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부여씨)
백제 (百濟)
삼국(三國)의 하나로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
백제는 삼국의 하나로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이다. 서기전 18년에 부여족 계통인 온조 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한인·예인 등의 토착민을 부여족이 지배하는 형식이었다. 건국 후 고구려·신라와 동맹과 공방을 되풀이하면서 영역을 영산강·섬진강 유역까지 확장하여 강력한 국가로 성장했다.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문화권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으나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에 의해 멸망했다.
부여족 온조 溫祚 하북위례성 河北慰禮城 십제 十濟
정의
삼국(三國)의 하나로서 한반도 중서부에 위치했으며 660년에 멸망한 고대국가.
백제(百濟)는 서기전 18년에 부여족(扶餘族) 계통인 온조(溫祚)집단에 의해 현재의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건국되었다. 4세기 중반에는 북으로 황해도에서부터 경기도 · 충청도 · 전라도 일대를 영역으로 하여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660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해 멸망하였다. 이후 3년 간 치열한 부흥운동(復興運動)을 전개하였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말았다. 678년 동안 존속한 백제 역사의 전개과정을 수도 변천을 중심으로 보면 한성도읍기(漢城都邑期: 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熊津都邑期: 475∼538), 사비도읍기(泗沘都邑期: 538∼660)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백제를 구성한 주민들의 계통을 보면 선주토착민은 한인(韓人)이었고, 여기에 예인(濊人)들이 섞였다. 한성도읍기에 지배층은 부여족 계통이 주류를 이루었다. 4세기 이후 삼국 간의 접촉과 중국 및 왜(倭)와의 접촉이 본격화되면서 신라인 · 고구려인 · 왜인 · 중국계통의 사람들도 지배세력으로 흡수되기도 하였다.
백제는 세 차례 천도를 하면서 개성있는 문화를 형성하였다. 한성시대에는 서울시 석촌동에 있는 대규모의 적석총(積石塚)에서 보듯이 고구려적인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 그러나 웅진 및 사비로 천도하면서 중국의 남조문화(南朝文化)를 받아들여 세련되고 우아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또 지정학적인 이점을 최대한 이용해 중국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 이를 백제화하고, 다시 왜나 가야(加耶)에 전수해 고대 동아시아 공유(共有)문화권을 형성하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역사
건국과 성장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백제는 기원전 18년에 온조집단이 고구려에서 남하해 내려와 한강 유역의 위례성(慰禮城)에 자리를 잡고 나라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 과정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기본사료인 『삼국사기』백제본기(百濟本紀)의 초기 기록과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한전(韓傳)」의 내용이 상충하는 점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가져야 한다. 영역과 관련하여 『삼국지』 동이전에는 3세기 중엽 무렵까지 경기 · 충청 · 전라도 지역에 마한(馬韓) 54국이 자리하고 있었으며 백제는 그 중의 하나인 백제국(伯濟國)으로 나온다. 반면에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서기전 1세기 초에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전라북도 고부(古阜)까지 영역으로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지배체제와 관련하여 동이전에는 국의 지배자인 국읍(國邑) 주수(主帥)가 읍락(邑落)의 거수(渠帥)들을 잘 제어하지 못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반면에 백제본기에서는 3세기 중엽 경에 이미 6 좌평(佐平) · 16관등제(官等制)라고 하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다.
이처럼 두 사서가 보여주는 백제의 모습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어느 자료를 택하느냐에 따라 백제의 건국 · 성장 과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차이가 생긴다. 그래서 초기기록을 신뢰하는 입장과 동이전의 내용을 강조하는 입장 등이 나왔다. 여기서는 3세기까지 백제국은 마한연맹체의 일원이었다는 동이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고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에 보이는 영역 확대 기사는 후대의 것이 부회(附會)된 것으로 보는 절충론(折衷論)의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건국설화(建國說話)가 실려 있다. 온조 중심의 설화에 의하면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朱蒙)과 졸본왕녀(卒本王女)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瑠璃)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가 되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해 위례(慰禮)에 정착하여 나라를 세웠고,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했다고 한다.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 의하면 비류는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改嫁)해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리를 이끌고 남으로 내려와 미추홀(彌鄒忽)에 정착했다고 한다.
건국설화에 의할 때 백제를 건국한 주체집단은 부여족 계통의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온조집단은 처음에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십제(十濟)’라고 하였다. 이후 십제는 미추홀(현 인천광역시 일대)의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했다.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고 하는 시조 형제설화(兄弟說話)는 두 집단이 연맹을 형성한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 형제설화에서 비류가 형으로 나오는 것은 연맹 초기에 비류계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든 무리들이 온조에게 귀부했다는 것은 그 후 어느 시기에 온조계가 연맹장의 지위를 차지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시기는 초고왕(肖古王)이다. 초고왕은 정치의 중심지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옮기고 국호를 ‘백제’로 개칭하였다.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백제의 성장에는 청동기시대 이래 발달한 한강유역의 청동기 및 초기철기문화(初期鐵器文化) 기반과 이 토대 위에서 이루어진 농업생산력의 증대 및 내륙 지방은 물론 서해안과 잘 통할 수 있는 이점을 지닌 한강의 지정학적인 조건 등이 작용하였다. 이후 백제의 성장은 크게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연맹 내의 세력들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지배력 강화는 우보(右輔) · 좌보(左輔)와 같은 직에 지역 세력들을 임명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다른 하나는 외부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영역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외부 세력은 백제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중국 군현(郡縣)과 약탈적인 침략을 해오는 말갈(靺鞨)로 표현되는 예(濊)세력이었다. 백제는 이들과 공방을 치루면서 성장해 나갔다.
3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에서는 큰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246년에 진한(辰韓)의 8국을 분할하는 문제로 마한과 낙랑 · 대방군(樂浪 · 帶方郡)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마한은 대방태수(帶方太守)를 전사시키는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패배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목지국(目支國)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는 목지국을 제압하고 새로이 마한의 맹주국이 되었다. 그 시기가 고이왕(古爾王)대이다. 고이왕은 주변 세력들을 아울러 북으로는 예성강(禮成江), 동으로는 춘천(春川), 남으로는 안성(安城) · 성환(成歡), 서로는 서해에 이르는 지역을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좌장(左將)을 설치해 병마권(兵馬權)을 장악하고, 좌평을 설치하여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한 단계 격상시켰으며, 금령(禁令)을 선포하고 솔계(率系) 관등과 덕계(德系) 관등을 토대로 하는 관제를 만들어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국가로서의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한성시대
3세기말 4세기 초에 중국의 서진(西晉)은 ‘8왕의 난(291∼306)’이라고 하는 왕족들 사이의 반란과 만리장성 이북의 유목민[오호(五胡)]의 침입 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로 말미암아 한반도에 위치한 낙랑군과 대방군은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었다. 이에 백제는 낙랑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기도 하였지만 책계왕(責稽王)과 분서왕(汾西王)이 낙랑 세력에 의해 피살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책계왕과 분서왕의 피살을 계기로 초고왕계인 비류왕(比流王)이 왕위에 올랐다.
비류왕은 김제에 대규모의 벽골제(碧骨堤)를 축조하는 등 수리시설을 확충시켜 농업경제력의 기반을 확대하였고, 활쏘기 연습을 장려하는 등 군사력을 강화하였으며, 서제 우복(優福: 扶餘優福)의 반란을 평정한 후에는 진씨(眞氏) 세력과 결합해 정치적 기반도 안정시켰다. 이 토대 위에서 근초고왕(近肖古王)이 즉위하여 초고왕계(肖古王系)의 왕위계승권을 확립하였다. 즉위 후 근초고왕은 진씨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여 아신왕(阿莘王)대까지 진씨 왕비족시대를 열었으며, 귀족세력들의 상하 서열을 분명히 하기 위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그리고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영역을 행정구역으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이를 담로제(擔魯制)라 한다. 담로제의 실시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는 직접지배로 바뀌었다. 또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를 신성화시키고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이렇게 다져진 기반 위에서 근초고왕은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49년(수정연대 369)조에 의하면 왜가 비자벌(比子伐: 경남 창녕) · 남가라(南加羅: 경남 김해) · 안라(安羅: 경남 함안) · 가라(加羅: 경북 고령))등 가야 7국을 평정한 뒤 군대를 돌려 고해진(古奚津: 전남 강진)에 이르고 남만(南蠻) 침미다례(忱彌多禮: 新彌國)를 정벌하고 비리(比利) · 벽중(辟中) · 포미지(布彌支) · 반고(伴古) 등 4읍의 항복을 받아 백제에 준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왜가 백제에 땅을 주었다는 것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왜곡과 윤색이 분명하다. 이 기사의 역사적 실상은 근초고왕이 가야지역으로 진출해 왜와의 교역로를 확보했다는 것과 전라도 지역에 잔존하고 있던 마한의 잔여세력을 정복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백제는 남으로 영산강(榮山江) 유역까지를 영역으로 편입했던 것이다. 영산강 유역을 장악한 근초고왕은 남진해 내려오는 고구려세력과 대결하였다. 특히 371년(근초고왕 26)의 평양성전투(平壤城戰鬪)에서 고국원왕(故國原王)을 전사시키는 승리를 거두어 수곡성(水谷城: 황해도 신계)까지 영역으로 하였다.
백제 초기의 대중관계(對中關係)는 낙랑 · 대방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근초고왕이 동진(東晋)에 사신을 파견하고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의 작호(爵號)를 받음으로써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이 시기의 조공(朝貢)은 한반도 내에서의 역학관계를 중국과 연결함으로써 세력균형을 유지하려던 외교행위였다. 백제의 중국에 대한 외교는 지리관계상 주로 남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북조(北朝)와의 교섭도 추구하였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삼국사기』에는 우호적이고 상호 원조하는 형태로 나온다. 이는 일본열도로 이주한 백제계 사람들이 왜정권(倭政權)의 핵심에 자리한 것과도 일정한 연관이 있다. 백제와 왜와의 관계는 근초고왕대에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시의 양국관계는 칠지도(七支刀)에 새져진 금상감명문에서 엿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백제는 왜왕을 후왕(侯王)으로 대우하였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백제는 왜에 학술 · 기술 등 선진문물을 제공하였고, 그 대신 왜는 백제에 군사적 지원을 하였다. 백제가 왜에 박사 왕인(王仁)을 파견하여 『천자문(千字文)』과 『논어(論語)』를 보내준 것은 전자의 사례가 되며, 「광개토왕비문(廣開土王碑文)」에 왜군이 백제를 도와 고구려. 신라군과 싸운 것은 후자의 예가 된다.
침류왕(枕流王)대에 와서 백제는 동진으로부터 온 인도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를 예로써 맞이하면서 불교를 공인하였다. 불교 공인을 통해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확립해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되었다. 침류왕이 죽은 뒤, 동생 진사(辰斯)는 조카 아신(阿莘)의 왕위를 찬탈했다. 그러나 7년 뒤 아신은 숙부 진사왕(辰斯王)을 쫓아내고 왕위에 올랐다. 왕족 사이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의 배후에는 왕비족으로서의 진씨 세력의 힘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진씨 세력은 군권(軍權)을 장악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것이다.
이 시기 백제는 고구려와의 공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에 와서 고구려 광개토왕은 적극적인 정복 정책을 추진하였다. 특히 신라를 자국 편으로 끌어들인 뒤 백제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백제는 58성(城) 700촌(村)을 점령당하고, 왕제(王弟)와 대신(大臣) 10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궁지에 몰렸다. 한반도에서의 세력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 아신왕은 태자 전지(腆支)를 왜에 파견해 원군을 요청하였다. 또 고구려에게 빼앗긴 북방의 요충지인 관미성(關彌城)을 탈환하려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신왕이 죽은 뒤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지배세력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다. 이 과정에서 태자 전지를 지지한 해씨(解氏) 세력이 왕제 혈례(碟禮)를 지지한 진씨 세력을 누르고 전지왕(腆支王)을 옹립하였다. 해씨세력은 진씨를 대신하여 왕비를 배출하였다. 이로써 실권(實權)세력은 진씨에서 해씨로 교체되었다. 실권을 장악한 해씨 세력은 상좌평(上佐平)을 설치하여 군국정사(軍國政事)를 맡게 하는 등 실권귀족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 실권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은 구이신왕(久爾辛王)대와 비유왕(毗有王)대에도 지속되었다. 이로써 왕권은 매우 미약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왕이 정복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평양천도를 추진하였다. 이 기간 동안 장수왕은 대외 정복활동을 자제하였지만 427년에 천도를 단행한 후 남진을 재개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은 백제와 신라에 큰 압박으로 작용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는 신라에 우호관계를 요청하여 비유왕 7년(433)에 동맹이 맺어졌다. 이 동맹은 백제가 주도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제라동맹(濟羅同盟)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동맹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해 공동으로 방어하는 공수동맹(共守同盟)의 성격의 것이었다. 나아가 비유왕은 송(宋)에 사신을 보내 역림, 식점과 더불어 요노(腰弩)를 요청하여 받았다. 요노라고 하는 신무기의 도입으로 백제 무기체계를 새롭게 정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비유왕은 흑룡(黑龍)이 사라진 후 죽었다는 기사와 무덤도 제대로 조영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 상징해 주듯이 비명에 사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즉위한 개로왕(蓋鹵王)은 후반에 와서 실권귀족중심체제를 극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개로왕은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했으며,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왕권전제화정책(王權專制化政策)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쳤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의 토목공사는 국가 재정을 탕진하게 하였고 밖으로는 북위가 군사원조를 거부함으로써 제대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고구려는 475년에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 공격을 단행하였다. 장수왕이 친히 거느린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한 채 왕도(王都)는 함락되고, 개로왕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백제는 웅진천도(熊津遷都)라고 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웅진시대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함락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미 개로왕은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劦滿致) · 조미걸취(祖彌桀取)의 보필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였다. 웅진으로 천도를 하게 된 데는 웅진 지역에 기반을 둔 백씨(白氏)세력의 도움이 컸다. 금동관, 금동신발, 장식대도, 중국제 청자가 다수 출토된 공주수촌리고분군은 백씨 세력의 위상을 잘 보여준다.
천도 후 문주왕(文周王)은 왜에서 귀국한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內臣佐平)으로 삼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책봉해 왕실의 안정을 꾀하면서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은 자체분열을 일으키고 있었고,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감으로써 대중국 접촉도 방해를 받게 되었다. 이런 혼란을 틈타 병권을 장악한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는 문주왕을 살해하고, 어린 삼근왕(三斤王)을 세워 전권을 휘두르다가 반란을 일으켰다. 해구의 반란은 덕솔(德率) 진로(眞老)에 의해 평정되었고 삼근왕도 재위 3년 만에 죽었다. 이에 진로는 왜에 있던 동성(東城)을 옹립하였다.
동성왕(東城王)은 비록 옹립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어려운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라 왕족인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해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면서 사씨(沙氏) · 연씨(燕氏) · 백씨(苩氏) 등 신진 지방세력들을 중앙에 등용해 한성에서 내려온 기존 세력과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북위에 대해서는 위로(魏虜), 흉리(匈利)로 폄하하는 등 대립각을 세웠다.
동성왕은 19년(497)에 병관좌평 진로가 죽자 신진세력의 하나인 연돌(燕突)을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이는 동성왕이 신진세력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추구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신진세력의 위세가 커지자 이를 억제하기 위해 동성왕은 측근 중심의 정치운영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를 가림성(加林城)의 성주(城主)로 파견했다. 그러나 불만을 품은 백가는 도리어 자객을 보내 왕을 살해하였다.
동성왕을 이어 무령왕(武寧王)이 즉위하였다. 무령왕은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동성왕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무령왕릉지석(武寧王陵誌石)」과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신찬(百濟新撰)』을 종합하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모형이 된다. 즉위 후 무령왕은 먼저 백가의 난을 평정해 왕권을 안정시켰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선제공격을 단행하는 등 공세적 입장을 취하여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또 제방을 수리하게 하고 유식자(遊食者)들을 귀농(歸農)시켜 금강 유역권과 영산강 유역권을 적극 개발해서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다. 또 지방통치조직인 담로에 자제종족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강화하였다. 나아가 섬진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남원 · 하동 지역을 장악함으로써 한성을 상실한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였다. 이 토대 위에서 무령왕은 다시 강국이 되었음을 선언하였고 양(梁)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아 국제관계상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령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 증거가 되는 것이다.
사비시대
웅진 지역의 지리적 조건은 방어하기에 좋은 요충지이나 한 나라의 수도로서는 협소하였다. 이에 성왕(聖王)은 무령왕대에 이루어진 안정 기반을 바탕으로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를 이루기 위해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 지역은 금강이 감돌아 방어에 유리하고 또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유리한 곳이었다. 사비로의 천도는 성왕의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결단과 성왕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사비천도를 적극 지지한 세력으로는 사비 지역을 기반으로 한 신진세력인 사씨 세력과 한성에서 남하해 온 목씨(木氏) 세력 등이었다. 성왕은 사비에 왕궁을 비롯해 여러 관청을 건축하고, 부소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연결되는 나성(羅城)을 축조하고 시가지는 방리제(方里制)에 입각해 정비한 후 538년(성왕 16)에 천도하였다.
천도 후 성왕은 왕권강화를 위한 제반 조처를 추진해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함으로써 왕실의 전통성과 권위를 강화하였다. 중국 남조와의 교류를 통해 모시박사(毛詩博士) · 강례박사(講禮博士) 등을 초빙하여 문화의 질을 높이고, 선진문물을 왜에 전수하였다. 그리고 중인도(中印度)로부터 오부율(五部律)을 갖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 백제적 계율종(戒律宗)을 설립시키고 계율을 강조함으로써 불교교단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 중앙통치조직으로 좌평을 1품으로 하고 극우(剋虞)를 16품으로 하는 16관등제를 정비하고, 22부사제(部司制) 등 중앙의 중요 관청들을 설치하였다. 수도의 행정 조직은 5부(五部)로 나누고 각 부 아래에 5항(五巷)을 두는 5부-5항제로 완비하였고, 지방은 전국으로 5방(五方)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군(郡)과 성[城: 현(縣)]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편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렇게 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왕명을 받들어 행하는 22부가 정치운영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결과 귀족들의 회의체인 5좌평제는 그 위상이 약화되었다.
천도를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한강 유역 회복작전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자력으로 고구려를 공격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신라 · 가야군과 연합군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는 서북으로부터 돌궐(突厥)의 남하에 따른 압력을 받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외척들이 싸움을 벌이는 등 내분에 처해 있었다. 이 틈을 이용하여 신라 · 가야군과 연합한 백제군은 551년에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여 마침내 백제는 한강 하류를 차지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한강 상류의 점령에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기 위해 비밀히 고구려와 결탁한 후 백제가 점령하고 있던 한강 하류 유역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 신라의 이러한 돌발 행동으로 양국 사이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원로 대신인 기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왕자 여창(餘昌: 扶餘昌)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 정벌에서 백제군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마침내 관산성전투(管山城戰鬪)에서 성왕은 신라 복병에 의해 사로잡혀 전사함으로써 대패하였다. 이 패배로 백제는 왕을 비롯해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士卒) 3만여 명이 전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선에 나가 있던 왕자 여창도 간신히 목숨을 구하였다.
관산성전투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신라정벌을 반대하였던 기로들은 위덕왕(威德王)에게 패전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정치적 발언권을 증대해나갔다. 이로써 사씨 · 연씨 · 해씨 · 진씨 등 ‘대성팔족(大姓八族)’으로 표현되는 가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 실권귀족들은 좌평의 정원을 5명에서 6명으로 확대하여 6좌평회의체(六佐平會議體)를 최고 귀족회의체로 만든 후 정치운영을 주도해나갔다.
그러나 위덕왕은 10년(567)에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능사(陵寺)를 창건하고 여기에 사용할 도구의 하나로 금동대향로(金銅大香爐)를 만들었다. 금동대향로는 성왕이 추구한 유교 · 불교 · 도교 삼교(三敎)의 공존과 상보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리고 20년(577)에는 죽은 왕자를 위해 왕흥사(王興寺)를 창건하였다. 이는 위덕왕이 초기의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점차 왕권강화를 추구한 것을 보여준다. 법왕(法王)은 위덕왕대에 지어진 왕흥사를 국가적 차원의 사찰로 그 격을 높여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하였지만 실권귀족들의 반대로 재위 2년의 단명으로 죽었다. 이에 실권귀족들은 익산(益山)에서 마[薯]를 캐며 살던 몰락한 왕족 출신인 무왕(武王: 扶餘璋)을 옹립해 왕으로 삼았다. 무왕의 출자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법왕의 아들로 나오지만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지룡(池龍)의 아들로 나온다. 그러나 무왕이 왕이 되기 전에 서동(薯童)으로서 가난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미루어 보면 그는 몰락왕족 출신이라 할 수 있다.
무왕은 귀족들의 정략적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즉위 후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먼저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딸 선화공주(善花公主)와 결혼하였다. 무왕과 선화공주와의 결혼에 대해 당시에 백제와 신라는 빈번히 전쟁을 하였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결혼이 매우 설화적이라고 꼬집는 견해가 있다. 또 근래에 미륵사지서탑(彌勒寺址西塔)에서 발견된 사리봉안기(舍利奉安記)에 무왕의 왕비가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나온다는 사실 등을 근거로 하여 선화공주의 존재를 부인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왕실과 왕실 사이의 결혼은 두 나라 사이에 긴장감이 고조될 때 이루어진다는 점, 고대사회에서는 왕비가 동시에 2명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이 시기에 신라가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혼 시기는 신라 진평왕이 원광법사(圓光法師)에게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요청한 청군표(請軍表)를 쓴 608년 전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무왕은 익산을 경영하여 이 지역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삼은 후 익산으로의 천도를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 무왕은 제석사(帝釋寺)를 만들고, 거대한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다. 미륵사를 창건하면서 무왕은 스스로를 전륜성왕(轉輪聖王)에 비겨 왕실의 권위를 높였다. 그러나 그의 익산천도 계획은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멸망과 부흥운동
무왕은 재위 33년(632)에 왕자 의자(義慈)를 태자로 삼았지만 익산으로의 천도가 좌절된 이후 점차 환락에 빠졌다. 이를 기회로 측근들이 권세를 농단하기 시작하여 정치정세는 매우 어지러워졌다. 무왕이 죽은 후 왕위에 오른 의자왕(義慈王)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유교이념에 투철하였지만 친위정변을 일으켜 자신의 즉위에 반대하였던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유력 귀족 40여 명을 추방하였다. 그리고 미후성을 친히 공격하면서 군사권을 장악하였다. 이렇게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대외적으로 고구려 · 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신라에 대해서는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게 하는 등 압박을 강화하였다.
그러나 의자왕은 15년 이후에 궁정의 측근세력들에게 둘러싸이기 시작하였다. 여기에는 왕의 총애를 받았던 왕비 은고(恩古) 세력의 작동과 의자왕의 병환이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의자왕은 왕의 행동을 비판한 성충(成忠)을 투옥하여 죽이고 말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지배계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및 그에 따른 궁중 내부에서의 부패와 정권의 천단은 백제의 지배질서를 더욱 문란하게 하였다. 또한 의자왕은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중하였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지만 패배한 경우도 적지 않았으며 이런 빈번한 전쟁은 국력을 피폐시키고 농민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였다. 백제의 군사적 압박은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와의 결합을 가속화시켰고, 그 결과 신라 김춘추(金春秋)는 당나라에 들어가 당태종(太宗)과 나당군사동맹(羅唐軍事同盟)을 맺었다. 나당연합군의 결성은 백제를 더욱 더 어려운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신라와 군사동맹을 맺은 당은 고구려 공격을 우선적으로 추진하였던 종래의 전략과는 달리 먼저 백제를 공격하기로 결심하였다. 660년 6월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13만 명의 군대와 김유신(金庾信)이 이끄는 5만의 신라군은 백제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백제 군신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한 신라군은 요충지인 탄현(炭峴)을 무사히 통과하였고, 당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기벌포(伎伐浦)에 상륙하였다. 화급해진 의자왕은 계백(階伯)으로 하여금 출전하게 하였다. 비장한 각오로 결사대 5천명을 거느린 계백은 황산벌전투(黃山伐戰鬪)에서 신라군의 공격을 끝내 막아내지 못한 채 전사하였고, 백강(白江) 하구에 상륙한 당군은 신라군과 합세하여 사비성(泗沘城)으로 진군하였다.
다급해진 의자왕은 태자와 더불어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을 갔다. 이에 왕자 태(泰: 扶餘泰)가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지만 민심이 동요하고 이탈자가 많이 생겨나자 당군에 항복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웅진을 지키던 방령(方領)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겁박하여 당군에 항복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사비성을 점령한 나당연합군은 횡포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점령군의 이러한 횡포는 백제 유민들을 크게 자극하여 곧바로 각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끊어진 왕조를 다시 일으켜야겠다는 ‘흥사계절(興祀繼絶)’의 정신을 표방하였다. 백제부흥군의 중심 인물로는 정무(正武) · 지수신(遲受信) · 흑치상지(黑齒常之) · 복신(福信) · 도침(道琛) 등을 들 수 있다. 무왕의 조카인 복신은 승려 도침과 더불어 임존성(任存城)을 공격해 온 소정방의 군대를 물리쳤다. 이는 부흥군의 사기를 크게 고무시켰다. 그에 따라 각 지역의 200여 성들이 부흥군에 호응함으로써 부흥군의 형세는 커졌다.
661년 3월 도침이 거느린 군대는 웅진강(熊津江) 전투에서 당군에 패배하였지만 복신의 군대는 1달 여 동안 지속된 두량윤성(豆良尹城) 전투에서 신라 대군을 격파하여 신라군의 기세를 꺾었다. 이후 복신과 도침은 중심지를 임존성에서 주류성(周留城: 전북 부안의 위금안산성)으로 옮긴 후 661년 9월에 의자왕의 아들 풍(豊: 扶餘豊)이 왜에서 귀국하자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써 부흥백제국이 성립되었다. 독립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후 도침은 ‘영군장군(領軍將軍)’을,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을 칭하면서 신라가 사비성으로 군량을 수송하는 길을 차단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나당연합군의 지배지역은 극히 제한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권력을 차지하였다. 부흥군 지휘부 내의 내분과 암투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도록 하여 내사지성(內斯只城)주1들과 거열성(居列城) 등 남방 지역의 거점 성들이 신라에 함락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신은 풍왕(豊王)을 암살하려다가 도리어 풍왕에게 살해당하였다. 이 틈을 타서 나당연합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이에 풍왕은 고구려와 왜에 군사원조를 요청했다. 이 요청에 응해 왜는 2만 7천명의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풍왕은 왜의 수군과 연계하여 백강과 주류성에서 나당연합군을 저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백강구전투(白江口戰鬪)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과 4번 싸워 크게 패배했고 황급해진 풍왕은 고구려로 도망을 쳤다. 곧이어 주류성도 신라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때 지수신은 임존성을 근거로 나당연합군에 끝까지 저항하였지만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고구려로 망명하여 임존성마저 함락되고 말았다. 이로써 3년간에 걸친 백제부흥군의 부흥전쟁 · 부흥운동은 끝을 맺고 말았다.
제도
정치제도 중앙통치조직 백제의 정치제도는 국가발전 단계에 따라 변하였다. 국(國)단계에는 국읍의 주수와 읍락의 거수가 정치의 중심을 이루었다. 연맹단계에 와서 우보와 좌보가 설치되어 군국정사를 관장하였다. 고이왕대에 5부체제가 이루어지면서 각국의 수장들은 중앙귀족으로 전화되었다. 그러나 국왕이 부의 세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배조직은 국왕 직속의 관직과 각 부의 장에게 직속된 관직이 양립하는 이원적인 체제로 운영되었다. 근초고왕대에 와서 백제는 이원적인 지배조직을 일원화하고 지방통치조직을 만들어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이 시기 통치조직의 핵심은 관등제, 관직제, 작호제(爵號制), 귀족회의체, 군사조직, 지방통치조직, 신분제 등이다. 이러한 제도는 한성도읍기에 기본틀이 만들어졌고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시대에 와서 정비되었다.
관등은 중앙귀족과 지방세력들을 서열화하여 상호간의 상하를 구별짓는 제도이다. 국단계에서는 관등과 관직의 구별이 없었다. 그러나 고이왕대에 와서 중앙귀족화한 세력들을 지배체제 내로 편제하기 위해 좌평과 솔계(率系) 관등, 덕계(德系) 관등이 만들어졌다. 중앙집권체제를 갖춘 근초고왕 대에는 좌평을 최고위로 하고 그 아래에 솔계 관등과 덕계 관등을 각각 다섯으로 분화시키고 맨 아래에 좌군(佐軍)- 진무(振武)-극우를 두어 관등제를 일원화하였다. 전지왕대에 상좌평이 설치되면서 좌평의 분화가 시작되었다. 이 관등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16관등제로 정비되었다. 16관등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품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관등명 좌평 佐平 달솔 達率 은솔 恩率 덕솔 德率 한솔 扞率 나솔 奈率 장덕 將德 시덕 施德 고덕 固德 계덕 季德 대덕 對德 문독 文督 무독 武督 좌군 佐軍 진무 振武 극우 剋虞 〈표 1〉 백제 16관등의 명칭
16관등제에서 좌평은 1품이었고, 좌평은 처음에는 5명이었으나 뒤에 6명이 되었다. 달솔은 2품이었고 정원은 30명이었다. 3품 은솔 이하는 정원이 없었다.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달솔은 가장 핵심적인 관료집단이 가질 수 있는 관등이었다. 문독과 무독은 문 · 무의 구별이 관등제에 반영된 것을 보여준다.
16관등은 복색과 관식(冠飾) 및 띠의 색〔帶色〕에 의해 구분되었다. 1품 좌평에서 6품 나솔까지는 자복(紫服)을, 7품 장덕 이하 11품 대덕에 이르는 관등은 비복(緋服)을, 12품 문독 이하 16품 극우까지는 청복(靑服)을 입었다. 대색(帶色)의 경우 장덕까지는 자대(紫帶), 시덕은 조대(皂帶), 고덕은 적대(赤帶), 계덕은 청대(淸帶), 대덕 · 문독은 황대(黃帶), 무독 이하 극우까지는 백대(白帶)를 띠었다. 관제(冠制)의 경우 왕은 금화(金花)로, 나솔 이상은 은화(銀花)로 관을 장식하였다.
연맹단계에서 정치는 좌보와 우보 중심으로 운영되었지만 아직까지 관직과 관등은 미분화한 상태였다. 부체제 단계에 와서 좌장이 설치되면서 관직과 관등은 분화되고 관부도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관부과 관직제는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와서 22부-사(二十二部司)로 재정비되었다. 22부의 명칭과 담당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관부명 담당 업무 구분 관부명 담당 업무 내관 전내부(前內部) 왕명출납 · 국왕근시 외관 사군부(司軍部) 내외병마 곡부(穀部) 곡물공선 · 어료지 관리 사도부(司徒部) 교육 · 의례 육부(肉部) 육류공선 · 왕실목장 관리 사공부(司空部) 토목 · 역역 관리 내경부(內京部) 왕실창고 관리 사구부(司寇部) 형벌 · 사법 외경부(外京部) 국용창고 관리 점구부(點口部) 호구파악 마부(馬部) 어마 · 승물 관리 객부(客部) 외교 · 사신접대 도부(刀部) 무기 · 무구 제작 외사부(外舍部) 관료의 인사 공덕부(功德部) 불교사원 주부(綢部) 직물제조 · 공물출납 약부(藥部) 어의 · 제약 일관부(日官部) 천문 · 점술 목부(木部) 토목 · 건축 도시부(都市部) 시장 · 교역 · 왕도의 관리 법부(法部) 의례 및 왕족 관리 후궁부(後宮部) 후궁 관리 〈표 2〉 백제 22부의 명칭과 담당 업무
22부-사제는 상위 관부인 부와 하위 관부인 사(司)로 구성되었다. 부는 궁중사무를 관장하는 내관(內官) 12부와 일반 국무를 관장하는 외관(外官) 10부 등 22부로 이루어졌다. 22부를 보면, 일반 서정(庶政)을 담당하는 부에 궁중의 업무를 담당한 관청의 수가 많다. 이는 왕권 중심의 관부 운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군부(司軍部)∼ 사구부(司寇部)까지의 명칭은 중국 고대의 『주례(周禮)』의 6관(六官)의 명칭과 동일하다. 이는 북주(北周)의 주례주의적(周禮主義的) 관제정비에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각 부의 장은 장사(長史) · 재관장(宰官長) 등으로 불렸으며 3년에 한 번씩 교체되었다. 이외의 관직으로 박사, 부마도위(駙馬都尉), 막부(幕府) 관료 등을 들 수 있다. 박사는 오경박사(五經博士), 역박사(易博士), 모시박사 등 유교경전을 전문으로 하는 박사와 와박사(瓦博士), 노반박사(露盤博士) 등 전문기술직을 담당한 박사로 구분된다. 부마도위는 왕의 사위를 예우하기 위한 관직이다. 장사, 사마(司馬), 참군(參軍)은 막부에 설치된 관직으로서 주로 외교 및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작호제는 공을 세운 고위귀족들에게 수여하는 칭호로서 왕 · 후 · 장군호(王 · 侯 · 將軍號)가 사용되었다. 이 작호제는 칠지도에 왜왕을 후왕으로 부른 것에서 보듯이 근초고왕대에 실시되었다. 왕 · 후로는 아착왕(阿錯王), 불사후(弗斯侯) 등에서 보듯이 지명이 붙은 형태로 사용되었고 장군호로는 정로장군(征虜將軍), 관군장군(冠軍將軍), 보국장군(輔國將軍) 등이 사용되었다. 근래에 전북 고창에서 ‘△義將軍之印’이 새겨진 청동도장이 출토되어, ‘△義將軍’이라는 또 하나의 장군호를 사용하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귀족회의체 초기백제 시기에는 귀족회의가 국가의 군국사무를 총괄하였다. 부체제 단계에 들어온 이후 국왕 중심의 집권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귀족회의가 수행하던 기능은 점차 행정관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권력이 초월적인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중요한 사항은 귀족회의체에서 논의되었다.
귀족회의체의 모태는 국의 거수들로 구성된 족장회의체였다. 이후 부체제가 확립되고 중앙귀족이 생겨나면서 중앙귀족 중심의 회의체가 만들어졌다. 이를 제솔회의(諸率會議)라고 한다. 제솔회의의 의장은 좌평이었고 구성원은 솔계 관등을 가진 귀족들이었다. 근초고왕대에 와서 제솔회의는 제신회의(諸臣會議)로 개칭되었다. 전지왕대에 와서 상좌평의 설치로 좌평은 상좌평, 중좌평(中佐平), 하좌평(下佐平) 등 5좌평으로 분화되었다. 이리하여 좌평으로 구성된 회의체가 이제 최고귀족회의체가 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와서 좌평의 정원이 6명으로 늘어나면서 6좌평회의체가 최고귀족회의체가 되었다. 이 가운데 내신좌평은 수석좌평으로서 의장의 기능을 하였다. 6좌평 회의체는 재상을 뽑는 것과 같은 중요한 국사는 신성한 지역에서 처리하였다. 백마강 건너편에 있는 호암사(虎岩寺)의 정사암(政事巖)은 이러한 신성지역의 하나였다. 6좌평의 명칭과 관장 업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명칭 직무 내신좌평(內臣佐平) 왕명 출납 내두좌평(內頭佐平) 재정 업무 내법좌평(內法佐平) 외교와 의례업무 위사좌평(衛士佐平) 형옥관계 업무 조정좌평(朝廷佐平) 왕궁 숙위 업무 내병관좌평(兵官佐平) 내외병마권 관장 〈표 3〉 백제 6좌평의 명칭과 직무
도성제 도성은 왕권의 표상이다. 백제의 최초의 도성은 위례성이다. 위례는 울타리라는 의미인데 백제에서는 도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 위례성은 뒤에 한성으로 불렸다. 한성은 큰 성이라는 의미이다. 한성도읍기의 도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이루어진 2성체제였다. 위치에서 볼 때 북성은 풍납토성(風納土城)으로서 평지성(平地城)이며 평소의 거성이고 남성은 몽촌토성(夢村土城)으로서 유사시에 대피하는 산성적(山城的) 성격을 지녔다.
풍납토성은 둘레가 3.5㎞에 달하는 평지성으로서 성벽의 저변은 43m가 넘고 높이도 9m 이상으로 추정되는 거대한 토성이다. 성 내부를 발굴한 결과, 신전(神殿)으로 생각되는 건물지와 이 신전에 사용한 토기들을 보관해둔 우물형 수장고와 중국제 도자기를 보관한 창고도 확인되었다. 이외에 부뚜막이 있는 주거지와 도로 유적 및 무수한 기와 등도 출토되었으며 성밖에서는 목조 우물도 확인되었다. 몽촌토성은 구릉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서 성벽에는 목책을 둘렀다. 성내를 발굴한 결과, 저장 시설과 연지가 확인되었다. 문헌에 의하면 이곳에 별궁(別宮)이 조영되었다.
웅진도읍기의 도성은 웅진성이었다. 이 웅진성은 오늘날의 공주 공산성(公山城)이다. 왕궁의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공산성 내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연회장소인 임류각(臨流閣)도 확인되었다.
사비도읍기의 도성은 사비성이었다. 사비도성은 나성으로 둘러싸였다. 발굴 결과 북나성(北羅城)과 동나성(東羅城)은 확인되었고 서측과 남측은 백마강을 자연방어 시설로 활용하였다. 왕궁은 부소산성(扶蘇山城) 남쪽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부소산성은 평화시에 후원의 역할을 하였다. 시가지 구조는 관북리에서 정리사지로 뻗은 남북 대로를 중심으로 사방이 바둑판처럼 짜여졌다. 이를 방리제라고 한다. 도성 내부는 상부(上部) · 전부(前部) · 중부(中部) · 하부(下部) · 후부(後部)로 나뉘고, 각 부는 다시 오항으로 나누어졌다. 궁남지(宮南池)에서 출토된「서부후항 목간」은 왕도 조직이 부-항으로 이루어진 것을 입증해준다.
각 부는 달솔 관등을 소지한 자가 맡았으며, 500명의 군사가 배속되어 있었고, 나성 외곽에는 청마산성(靑馬山城), 주장산성, 울성산성(蔚城山城), 부산성(浮山城), 석성산성(石城山城) 등 많은 성들이 배치되어 도성 방어망을 형성하였다.
지방통치조직 백제의 지방제도는 지방에 대한 통제력 강화와 지방의 생산물 수취를 목적으로 마련되었다. 부체제 단계까지 지방에 대한 통치는 부의 장을 통한 간접지배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지방통치조직이 마련되어 지방관이 파견됨으로써 지방에 대한 직접지배가 이루어졌다. 백제의 지방제도는 근초고왕이 영역을 분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해 각 지방의 생산물을 파악하게 함으로써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때 만들어진 지방통치조직이 담로이다. 이 담로는 종래 마한을 구성하였던 국을 토대로 하여 만들어졌다. 여기에는 왕족이나 유력한 귀족이 파견되었으며 종래 국의 수장이나 읍락의 거수들은 재지세력으로 전환되어 담로에 파견된 관료들을 보좌하였다. 한성도읍기의 담로의 수는 50여 개로 추정되는데 웅진도읍기에 와서 22개로 축소되었다.
사비천도를 계기로 백제는 담로제를 방 · 군 · 성(현)제[方 · 郡 · 城(縣)制]로 재정비하였다. 방 · 군 · 성(현)제는 중앙에서 지방을 보다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방은 중방(中方) · 동방(東方) · 남방(南方) · 서방(西方) · 북방(北方)의 5방으로 구성되었고, 각 방에는 방성(方城)을 두어 방의 중심지로 삼았다. 중방은 고사성(古沙城), 동방은 득안성(得安城), 남방은 구지하성(久知下城), 서방은 도선성(刀先城), 북방은 웅진성이다. 방의 장관은 방령이고,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가 맡았으며 보좌관으로 방좌(方佐)가 있었다. 이러한 방은 군 · 성과 중앙을 매개하는 기능을 하면서 동시에 군관구적(軍官區的) 성격을 지녔다. 방성의 내부구조는 수도와 마찬가지로 5부-5항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방의 치소였던 고부읍성(古阜邑城) 발굴에서 발굴된 백제 기와에 새겨진 ‘上部-上巷(상부-상항)’이란 명문에서 확인된다. 5방성의 명칭과 위치는 다음과 같다.
방성 명칭 현재의 지명 중방성(中方城) 고사성(古沙城) 전북 고부 동방성(東方城) 득안성(得安城) 충남 은진 남방성(南方城) 구지하성(久知下城) 광주 또는 남원 서방성(西方城) 도선성(刀先城) 충남 대흥 북방성(北方城) 웅진성(熊津城) 충남 공주 〈표 4〉 오방성의 명칭과 위치
군은 37개 군으로 구성되었다. 군의 장으로는 군장(郡將) 3명이 있었고, 덕솔의 위계자가 임명되었다. 군 규모의 성보다 작은 단위의 것을 소성(小城) 또는 현(縣)이라 했는데, 그 장은 도사(道使)라 하였다. 소성(현)은 방성이나 군성(郡城)에 통속되어 있었다. 성(현)의 수는 200∼250개였다. 성(현)의 수가 이렇게 많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종래 사회편제 단위였던 읍락이 행정조직을 이룰 정도로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인구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5방제는 백제 말기에 와서 5부제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나 성격의 변화는 없었다. 멸망할 당시 백제는 5부 · 37군 · 200성(혹은 250현)이었고 호수(戶數)는 76만호(萬戶)였다. 방 · 군 · 성(현)제의 실시로 중앙의 통치력이 보다 강력하게 지방에 미칠 수 있게 되었고 지방의 재지세력들은 군사(郡司)나 현사(縣司)에 속하여 지방관의 지방통치를 보좌하였다.
군사제도
군사조직과 운용
백제의 군사조직은 국단계에서는 읍락의 지배자인 거수층과 호민층이 중심을 이루었다. 이들은 일종의 명망군(名望軍)으로서 참전의 대가로 전쟁에서 획득한 노획물이나 포로 등을 분배받았다. 반면에 하호(下戶)층은 군량을 조달하였다. 오부체제가 확립되어 군사권이 국왕에게로 집중되면서 국왕의 명을 받아 군령권을 행사하는 좌장이 설치되었다.
그러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고 또 전쟁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군사조직도 정비되었다. 근초고왕이 3만명의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공격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이 과정에서 근초고왕은 왕도의 주민을 주축으로 하는 중앙 군사조직과 지방 주민들을 징발하여 편성한 지방군사조직을 만들었다. 대규모의 군사조직이 편성되면서 종래의 명망군적인 군대만으로는 병력을 충원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근초고왕은 일정한 연령층의 백성[정남(丁男)]들에게 군역 의무를 부과하고 이들을 병사로 징집하였다. 이로써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에 의한 군사충원제도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복무기간은 3년이었다.
백제의 군사조직은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와서 재정비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정비된 군사조직은 시위군(侍衛軍), 중앙군(中央軍), 지방군(地方軍)으로 나누어진다. 시위군은 국왕의 친위 군사로서 왕궁을 시키고 국왕의 행차에 호종하는 기능을 하였다. 이 시위군은 왕도에 주둔한 2,500명의 군사였다. 이 군사들은 5부에 각각 50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시위군은 총체적으로 위사좌평이 관장하였고 그 아래에 달솔의 관등을 지닌 자가 각 부에 배치된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중앙군은 외침을 방어하거나 다른 나라를 공격할 때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군사력이었다. 병졸들은 왕도인을 징발하여 편성하였는데 지방민의 일부도 차출되기도 하였다. 중앙군은 청마산성, 청산성 등 사비도성의 주변에 위치한 산성에 주둔하였다.
군사조직의 운용기구로는 사군부, 병관좌평, 좌장, 장군 등이 있었다. 사군부는 내외병마를 총괄하는 관청이었고, 병관좌평은 내외의 군정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좌장은 왕명을 받아 출동하는 군부대를 지휘하는 군령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들이 왕명을 받아 군사권을 행사할 때는 장군을 칭하였다. 한편 최고 지방통치조직인 5방에는 각각 1,000∼1,200명의 군사 또는 7∼8백명 정도의 군사들이 주둔하였다. 이 군사들은 방의 장관인 방령이 통솔하였다. 군에도 군사가 배치되었는데 장관인 군령(軍領: 軍將)이 통솔하였고, 현에 배치된 군사는 장관인 도사(성주)가 관할하였다.
군사의 지휘와 훈련
군대를 출동할 때 통솔하는 방법은 친솔형과 교견형으로 나누어진다. 친솔형은 최고 군령권자인 국왕이 직접 군대를 지휘하는 것을 말하며, 교견형은 국왕은 왕도에 머무르고 신하들에게 군령권을 임시로 위임하여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군령권을 위임할 때 국왕의 재가를 받지 않고도 군사와 관련항 사항을 처리할 수 있는 편의종사권이 부여되기도 하였다. 군령권의 위임은 좌장에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때로는 좌평이나 달솔의 관등을 가진 자도 위임받기도 하였다.
병종으로는 보병(步兵), 궁수대(弓手隊), 기병(騎兵), 수군(水軍) 등과 특수병종으로서 노군(弩軍), 충군(衝軍), 석투군(石投軍), 운제군(雲梯軍) 등이 있었다. 노군은 요노(腰弩)로 무장한 부대를, 충군은 충차(衝車)를 이용하여 성문을 공격하는 부대를, 석투군은 투석을 전문으로 하는 부대를, 운제군은 구름사다리를 이용하여 성벽에 오르는 부대를 말한다. 군사훈련은 평상시에는 병법에 따라 행해졌다. 때문에 군령권자가 누가 되더라도 그 지휘에 따를 수 있었다. 전렵(田獵)은 본래 사냥 놀이지만 이에 부수하여 군사훈련도 행하였다. 습사(習射)는 매월 보름과 초하루에 정기적으로 활쏘기 연습을 하는 것이다. 왕도에서 도성 서쪽에 사대(射臺)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오행에 의할 때 서쪽은 무(武)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무구(武具)에는 개인 방호를 위한 갑주(甲冑)를 비롯하여 충차(衝車), 포차(砲車) 등과 같은 공 · 수성용 무기와 마구(馬具)가 있었다. 병기로는 단병기, 장병기, 속사병기, 공 · 수성용 병기가 있었다. 궁수대가 사용하는 화살대는 대나무, 싸리나무, 박달나무 등으로 만들었다.
신분제도
신분제는 가문에 따라 정치적 사회적 특권과 제약이 주어진 사회적 제도이다. 백제의 신분제는 백제국이 성장하면서 마한의 여러 나라들을 통합하여 중앙귀족으로 전환시키고 중앙과 지방의 귀족들을 편제하는 과정에서 성립되었다. 백제의 신분은 크게 지배신분층, 평민층, 천인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지배신분층은 공복의 복색과 관등제를 연결시켜 볼 때, 내부적으로 몇 개의 층으로 구별할 수 있다. 제1신분 층은 자복(紫服)을 입는 솔계 관등 이상을 소지할 수 있는 층이다. 제2층은 비복(緋服)을 입는 덕계 관등을 소지할 수 있는 층이다. 제3층은 청복(靑服)을 입을 수 있는 관등층이다. 이 가운데 지배신분층의 중심은 왕족과 왕비족이었다. 왕족은 부여족의 일파로 남하해 와서 건국한 온조계 집단으로 이루어졌으며, 왕비족은 한성도읍기 전기에는 진씨, 후기에는 해씨가 되었다. 사비도읍기에 와서는 왕족 이외에 대성팔족이 최고신분층을 형성하였다. 대성팔족은 사씨 · 연씨 · 해씨 · 진씨 · 목씨 · 백씨(苩氏) · 협씨(劦氏) · 국씨(國氏)를 말한다. 이 가운데 5∼6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좌평과 30명으로 정원이 정해진 달솔은 최고 귀족신분층 출신자들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이었다.
신분제는 관등 · 관직제를 규정하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관등 · 관직 · 복색 · 대색에도 구별이 있었다. 왕은 금화로 장식한 오라관(烏羅冠)을 쓰고, 흰 가죽띠를 두르고, 검은색의 비단신을 신었다. 지배신분층 가운데 제1층은 자복을 입고, 은화로 장식한 관을 썼다. 제2층은 비복을 입었고, 자대에서 황대까지의 띠를 띠었다. 제3층은 청복을 입되, 황대에서 백대까지의 띠를 둘렀다.
이러한 귀족의 지배를 받은 피지배층의 주류는 신분적으로는 자유민인 일반 농민이었다. 농민은 소규모 토지보유자로서 농업 · 공업 · 상업에 종사했으며, 국가 수취의 주된 대상이었다. 이들은 비색이나 자색의 옷을 입는 것이 금지되었다. 그 밑에는 최하층의 신분으로서 천인과 노비가 있었다. 천민신분층은 정복전쟁과 통일전쟁의 전개과정에서 피정복민들이 천민집단으로 또는 노예로 전락되면서 성립되었다. 노비는 관노(官奴) · 사노(私奴)가 있었다. 관노는 국가 또는 관청에, 사노는 개인에게 예속되었다. 노비는 물건과 같이 취급받는 비자유인이었다. 한편 노비의 공급 및 재생산의 방법에 따라 전쟁포로 · 부채노비 · 형벌노비와 노비소생자를 노비로 삼는 세습노비 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경제제도
토지제도
백제는 철제의 농기구 · 토목용구(土木用具)를 사용함에 따라 농업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적 소유가 진전되었다. 이에 따라 경작지에 대한 공동체적 소유가 소멸되어 점차 개별적인 토지사유가 가능하게 되었다.
토지지배의 유형에서 상부 특권층의 토지지배에는 국가 · 왕실의 직속지, 귀족들에 대한 사전(賜田), 사원전(寺院田) 등이 있었다. 또 대귀족에 대한 식읍(食邑)의 사여(賜與)도 있었다. 전렵지인 서해대도(西海大島) · 횡악(橫岳) 등은 국왕의 직속지였을 것이다.
사원은 왕실과 귀족의 후원에 힘입어 대토지소유자로 등장하였다. 귀족들은 자신의 소유지 외에 특별한 공로로 전조권(田租權)이나 식읍을 부여받기도 했고, 새로운 토지를 개간함으로써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편 농민의 토지지배로는 농민이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소규모의 경작지가 있었다. 소를 사용한 경작[우경(牛耕)]으로 토질이 개선되고 노동력이 절감되었다. 이에 농업경영 방식도 노동력이 많이 소요되는 집체적 방식에서 소농(小農) 중심의 농업경영 추세를 보이게 되었다. 개별 농가가 농업경영 단위로 성장함으로써 개별 농가에 의한 토지소유가 촉진되고, 농민층의 다양한 계층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민 경작지는 국가의 각종 수탈과 귀족층의 강점(强占) 대상이 되었다. 또 빈번한 전쟁에의 동원 등으로 농토를 상실한 농민은 노비로 전락하거나 남의 농토를 용작(傭作)하기도 하였다. 토지경작은 소규모의 경작지를 보유한 자유농민에 의해 주로 이뤄졌으며 노예노동도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토지지배는 생산력의 향상과 연관된다. 백제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철제 농기구의 사용을 장려하고 또 우경을 행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수리관개시설(水利灌漑施設)을 정비하였다. 수리시설은 안동 저전리에서 청동기시대 저수지가 발굴된 것에서 보듯이 청동기시대부터 만들어졌다. 따라서 『삼국사기』초기기록에 보이는 수리시설은 규모가 그다지 크지 않은 저수지 제방이라 할 수 잇다. 백제에서 본격적으로 저수지가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전반 경에 만들어진 김제의 벽골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벽골제는 나뭇가지 등을 이용한 부수공법에 의해 축조되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무령왕은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전국의 제방을 수리하고 새롭게 축조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저수지의 축조는 많은 논에 물을 공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갈수기(渴水期)에도 물을 공급할 수 있어서 획기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가져왔다.
조세제도
백제의 세제(稅制)는 조(租) · 조(調) · 역역제(力役制)로 이루어졌다. 조(租)는 농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조(調)는 가내 수공업의 생산물이나 각 지방의 특산물을 수취하는 것이고, 역역은 노동력을 징발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조(租)와 조(調)는 결합된 형태로 행해지기도 하였다.
조조(租調)의 수취물로는 포(布) · 견(絹) · 사(絲) · 마(麻) · 미(米) 등이었고, 매년 풍흉(豊凶)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수취하였다. 역역은 국가나 지방관청에 동원되어 무상으로 노역하는 요역(徭役)과 군역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초기의 역역 징발대상은 주로 하호로 표현되는 일반민이었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정(丁)을 부 단위로 징발되어 축성(築城)과 같은 대규모 토목사업에 동원되었다.
조의 수취대상은 농민이었다. 백제 초기의 농민은 하호(下戶)로 불렸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국가통치체제가 갖추어지고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민의 사회경제적 지위도 변화되었다. 이에 민은 소국 수장들의 사적 수탈에서 벗어나 국가의 보호를 받는 공민적 존재로 편입되었다. 국가는 민호(民戶)를 파악하고 이렇게 파악된 호구를 토대로 편호제(編戶制)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근초고왕대에 반포되었을 율령에는 호구령(戶口令)과 부역령(賦役令)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비도읍기에 역역징발 업무를 맡은 관청은 사공부(司空部)였다.
수공업 · 상업
백제의 수공업은 마한 시기 수공업의 기술과 생산 분야를 기반으로 전개되었다. 수공업 가운데 먼저 들 수 있는 것이 직물 생산이다. 포의 종류에는 세포(細布)와 추포(麤布)가 있었다. 백제는 오색채견(五色彩絹)을 왜에 보냈고 또 봉제기술자인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보냈으며 관리들은 자(紫) · 비(緋) · 청(靑)색의 공복을 입었다. 이는 백제의 직조(織造) 및 염색술의 발달을 보여준다. 직기(織機)는 현재 남아 있지 않으나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비경이[베틀에 딸린 제구의 하나]를 통해 그 일단을 짐작할 수 있다.
제철 수공업의 경우 충청북도 진천 석장리에서 초강이 만들어진 제철 유적이 발굴되었다. 또 백제가 왜에 보낸 칠지도는 백번 단련한 철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금상감으로 글자를 새겼다. 이는 백제의 뛰어난 제련기술과 상감기술을 잘 보여준다. 『일본서기』에는 백제가 철정(鐵鋌) 40매와 단야(鍛冶) 기술자를 파견한 기사가 나온다. 한편 불교 전래 후 사원 · 불상 · 불화 등 우수한 불교예술품이 제작되었다. 또 도공품(陶工品)으로는 정교한 문양전(文樣塼)과 기와 · 질그릇 등이 제작되었다.
수공업 제품은 왕실이나 관청 소속의 장인(匠人)이나 노비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들은 국왕과 왕실의 생활용품은 물론 지배자의 권위를 표현하는 각종 위세품(威勢品)과 대외 교역에 수반되는 증여품을 제작하였고 또 무기와 갑옷 등 군사용품도 생산하였다. 일반민이 사용하는 토기 · 농기구와 각종 도구들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수공업 기술자 가운데 재능이 뛰어난 자들에게 와박사, 노반박사 등과 같은 박사의 칭호가 부여되었다. 박사 칭호 소지자는 그 분야의 최고 전문가로서 미숙련자들을 교육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삼베 같은 일상적인 의류 소재나 목기, 짚신 등은 대부분 일반민들이 가내에서 생산하였다. 수공업과 관련한 기구들은 내관 22부 가운데 육부(肉部) · 마부(馬部) · 도부(刀部) · 목부(木部) 등이다.
생산력이 발전하여 잉여생산물이 늘어나고 사회적 분업이 진전되면서 상업이 발전하였다. 또 도시의 발달은 물자 유통을 보다 원활하게 하였고 그 가운데 수도는 물자 유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물자가 활발하게 유통되면서 수도 안에 상설시장이 설치되었다. 이것이 관시(官市)이다. 그리고 원활한 물자 공급을 위해 도로교통망이 정비되었다. 왕도에서의 상업은 도시부(都市部)가 관리하였다. 한편 지방에는 향시(鄕市)가 있었다. 일정한 기간마다 열리는 이 향시에는 행상(行商)들이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지방과 지방 사이에 물자를 유통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백제의 대외교역은 중국대륙과의 교역, 일본열도와의 교역으로 나누어진다. 중국과의 교역은 서진 및 동진대의 청자나 전문도기가 백제의 여러 곳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에서 보듯이 매우 활발하였다. 이러한 대외교역의 활성화는 4세기 초에 낙랑군과 대방군이 소멸되어 중국 군현 중심의 교역체계가 붕괴되자 백제가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이루어졌다. 왜와의 교역은 366년에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왜는 백제로부터 유학이나 불교 등 정신문화를 비롯하여 직조기술 등 기술문명에 이르는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백제의 교역항으로는 한성도읍기에는 한강 하구에 위치한 인천이, 사비도읍기에는 수도 웅진성이나 사비성의 관문인 금강 하구가 중심을 이루어졌다. 이외의 교역항으로는 당진 지역, 죽막동 유적이 발굴된 부안 지역, 연산강 유역의 나주와 영암 지역, 섬진강 하구의 하동 지역이 있었다. 대외교역에서는 항해의 안전이 급선무이다.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초월자에게 드리는 제의가 행해졌다. 태안의 백화산에 세워진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과 무속적(巫俗的) 신에 의존하여 제의를 드린 부안죽막동유적(扶安竹幕洞遺蹟)이 그 좋은 예가 된다.
백제의 대표적인 대외교역품으로서 견직물로는 오색채견 · 백금(白金) · 세포 등이, 철소재로는 철정이, 무기 · 무구류로는 각궁전(角弓箭) · 명광개(明光鎧) · 철갑조부(鐵甲彫斧) 등이, 칠제품으로는 황칠수(黃漆樹) 등이 있다. 백제가 중국의 여러 왕조로부터 수입한 물품으로는 역림 · 식점 등 서적와 요노 등 무기 및 약재, 글씨, 『열반경(涅槃經)』 등 정신문화적인 것과 도자기나 거울 등 고급 공예품 등이었다. 한편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왜계 유물인 스에끼라든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왕과 왕비의 관을 만드는데 사용한 금송(金松) 등은 왜로부터 수입한 것이다.
유학
유학은 유가(儒家)의 학문이란 뜻이며, 유교는 유가의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초기 백제는 낙랑군을 통해 유학이 전래되었고 비류왕대에 와서 유학을 국가통치 상에서 지배이념으로 받아들였다. 근초고왕대에는 박사제도(博士制度)를 설치하여 유학을 교육하고 보급하였다. 웅진 · 사비도읍기에 오면 무령왕은 오경박사를 설치하였고 성왕 때는 양(梁)나라에 모시박사 · 강례박사를 초빙해왔다. 이리하여 유학에 대한 이해 수준은 훨씬 높아졌다. 부모의 상을 당하였을 때 삼년상을 치룬 것이라든가 이름에 유교 이념을 잘 보여주는 충 · 신 · 의 · 효 등을 사용한 사례가 많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된다.
유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근초고왕대에 박사 고흥은 『서기』를 편찬하였고, 위덕왕대에 와서는 『백제기(百濟記)』 · 『백제신찬』 · 『백제본기』 등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가 편찬되었다.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인 근초고왕은 왕인을 왜에 파견하여 『천자문』과 『논어』를 전수하였고, 무령왕대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성왕대에는 오경박사 왕유귀(王柳貴)를 왜에 파견하여 왜가 유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학을 국가통치이념으로 받아들이면서 시조묘(始祖廟), 종묘(宗廟), 사직(社稷), 교사(郊社), 산천제의(山川祭儀) 등 유교적 의례제도도 정비되었다. 시조묘는 건국주인 온조왕이 부여족의 족조인 동명(東明)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 시조묘에 건국주가 아니라 부여족의 족조(族祖)를 모신 것은 백제의 특징이다. 종묘는 역대왕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고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모신 사당이다. 종묘와 사직은 유교적 제의체계의 중심이이서 왕조를 창건하면 반드시 왕도에 설치하였다.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확인된 여자형의 대형건물지는 종묘일 가능성이 크다. 교사는 교외에서 지내는 천지신에 대한 유교적 제의이다. 교사 때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단을 대단 또는 남단이라 하였다. 왕이 즉위하면 교사에서 즉위의례를 하였다. 교사에 드리는 희생제물은 소 · 돼지 · 사슴 등이었다. 산천제의는 종래의 산악숭배 신앙을 유교적 예제(禮制)에 따라 재정비한 것이다. 백제는 왕도와 전국의 산천 가운데 중요한 산천을 제사의 대상으로 하면서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누어 그 등급을 매겼다. 대사에 속한 산은 삼산(三山)인데 사비도읍기의 삼산은 일산(日山: 금성산), 오산(吳山: 오석산), 부산(浮山)이었다. 오악(五嶽)의 위치는 동악(東嶽)은 계람산(鷄藍山: 계룡산), 남악(南嶽)은 무오산(霧五山: 지리산), 서악(西嶽)은 단나산(旦那山: 월출산), 북악(北嶽)은 보령의 오서산이었고, 중악(中嶽)은 산 이름을 알 수 없는데 고부 지역에 위치한 산으로 추정된다. 이 오악은 나라의 각 방위를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불교
백제의 불교는 384년(침류왕 1)에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으로부터 들어오자 왕이 그를 예경(禮敬)함에서 시작되었다. 이듬해 침류왕은 한산에 불사를 이룩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아신왕은 불법을 숭신(崇信)해 복(福)을 구하라는 하교(下敎)를 내리기도 하였다. 한성도읍기에 백제 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과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蓮花文 瓦當)을 들 수 있다.
웅진도읍기에 무령왕은 교단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겸익을 인도에 보내 계율을 배워오게 하였다. 겸익이 인도에서 돌아오자 성왕은 겸익이 갖고 온 범문율부(梵文律部)를 명승(名僧) 18명으로 번역하게 하고, 『율소(律疏)』 36권을 저술하게 하였다. 그리고 스스로 「비담신율서(毘曇新律序)」를 지어 계율의 역행(力行)을 강조하였다. 웅진도읍기의 사찰로는 대통사지가 유명하다.
백제의 불교는 사비시대에 크게 성행하였다. 성왕은 사비도성을 조성하면서 시가지의 중심에 정림사(定林寺)를 창건하였고, 양나라로부터 열반(涅槃) 등 경의(經義)와 공장(工匠) · 화사(畫師) 등을 청해왔다. 법왕은 호국의 영장(靈場)으로 왕흥사를 세워 왕권강화를 추구하였고, 무왕은 익산에다 거대한 미륵사를 창건하여 미륵의 용화세계(龍華世界)를 이루려고 하였다. 근래에 발굴된 미륵사지 서탑에서 출토된 사리봉안기에 의하면 무왕은 정치적으로는 폐하, 즉 황제로 불렸음이 밝혀졌다. 불상으로는 예산사면석불(禮山四面石佛),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瑞山磨崖三尊佛) 등이 유명하다.
불교가 성행하면서 교리 연구도 활발해 율학(律學)이 발달하고 삼론학(三論學)주2 · 성실종(成實宗)주3 등이 연구되었다. 이름난 승려로는 양나라에 유학한 발정(發正), 삼론학의 대가로 일본에서 초대 승정(僧正)이 된 관륵(觀勒), 『법화경(法華經)』의 독송(讀誦)에 힘써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오른 혜현(慧顯), 중국의 형산(衡山)에서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배운 현광(玄光), 일본에 건너가 『성실론소(成實論疏)』를 저술한 도장(道藏) 등을 들 수가 있다.
한편 백제 성왕은 왜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이후 백제에서는 많은 승려와 예술가들을 일본에 보내 일본의 불교문화 융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법륭사 5층목탑(法隆寺五層木塔)과 사천왕사(四天王寺)의 창건 등은 모두 백제 기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관륵은 왜에 천문 · 둔갑(遁甲) · 방술(方術)의 서적을 전수해주었고, 초대 승정이 되어 왜의 불교교단을 정비하였다.
도가사상
도교는 중국에서 후한(後漢)의 사회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던 격동의 시기에 성립되었다. 노장사상(老莊思想)은 도교의 사상적 토대이자 도교의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백제는 서진과의 교섭을 통해 도교사상을 받아들였다. 그 시기는 황룡(黃龍)의 출현과 왕의 복색을 오행의 색깔로 한 것에서 볼 때 고이왕대로 볼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는 장군인 막고해(莫古解)가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어 이미 4세기 중엽에 『도덕경』이 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사왕은 도교적인 원지(園池) 사상에 따라 못을 만들어 이훼(異卉)주4와 기금(奇禽)을 길렀다.
웅진도읍기에 도가사상(道家思想)을 보여주는 것으로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진묘수(鎭墓獸)와 묘지석(墓誌石)이다. 진묘수는 죽은 자를 보호하는 기능 이외에 사자(死者)의 영혼을 승선시키는 안내자의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묘지석에는 왕의 무덤이 위치한 곳은 지하세계의 신인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등으로부터 산다고 하는 내용이 들어 있는데, 이 또한 도가사상의 반영인 것이다.
도가사상은 웅진도읍기를 거쳐 사비도읍기에 성행하였다. 무왕은 궁남지를 축조하고, 못 속에 인공섬을 만들어 이를 방장선산(方丈仙山)주5에 비기었다. 또 와전(瓦甎) 중에 산경문전(山景文塼)이 제작되고, 능산리 제6호분에는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졌다. 또 관륵이 일본에 전해준 문물 중에 둔갑 · 방술 같은 도교적인 잡술(雜術)이 포함되어 있었다. 부여 능산리 사지에서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 뚜껑 쪽에 새겨진 문양은 주제가 신선이 살았다는 봉래산(蓬萊山)을 중심으로 하고 있고, 익산 왕궁면 왕궁리에서 발굴된 원지는 우리나라 고유의 산악숭배와 더불어 신선사상 및 도교사상의 영향을 보여준다.
신앙과 의례
백제의 토속신앙(土俗信仰)으로는 소도신앙(蘇塗信仰), 농경 의례, 점복(占卜), 은(殷) 조상숭배, 제천신앙, 산천신앙 등을 들 수 있다. 여기에는 중국의 오행사상(五行思想)에 의한 오제숭배(五帝崇拜) 외에는 토속신앙의 흐름이 강하게 이어져왔다.
소도는 마한을 구성한 각 소국에 두어진 별읍(別邑)을 말한다. 이 별읍은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가 행해지는 곳이면서 동시에 이곳에 도망해온 자에 대해서는 사법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신성지역이었다. 그러나 이 소도는 백제가 지방통치조직을 만들고 지방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하면서 왕의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게 되면서 별읍으로부터 지방행정조직의 하부 단위로 전환되었다.
농경의례와 관련하여서는 파종제(播種祭)와 추수제(秋收祭: 수확제)가 있다. 파종제는 5월에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하고, 추수제는 10월에 농사일을 마치고 수확을 한 후 귀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이 제의를 거행하는 때에는 수십 명이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술을 마셨으므로 집단제의(集團祭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는 국가체제가 정비되면서 유교적 제의체계로 전환되었다. 토지신인 ‘사(社)’와 곡신인 ‘직(稷)’을 모시는 사직단(社稷壇)을 세워 국가의 안위로 풍요를 기원한 것이 그것이다.
점복은 별자리와 달의 천체 현상, 동물의 희생 또는 골각기(骨角器)로 점을 쳐서 길흉을 살펴보는 것이다. 점복은 개인적인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도 행해졌다. 점을 칠 때 사용한 뼈를 복골(卜骨)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과의 접촉이 빈번하면서 중국으로부터 역림과 식점을 새로이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점을 치는 방법도 종래의 복골이 아니라 식반을 이용하여 점을 치게 되었다.
백제에서는 용신앙(龍信仰)도 행해졌다. 용은 수신(水神)의 상징이다. 용신앙은 용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고 풍농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또 바다에는 용왕이 산다고 생각하고 용왕에게 풍어제(豊漁祭)를 지내고 또 항해에서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용왕에게 제사를 드렸다.
백제에서는 남근숭배신앙(男根崇拜信仰)도 행해졌다. 남근은 악귀를 내쫓기도 하고 신에게 봉헌(奉獻)하는 봉헌물이기도 하였다. 남근숭배신앙은 생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민간신앙을 보여준다. 능산리폐사지(陵山里廢寺址)에서 발굴된 목간 가운데 발기된 남근에 각서와 묵서(墨書)가 있는 목간은 교차로 설치하여 마을의 수호와 자손 번영, 교통안전을 지켜주는 것으로 관념화 되었다.
백제에서는 산천에 신이 있어 마을을 지켜주고 나라를 지켜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마한시기에는 각 국보다 자신의 영역 범위 내의 산천에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중앙집권체제가 갖추어지면서 백제 왕실의 입장에서 산천제의가 정비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국도에 있던 산천은 그 격이 격상되어 대사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방에 위치한 산천은 일부만 오악에 편제되었고 그렇지 못한 산천은 제외되었다.
상례와 무덤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묻히게 된다. 죽어서 무덤에 묻히기까지 진행되는 의식과 예절이 상례(喪禮)이다. 「무령왕릉묘지석」에 의하면, 왕이 죽자 27개월 동안 빈전에 시신을 두었다. 이 기간을 거상(居喪)이라 하는데 3년 상이었다. 3년 동안 시신을 빈전에 두었다는 것은 백제 상례의 특징이다. 기와 건물지와 벽주 건물지가 확인되었고, 얼음을 저장한 시설도 발견된 공주정지산유적(公州艇止山遺蹟)은 바로 빈전이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시신을 묻을 곳을 정한 후 돈으로 지하 신들에게 장지(葬地)를 사서 세상의 법률에 얽매이지 않도록 계약한 후 길일(吉日)을 택하여 매장하였다. 죽어서 마지막 무덤에 묻기까지 상주(喪主)들은 상복을 입었다. 상복 기간은 망자(亡者)와의 혈연적 친소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부모와 남편이 죽었을 경우 자식이나 부인은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나머지 친척들은 장례와 동시에 상복을 벗었다.
시신을 묻기 위해 무덤을 만들었다. 백제의 무덤은 크게 적석총[돌무지무덤]과 봉토분(封土墳)으로 크게 나누어지고, 봉토분은 다시 석실분(石室墳: 돌방무덤) · 석관묘(石棺墓: 돌널무덤) · 토광묘(土壙墓: 움무덤) · 옹관묘(甕棺墓: 독무덤)로 구분된다. 적석총은 서울 석촌동이나 양평 문호리, 연천 삼곶리 등에서 확인되었다. 이 적석총들은 만주의 집안에 있는 고구려 적석총과 맥을 같이 한다. 석촌동 제3호분은 동서 55.5m, 남북 43.7m의 평면에 현재의 높이가 4.5m인 대형 적석총으로서 3단까지 추적할 수 있다.
웅진도읍기로 오게 되면 적석총은 없어지고, ‘ㄱ자형’ 석실분과 장방형 석실분이 유행하고 중국계통의 전축분(塼築墳)이 축조되었다. ‘ㄱ자형’ 석실분은 돔(Dome)형식에 벽에 회칠을 했으며, 장방형 석실분은 순수 백제식 석실분 형식이라 할 수 있다. 전축분으로는 사신도가 그려진 송산리 제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무령왕릉은 터널형 전축분으로 연도가 달려 있다.
사비시대로 오게 되면 ‘ㄱ자형’ 석실은 없어지고 연도가 달린 상자형 석실이 주류를 이룬다. 왕실 무덤은 능산리에 조성되었는데 현재 7기가 남아 있다. 중하총(中下塚)은 석제로 터널형의 석실을 만들었는데 성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하총(東下塚)은 네 벽 및 천장을 잘 물갈이한 편마암 판으로 축조했고, 석면(石面)에 사신과 연화문을 직접 그렸다.
영산강 하류인 나주시와 영암군 내에서는 대형 옹관묘의 군집이 있다. 이 옹관묘들은 초기철기시대 이래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동일 봉토 내에 여러 개를 합장(合葬)한 것이 주류이다. 옹관의 형식에는 단옹(單甕)과 합구식(合口式)이 있다. 이 가운데 나주 신촌리 제6호분은 금동관 · 금동식리(金銅飾履) · 철도(鐵刀) 등의 부장품이 나와 이 지방의 유력세력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외에 이 지역의 특징적인 무덤양식으로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에 대해서는 백제 귀족설, 왜계 백제관료설 등이 있다.
건축 · 미술
토목과 건축 백제의 토목 기술을 잘 보여주는 것이 성곽(城郭), 고분, 제방 등 대규모 토목물이다. 성은 축조 재료에 따라 목책(木柵), 토축성(土築城), 석축성(石築城)으로 나뉜다. 이러한 성 가운데 축조 모습을 생생이 보여주는 것이 왕성인 풍납토성이다. 축조공정을 보면 생토 모래층 위에 형성된 점토층(粘土層)을 기저부로 삼아 전체적으로 정지작업을 한후 그 위에 사다리꼴 모양의 중심 토루(土壘)를 쌓아 올리고 이를 기준으로 삼아 내 · 외면에서 비스듬하게 점질토(粘質土)와 사질토(沙質土)를 교대로 쌓아올렸다. 최하층에는 점성이 강한 점토를 깔고 나뭇가지와 같은 식물을 10여 차례 이상 반복하여 깔았다. 이를 부엽공법(敷葉工法)이라 하는데 성벽의 안전성과 토층 사이의 결합력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것이다. 풍납토성 축조에 사용된 부엽공법은 이후 토성 · 제방 축조에 사용되었다. 사비도읍기에 만들어진 나성도 동쪽 부분은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다. 김제 벽골제의 제방도 발굴 결과, 부엽공법에 의해 만들어졌음이 확인되었다.
백제의 건축물로는 실물이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고, 사서에 이름만 남아 있는 것이 대다수이다. 이 가운데 건물지가 확인된 것으로는 한성도읍기의 경우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 종묘로 보이는 제의 건물지, 웅진도읍기의 경우 공산성 내에서 확인된 임류각지(臨流閣址)와 왕궁지(王宮址), 사비도읍기의 경우 익산 왕궁리에서 발굴되고 있는 궁성 유적 등을 들 수 있다. 경당지구의 제의 건물지는 ‘여(呂)’자형의 건물로서 주변에 도랑을 파서 외부와 격리하고 있다.
백제의 건물지는 가람(伽藍)에 많이 남아 있다. 몇몇 사지(寺址)가 발굴 결과, 군수리사지는 목탑지(木塔址)로 생각되는 방형의 기단을 중심으로 중문(中門) · 금당(金堂) ·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중문 · 강당을 회랑(回廊)으로 연결해 탑과 금당을 둘러싼 일탑식(一塔式) 가람배치였다. 이와 같은 일탑식 가람배치는 금강사지(金剛寺址), 정림사지(定林寺址), 왕흥사지(王興寺址), 능산리폐사지의 발굴조사에서 분명히 밝혀졌다. 미륵사지는 발굴 결과, 중앙에 목탑이 있고 현존하는 서탑과 같은 규모의 석조 동탑이 있었음이 밝혀져 3탑 · 3금당(三塔三金堂)이라고 하는 삼소(三所) 가람의 형식을 취하였다.
현존하는 백제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석탑이다. 석탑은 목탑에서 비롯되었는데 정림사지오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과 미륵사지석탑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미륵사지석탑은 목조건축의 세부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초층(初層) 탑신(塔身)의 부재(部材)는 목조건물의 부재를 모방해 모두 다른 돌을 사용했고, 기둥 위의 3단 층개(層蓋)받침은 공포를 번안한 것이고 옥개석(屋蓋石)이 넓게 퍼져 추녀 끝이 들려 있음도 목조건축의 추녀와 같다.
조각 · 공예 조각과 공예는 재질에 따라 석조, 금속공예, 토기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불상 조각으로는 금동불(金銅佛)과 납석상(蠟石像) 석불(石佛), 소조불(塑造佛) 등이 남아 있다. 한성도읍기 불상으로는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여래좌상(金銅如來坐像)이 있다. 선정인(禪定印)주6을 하고 있는 이 좌상은 북위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웅진도읍기에 와서 서산 보원사지출토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은 일광삼존불상(一光三尊佛像)으로 추정되는데 북위식 복제를 하였다. 사비도읍기에 와서 부여 부소산에서 출토된 금동석가여래입상(金銅釋迦如來立像)은 광배(光背)에 정지원(鄭智遠)이 죽은 처를 추복(追福)하기 위한 명문이 있는데 산동성 제성(諸城)에서 출토된 동위(東魏)의 불상과 닮았다. 부여 군수리사지 목탑의 지하 심초석(心礎石) 부근에서는 납석제 여래좌상과 금동보살입상(金銅菩薩立像)이 발견되었다. 부여 신리에서는 봉보주보살상(捧寶珠菩薩像)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봉보주보살상은 남조와 백제 사이의 문화적 친연성(親緣性)을 잘 보여준다.
석불은 거대한 마애불(磨崖佛)의 형태로 조성되었다. 예산 사면석불은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하고 3면에 여래입상을 각각 1구씩 조각한 것이다. 사면불(四面佛)임에도 전 · 후 · 좌 · 우가 모두 조각된 입체상처럼 입체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상반신은 광배와 넓은 거리를 두고 있고 팔은 따로 조각하여 부착하였다. 태안마애삼존불은 서해에 면한 백화산 정상의 화강암을 조각하여 만든 것으로서 가운데에 작은 봉보주관음상(捧寶珠觀音像)을, 좌우에 키가 크고 체구가 당당한 여래입상을 배치한 것이 특징이다. 6세기 말에 만들어진 이 불상은 항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이 지역의 유력세력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서산마애삼존불은 본존(本尊)은 아미타불(阿彌陀佛), 봉보주보살은 관음보살(觀音菩薩)주7, 반가사유형보살(半跏思惟形菩薩)은 미륵보살(彌勒菩薩)로 추정된다. 7세기 작품이다. 본존은 부드럽고 친근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의 수인을 하고 있다. 이외에 익산 연동리의 불상에서 화려한 광배의 화염문(火焰文)과 7구의 화불의 배치는 일본 법륭사 금당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의 광배와 상통한다.
공예품으로는 도검, 장신구 및 토기 · 기와 · 전 등을 들 수 있다. 근초고왕대에 제작된 칠지도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데 한일고대관계사 연구에 중요한 유물이다. 여기에 새겨진 금상감명문은 백제에서 상감기술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음을 보여준다. 금동관모(金銅冠帽)는 공주 수촌리에서 2점, 서산 부장리에서 1점, 고흥 길두리에서 1점, 천안 용원리에서 1점, 익산 입점리에서 1점, 나주 신촌리에서 1점 등이 발굴되었다. 금동관모의 특징은 정면이 뾰쪽하고 옆에서 보았을 때 반원형을 띠는 고깔형이다. 이 가운데 수촌리와 부장리의 것은 금동판을 투조하여 용과 봉황 등을 표현하였고 입점리와 신촌리의 것은 타출기법(打出技法)으로 제작되었는데 이는 제작 시기의 차이를 반영한다. 수촌리형의 관모는 일본의 강전선산(江田船山) 고분에서도 발굴되었다. 금동신발은 원주 법천리,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고흥 길두리에서 출토되었다. 수촌리와 법천리는 투조기법(透彫技法)으로 ‘T자형’의 무늬와 용문을 새겼고 입점리나 신촌리에서는 타출기법을 사용하였다.
웅진도읍기의 경우 공예의 진수는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이 잘 보여준다. 여기에서는 금제관식(金製冠飾) · 금제귀걸이[金製耳飾] · 은제팔찌[銀製腕飾] · 은제탁잔(銀製托盞) · 두침(頭枕) · 족좌(足座) 등이 출토되었다. 금제관식은 연화문, 인동당초문(忍冬唐草文), 화염문으로 구성되었으며 얇은 금판의 영락에 구멍을 뚫고 금실[金絲]을 꿰어 관식의 겉면을 장식하였다. 왕비의 귀걸이는 중심고리와 노는 고리에 이어 화려한 중간식, 그리고 수하식으로 이어지는 형태이다. 은제팔찌는 겉면에 두 마리의 용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연결되었는데 비늘이나 발톱의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안쪽에는 “庚子年二月多利作大夫人分二百卅朱耳”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520년라는 제작 연대와 제작자를 알 수 있다. 동탁은잔(銅托銀盞)은 동제 받침에 은잔을 붙인 것인데 손잡이 꼭지는 연화 봉우리 형태로 만들었고, 그 아래에 연잎이 조각되어 있으며, 몸통에는 산과 기금과 용 등이 표현되어 있는 걸작이다.
사비도읍기의 공예품으로는 금동합(金銅盒), 장신구, 금동화판(金銅花板), 은제관식 등을 들 수 있다.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금동사리합(金銅舍利盒)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577년에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목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공양한 사실이 새겨져 있다. 사리기는 청동사리합(靑銅舍利盒), 은제사리호(銀製舍利壺), 금제사리병(金製舍利甁)으로 구성되었고 이외에 8,150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들이 공헌되었다. 이 가운데 관모는 투명한 운모와 금판을 여러 번 포개어 연화의 자방과 연판을 표현한 장식을 부착하고 있다. 미륵사지 서탑의 사리공에서는 금동제사리봉안기(金銅製舍利奉安記)를 비롯하여 금동제사리호(金銅製舍利壺)와 장식도자, 소형 금판 등이 출토되었다. 사리봉안기에는 무왕의 왕비인 사택적덕의 딸인 왕후가 왕의 건강을 위해 발원하여 서탑을 세웠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소형 금판에는 금 1만을 시주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은제관식은 좌평에서 나솔에 이르기까지 고위 관료들이 착용한 관모에 장식한 것이다. 장식의 형태는 줄기, 가지, 꽃봉오리, 꽂을 대, 꼭대기의 꽃 등으로 정형화되었다. 특히 부부가 나란히 매장된 능산리의 한 고분에서는 부부 모두가 사용한 은제화형 장식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토기는 고구려 · 신라의 토기와 뚜렷이 구별되는 부드러운 곡선과 정교한 문양, 그리고 때로는 회백색의 기표(器表) · 색조(色調)에서 오는 온건한 조형이 특징이다. 초기에는 흑도(黑陶) 같은 토기가 생산되기도 하였고, 중기 이후에는 삼족기(三足器)가 만들어졌고, 후기에는 청록색 또는 황갈색의 유약을 바른 시유토기(施釉土器)가 제작되었다. 이들 시유토기는 신라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와당은 목조건축의 성행과 더불어 발달하였다. 처음에는 낙랑계(樂浪系)의 영향을 받았으나 6세기 중엽에는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다. 서울 광장동에서 발견된 고식의 연화문 와당을 비롯해 와당에 새겨진 모든 연화는 모가 없이 우아하게 표현된 것이 특징이다. 한편 풍납토성에서는 나뭇잎 모양의 장식을 한 와당이 출토되었다. 미륵사지 · 금강사지 등에서 발견된 연화문 연목와(椽木瓦), 부여 가탑리 출토의 귀면문(鬼面文) 연목와 등의 연화는 매우 아름다게 표현되어었다. 또 미륵사지에서 출토된 녹유를 시유한 와당은 이 건물이 매우 고급스러운 것임을 보여준다.
전(塼)은 묘실축조로 사용되고 있다. 전의 표면에는 기하학적 문양과 연화 · 인동문(蓮花 · 忍冬文) 등이 조각되었다. 표현수법은 다른 유물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온건 · 우아한 품위가 나타나 있다. 이밖에 전돌로는 부여에서 발견된 연화 · 인동문의 상형전(箱形塼)과 부여 규암면 출토의 방형문양전(方形文樣塼)이 있다.
회화와 서예 백제의 회화는 고분에 그려진 벽화 및 무령왕릉 출토품에서 그 대략을 살펴볼 수 있다. 공주 송산리 제6호분은 벽화분인데 전축분으로 벽화를 그릴만한 자리에 진흙을 칠하고 면회(面灰)한 위에 먹과 채색으로 사신도를 그렸다. 지금은 회가 떨어지고 색이 퇴색되어 거의 형태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 사신도는 고구려가 아닌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릉에는 왕비 두침에 세화(細畫)가 그려져 있다. 이 세화는 두침 표면을 옻칠한 다음 귀갑문(龜甲文)을 치고 그 안에 비천(飛天) · 어형(魚形) · 조형(鳥形) · 연화 등을 그렸는데, 어느 것이나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면서도 생동하는 기운을 나타내고 있다.
능산리 동하총 석실분은 곱게 물갈이한 판석으로 조립한 무덤인데 네 벽에 사신도와 천장에 연화와 구름무늬가 그려졌으나 현재는 거의 없어져 백호(白虎)의 머리부분과 연화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연화는 백제 특유의 부드러운 형식이고 운문(雲文)은 비운(飛雲)인데 꼬리가 길게 끌린 양식이 연판(蓮瓣)의 형식과 더불어 고구려와의 연관을 느끼게 한다.
백제의 화가로는 왜에 건너간 아좌태자(阿佐太子)와 백가가 있다. 아좌태자는 왜에 가서 쇼토쿠태자상[聖德太子像]을 그렸다고 한다. 한편 백제는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각종 기술자와 화사(畵師)를 청해와 자신의 문화 수준을 높혔다.
백제의 서예는 기와나 돌에 새겨진 문자, 칠지도를 비롯하여 금속에 새겨진 명문, 목간에 쓰인 문자 등에 의해 살펴볼 수 있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전돌에 새겨진 ‘直’, 토기에 새겨진 ‘大夫’와 ‘井’이라는 글자와 토제(土製) 벼루는 백제가 일찍부터 문자생활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무릉왕릉에서 출토된 묘지석의 글자는 남조와 북조의 해서(楷書)의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무령왕릉 왕비 두침에 쓰여진 ‘甲’과 ‘乙’은 유려하면서 분방한 필체를 보여준다.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는 사육변려문(四六騈儷文)으로 쓰여졌는데 자체는 웅건한 구양순체(歐陽詢體)이다. 한편 최근에 많이 발굴되고 있는 목간에는 다양한 서체들이 쓰여 있어 서예 연구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한편 『남사(南史)』에 의하면 양나라에 파견된 백제 사신이 당시 왕희지체(王羲之體)를 계승한 유명한 서예가 소자운(蕭子雲)에게 금화 수백만을 주고 30여 개의 글씨를 받아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백제 왕실과 귀족들이 서예에 매우 심취해 있던 정황을 보여준다.
백제사 연구의 현황 1980년 이래 백제사 연구 현황은 박사학위논문의 제목을 통해 그 대략적인 흐름을 볼 수 있다. 1980년 이후 백제사와 백제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은 30여명이 되는데 논제(論題)들을 보면 정치사, 제도사, 영역확장사 등이 중심이었다. 근래에 금석문 관련 연구라든가, 불교 관련 논문들이 제출되고 있다. 이는 백제사 연구자들의 관심 분야가 정치사 중심에서 보다 다양한 주제로 확대되어가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고학 분야의 경우 묘제나 고분을 주제로 한 경우나 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금강 유역, 호남 동부, 전라남도 동부 지역 등 각 지역에서 조사 · 정리된 고고자료를 토대로 그 지역의 모습을 밝히려고 한 논문도 나오고 있는데, 이 또한 관심 분야의 확대를 보여주는 것이다.
백제사 연구는 연구자의 수적 증가, 고고자료의 증가에 힘입어 다양한 연구 성과들이 쏟아졌으며 연구 수준도 심화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하게 연구되어 온 성과들을 종합 · 정리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근래에 와서 몇몇 연구 기관에서 이러한 종합 · 정리 작업의 결과를 출간하였다.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에서는 1997년의 『백제의 중앙과 지방』, 2000년의 『백제사상의 전쟁』, 2003년의 『고대 동아세아와 백제』와 『한국의 전방후원분』 등 학술대회를 개최한 결과를 단행본으로 꾸준히 묶어 내고 있다. 백제문화개발연구원에서는 제1권 『백제의 언어와 문학』에서 제28권 『목간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별책으로 『사료로 보니 백제가 보인다(국내편)』 · 『사료로 보니 백제가 보인다(국외편)』와 『최근 발굴한 백제유적』에 이르기까지 31권의 역사문고를 출간하였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는 제1권 『백제사 총론』에서 제15권 『백제의 건축과 토목』에 이르기까지 총 15권으로 이루어진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백제사 연구의 전반적인 흐름을 개관한 것에서부터 백세사의 전개 과정을 정치사 편과 생활 · 문화사 편으로 나누어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전반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에서는 제1권 『성격과 문화기반』에서 제5권 『생활과 문화』에 이르기까지 총5권으로 이루어진 한성백제사를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한성도읍기의 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총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작업이다.
고고학자료를 중심으로 백제사의 흐름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작업으로는 도록을 들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02년에 『특별전 백제』를, 국립부여박물관에서는 2002년 『백제의 문자』에서부터 2006년 『백제의 공방』에 이르기까지 특정한 주제를 고고학 자료로 정리한 교양서를 출간했다. 전라북도 · 전북문화재연구원은 2003년에 『전북지역 백제문화유산』을, 경기도박물관에서는 한성도읍기의 백제관련 유적 유물을 정리하여 2006년에 『한성백제 묻혀진 백제문화로의 산책』을, 국립공주박물관 ·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공주 수촌리 고분발굴을 계기로 금동관과 금동신발 등 위세품을 중심으로 2006년에 『한성에서 웅진으로: 4∼5세기 백제유물 특별전』을 펴냈다. 최근에는 부여 지역뿐만 아니라 익산 · 나주 지역에서 목간이 출토되었다. 이 목간에는 개인 차원의 습자에서부터 국가 행정에 이르기까지 당시 사람들의 사상과 생활 모습을 보여주는 다양한 내용이 쓰여 있다. 이를 종합한 것으로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유산연구소)가 2004년에 펴낸 『한국의 고대목간』과 국립부여박물관이 2009년에 펴낸 『나무 속 암호 목간』이 있다.
백제는 고대동아시아 공유문화권(共有文化圈) 형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에 대한 철저한 검토와 더불어 중국 및 일본 지역에 남아 있는 백제의 유적과 유물을 확인하는 것도 필요하다. 지금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이루어낸 해외 소재 백제 관련 유적 · 유물의 조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Ⅰ』(국립공주박물관, 1999)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Ⅱ』(국립공주박물관, 2000)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Ⅲ』(국립공주박물관, 2002)
『일본소재 백제문화재 조사보고서(日本所在 百濟文化財 調査報告書)Ⅳ』(국립공주박물관, 2004)
『백제문화 해외조사보고서(百濟文化 海外調査報告書)Ⅴ』-중국 강소성 · 안휘성 · 절강성(中國 江蘇省 · 安徽省 · 浙江省)-(국립공주박물관, 2005)
근래 2009년에는 백제학회가 창립되어 관련 학자들의 관심과 지원 속에서 월례발표회학술대회를 개최하고 학보를 발간하는 등 백제사 연구의 지평은 넓어지고 있으며 전망도 밝다.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徐族)=여족(餘族)=여족(余族) =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서성현(徐城縣)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生時正偃,故以爲名。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宮人聞之,更取養之。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及長,襲爲徐君。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으로 변했다. 鵠蒼或名後蒼。」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서국의 쇠퇴와 멸망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중국기록에서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목차
- 1 역대 서국(徐國) 국왕
- 2 백제 부여씨의 분파
- 3 부여 부여씨의 인물
- 4 백제 부여씨의 인물
- 5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 6 일본의 백제계 성씨
- 7 역대 서국(徐國) 국왕
- 8 부여왕 계보
- 9 백제왕 계보
- 10 황룡(黃龍)
- 11 곡창(鹄蒼)
- 12 泰山(태산)=서산(徐山)
- 13 월병(月餠)
- 14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15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16 서귀포(西歸浦)
- 17 서불과차(徐不過此)
- 18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19 고려도경(高麗圖經)
- 20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21 고군산군도
- 22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23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24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25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26 숭렬전(崇烈殿)
- 27 온조왕묘(溫祚王廟)
- 28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 29 삼충제(三忠祭)
- 30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31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32 효양산 은선사
- 33 희성당(希聖堂)
- 34 같이 보기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약 1,000년 동안 북만주에서 부여국을 세워 활동한 예맥족의 종족. 철기를 사용하고 영고(迎鼓)라는 제천 의식을 행하였으며 순장과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2. 우가: 소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3. 구가: 개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4. 저가: 돼지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
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
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