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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6월부터는 밤에도 서문시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큰시장이 문을 닫은 후 야시장을 개장하는 것인데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고 있다. 총 350m의 길이에 달하는 대형 야시장으로 80여 개의 간이 포장마차가 펼쳐진다. 야시장은 매달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대구 시민과 방문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나야키, 삼겹살김밥, 도도감자, 나뭇잎만두 등 인기 메뉴를 파는 포장마차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도 야식 문화의 분위기를 즐기는 표정이다. 야시장 내에는 특색 있는 술집과 버스킹 공연도 있어 맛있는 음식과 함께 길거리 축제도 즐길 수 있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을 파는 곳도 있어서 찾고 싶은 명소가 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서문시장을 전국 단위의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하여 택배 배송시스템을 구축하여 각지에서 주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관광 안내 센터를 야간에도 운영하여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스마트폰 세대를 위하여 서문시장 전용 앱을 개발하였고, 전통시장에는 드문 카드 결제 시스템, 인근 한옥게스트하우스 등이 갖추어져 있어 서비스 면에서 충실함을 확보하고 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며 자타가 인정하는 관광 명소 자리 잡았다. 대구광역시는 2020년 10월 대구관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해외 채널을 통하여 외국인 관광객이 추천하는 ‘대구 핫플레이스’를 설문하였다. 1,834명이 참여한 이벤트 결과 대만 관광객들은 서문시장을 1위로 꼽았다. 대만 관광객은 대구를 방문한 외래 관광객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서문시장에 대한 선호도가 남달랐던 것이다. 글로벌해진 서문시장 덕분에 젊어진 고객을 겨냥하여 상인도 점차 젊어지는 추세이다. 서문시장에 프랜차이즈 카페만 해도 20곳이 넘어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 2016년 6월부터는 밤에도 서문시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큰시장이 문을 닫은 후 야시장을 개장하는 것인데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고 있다. 총 350m의 길이에 달하는 대형 야시장으로 80여 개의 간이 포장마차가 펼쳐진다. 야시장은 매달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대구 시민과 방문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나야키, 삼겹살김밥, 도도감자, 나뭇잎만두 등 인기 메뉴를 파는 포장마차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도 야식 문화의 분위기를 즐기는 표정이다. 야시장 내에는 특색 있는 술집과 버스킹 공연도 있어 맛있는 음식과 함께 길거리 축제도 즐길 수 있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을 파는 곳도 있어서 찾고 싶은 명소가 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서문시장을 전국 단위의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하여 택배 배송시스템을 구축하여 각지에서 주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관광 안내 센터를 야간에도 운영하여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스마트폰 세대를 위하여 서문시장 전용 앱을 개발하였고, 전통시장에는 드문 카드 결제 시스템, 인근 한옥게스트하우스 등이 갖추어져 있어 서비스 면에서 충실함을 확보하고 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며 자타가 인정하는 관광 명소 자리 잡았다. 대구광역시는 2020년 10월 대구관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해외 채널을 통하여 외국인 관광객이 추천하는 ‘대구 핫플레이스’를 설문하였다. 1,834명이 참여한 이벤트 결과 대만 관광객들은 서문시장을 1위로 꼽았다. 대만 관광객은 대구를 방문한 외래 관광객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서문시장에 대한 선호도가 남달랐던 것이다. 글로벌해진 서문시장 덕분에 젊어진 고객을 겨냥하여 상인도 점차 젊어지는 추세이다. 서문시장에 프랜차이즈 카페만 해도 20곳이 넘어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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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씨(徐氏)는 고조선 때 여수기(余守己)가 서씨 성을 하사받은 것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신라 말 고려 초에 서신일(徐神逸)로 이어졌다. 대구에 정착한 것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한 서진(徐晉)이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고 달성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것에서 비롯한다. 이후 후손들이 서진을 시조로 삼고, 달성을 본향으로 세계(世系)를 이었다. [입향 경위] 1424년(세종 6) 달성은 지형이 자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고 있어서 군사를 훈련하고 적을 방어할 요새 구축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달성서씨의 세거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하고 보상책을 논의하였다. 서진의 5세손 서침(徐忱)은 일체의 보상을 사양하는 대신, 고을의 백성들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씩 줄여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세종(世宗)은 서침의 성의를 가상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 특별히 연신지(蓮信池)[현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新池)[현 서문시장 자리] 일대의 토지에 대한 조세 수취권은 물론이고 남산고역(南山古驛)[전 남산병원 일대]과 동산(東山)[현 중구 동산동] 일대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에 달성서씨는 금호강과 연암산 사이의 넓은 들[현 북구 산격동]에 자리를 잡고 세거하게 되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달성서씨는 40만 7431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대구 지역 달성서씨의 관련 유적으로는 중구 동산동의 구(舊) 구암서원(龜巖書院)과 북구 산격동의 현 구암서원, 1758년(정조 34)에 세운 구암서원묘정비(龜巖書院廟庭碑)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동구 도동의 백원서원(百源書院), 수성구 황금동의 덕산서원(德山書院), 달서구 호산동의 이락서당(伊洛書堂)과 낙선재(樂善齋), 북구 산격동의 체화당(棣華堂)과 태전동의 매강정사(梅岡精舍),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의 낙동정사(洛東精舍)와 다사읍 이천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등이 있다. | ||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2024년 11월 9일 (토) 10:47 기준 최신판
서문시장(西門市場=徐門市場 | Seomun Market)
위치는 대구광역시 중구 큰장로26길 45
대구광역시에서 가장 큰 장인 서문시장의 과거와 현재.
조선 중기에 생겨난 대구의 서문시장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커다란 장터라는 의미로 ‘큰 장’으로도 불린다.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 서문시장은 낮에는 큰시장, 밤에는 야시장을 통한 먹거리 상품화가 성행하고 있다.
[대구장에서 서문 전통시장으로]
대구광역시의 대구도시철도 3호선 모노레일을 타고 대봉교역에서 칠곡 경북대학교병원 방향으로 가다 보면 “여어가 대구의 큰 장, 서문시장 아인교”라는 안내 방송과 함께 여러 승객들이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대구도시철도 3호선에서 이용객이 가장 많은 서문시장역 3번 출구로 나오면 ‘서문시장 관광 안내 센터’가 있다. 서문시장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굽이굽이 명소가 숨어 있으며 면적이 방대하므로 처음 방문한 사람이 시장을 속속들이 둘러보기는 쉽지 않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일원에 있는 서문시장의 대지면적은 3만 4974㎡, 건물 연면적은 9만 4244㎡이다. 1지구, 2지구, 4지구, 5지구, 동산상가, 건해산물상가 등 6개 지구로 구성되고, 약 4,500여 개의 점포가 들어서 있다. 노점 620곳을 더하여 상인 수만 해도 2만여 명이다. 서문시장의 북쪽과 서쪽에 있는 대신지하상가는 대구광역시 서구 비산4동까지 뻗어 있다. 매일 7만 명의 손님이 드나드는 대구경북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인 서문시장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문화 관광 해설사의 안내를 받는 것도 좋은 방안이다. 서문시장의 역사는 대구의 운명과 맥을 같이하는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폐허가 된 조선 8도에 물자 조달이 급격히 필요하면서 시장 또한 번성하였다. 특히 1601년(선조 34) 경상감영이 대구에 설치되어 대구는 한층 더 발전하게 되고, 1669년(현종 10) 낙동강 좌우 도로로 분리되어 있던 경상도가 통합됨으로써 대구의 위상이 더 높아졌다. 또한 1677년(숙종 3) 대동법 실시로 현물 납부를 포와 쌀로 대체함으로써 시장 기능이 더욱 활성화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구읍성의 북문 밖에 있던 대구장을 경상감영의 서문 밖으로 이전하면서 시장 이름도 경상감영 서문 밖에 있다 하여 ‘대구 서문시장’이라 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대구장이라 불리며 평양장, 강경장과 더불어 전국 3대 장터로 손꼽혔는데 특히 경상도 내의 5일장들을 연결하여 주는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1922년에는 서문시장이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재정비되면서 위치도 옮겨진다. 원래 천왕당지(天皇堂池)가 있던 자리에 고분군(古墳群)의 흙을 메움으로써 장터를 만든 것이다.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켜 온 서문시장은 광복 이후 6·25전쟁의 위기를 기회로 삼아 또 한번 도약하게 된다. 6·25전쟁 기간 중 비교적 피해가 적었던 대구에는 피난민들이 몰려 인구가 급증하였고 군사 중심지의 위용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가 세워 놓은 섬유공장도 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다시 일으키는 것이 시장의 역할이었다. 휴전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폐허를 되살리기 위하여 섬유 산업을 육성하였다. 대구가 섬유도시로 거듭나는 동안 서문시장은 전국 최대의 의류 도매시장으로 재탄생하였다. 대구 지역 섬유 도매상의 절반 이상이 전국 최고의 포목 판매시장이 된 서문시장에서 영업하게 된 것이다. 서문시장의 직물 도매업은 금세 전국 섬유시장을 석권하였다. 피난민들 또한 당장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하여 서문시장에서 생업을 찾아 나섰고,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모여들자 시장은 늘 북적였다. 서문시장의 주거래 품목은 여전히 주단·포목 등 섬유 관련 품목이며 전국적으로도 원단시장이 유명하다. 서문시장은 대구 최대의 전통시장답게 매일 시민들로 붐비다 보니 정치인들이 홍보를 위하여 찾는 장면도 종종 목격된다.
[배고픈 날엔 서문시장으로 가라]
경부선 철도가 놓이며 물류 이동이 용이하고, 6·25전쟁으로 미국의 구호물자였던 밀가루가 쏟아지자 대구는 국수 생산에 앞장서게 된다. 분지 지형으로 더운 데다 강수량도 적어 국수가 자연 건조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어 대구는 자연히 국수 생산지로 각광받았다. 1980년대 초까지 전국 국수 생산량의 60% 이상이 대구에서 나왔으니 가히 국수의 도시라 부를 만하다. 많이 생산하는 만큼 소비도 많아 대구는 전국 최대의 국수 소비량을 기록하는데 타 도시에 비해 3배나 많은 양을 소비하였다. 이미 1933년 풍국면 국수공장이 설립되었으며, 삼성상회의 별표국수 등 국수 회사들이 대구에 터전을 잡았다. 그리고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국숫집이 서문시장 곳곳에 들어서게 된다. 50여 곳의 칼국숫집이 줄지어 서 있는 서문시장 칼국수골목은 연중무휴로 붐빈다. “칼제비 할머니”라고 부르면 수십 명이 돌아볼 정도로 서문시장에는 칼국숫집이 넘쳐난다. ‘칼제비’는 칼국수와 수제비의 합성어로, 서문시장 제1지구와 제4지구를 이어 주는 육교 아래에 있는 국수골목에서 판다. 청방배추가 푹 삶기도록 끓여 낸 칼국수 국물 안에 아무렇게나 툭툭 뜯어 넣은 수제비가 별미이다. 곁들여 나오는 반찬은 풋고추, 된장, 김치가 전부이지만 저렴한 가격에 양이 풍부하다 보니 서문시장의 칼제비국수는 점심시간에 줄을 서야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국수 외에도 떡볶이, 순대, 돈가스, 납작만두, 유부전골, 양념오뎅, 호떡이 항시 불티나게 팔려 나가기 때문에 식사 시간대를 피하여 가는 것도 서문시장 맛집을 차지하는 팁이라 할 수 있다. 늘 장사진을 이루는 서문시장에 도시철도역이 들어서면서 대구 시민의 발길도 더욱 잦아진 데다 타지 관광객들의 접근도 용이해졌다. 노인들의 단골 명소이던 서문시장은 최근 들어 SNS 바람을 타고 청년들의 핫스폿이 되면서 더욱 생기가 돌고 있다.
[슬픔도 기쁨도 함께 한 서문시장]
1922년 일제는 대구 달성 고분군 등 문화재를 훼손하여 파헤친 흙을 커다란 못에다 가져다 부었다. 대구 각지에는 달성 고분군, 비산동 고분군, 대명동 고분군 등이 있었으나 이와 같은 방식으로 거의 사라지고 현재는 공원이 조성된 불로동 고분군만 남아 있다. 고분의 흙으로 못을 메워 세운 서문시장에는 궂은 일이 종종 생겼다. 특히 대형 화재를 겪고 극복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되었다. 서문시장 화재의 역사를 살펴보면, 우선 1960년대에 일어난 큰불로 시장 전체가 전소된 적이 있다. 그리고 1975년 11월 20일 서문시장 제4지구가 큰불로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20여 년이 지난 1996년 11월 1일에는 서문시장 제2지구 1층 배전판에서 전기 합선으로 추정되는 불이 났다. 이듬해인 1997년 7월 30일에도 누전으로 추정되는 불이 나 서문시장 제2지구 남쪽 건너편 건어물전 밀집 지역에서부터 화재가 발생하였다. 2005년 연말인 12월 29일에는 서문시장 제2지구에서 일어난 큰불로 1,000여 개 점포가 전소하고 683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10여 년이 지난 2016년 11월 30일에는 서문시장 제4지구의 큰불로 679개 점포가 전소하여 피해 금액이 469억 원에 달하였다. 2016년 11월 30일 새벽 2시 8분에 발생한 화재는 이틀이 지난 12월 2일 낮 1시 8분에 진화되었다. 무려 58시간 57분 만에 완진된 것이다. 대구광역시 중구 건설안전과에서는 서문시장 화재 사건을 담은 백서를 발간하여 안전사고 대처의 매뉴얼로 삼고자 하고 있다. 이 백서는 서문시장 제4지구 화재 발생 시점부터 제4지구 건물 철거까지의 상황 대처와 사고 수습 등 전 과정을 담아 향후 유사한 재난 발생 시 참고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화재 피해 초기 대응과 수습, 기관별로 대응한 과정과 피해 상인 지원, 향후 재난 대비 개선 사항 등을 수록함으로써 사고의 발생부터 수습에 이르기까지 현장의 목소리를 최대한 담았다. 특히 전기로 인한 화재 사고가 다수이므로 화재 안전대책이 항시 요구되고 있다. 2020년 9월 11일 오전 7시 30분 서문시장 제2지구 1층 가방가게에서 이유 모를 화재가 발생하였다. 다행히 신축 건물이라 소방시설이 완비되어 있어 스프링클러가 제때 작동하여 불이 진화되었다. 가방가게의 일부가 소실되긴 하였지만 인명 피해가 없었기에 소방시설을 갖춘 혜택을 톡톡히 경험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문시장 키다리아저씨] 2003년부터 대구광역시 수성구청에 쌀을 10톤 트럭째로 기부하는 노인이 화제였다. 해마다 한가위가 다가오면 대구광역시 수성구 수성구민운동장에 10톤 트럭 한 대가 도착한다. 10㎏짜리 쌀 2,000포대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노인의 당부에 수성구청 직원들은 복지관, 경로당 등에 나누어 주기 위한 작업을 하였다. 흔치 않은 기부에 공무원들이 노인의 인적 사항을 알아내고자 하였으나 극구 사양하여 공무원들 사이에서 ‘키다리 아저씨’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노인의 키는 160㎝도 안 되는 왜소한 체구이지만, 동화 속에서 선행을 베푸는 ‘키다리 아저씨’를 연상한 것이다. 노인은 1911년생에 박씨 성을 가졌고 고향이 평안남도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다. 6·25전쟁 와중이던 1·4후퇴 때 41세의 나이로 월남한 뒤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대구 서문시장에서 양복 옷감 도매상을 하며 제2의 삶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1970년 서문시장에 불이 나 ‘키다리 아저씨’의 가게도 소실되는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대구 시민들이 기탁한 성금으로 도움을 받은 것에 크게 감사함을 느껴 ‘형편이 나아지면 반드시 이웃을 돕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뒤 남은 생애 동안 어려운 이웃에게 쌀 배달부가 되는 것이 바람이라던 노인은 2014년 5월, 9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자녀들이 아버지의 당부를 이어받아 해마다 기부의 규모를 늘려 10㎏짜리 쌀 2,000포대와 라면 1,200박스를 기증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하는 선친의 방식도 고수하고 있다. 대구광역시 수성구청은 기부받은 쌀과 라면을 관내 주민센터와 경로당 60곳, 사회복지시설 41곳, 새터민 가정, 무료 급식소 등에 나누어 주고 있다.
[낮에는 큰시장 밤에는 야시장]
2016년 6월부터는 밤에도 서문시장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아침부터 시작하는 큰시장이 문을 닫은 후 야시장을 개장하는 것인데 저녁 7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고 있다. 총 350m의 길이에 달하는 대형 야시장으로 80여 개의 간이 포장마차가 펼쳐진다. 야시장은 매달 100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찾는 대구 시민과 방문객의 필수 코스가 되었다. 하나야키, 삼겹살김밥, 도도감자, 나뭇잎만두 등 인기 메뉴를 파는 포장마차 앞에는 길게 줄이 늘어서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지나가는 사람도 야식 문화의 분위기를 즐기는 표정이다. 야시장 내에는 특색 있는 술집과 버스킹 공연도 있어 맛있는 음식과 함께 길거리 축제도 즐길 수 있다. 먹거리뿐만 아니라 아이디어 상품을 파는 곳도 있어서 찾고 싶은 명소가 되고 있다. 대구광역시는 서문시장을 전국 단위의 대표 관광지로 육성하기 위하여 택배 배송시스템을 구축하여 각지에서 주문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관광 안내 센터를 야간에도 운영하여 이용객들의 편의성을 높이고 있다. 스마트폰 세대를 위하여 서문시장 전용 앱을 개발하였고, 전통시장에는 드문 카드 결제 시스템, 인근 한옥게스트하우스 등이 갖추어져 있어 서비스 면에서 충실함을 확보하고 있다. 2017년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한국관광의 별’에 선정되며 자타가 인정하는 관광 명소 자리 잡았다. 대구광역시는 2020년 10월 대구관광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해외 채널을 통하여 외국인 관광객이 추천하는 ‘대구 핫플레이스’를 설문하였다. 1,834명이 참여한 이벤트 결과 대만 관광객들은 서문시장을 1위로 꼽았다. 대만 관광객은 대구를 방문한 외래 관광객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데 서문시장에 대한 선호도가 남달랐던 것이다. 글로벌해진 서문시장 덕분에 젊어진 고객을 겨냥하여 상인도 점차 젊어지는 추세이다. 서문시장에 프랜차이즈 카페만 해도 20곳이 넘어 여느 관광지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서씨(徐氏)는 고조선 때 여수기(余守己)가 서씨 성을 하사받은 것에 연원을 두고 있다. 이후 신라 말 고려 초에 서신일(徐神逸)로 이어졌다. 대구에 정착한 것은 고려시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등을 역임한 서진(徐晉)이 공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책봉되고 달성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은 것에서 비롯한다. 이후 후손들이 서진을 시조로 삼고, 달성을 본향으로 세계(世系)를 이었다. [입향 경위] 1424년(세종 6) 달성은 지형이 자연적으로 높은 성벽을 이루고 있어서 군사를 훈련하고 적을 방어할 요새 구축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달성서씨의 세거지를 다른 곳으로 이전하도록 하고 보상책을 논의하였다. 서진의 5세손 서침(徐忱)은 일체의 보상을 사양하는 대신, 고을의 백성들이 납부하는 환곡(還穀)의 이자를 다섯 되씩 줄여 달라고 청하였다고 한다. 세종(世宗)은 서침의 성의를 가상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 특별히 연신지(蓮信池)[현 영선시장 자리]와 신지(新池)[현 서문시장 자리] 일대의 토지에 대한 조세 수취권은 물론이고 남산고역(南山古驛)[전 남산병원 일대]과 동산(東山)[현 중구 동산동] 일대의 땅을 하사하였다. 이에 달성서씨는 금호강과 연암산 사이의 넓은 들[현 북구 산격동]에 자리를 잡고 세거하게 되었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15년 현재 달성서씨는 40만 7431명으로 조사되었다. [관련 유적] 대구 지역 달성서씨의 관련 유적으로는 중구 동산동의 구(舊) 구암서원(龜巖書院)과 북구 산격동의 현 구암서원, 1758년(정조 34)에 세운 구암서원묘정비(龜巖書院廟庭碑)가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동구 도동의 백원서원(百源書院), 수성구 황금동의 덕산서원(德山書院), 달서구 호산동의 이락서당(伊洛書堂)과 낙선재(樂善齋), 북구 산격동의 체화당(棣華堂)과 태전동의 매강정사(梅岡精舍), 달성군 화원읍 성산리의 낙동정사(洛東精舍)와 다사읍 이천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등이 있다.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고려말조선 문신.
이천서씨(利川 徐氏)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의 12세손이다.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 달성군)
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고조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증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본인: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작은아버지: 서익진(徐益進 종2품 판전객시사)
작은증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작은증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본관은 달성서씨.
묘소는 대구광역시 동구 용수동 산125
徐沈(서침)은 字(자)가 聖默(성묵)이고 號(호)는 龜溪(구계)이며 鄭圃隱(정포은)의 문인으로서 性理學(성리학)을 연구한 문인이요 벼슬은 朝奉大夫(조봉대부) 典醫小監(전의소감) 中樞院事(중추원사)를 지냈었고 世宗(세종)때 三南均田制處使(삼남균전제처사)가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達城(달성) 안을 군사상 요지로 쓰기위하여 南山(남산) 옛 驛(역) 터를 대신주고 蓮信池(연신지)와 新池(신지)의 이권도 주며 대대로 벼슬과 녹을 주도록 명령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며 한집안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보다는 모든 백성이 은택을 두루 입게하소서 하고 이 지방에서 바치는 環穀(환곡) 한 섬에 다섯 되씩 감해줄 것을 청하여 위에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그대로 실시하여 5백 여 년을 계속해 내려왔으니 공의 은혜를 앙모함이 있어 이제 저 顯宗(현종)때에 龜巖書院(구암서원) 崇賢祠(숭현사)를 세워 공과 공의 종족으로 이름난 이들을 제사 해 왔던 것만으로 족할 것이라 헤아려 보건데 徐氏(서씨)가 達城(달성)에 터를 잡았던 것이 高麗(고려) 靖宗(정종) 시대라 구백여년 전이요 또 이 터를 나라에 바친 것은 世宗(세종) 시대라 오백 여년인데 공의 은혜로 徐氏(서씨) 문중에서 四佳(사가) 서거정선생과 樂齋(낙재) 서사원선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현 달사들을 배출한 것은 진실로 덕을 끼친 때문이 아니랴.
이천서씨(利川 徐氏)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의 12세손이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1]]
[[2]]
달성공원 서침나무
구계 서침선생이 헌납한 달성공원에는 수령 300년이 넘는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나무는 한때 서침의 세거지였던 이곳을 지켜주는 수문장이다. 그의 올곧은 인품을 상징하여 '서침나무'라 불린다. 이 노거수는 대구시 보호수(지정번호 1-3)로 지정된 나무이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구암서원(龜巖書院)
소재지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후기 서침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675년(숙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현사, 3칸의 신문(神門), 5칸의 강당 등이 있다.
사우인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대구 구암서원은 숭현사는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또한 대구시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서원이기도 하다.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79년 유림과 본손 합의에 의해 서원수계를 받았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됐다고 1924년 유림에서 복설했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이 증수됐다. 숭현사를 1974년 보수하고 1975년 2월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됐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 내로 옮겼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이유는 애민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구계선생은 조선 초 달성 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으며 임금이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땅을 내주는 대신 지금의 영선시장과 서문시장 자리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했다. 또한 남산고역과 동산일대 땅을 주고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구계선생이 이를 백성들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가문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칭찬한 뒤 대구 도호부에서 이를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대구부민은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침의 은혜에 백성들은 감동했고 1665년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를 세워 선생을 모셨다. 후대에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이어졌으며 1971년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달성서씨대종회가 문중 서원 격인 옛 구암서원 소유권을 무상으로 대구 중구에 넘긴다.
6일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달성서씨대종회는 동산동·약령시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추진을 위해 옛 구암서원(약 2500㎡)을 중구청에 기부하기로 했다.
구계 서침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옛 구암서원은 북구로 이전하기 전 자리했던 터로 현재는 한옥 숙박 등 전통문화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구암서원. 달성 서씨 문중이 서원을 중구에 기부채납함으로써 이 공간은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주요 거점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구는 국가공모에 선정돼 이 일대를 대상으로 뉴딜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이 본격화되면 옛 구암서원은 고택 문화 전시와 숙박 체험이 가능하고 공연이 상설화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구는 이 일대에 한옥이 밀집해 있는 점과 연계해 새로운 관광코스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근대문화골목과도 맞닿아 있어 많은 관광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중구청은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생활 인프라 개선, 골목경제 활성화 등도 추진할 방침이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달성서씨대종회가 옛 구암서원을 중구 구민과 대구시민을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의미있는 결정을 해주신 데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뉴딜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기부채납 업무 협약식은 권영진 대구시장, 류규하 중구청장, 서영택 달성서씨대종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19년 12월 7일 오전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렸다.
서문시장(西門市場)
서문시장(西門市場)은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재래시장으로, 대구 최대의 재래시장이다. 칠성시장과 함께 대구의 2대 장터를 이루고 있으며, 대구장이라고 불리던 조선 시대부터 서울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발전하여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주로 섬유와 직물 품목을 취급하고 있으며, 대구권의 중심 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6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고 지구 내에 4천 여개의 점포가 입주해 있으며, 주위에도 다양한 상권이 발달(동산상가, 건해산물 등)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