국 과정에서 대조영은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을 아울러 나라를 세웠고, 발해의 영역 확장 과정에서 더 많은 구성원이 포함되었다. 727년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여러 나라를 주관하고 여러 번(蕃)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터전을 수복하고 부여의 남은 풍속을 가졌다고 하고, 『신당서』에 발해가 부여 ‧ 옥저 ‧ 조선 등 바다 북쪽 여러 나라를 얻었다고 한 것은 이러한 사실을 보여준다.

무왕과 문왕 대를 거쳐 선왕 대까지 철리 ‧ 불열 ‧ 월희 ‧ 우루부(虞婁部) 등을 복속시켰고, 흑수말갈 역시 발해에 복속되었다. 그리고 남실위와 철륵 등의 종족이 일부 발해에 편입되었고, 발해의 땅에서 발견되는 거란계, 투르크계 유물 등을 통해 소수이지만 이들 역시 발해의 구성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인의 성명을 분석해 보면 역시 고구려계, 말갈계, 소그드계 등 다양한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신라계로 보이는 인물들도 있다.

발해의 지방 사회 구조와 관련하여 일본의 『유취국사(類聚國史)』에 보이는 토인(土人)과 수령(首領)의 존재가 논란이 되었다. 이 책에는 “그 나라는 사방 2,000리인데, 주 · 현과 관(館) · 역(驛)이 없다. 곳곳에 촌리(村里)가 있는데 모두 말갈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이 많고 토인이 적다. 모두 토인을 촌장으로 삼았다. 큰 촌은 도독이라 하고, 그 다음은 자사라고 한다. 그 아래 백성들은 모두 수령이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여기서 토인은 말갈인에 대비되는 존재로 고구려인으로 보아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토인을 사인(士人)으로 보기도 하고, ‘백성’과 ‘수령’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이들 사이의 상하 관계가 다르게 해석된다. 토인을 사인으로 볼 경우 종족 구분과는 무관해진다. ‘백성’을 일반민으로 볼 경우 피지배층인 백성이 도독과 자사를 수령으로 부른 것이 되고, ‘백성’을 관인으로 볼 경우 도독이나 자사 아래에 있는 관료로서 이들을 수령으로 불렀다고 해석될 수 있다.

발해의 사회 구성은 고구려계와 말갈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렇지만 상당수의 말갈인은 과거 다종족 국가인 고구려의 주요한 구성원으로 고구려인이었기 때문에, 발해의 지배층은 고구려인, 피지배층은 말갈인이 많았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발해의 신분 구조는 왕족(황족), 귀족, 평민, 그리고 하층민인 부곡(部曲)과 노비 등으로 이루어졌다. 발해의 신분 구조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기록은 없으나,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지은 『송막기문(松漠紀聞)』에 “그 왕은 예전에 대(大)를 성으로 삼았고, 유력한 성씨〔右姓〕로는 고(高) · 장(張) · 양(楊) · 두(竇, 賀의 잘못으로 보기도 함) · 오(烏) · 이(李)로 불과 몇 종에 지나지 않는다. 부곡과 노비와 같이 성이 없는 자는 모두 주인을 따랐다”고 하였다.

고대 사회에서는 성의 유무가 신분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왕족(황족)인 대씨를 제외하고, 우성인 고 · 장 · 양 · 두(또는 하) ‧ 오 · 이씨는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에 속한 유력한 귀족 성씨였을 것이다. 문왕 사후 대원의를 몰아내고 대화여(성왕)를 왕으로 추대한 ‘국인(國人)’은 중앙 귀족으로, 발해의 우성 가문이 국인을 형성하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모든 기간 동안 기록에 등장하는 발해 인명은 왕을 포함하여 230여 명이고, 유민까지 합치면 380여 명이다. 확인되는 성씨는 60개가 넘는다. 이 가운데 왕족(황족)인 대씨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고구려의 왕족 성씨인 고인데, 이들 성씨가 발해에서 성씨를 가진 사람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그 다음으로는 왕씨, 장씨, 양씨, 오씨, 이씨, 하씨가 상위를 차지한다. 이들 성씨는 고구려 당시부터 유력 성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밖에 고구려계 성씨로 보이는 마(馬) ‧ 해(解) ‧ 배(裵) ‧ 조(趙), 말갈계로 보이는 모(慕) · 여(茹) ‧ 섭(聶), 소그드계로 보이는 안(安) ‧ 사(史), 신라계로 보이는 박(朴) · 최(崔) ‧ 김(金)씨 등도 포함되어 있다. 왕 ‧ 장 ‧ 이 ‧ 마 ‧ 배 ‧ 조씨 등의 성씨를 가진 사람 중에는 한족(漢族)이나 다른 계통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구별되지는 않는다.

평민은 일반적으로 성이 없으며 국가의 호적에 등재되어 편호(編戶)주32를 이루었다. 이들은 농민이 다수를 차지하고 상인과 수공업자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직접 생산과 경제 활동을 담당하며 나라에 조(租)와 요역(徭役), 병역(兵役) 등을 부담한 계층이다. 발해의 신분 구조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것은 부곡과 노비로, 대부분 중앙 귀족이나 지방 유력자에 예속되었고 일부는 왕실과 관청에 소속되었을 것이다.

종교 생활 발해에서는 불교, 도교, 무속, 경교(景敎) 등 다양한 종교를 믿었다. 발해의 왕족들은 일찍부터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713년 12월에 당나라에 갔던 발해의 왕자는 현지 절에서 예배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제3대 문왕은 ‘금륜(金輪)’과 ‘성법(聖法)’이라는 불교 용어를 존호에 사용하였다. 이것은 문왕이 스스로 불법을 수호하며 천하를 다스리는 지배자인 ‘전륜성왕(轉輪聖王)주33’을 자처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발해의 중심지인 상경(上京) ‧ 중경(中京) ‧ 동경(東京)을 비롯하여 지역 거점지에는 모두 절터가 확인되고 있다. 주요 거점 지역의 사찰은 국가 차원에서 관리한 것으로 보인다. 발해 왕실과 귀족 불교의 모습은 무덤 형태에서도 드러나는데, 문왕의 딸인 정효공주 무덤을 비롯하여 고위 귀족의 무덤 위에 탑을 세운 것은 불교식 장례 문화라고 할 수 있다.

발해의 불교는 문왕 대를 거치며 크게 발전하였다. 9세기 이후에는 석인정(釋仁貞, ?∼815), 석정소(釋貞素, ?∼828), 살다라(薩多羅), 재웅(載雄) 등과 같은 승려들의 활동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석인정은 제8대 희왕(僖王) 대의 인물로 승려의 신분이었지만 문예에 능하여 814년에 기록을 담당하는 녹사(錄事)의 신분으로 사신단과 함께 일본에 파견되었다. 그가 일본에서 지은 시 1수가 전해진다. 귀국 길에 풍랑을 만나 에치젠〔越前〕에 표류하였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같이 갔었던 왕효렴(王孝廉)이 먼저 창(瘡)주34을 앓고 갑자기 죽은 뒤 왕승기(王昇基)와 석인정이 이어 죽은 것으로 보아 전염병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석정소는 희왕 대부터 제10대 선왕 대까지 당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813년 가을에 일본 유학승 레이센〔靈仙, ?∼828〕을 만나 사귀었다. 그 뒤로 오대산(五臺山)에 들어간 레이센과 일본 조정 사이를 왕래하면서 서신과 물건을 전해 주었다. 828년에 발해의 하정사(賀正使)와 함께 귀국하던 길에 바다에서 폭풍을 만나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살다라는 설화적인 인물로 당나라 장안에 머물렀는데 새와 짐승의 말을 잘 하였다고 전해진다. 재웅은 발해가 멸망한 뒤인 927년에 60여 명과 함께 고려로 투항하였다.

발해 관료와 관련된 일화로는 762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신복(王新福) 일행이 도다이지〔東大寺〕에서 예불하였던 것과 814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왕효렴이 일본 승려인 쿠우카이〔空海, 774∼835〕와 시문을 나눈 기록이 전해진다. 861년에 사신으로 갔던 이거정(李居正)은 일본에 다라니경(陀羅尼經)주35을 전해주었는데, 지금도 남아 있다. 814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고예진(高禮進)은 금불상과 은불상을 바쳤다.

발해는 왕실에서부터 귀족층 그리고 일반 백성까지 불교를 숭상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절터와 탑터, 불상, 사리함주36 등 불교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많다. 탑으로는 영광탑(靈光塔)만이 거의 완전한 형태이며, 정효공주 무덤탑, 마적달탑 등 흔적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불상으로는 금불, 금동불, 동불, 석불, 철불, 전불(塼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있고, 벽화 조각도 남아 있다.

석불로는 상경성 2호 절터에 남아 있는 석불과 일본 오오하라〔大原〕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함화 4년명 불비상(咸和4年銘佛碑像)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발해 불상의 전형을 이루는 것은 전불로, 크기가 10㎝ 내외로 아주 작으며 틀빼기주37를 해서 구웠다. 형식면에서는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선정인여래좌상(禪定印如來坐像), 미타정인여래좌상(彌陀定印如來坐像), 2불병좌상(二佛竝坐像), 3존불(三尊佛), 5존불(五尊佛) 등이 있다. 지역적으로 관음상은 상경에서, 2불병좌상은 동경에서 주로 발견되어 지역별로 관음신앙과 법화(法華)신앙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 초기의 불교는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불상은 상당수가 고구려 시기의 양식을 취하고 있고, 절 지붕에 사용되었던 막새기와주38의 연꽃 문양도 고구려의 양식을 이었다. 발해 불교의 전통은 다시 발해 유민에게 계승되었다. 요나라에서 발해 유민이 가장 많이 살았던 랴오양〔遼陽〕 지역은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불교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도교의 경우 도교사원과 같은 유적은 확인되지 않으나, 정혜 ‧ 정효 공주의 묘지명이나 일부 기록에서 그 흔적이 보인다. 공주의 묘지명에는 『장자(莊子)』와 ‘무악(巫岳)’, ‘무산신녀(巫山神女)’, ‘신선(神仙)’ 등 도교와 관련 있는 고사가 인용되었다.

발해 사람 고원고(高原固)주39는 당나라 문인인 서인(徐夤)을 만나 시를 얻었는데 '인생기하부(人生幾何賦)'라는 시는 도가적인 생활을 동경하는 내용으로 도교적인 관심을 보여준다고 한다. 발해 사람 이광현(李光玄)은 도를 구하기 위해 20세에 출가하여 도교 수련법을 익히고, 불로장생약인 금단(金丹)주40을 제련하며 자신이 체득한 바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이러한 내용이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에 수록되어 있다.

이 밖에 발해에는 기독교 일파인 경교가 들어왔던 흔적도 보인다. 발해의 동경성인 팔련성 제2절터에서 발견된 삼존불은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있고, 러시아 연해주의 아브리코스 절터에서는 십자가가 새겨진 점토판이 나왔다. 이들 십자가는 가로 세로의 길이가 똑같은데, 이것은 경교 십자가의 특징이다. 또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는 샤머니즘이 보편적으로 신앙되었다.

생산 경제 발해는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어 토양과 기후 조건, 거주민의 생활 방식 등에 따라 지역마다 산업 경제가 일정하지 않았다. 주로 서부와 남부는 농업이 중심이었고, 동부는 농업과 어업 ‧ 수렵이, 북부 지역은 수렵과 목축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당서』 발해전에는 발해의 특산물에 대해 “그 나라가 귀하게 여기는 것에는 백두산의 토끼, 남해부의 다시마, 책성부의 된장, 부여부의 사슴, 막힐부의 돼지, 솔빈부의 말, 현주의 베, 옥주의 면(綿), 용주의 명주, 위성의 철, 노성의 벼, 미타호의 붕어가 있고, 과일에는 환도의 오얏, 낙유의 배가 있다”고 하였다. 이 특산물은 나라에서 각 지방에 부과하였던 공납품이면서, 일부는 대외 무역에서도 중요한 상품이 되었다. 이것을 관장하는 관청으로는 인부와 사장시, 대농시 등이 있다.

농작물로는 발해 지역이 전체적으로 한랭하여 내한성주41이 강하고 생장이 빠른 보리 ‧ 밀 ‧ 메밀 ‧ 수수 ‧ 기장 ‧ 조 ‧ 콩 등을 주로 심었다. 기후가 비교적 따뜻하고 수량이 많은 남부 지역 일부에서는 벼를 재배하였다. 『유취국사』에는 발해 지역이 매우 추워서 논농사〔水田〕에 적합하지 않다고 기록하였다. 따라서 두만강 유역에 위치한 노성의 벼는 밭농사로 재배한 것으로 본다. 그러나 노성 지역은 물이 풍부하고, 우경(牛耕) 등 발해의 농업 기술이 발달하였다는 점에서 논농사가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 밖에 직물을 짜기 위해 마(麻)를 재배하였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명주를 생산하였다. 과일은 오얏, 배, 살구, 앵두 등을 키웠다. 인삼이나 꿀 · 사향과 같은 약재 등은 채집이나 사냥 등으로 획득하였다.

가축으로는 말, 소, 돼지, 개, 양, 닭 등을 키웠고, 수렵으로 매와 꿩 등 날짐승과 담비, 사슴, 호랑이, 표범, 곰, 말곰, 멧돼지, 흰토끼, 사향노루 등 들짐승을 잡았다. 어업은 압록강, 두만강, 쑹화강〔松花江〕, 무단강〔牡丹江〕, 칭포호〔镜泊湖〕, 싱카이호〔興凱湖〕 등 큰 하천과 호수를 낀 지역과 요동만과 동해 바다를 낀 지역에서 주로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남해의 다시마, 동해의 대게, 미타호의 붕어 외에도 마른 문어, 숭어, 바다범 가죽, 고래 등이 있다.

수공업으로는 직조, 금속 가공, 요업(窯業) 등이 발달하였다. 베는 옛 옥저 시대부터 유명한 특산물로, 발해가 후당(後唐)에 보낸 세포(細布)주42와 말갈족이 거란과 교역한 세백포(細白布) 등이 현주의 베와 같은 종류로 보인다. 발해 고분군에서 발견된 베는 직조가 고르고 광택이 아직도 남아 있어 발해 직조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비단 직조술도 발달하여 주(紬), 어아주(魚牙紬), 조아주(朝霞紬)주43 등 다양한 종류의 비단을 생산하였다. 발해인은 금속 가공에도 뛰어나서 많은 철제 유물을 남겼고, 거란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 발해의 야철 장인들을 데리고 가 철기를 생산하게 하였다. 구리와 금 ‧ 은을 이용하여 만든 장신구와 거울, 불상, 기물 등은 발해인의 높은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요업 분야에서는 벽돌과 기와, 흙으로 빚은 장식물 등 건축 자재 분야와 도자기 생산을 들 수 있다. 궁전이나 절, 유력자의 주거지 등에서 주로 쓰인 고급 벽돌 ‧ 기와 ‧ 건축 장식물은 대체로 담당 관청 소속의 장인 집단이나 지역별 생산 집단에서 만들어져 공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경, 동경, 중경 등 주요 건축 유적에서는 생산자를 표시한 것으로 보이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많이 나왔다. 고급 도자기의 경우도 전문 장인 집단이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3가지 유약을 배합하여 만든 발해 삼채(渤海三彩)가 유명하다.

상업과 교역 상업과 교역이 발달하기 위해서는 지역 간 물류가 쉽게 이동할 수 있는 교통로가 발달해야 한다. 발해는 지방 행정 제도를 정비하며 5개의 주요 대외 교통로를 함께 정비하였다. 동경 용원부는 동남쪽으로 바다에 접해 있는데, 일본으로 가는 일본도(日本道)의 출발지였다. 동경 관할의 염주(지금의 크라스키노 성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의 서해안에 도착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남해부는 신라로 이어지는 신라도(新羅道)에 해당하며, 여기서부터 국경인 니하(泥河)를 건너 신라의 천정군(泉井郡)을 거쳐 왕경이 있는 경주로 들어갔다. 천정군에서 남해부를 거쳐 책성부(즉 동경 용원부)까지는 모두 39개의 역(驛)이 있었다.

당나라의 장안으로 가는 길은 조공도(朝貢道)라고 하는데, 압록부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하구에서부터 요동반도 연안의 뱃길을 따라 서행하다가 뤼순〔旅順〕 지역에서 남하하여 당나라의 등주로 들어가 장안까지 이어졌다. 당나라의 요서 지역 거점인 영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영주도(營州道)라고 하는데 장령부에서 출발하였다.

부여부에서 거란으로 이어지는 길은 거란도(契丹道)라고 한다. 영주도와 거란도는 당나라와 거란 외에 발해의 서쪽과 서북쪽에 위치한 실위, 말갈, 돌궐, 회흘 등과 교통하는 데도 이용되었다. 그리고 흑수말갈 지역으로 가는 흑수도(黑水道)와 초원의 길, 담비의 길 등이 발해로 이어졌다. 대외 교통로는 국내의 주요 간선도로와 함께 국내외 상업 ‧ 교역망을 형성하였다.

발해의 교통로를 따라 24개의 주춧돌로 되어 있는 건물지(일명 24개돌 유적)가 10여 개소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적은 역참 제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경과 같이 리방(里坊)주44으로 구획하여 세워진 계획 도시 안에서는 외성 안에 시장터를 지정하여 상업 행위를 할 수 있도록 감독하였고, 지방의 일반 백성 사이에서는 자연 발생적인 장터나 보부상들에 의해 상행위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발해가 직접 화폐를 만들어 사용하였는지는 논란이 많으며, 아직까지는 자체 주조한 화폐는 발견되지 않았다.

상업과 교역에서 주로 거래한 물품은 발해의 여러 산업 분야에서 생산된 특산품을 위주로 하였으며, 동남아시아나 중국, 거란, 일본 등 주변 나라의 상품을 중개 무역하기도 하였다. 대외 교역은 공무역과 사무역으로 구분된다. 발해는 대외 교역을 주로 국가가 주도하였는데, 교역에 말갈 등 복속 집단의 수령층을 참가시켜 복속에 대한 경제적 보상을 주는 통치 정책을 펼친 것이 특징이다. 기록상 발해가 가장 활발하게 무역을 하였던 대상은 당나라와 일본이었다.

공무역은 외교 의례에서 조공(朝貢) ‧ 선물, 회사품(回賜品)을 주고받는 형태와 사신단과 사행에 따라 간 상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무역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변경 지역에서 행해지던 호시(互市)주45도 공무역에 해당한다. 발해와 당과의 공식적인 교역은 713년 12월에 당나라에 도착한 발해 왕자가 시장에서 교역할 수 있기를 청하여 허락받은 것이 첫 사례이다.

발해가 당나라에 보낸 상품으로는 담비 ‧ 호랑이 · 해표 · 곰 ‧ 흰토끼 등의 가죽과 말 · 매 등의 짐승, 고래 · 마른 문어 · 다시마 등의 해산물, 인삼 · 우황 · 백부자(白附子) ‧ 꿀 등의 약재가 주를 이뤘다. 그리고 두어 차례 여자 · 아이 · 노비 등 사람을 보낸 기록도 있다. 당나라에서 발해로 들여온 물품에는 백(帛) ‧금(錦) 등 비단이나 옷가지, 금 · 은으로 만든 그릇 등이 있었다.

9세기에 들어서는 사무역이 발달하였는데, 발해관(渤海館)이 있던 산동과 중국 동남해 지역에서 무역을 하였다. 특히 발해의 말은 등주(登州)와 청주(靑州)에서 많이 거래되었고, 839년에는 발해가 숙동(熟銅)을 가져다가 교역한 기록이 전해진다.

일본과의 경제 교류 역시 공무역이 주를 이루었고, 사무역도 일부 행해졌다. 발해는 일본에 35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고, 일본은 발해로 1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다. 발해와 일본과의 교섭은 처음에는 정치 ‧ 군사적 목적을 띠었지만, 뒤에는 점차 상업 ‧ 문화적 성격으로 변하였다. 특히 발해의 대일 교섭은 교역에 중심을 두고 빈번하게 대규모로 사신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경제에 부담을 줬다.

일본은 이러한 발해 사신단의 모습을 보고 이웃 나라의 손님이 아닌 상인과 마찬가지라고 비난하였다. 그리고 발해 사신의 일본 방문 시기를 6년에 한 번, 12년에 한 번으로 제한하고 사사로운 교역을 금지하며 통제하려고 하였으나 별로 효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일본과 교역에서 발해가 가져간 상품은 담비 가죽 · 표범 가죽 · 곰 가죽 ‧ 인삼 ‧ 꿀 등 발해의 특산품이 주를 이루었고, 거란의 큰 개, 대모(玳瑁)로 만든 술잔 등 다른 나라의 물산도 포함되었다. 일본에서 들여온 물품에는 비단 · 면포 · 실 등의 옷감, 황금 ‧ 수은 ‧ 칠(漆) ‧ 부채 등이 있다

발해의 문화와 예술

문자 생활 발해의 문화 발전에는 문자 생활의 발전이 중요한 배경이 된다. 그런데 발해의 문자 생활과 관련해서 논란이 되는 것은 고유한 문자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12세기 초의 일본 설화집인 『강담초(江談抄)』에는 발해가 만든 글자에 대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연희(延熹: 901~922) 때에 발해국의 사신 2명이 일본에 왔는데, 첩장(牒狀)에 쓰인 사신의 이름은 모르는 문자였다. 일본인 키케〔紀家〕가 그것을 보고 비록 모르는 문자였지만, 풀어 읽어 신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발해의 문자와 관련해서는 중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태백전집(李太白全集) 『옥진총담(玉塵叢談)』에는 발해에서 당나라로 보낸 서신을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자, 이태백만이 이를 해독하고 회답하였다고 한다. 명나라 시기의 야설인 『고금기관(古今奇觀)』과 『 수당연의(隋唐演義)』에도 이태백이 발해의 문자를 해독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문자가 마치 새의 발자국을 닮았다고 하였다.

근대 이후 발해 유적에서는 문자가 새겨진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다. 기존 한자와는 다른 글자들도 있어 발해 문자에 대한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발해 기와에 보이는 한자의 90%는 기존 글자와 다르지 않고, 그 외 상당수는 한자의 간체, 약체, 이체로 볼 수 있다. 확실히 독특한 글자도 있지만, 거란이나 여진과 같이 독립적인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힘들다. 공식 문자는 한자를 사용하였고, 일부 한자와 다른 글자는 고구려나 발해가 필요에 의해 새로 만든 글자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한자를 수용하여 문자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발해는 건국할 때부터 이미 한자를 습득한 상태였다. 따라서 『구당서』에는 발해에 “문자(文字)와 서기(書記)가 있다”고 하였고, 『신당서』에서는 “서계(書契)를 잘 안다”고 하였다. 발해가 만든 서책은 거의 전하지 않지만, 일본에는 발해에서 가져간 다라니경이 전해지고 있다. 중앙에는 문헌을 정리하고 관리하던 문적원이 있었고, 체계적으로 인재를 양성하던 국가 교육 기관인 주자감이 있었다. 교육 기관에 세웠던 비석에는 “유생(儒生)이 동관(東觀)에 북적인다”고 하였다.

문서 행정 체계도 잘 갖추어져 왕의 명령에 따라 초고(草稿)를 작성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던 조고사인이 중대성에 속해 있었다. 또한 외국에 파견된 사신 가운데에는 문서와 기록을 담당하는 관리로 녹사가 있었다. 문자 유물로는 정혜, 정효 공주의 묘비, 개심사(開心寺) 출토 글쪽지, 영광탑의 명문, 인장과 동경 · 청동부절 · 불상 등의 명문이 있다. 최근에 발견된 발해 황후 2명의 묘지명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그 밖에 기와 등에 새겨진 명문도 많이 발견되고 있어, 발해에서 문자 생활이 발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발해에서 문자 생활이 발전한 사실은 발해가 9세기 들어 ‘해동성국’으로 불리게 된 문화적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 유학은 삼국시기부터 국가의 통치와 교육에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발해는 고구려에서 이어지는 유학을 바탕으로 당나라와의 문화적 교류를 통해 유학을 발전시켜 나갔다. 발해는 714년 처음으로 당나라에 학생을 보내어 국자감(國子監)에 들어가 공부하게 하였다. 그리고 사신 파견과 숙위(宿衛) 등을 통해 선진 문화를 배우게 하였고, 유학 관련 서적을 당나라에서 수입하기도 하였다.

발해에서 본격적으로 유학이 발전하는 것은 문치에 힘을 기울인 문왕 때이다. 문왕은 즉위 다음 해인 738년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당례(唐禮)』 ‧ 『삼국지(三國志)』 ‧ 『진서(晋書)』 ‧ 『삼십육국춘추(三十六國春秋)』를 구하였다. 『당례』는 유학에 입각한 국가 통치 규범과 의례를 담고 있던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로, 문왕 시기의 통치제도와 국가의례 정비에 중요한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그 외 서적들은 문적원에 소장하거나 주자감에서는 귀족 자제들을 교육하는 데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발해의 제도와 문장을 살펴보면 유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모습이 많다. 관청의 명칭을 보면, 궁중에서 후궁의 업무를 담당하던 항백국(巷伯局)의 항백은 『시경(詩經)』에서 따온 것이다. 무엇보다도 6부의 명칭을 충 · 인 · 의 · 지 · 예 · 신이라는 유교 덕목으로 삼은 것은 발해에서 유학의 이념이 얼마나 중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문왕의 존호인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에 있는 효감(孝感)이란 단어도 유교에서 강조하는 덕목이다.

문왕의 두 딸인 정혜공주와 정효공주의 묘지명에는 중국의 유교 경전과 역사서들을 두루 섭렵하여 변려체주46 문장을 구사하고 있어서 당시 발해 지식인의 유학적 소양을 보여준다. 묘지에 인용된 경전으로는 『상서(尙書)』 ‧ 『춘추(春秋)』 ‧ 『좌전(左傳)』 ‧ 『시경』 ‧ 『역경(易經)』 ‧ 『예기(禮記)』 ‧ 『맹자(孟子)』 ‧ 『논어(論語)』 등이 있다. 공주들은 여사(女師)에게 생활 예절과 함께 유학에서 강조되는 여성의 덕목과 소양을 배웠다.

외국과 주고받은 국서(國書)에서도 유학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국서는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말들로 가득 차 있는데, 상대국에게 문화적 소양을 드러내기 위하여 유학적 지식과 고사, 미사 등을 많이 사용하였다. 얼마나 이를 잘 활용하여 세련되게 썼는가가 국가의 격을 보여준다고 여겼다. 이러한 국서에는 상대에 대한 칭찬이나 평가 역시 유학과 관련한 내용을 담은 경우가 많았다.

제10대 선왕은 일본으로부터 “신의로 본성을 이루고, 예의로 입신하였다〔신의성성, 예의입신(信義成性, 禮儀入神)〕”, “세속에는 예악을 전하고, 가문에는 의관을 이었다〔속전예악, 문습의관(俗傳禮樂, 門襲衣冠)〕”, “믿음은 금석과 같이 확고하고 절개는 소나무 · 대나무처럼 곧다〔신확금석, 조정송균(信確金石, 操貞松筠)〕”라는 말을 들었다.

제11대 왕 대이진은 중국으로부터 “대대로 충정을 이어받았고, 사람 됨됨이는 인후에 바탕을 두었다〔대습충정, 기자인후(代襲忠貞, 器資仁厚)〕”는 평가를 얻었다. 이러한 평가는 상투적이지만 발해인들이 상당한 유학적 소양을 갖추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발해인의 이름에서도 유학의 영향이 보이는데, 왕의 이름인 대원의(大元義), 대언의(大言義), 대명충(大明忠), 대인수(大仁秀)나 왕족의 이름인 정혜(貞惠)공주, 정효(貞孝)공주, 대의신(大義信), 대성경(大誠慶), 대성신(大誠愼) 등이 그 예이다. 발해에서 유학이 발달한 것은 당나라의 빈공과에서 10여 명의 합격자를 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발해인은 이 빈공과에서 신라인과 함께 수석과 차석 자리를 두고 다툴 정도로 학문적 자신감을 드러내었다.

한문학 발해의 문자 생활과 유학이 발달하며 동시에 발해인의 한문학 수준도 높아졌다. 한문학은 발해의 귀족층과 관인들에게 기본 소양이었고, 이웃 나라와의 외교 교섭에 있어서도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한문학이 뛰어난 사신을 외국에 파견하여 자국의 문화 수준을 선양하는 것이 외교 수단이 되었다. 이를 이른바 문화(문예) 외교라고 한다.

먼저 발해의 한문학 실력을 볼 수 있는 것은 외교 문서이다. 발해는 당나라 · 일본 · 신라 · 거란 · 돌궐 등 이웃 나라들과 교류를 하였지만, 발해의 외교 문서는 당나라와 일본과 주고받은 일부만이 전해진다. 발해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이 145차례 이상 확인되는데, 당나라에 보낸 문서로는 연대를 확인할 수 없는 하정표(賀正表) 1편만이 남아 있다.

한편 발해에서 일본에 보낸 외교문서는 모두 23편이 남아 있다. 발해 국왕이 보낸 국서(國書) 16편과 중대성에서 일본 태정관(太政官)에 보낸 중대성첩(中臺省牒) 7편이다. 이들은 외교 문서에 속하기 때문에 일정한 격식을 갖추고 있고 대부분 상투적인 어구로 채워져 있지만, 국왕과 중앙 관청의 이름으로 작성된 문서여서 발해에서 가장 높은 문장 실력을 보여준다.

발해의 한문학 수준은 9세기가 되면 당나라와 일본에서도 감탄할 만큼 올라가는데, 특히 발해의 사신들이 일본 문인들과 교류한 이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발해 초기에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주로 무관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8세기 후반부터는 국내외 정세의 안정을 기반으로 문관을 주로 사신으로 보내었고, 9세기 들어서면서 문인들이 파견되는 현상이 두드러졌다.

일본 문인들과 시문을 교환하였던 발해 사신으로는 758년에 파견된 부사 양태사(楊泰師)주47, 814년에 파견된 대사 왕효렴과 부사 고경수(高景秀)주48 및 녹사 석인정 등이 있다. 또한 858년에 파견된 부사 주원백(周元伯)주49, 871년에 파견된 대사 양성규(楊成規)와 부사 이흥성(李興晟), 882년에 파견된 대사 배정(裴頲), 894년에 파견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부사, 907년과 919년에 파견된 대사 배구(裴璆) 등이 있다. 배구는 발해가 멸망한 뒤 동단국의 사신으로 929년 한 차례 더 일본에 갔다.

일본에서는 문장에 조예가 있는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데에 무척 신경을 썼다. 문장에 능한 사람을 특별히 선별하여 발해 사신을 응대하였는데, 양태사 일행을 접대하는 임무를 맡았던 미야코 코토미치〔都言道〕는 이름이 발해 사신을 접대하는 데 적당하지 않다고 개명까지 하였다. ‘칠보지재(七步之才)주50’를 지닌 배정이 사신으로 갔을 때는, 문장에 능하지 못한 후지와라 요시즈미〔藤原良積〕가 부끄러워하며 연회 도중에 퇴장하는 사건도 발생하였다.

발해와 일본 문인 사이에 주고받은 시는 일본의 『경국집(經國集)』,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관가문초(管家文草)』, 『부상집(扶桑集)』, 『강담초(江談抄)』 등에 전한다. 이 중 발해 문인의 작품으로는 양태사의 2수, 왕효렴의 5수, 석인정의 1수가 전해진다. 시는 오언율시주51, 칠언고시주52, 칠언절구주53의 형식을 띄는데 칠언으로 이뤄진 것이 많았다.

내용은 멀리 타국에서 고국을 그리는 향수를 그린 것이 있는가 하면, 일본 조정으로부터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것도 있다. 고국을 그리는 서정적인 시로는 양태사의 ‘ 야청도의성(夜聽擣衣聲)’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가을밤에 다듬이질 소리를 듣고 고국에 있는 부인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다. 일본 궁궐의 연회에 참석하여 환대를 받아 즐거운 마음을 표현한 왕효렴의 ‘봉칙배내연(奉勅陪內宴)’과 봄날에 비를 보고 정자(情字)를 얻었다는 내용의 ‘춘일대우 탐득정자(春日大雨 探得情字)’ 시도 유명하다.

그 밖에 발해인의 시는 승려인 정소가 중국에서 일본 승려 라이센〔靈仙〕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곡 일본국 내공봉 대덕 영선화상 시병서(哭日本國內供奉大德靈仙和尙詩幷序)’ 1수가 엔닌〔円仁〕의 『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전해져 온다.

한편 발해 문인이 당나라 문인과 교류하며 남긴 작품은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발해인들이 문학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는 고원고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과거시험에 함께 급제한 서인(徐夤)을 만나러 민중(閩中, 福建省 福州) 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이 때 고원고는 서인이 지은 ‘참사검부(斬蛇劍賦)’, ‘어구수부(御溝水賦)’, ‘인생기하부(人生幾何賦)’를 발해 사람들이 집집마다 병풍에 금으로 써놓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의 문인인 온정균(溫庭筠)은 발해를 “문물제도에서 당과 한 집안을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는데, 이를 보아 발해의 한문학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학 전통은 발해 유민들에게까지 계승되었다. 발해 멸망 뒤에 유민으로서 문학 작품을 남긴 인물도 적지 않은데, 요나라 때의 천조제(天祚帝)주54의 문비 대씨(文妃 大氏), 금나라 때의 왕준고(王遵古) · 왕정견(王庭堅) · 왕정균(王庭筠) · 왕만경(王萬慶) 집안, 고간(高衎) · 고헌(高憲) 집안, 장여위(張汝爲) · 장여능(張汝能) 형제 등이 유명하다.

미술과 공예 발해시대의 그림으로는 고분에 그려진 벽화가 대표적이다. 1959년 둔화〔敦化〕 리우딩산〔六頂山〕 고분군의 여러 무덤에서 벽화가 처음 발견되었으나, 모두 파손되어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었다. 1980년에 허룽〔和龍〕 룽터우산〔龍頭山〕 고분군의 정효공주 무덤에서 거의 완전한 인물화가 발견되었고, 1991년 닝안 산링둔〔三陵屯〕 2호묘에서도 벽화가 발견되었다. 정효공주 무덤에는 널방주55 동 ‧ 서 ‧ 북 세 벽에 시위 · 내시 · 악사 · 시종 등 10명이, 널방으로 이어지는 널길주56 동 ‧ 서벽에는 무사 2명이 그려져 있다. 모두 돌벽 위에 백회를 바르고 그렸다. 널받침〔棺臺〕 남쪽 측면은 백회 위에 그린 사자머리 같은 모습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나 손상이 심하다.

인물들은 대체로 얼굴을 하얗게 칠하였고, 둥글고 살이 쪄서 풍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 눈은 작고 눈썹은 가늘며 코는 낮고 뺨은 둥글며 붉은 입술은 작고 동그랗다. 이러한 인물 표현은 대체로 당나라 때 유행하던 화풍이다. 그러나 무덤의 구조나 사신도, 병풍, 시녀 등이 등장하지 않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벽화에 그려진 인물들의 복식을 보면 머리에 높은 상투를 틀고 복두나 말액(抹額)주57 · 투구를 썼다. 몸에는 단령포나 갑옷을 입었다. 단령포는 깃이 짧아서 목둘레선에서는 속옷이 보이지 않는다. 허리 아래에서 옆트임을 통해 속에 입은 중단(中單) · 내의(內衣) · 고(袴)주58가 드러난다. 소매에는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있고, 옷자락이 발등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다. 겉옷에는 여러 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겉옷의 색깔은 갈색 · 붉은색 · 짙푸른색 · 흰색 · 자색 등이 있다. 허리에는 가죽띠를 둘렀고 신발은 검은 가죽신이나 미투리를 신었다.

산링둔 2호묘의 널방과 널길의 벽 및 천장에도 백회를 바르고 벽화를 그렸다. 이 무덤에는 인물과 함께 꽃 그림이 그려져 있다. 인물 그림은 널방 동쪽과 서쪽 벽에 각각 4명, 북쪽 벽에 3명, 남쪽 널길 입구 좌우에 각각 1명, 널길 동 · 서쪽 벽에 각각 무사 1명씩 도합 15명이 그려져 있지만 훼손이 심하다. 널방 천장과 널길 천장에는 꽃 그림이 있다. 삼각고임한 천장에는 흰색 바탕에 노란색 꽃이 가득 그려져 있는데, 연꽃이나 모란꽃으로 보인다.

함경북도 화대군 금성리 고분에서는 사람의 다리 등이 묘사된 벽화편이, 상경성 절터에서는 꽃이나 천불도(千佛圖)가 그려진 벽화편이, 연해주 아브리코스(Abrikos) 절터에서는 번개무늬와 직물무늬가 섞인 벽화편이 출토되었다. 이 밖에 복두를 쓴 인물의 얼굴이 그려진 벼루와 새와 별모양 등이 그려진 토기편들이 발견되었다.

화가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데, 원나라 때에 편찬된 『도회보감(圖繪寶鑑)』에는 금나라 때 활동한 것으로 보이는 대간지(大簡之)가 소나무와 돌 및 작은 풍경을 잘 그렸다고 한다. 발해의 공예품으로는 조각 · 도자기 · 기와 · 벽돌 · 금속 세공품 등이 있다.

상경성 2호 절터에는 현무암으로 만든 높이 6m의 8각형 석등이 지금도 남아 있다. 상하대석에 새겨진 연꽃과 목조 건축 양식이 표현되어 있는 옥개석주59과 화사석주60은 발해 조각 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준다. 정혜공주 무덤에서 출토된 화강암으로 된 돌 사자상은 크기가 작지만 강한 힘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 조각품에 속하는 것으로는 상경성에서 출토된 귀부(龜趺)와 짐승머리가 조각된 그릇 다리 등이 있다.

발해의 그릇은 도기(陶器)와 자기(磁器)가 있다. 일반 백성들은 유약을 바르지 않은 도기를 사용하였다. 유약을 바른 도기는 주로 귀족이나 왕실에서 사용하였고, 3가지 유약을 사용하여 만든 발해 삼채가 유명하다. 허룽 베이따〔北大〕 고분군에서 발견된 삼채 도기, 허룽 스꿔〔石國〕 고분군과 룽하이〔龍海〕 고분군의 삼채 도용, 산링둔 4호묘의 삼채 향로가 대표적이다. 자기는 수량이 아주 적으며 대부분 조각 상태로 발견되었다. 상경성에서 백자완(白磁碗)과 자색관(紫色罐) 편이 발견되었고, ‘함화(咸和)’라는 발해 연호가 바닥에 먹으로 쓰인 갈색 교유(絞釉)를 바른 호리병이 발견되었다.

건축 자재로는 기와와 벽돌 · 치미 · 용면와(龍面瓦) · 기둥밑장식〔柱礎裝飾〕 등이 있다. 발해 기와에는 암키와 · 수키와 · 치미 · 용면와 · 기둥밑장식 등이 있다. 기와 가운데 유약을 바른 것은 녹유가 대부분이고, 자색 유약을 바른 것도 일부 있다.

암키와는 겉에 새끼줄 · 그물 · 마름모꼴 무늬 등이 장식되어 있고, 안쪽에는 포목 무늬가 많다. 가장자리에는 손가락으로 누른 무늬나 연주문(連珠紋) 또는 톱날 무늬가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수키와는 막새기와주61가 대표적인데, 고구려의 전통을 이은 연꽃잎 무늬가 주종을 이룬다. 연꽃잎은 대체로 양식화되어 6개가 기본을 이루었다.

치미는 상경성 · 서고성 · 연해주 아브리코스 절터 등에서, 용면와는 상경성 · 서고성 등지에서 발견되었다. 기둥밑장식은 발해 건축의 특징적인 요소로 커다란 고리 모양으로 기둥과 주춧돌이 만나는 부분을 씌워 장식하면서 비가 들이쳐 기둥이 썩는 것을 방지하였다.

발해의 금속 공예는 금 ‧ 은 ‧ 동 ‧ 철 등을 사용하여 장신구, 그릇, 무기, 사리장엄구 등을 만들었다. 창덕 3호분에서 나온 태환식 귀고리는 고구려 양식을 이었다. 룽하이 고분군 14호분에서 나온 금관 장식은 기다란 잎사귀가 세 갈래로 갈라진 모양인데, 가운데 것은 위로 곧게 솟아 있고 양쪽은 뒤로 날개를 편 듯이 구부러져 있어 고구려 조우관과 매우 닮았다.

그리고 14호분에서는 금판을 붙인 옥대(玉帶) 등이 함께 발굴되었던 13호분에서는 금팔찌와 금비녀 등이 출토되었다. 이 외에도 발해 고분에서는 팔찌, 귀걸이, 머리꽂이 등의 장식이 발견되었다. 발해의 유적에서는 금동과 청동 ‧ 철 등의 과판을 가죽에 붙여 만들었던 과대가 여러 점 출토되었는데, 지린성 허룽현 허난둔〔河南屯〕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과대가 대표적이다.

발해는 불교 국가로 돌과 소조로 불상을 많이 만들었고, 금과 은으로도 만들었다. 814년에 당나라에 갔던 발해 사신은 금과 은으로 만든 불상을 당나라에 선물하였다. 발해의 상경성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은 현재 일본 도쿄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사리장엄구의 경우 닝안현 투타이쯔〔土臺子〕 절터에서 발견된 것이 대표적이다. 이 사리장엄구는 2중의 석함과 철함 ‧ 동함 ‧ 칠갑(漆匣) ‧ 은함 ‧ 은병 ‧ 유리병 등 모두 8중의 용기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 인물상으로는 연해주 크라스키노 성터 부근의 강가에서 발견된 청동용(靑銅俑)과 상경성과 연해주 우수리스크 등에서 발견된 기마인물상 등이 있다.

음악과 무용 발해의 궁중 음악과 무용은 예제와 제사를 담당하던 의부와 태상시, 그리고 외교 사절의 접대와 빈례를 담당하던 사빈시에서 의례를 행할 때 반드시 포함되었다. 발해에서도 교방이 설치되어 전문 악사(樂師)와 무사(舞師)가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발해의 음악은 일본과의 교류에서 그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일본에 사신으로 갔던 기진몽(己珍蒙) 일행은 740년 정월에 연회에서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는데, 이것이 발해 음악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리고 777년 사례(射禮)에서 사도몽(史都蒙)주62 일행도 본국의 음악을 연주하였다. 이때 연주한 음악은 속악(俗樂)보다는 아악과 같은 관악(官樂)이거나 귀족층의 음악이었을 것이다.

발해의 음악은 일본의 왕실 법회나 궁중행사에서 연주되었는데, 749년에 도다이지〔東大寺〕에서 개최된 법회에서 연주된 기록이 처음이다. 이 무렵에 ‘ 발해악(渤海樂)’은 정식으로 일본의 궁중음악이 되었고, 발해 사신들을 접대할 때에 의례적으로 연주되었다. 외교 의례에서 발해악을 제대로 연주하기 위해 일본 조정에서는 유학생을 발해에 파견하여 직접 배워 오게 하기도 하였다.

발해 음악은 발해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의 송나라와 금나라에 이어졌는데, 송에서는 1185년에 발해 음악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리며 명맥이 끊어졌다. 금나라에는 발해교방(渤海敎坊)을 설치하여 제도적으로 발해 음악의 명맥을 이었다.

발해 악기로는 송나라 때까지 발해금(渤海琴)이 있었지만 실물은 전하지 않는다. 이 발해금에 대해서는 고구려의 거문고와 같다는 견해와 3현(弦)으로 된 악기라는 주장이 있다. 정효공주 무덤의 서쪽 벽에 그려진 3명의 악사 그림을 보면 각기 보자기에 싼 악기를 들고 있다. 외형으로 보아 박판(拍板)주63, 공후(箜篌), 비파(琵琶)로 추정된다.

무용과 관련해서는 『속일본기(續日本記)』에 발해 사신이 일본에 도착하여 영객사(領客使)의 환영을 받을 때 말에서 내려 무도(舞蹈)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송나라 진양(陳暘)이 지은 『악서(樂書)』 「호부(胡部)」에는 말갈무(靺鞨舞)라는 춤이 보이는데 발해로부터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거란의 유하관(柳河館, 현재 중국 허베이 灤平縣 紅旗鎮 부근) 근처에 살던 발해 유민들이 답추(踏鎚)라는 춤을 추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는 “세시 때마다 사람들이 모여 노래를 부르며 논다. 먼저 노래와 춤을 잘 하는 사람을 여러 명 앞에 내세우고 그 뒤를 남녀가 따르면서 서로 화답해 노래 부르며 빙빙 돌고 구르는데 이를 답추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발해에서 백성들 사이에 춤추고 노래 부르는 일종의 집단 무용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마침 2008년에 러시아 연해주의 콕샤로프카-1 성터에서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치마를 입은 여인들이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이 장식된 발해시기의 토기가 발견되었다. 마치 강강술래를 연상하게 하는데, 발해의 집단 무용의 하나로 보인다.

건축 문화 발해의 건축은 성 ‧ 건물 ‧ 사찰 등이 있다. 성터에 대한 체계적인 조사는 1933년과 1934년에 일본 동아고고학회(東亞考古學會)가 동경성(東京城: 지금의 상경성)을 발굴한 것이 최초이다. 그 뒤 많은 성터들이 확인되었다. 성을 쌓는 재료로 볼 때에 토성(土城), 석성(石城), 토석 혼축성(土石混築城)이 있다. 평지성은 토성과 혼축토성이 많고, 산성은 석성과 혼축토성이 많다. 평면은 긴네모모양〔長方形〕 · 네모모양〔方形〕 · 부정형 등이 있다. 장성의 형태를 이룬 것으로는 무단장변장〔牡丹江邊墻〕이 대표적이다.

발해는 전국을 부(경)-주-현으로 설정하여 통치하였다. 주요 관청의 소재지에는 성을 쌓아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도성터로는 상경성(上京城), 서경 서고성, 동경 팔련성(八連城)이 있다. 남경은 함경남도 북청(北靑)의 청해토성(靑海土城)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서경은 닌장〔臨江〕 지역이 유력하나 성의 흔적은 불명확하다.

지린성 둔화에 있는 청산쯔산성은 대조영이 처음 성을 쌓고 나라를 세웠던 동모산으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 학계에서 투먼〔圖們〕 모판춘〔磨盤村〕 산성을 동모산으로 보는 설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부성으로는 수미성〔蘇密城〕이 장령부의 소재지로, 따청쯔고성〔大城子古城〕이 솔빈부의 소재지 등으로 꼽히고 있다. 크라스키노(Kraskino)성 · 원터허부성〔溫特赫部城〕 · 난청쯔고성〔南城子古城〕 · 난후터우고성〔南湖頭古城〕 등은 주급 성으로 추정된다.

발해 성의 변화 과정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청산쯔산성처럼 방어 기능을 중요시하여 산성에 의지하다가 8세기 중반 이후 국내외 안정을 기반으로 평지성을 쌓으며, 고구려와 같이 산성과 평지성이 세트를 이루는 방어 체계를 갖춘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한편 초기에는 환런〔桓仁〕 오녀산성이나 지안〔集安〕 환도산성에서 볼 수 있는 듯이 고구려 성의 전통을 계승하였지만, 이후 당나라 문화를 수용하며 장안성(長安城)을 모방한 평지성 중심의 방어 체계로 전환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발해시대의 건물로는 궁전이나 관청터 등이 발굴되었다. 궁전과 관청 자리는 상경성과 서고성 ‧ 팔련성에서 조사된 것이 대표적이다. 도시 계획에 의해 공간을 구획하고 건물을 배치하였다. 상경성 궁전은 5개의 건물이 일직선상에 놓여 있고, 각 건물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왕이 거처하던 건물지에서 온돌이 발굴되었는데, 고구려식 온돌을 발전시킨 형태이다.

궁성의 동쪽 구역에는 어화원(御花園)으로 불리는 후원이 있는데, 인공으로 만든 못과 산이 있고 정자 터도 확인되어 발해의 정원 건축을 엿볼 수 있다. 상경성 북쪽 인근의 무단강〔牧丹江〕에는 발해 때 만들어진 오공교(五孔橋), 칠공교(七孔橋)로 불리는 교량 유적이 남아 있다.

왕실과 귀족들의 주거지 및 사찰의 전각은 흙이나 돌로 올린 기단에 주춧돌을 놓고 굵은 나무 기둥을 세워 기와를 얹었다. 이러한 건축물은 기초 부분과 건축 자재를 제외하고 남아 있는 것이 없어, 외형을 정확히 알 수 없다.

1987년 연해주 하산지구의 비짜지만에서 발견된 불판(佛板)에 불상이 안치된 건물과 상경성 절터의 석등 상부에 조각된 건물의 형태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초석 등을 통해 볼 때 대체로 기와를 얹은 건물은 맞배지붕 ‧ 우진각지붕 ‧ 팔작지붕이 기본을 이루고, 상경성의 팔보유리정과 같은 누각식 건물은 사각 ‧ 육각 ‧ 팔각 지붕을 이루었다. 건물 축조에 사용되었던 기와와 벽돌은 도성과 지방 행정성 주변의 가마터에서 구웠는데, 상경성 부근의 싱산〔杏山〕과 크라스키노 성에서 발굴된 것이 대표적이다.

평민들의 주거지는 반지하식 건물이 많이 보이는데 둥닝〔東寧〕 단결(團結)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화덕자리나 온돌 장치가 딸린 반지하식 주거지도 많이 확인되고 있어 발해는 상류층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온돌을 많이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절과 탑 자리도 많이 확인되었다. 발해의 교통로를 따라서는 24개의 주춧돌이 남은 건축 유적 10여 곳이 발견되었다. 건물의 성격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대체로 역참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24개돌 유적을 요나라나 금나라 때의 것으로 보는 시각이 늘고 있다.

매장 문화 발해 무덤은 초기 수도인 구국(舊國)이 있었던 지린성 둔화를 비롯하여 상경 ‧ 중경 ‧ 동경 ‧ 남경 일대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 및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수천 기가 발견되었다. 둔화에 있는 리우딩산 고분군에서는 160여 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이 가운데 1949년 정혜공주 무덤이 발견되면서 발해 초기 왕실과 귀족들이 묻힌 고분군으로 밝혀졌다.

중경 지역인 허룽 룽터우산 고분군은 제일 남쪽의 스꿔〔石國〕 고분군, 중간의 룽하이 고분군, 북쪽의 룽후〔龍湖〕 고분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룽하이 고분군에서 1980년 정효공주 무덤이 발견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 15기를 추가 발굴하면서 문왕과 간왕의 황후인 효의황후주64와 순목황후주65의 무덤이 발견되었다. 인근의 베이따〔北大〕 고분군에서는 약 70기 정도가 발굴되었고, 서고성 남쪽에서는 왕릉급인 허난둔 고분이 발굴되었다.

상경성 부근에서는 왕실 무덤인 산링둔〔三陵屯〕 고분군이 발굴되었다. 벽을 돌려서 왈(曰)자 모양의 능역을 조성한 것이 특징이다. 남쪽은 제사구역이고 북쪽은 무덤구역인데, 이 능역에서는 3기가 발굴되었고, 부근에서 1기가 더 발굴되었다. 2호묘에서는 정효공주묘의 벽화와 비슷한 벽화가 발견되었으며, 4호묘에서는 발해의 특징적인 삼채 향로가 발굴되었다.

상경성 서북쪽에 있는 훙준어장〔虹鱒魚場〕 고분군에서는 1990년대에 고분 323기, 방단(方壇)주66 7기, 집터 1기를 발굴하고, 유물 1,800여 점을 수습하였다. 무덤은 돌무덤〔석축표(石築墓)〕, 전돌무덤〔전축묘(塼築墓)〕, 돌전돌혼축무덤〔석전혼축묘(石塼混築墓)〕 3가지 유형이 있다. 영안 따주둔〔大朱屯〕 고분군 역시 규모가 큰데 약 20여 기만이 발굴되었다.

북한 함경도 일대에는 회령 궁심고분군, 청진 부거리 일대의 고분군(다래골, 연차골, 합전, 옥생동, 토성 등), 화대 금성리 고분군 등이 있는데, 금성리 고분에서는 벽화 일부가 발견되었다. 근래에는 청진 부거리 고분군과 북청 ‧ 회령 일대의 발해 고분을 발굴하여 국내에서 보고서를 출간하였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도 발해 무덤이 발견되었는데, 2000년대에 들어 체르냐티노(Cherniatino) 5 고분군에서 159기를 발굴한 것이 가장 큰 성과이다. 움무덤이 대부분이지만 돌방무덤〔석실묘(石室墓)〕, 돌깐무덤〔부석묘(敷石墓)〕, 돌돌림무덤〔위석묘(圍石墓)〕, 무시설 무덤 등 다양한 고분 양식이 확인되었다. 매장법에서도 매장, 화장, 굴지장(屈肢葬), 단인장(單人葬), 다인장(多人葬), 1차장, 2차장 등 여러 모습이 보인다. 이 고분군은 지방 사회에 발해의 중앙 매장 문화가 침투되어 들어가는 모습을 추적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발해 고분에는 흙무덤, 돌무덤, 벽돌무덤 등이 있다. 흙무덤은 건국 이전부터 유행하였던 양식이다. 돌무덤은 다시 돌방무덤, 돌덧널무덤〔석곽묘(石槨墓)〕,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으로 나뉜다. 이 중 돌방흙무지무덤〔석실봉토묘(石室封土墓)〕이 최상층의 무덤이다.

돌을 이용하여 무덤을 쌓는 방식은 기본적으로 고구려에서 영향을 받았다. 특히 돌방흙무지무덤은 고구려 후기의 양식을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인데, 정혜공주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벽돌무덤은 당나라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정효공주의 무덤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산링둔 고분군의 고분은 돌을 벽돌처럼 깎아서 축조하였다.

매장 방식으로 단인장 · 2인 합장 · 다인 합장이 모두 보인다. 2인 합장은 부부 매장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인 합장은 발해 매장 습속의 특색을 이루는데, 주인공과 배장자가 뚜렷하게 구별된 예도 있다. 배장자는 적게는 1인에서 많게는 14인에 이른다. 1차장과 2차장이 모두 있으며, 한 무덤에서 2가지가 혼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 2차장된 사람 뼈는 대체로 추가장에 의한 것이다. 1차장의 경우에는 널을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지만, 널 없이 직접 묻은 예도 보인다. 발해 초기에는 리우딩산 고분군에서처럼 화장이 유행하였는데, 시신을 널에 넣은 채 무덤 안에서 불에 태웠다.

이 밖에 리우딩 고분군에서는 사람 뼈와 함께 동물 뼈도 출토되었다. 동물 뼈로는 말, 소, 개의 뼈들이 있다. 무덤 위에 건물을 짓던 풍습도 있었다. 산링둔 고분과 허난둔 고분, 룽하이 고분군에서는 흙무지 위에 주춧돌이 남아 있는 무덤도 발견되었다. 리우딩산 고분군과 룽터우산 고분군에서는 흙무지에서 기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이러한 묘상 건축물 전통은 불교가 성행하면서 탑으로 변하였다.

발해사 연구동향 발해는 전성기에 사방 5,000리에 달하는 영토를 가졌다. 서쪽으로는 요하까지, 북쪽으로는 쑹화강과 헤이룽강까지 이르는 지역을 아울렀고, 동쪽으로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을, 남쪽으로는 대략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선에서 신라와 접하였다. 오늘날 국가로 따진다면 한국, 중국, 러시아에 걸쳐 있었던 나라이다. 따라서 이 3국에서 발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며, 발해 당시 교류가 빈번하였던 일본에서도 상당한 연구가 이뤄졌다.

한국 한국의 발해사 연구는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당시 발해사에 대한 관심은 영토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연구는 자연히 지리 고증에 집중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약용 · 한치윤 · 한진서 등이다. 그리고 유득공의 『 발해고(渤海考)』를 통해 발해를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으로 부르며, 한국사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하게 되었다.

한국에서의 실증적 연구는 19세기 중반부터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실증적인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지만, 박은식 · 신채호 · 장도빈 · 권덕규 · 황의돈 등에 의해 발해를 한국사로 이해하는 역사 인식이 발전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분단으로 남북한에서 발해사 연구가 별도로 진행되었다.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동양사 연구자인 이용범이 고구려 계루부와 발해 왕실의 연결 가능성과 발해의 사회 구성 ‧ 유민사 등을 연구하였다. 1970년대에는 이우성의 「남북국시대와 최치원」이란 글이 남북국시대론에 대한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송기호 · 한규철 · 노태돈 등이 발해사 연구에 참여하였고, 1990년대에는 한규철을 시작으로 송기호 · 임상선 등의 박사논문이 나오며 점차 연구진과 연구 주제가 확대되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역사학에서 박진숙 · 김은국 · 김동우 · 김종복 · 이효형 · 김진광 · 권은주 등의 박사논문이 나왔다. 이 밖에 신라사나 일본사 연구자를 비롯하여 역사 교육 ‧ 건축 ‧ 복식 ‧ 고고학 분야에서 조이옥 · 구난희 · 윤재운 · 이병건 · 전현실 · 정석배 등 많은 연구자들이 발해사 연구에 참여하였다.

연구 주제는 대조영의 출자와 건국 주체, 주민 ‧ 사회 구성, 지리 ‧ 강역 ‧ 교통, 문화 성격, 발해 인식의 변천, 역사 귀속, 정치 제도, 대외 관계(신라 ‧ 일본 ‧ 당 ‧ 거란 ‧ 말갈 ‧ 북방 민족), 부흥 운동과 유민, 유적과 유물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문헌학보다는 고고학 분야의 신진 연구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에서는 1962년에 박시형이 「발해사 연구를 위하여」라는 논문에서 발해가 모든 면에서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명제를 제시한 것이 본격적인 연구이다. 문헌에 기초를 둔 그의 주장은 주영헌이 고고학적으로 뒷받침함으로써 더욱 강화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 문헌사와 고고학 두 방면에서 연구의 기본 틀이 마련되었다.

이후 북한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한동안 침체를 보이다가 1980년대 후반에 다시 활기를 띠며 연구자가 늘었다. 문헌학자로 장국종 · 손영종 · 현명호 · 채태형 · 김혁철 등이 있고, 고고학자로 김종혁 · 리준걸 · 김지철 등이 대표적이다. 1980년대에는 주체사상이 유일사상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연구 주제가 고구려의 계승성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한편 함경도에서 발해 유적들이 연이어 확인된 것이 큰 성과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는 『발해사1~7-성립과 주민, 정치, 경제, 문화, 역사지리』, 『조선단대사(발해사)』, 『발해사문답』, 『발해정치사연구』, 『발해의 대외관계연구』, 『력사이야기: 발해 및 후기신라편』, 『동해안 일대의 발해유적에 관한 연구』, 『발해교통운송사』, 『대조영과 발해국』 등의 책이 출판되었고, 논문의 수도 많아졌다. 문헌학 분야에서는 김성호 · 림호성 · 전동철 · 리진국 · 리춘민 등이 있고, 고고학 분야에는 김창호 · 김남일 · 김대영 · 리창진 · 최춘혁 · 장철만 · 김인철 등의 연구가 확인된다.

중국 중국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세기에 조정걸(曹廷杰) · 경방창(景方昶) 등이 역사 지리를 고증하면서 단초를 열었고, 20세기 초 탕옌〔唐宴〕 · 황우이한〔黃維翰〕 · 진위푸〔金毓黻〕에 의해 한층 발전하였다. 특히 진위푸의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篇)』은 중국 ‧ 한국 ‧ 일본의 발해사 관련 기록을 망라하여 체계적으로 정리 ‧ 고증하였으며, 지금까지도 중국의 발해사 연구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중국에서 발해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계기는 일본과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이 본격화되면서이다. 동북 3성(만주) 지역이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였음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발해가 중국의 변강사라는 인식을 확립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발해사를 한국사와 명확히 구분하지는 않았다.

현대에 들어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1949년 둔화 리우딩산 고분군에서 정혜공주의 묘가 발굴되면서 발해사 연구에 새로운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에는 북한과 연합하여 리우딩산 고분군과 발해 상경성 유적에 대해 공동으로 발굴하였고, 헤이룽장성〔黑龍江城〕에서는 무단강〔牧丹江〕 일대의 발해 유적을 조사하였다.

이후 문화 대혁명주67으로 중국에서 발해사 연구가 중단된 사이에 북한이 일방적으로 공동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발해를 한국사이자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 강조한 것이 중국에 알려지게 된다. 중국은 문화 대혁명이 끝난 뒤 발해사를 비롯한 동북 변강 연구를 본격화하였고, 1983년 중국사회과학원 산하에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研究中心: 현재 중국변강연구소)을 설립하여 발해사를 주요 연구 사업에 포함시켰다. 이 무렵에도 중국 측은 발해가 말갈족이 주체가 된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한중 수교로 남한의 발해사 연구가 중국 학계에 알려지면서 중국에는 적지 않은 발해사 연구가 쏟아졌다. 이후 ‘ 동북공정(2002~2007)’을 거치며 중국 측은 발해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주장을 전개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년 10편 내외의 석박사 학위논문을 포함하여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100여 편에 가까운 관련 연구가 나왔다.

대표적인 발해사 연구자로는 쑨슈런〔孫秀仁〕 · 왕청궈〔王成國〕 · 리우전화〔劉振華〕 · 왕청리〔王承禮〕 · 웨이궈중〔魏國忠〕 · 주궈천〔朱國忱〕 · 쑨위량〔孫玉良〕 · 웨이춘청〔魏存成〕 · 쑨진지〔孫進己〕 · 류샤오동〔劉曉東〕 · 양위수〔杨雨舒〕 · 판언스〔范恩实〕 · 량위뚜어〔梁玉多〕 · 마이홍〔马一虹〕 등이 있고, 조선족 학자로는 방학봉 · 정영진 · 김태순 · 김향 · 이동휘 · 윤현철 · 정경일 · 강성산 등이 있다.

발해사 연구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굴된 주요 유적으로는 발해 상경성 유적 ‧ 동경 팔련성 유적 ‧ 중경 서고성 유적, 리우딩산 고분군 ‧ 롱터우산 고분군 ‧ 싼링둔 고분군 ‧ 훙준어장〔虹鱒漁場〕 고분군 ‧ 허난둔〔河南屯〕 고분 ‧ 따주둔〔大朱屯〕 고분군 ‧ 베이다〔北大〕 고분군 등이 있다. 최근 발굴 유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곳은 투먼〔圖們〕 모판춘〔磨盤村〕 산성으로, 중국 학계에서 이곳을 발해 건국지인 동모산으로 보는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

일본 일본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발해의 영토를 점유하고 있는 한국이나 중국 ‧ 러시아에 못지않게 많이 이루어졌다. 차이점은 한국 등 3국은 자국사의 입장에서 발해를 연구한다면, 일본은 대외 관계사의 측면에서 주로 연구한다.

일본의 발해사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는 19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정치적으로 정한론(征韓論)주68과 연결되어 그 연장선상에서 관심을 기울였다. 20세기 전반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과 연계하여 지리 고증과 고고 조사를 중심으로 진행하였고, 만선사(滿鮮史)주69 연구의 일환을 이루었다.

고고학 성과로서 닝안 동경성(東京城, 상경성), 허롱 서고성, 훈춘 반랍성(半拉城, 팔련성) 등을 조사하여 발해의 5경(京) 중 수도였던 3경 지역을 처음으로 확정하였다. 이 시기에는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미카미 츠기오〔三上次男〕, 고마이 가즈치카〔駒井和愛〕, 사이토 유우〔齋藤優〕, 와다 세이〔和田淸〕,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 등과 같은 연구자들이 주축을 이루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1960년대까지는 기존 연구자들이 일제시기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발해사를 연구하였고, 히노 가이자부로〔日野開三郞〕, 니이즈마 토시히사〔新妻利久〕 등이 새로 합류하였다. 1970년대에는 전후 세대로 구성된 연구자들이 등장하였고, 1980~1990년대를 거치며 연구진이 확대되었다.

냉전시기에는 중국과의 학술 교류가 제한되어 문헌사 연구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일본사 전공자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사를 연구하면서 발해와의 대외 교류 연구가 주를 이루었다. 동양사 내지 한국사 그리고 고고학 연구자들의 참여가 늘면서, 발해의 정치 제도 · 사회 구조 · 수령제 ‧ 국서(國書) 및 중대성첩(中臺省牒), 발해의 고구려 계승 의식 등 연구 주제가 다양해졌다.

관련 연구자로는 이시이 마사토시〔石井正敏〕 ‧ 스즈키 야스타미〔鈴木靖民〕 ‧ 사카요리 마사시〔酒寄雅志〕 ‧ 가네코 슈이치〔金子修一〕 ‧ 오오스미 아키히루〔大隅晃弘〕 ‧ 후루하타 도루〔古畑徹〕 ‧ 가와카미 히로시〔河上洋〕 ‧ 이성시(李成市) ‧ 하마다 코사쿠〔濱田耕策〕 ‧ 고지마 요시타카〔小嶋芳孝〕 ‧ 니시가와 히로시〔西川宏〕 등이 있다. 2000년대 이후 신진 학자로는 아카바메 마사요시〔赤羽目匡由〕 ‧ 하마다 쿠미코〔浜田久美子〕 등이 있다.

러시아 러시아에서 연해주와 발해에 대한 개략적 이해는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비추린(N. Ia. Bichurin) 등과 같은 중국학 학자들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1860년 베이징 조약주70으로 우수리강주71 동쪽 연해주 지역이 러시아 영토로 편입되면서 발해 유적 조사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188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아무르 변구(邊區) 연구회(OIAK)’가 창립되어 발해를 연해주 중세의 첫 시기로 설정하고, 발해 유적을 포함한 연해주 지역의 유적 조사가 이뤄졌다. 그 밖에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지질 조사가, 러시아 정교회주72 선교사, 군사 측량가, 고고 탐험가, 신문 기자 등에 의해 발해 유적이 조사되었다. 1929년에는 국립극동대학교 교수였던 마트베예프(Z. N. Matveyev)가 『발해』를 출간하였다.

러시아에서 발해사 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 주로 고고학자들이 많으며, 문헌학 연구자는 소수이다. 1953년 소련과학원(현재 러시아과학원) 고고학연구소에서 극동고고학조사단이 조직되었고, 이듬해 블라디보스토크에 소련과학원 극동지소 역사학고고학민속학연구소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조사단 단장인 저명한 고고학자 오클라드니코프(A. P. Okladnikov)와 그의 제자인 샤프쿠노프(E. V. Shavkunov)가 발해사 연구를 주도하였다.

1958년 코프이토(Kopyto) 절터를 발굴하면서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하였고, 아크리코스 발해 무덤과 절터 발굴, 크라스키노성 답사 등이 이루어졌다. 1959년 오클라드니코프의 『연해주의 먼 과거-연해주의 고대사 및 중세사 개관』에서는 연해주 통사의 일부로 발해사가 처음 정리되었고, 1968년 샤프쿠노프의 『발해국과 연해주의 발해 문화 유적』에서는 최초로 발해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는 금나라 유적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상대적으로 발해사 연구가 부진해졌다.

러시아에서의 발해사 연구는 1970년대부터 새로운 연구자들이 참여하면서 활기를 띄었다. 그리고 1990년 한러 수교와 1992년 블라디보스토크 개방으로 한러 학술 교류가 가능해지며, 1993년부터 연해주 지역 발해 유적에 대해 한국학자들과 공동 조사 ‧ 발굴이 활성화되었다. 공동 발굴 유적으로는 마리야노프카(Mar'ianovka) 성터 ‧ 크라스키노(Kraskino) 성터 ‧ 콕샤로프카(Koksharovka) 성터와 코르사코프카(Korsakovka) 절터 ‧ 체르냐티노(Cherniatino) 고분군 및 주거지 등이 대표적이다.

발해 고고학과 문헌학 연구자로는 셰메니첸코(L. Ye. Semenichenko), 볼딘(V. I. Boldin), 렌코프(V. D. Lenkov), 이블리예프(A. L. Ivliev), 크라딘(N. N. Kradin), 니키틴(Yu. G. Nikitin), 겔만(E. I. Gelman), 디야코바(O. V. D’iakova), 크루퍈코(A. A. Krupyanko) 등이 있다.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徐族)=여족(餘族)=여족(余族) =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한국의 서씨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서성현(徐城縣)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生時正偃,故以爲名。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宮人聞之,更取養之。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及長,襲爲徐君。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으로 변했다. 鵠蒼或名後蒼。」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서국의 쇠퇴와 멸망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중국기록에서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약 1,000년 동안 북만주에서 부여국을 세워 활동한 예맥족의 종족. 철기를 사용하고 영고(迎鼓)라는 제천 의식을 행하였으며 순장과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2. 우가: 소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3. 구가: 개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4. 저가: 돼지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 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

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

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현

여울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

부여기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부여왕 계보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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