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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서족]](중국어: 畲族 Shezú[*], 중국조선어: [[써족]])
 
[[서족]](중국어: 畲族 Shezú[*], 중국조선어: [[써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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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동이)|서족]](徐族)=[[여족(동이)|여족]](餘族)=[[여족(부여)|여족]](余族) =[[도족(부여)|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동이시조의 한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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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동이)|서족]](徐族)=[[여족(동이)|여족]](餘族)=[[여족(부여)|여족]](余族) =[[도족(부여)|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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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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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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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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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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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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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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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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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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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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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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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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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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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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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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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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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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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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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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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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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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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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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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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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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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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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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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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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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현]](徐城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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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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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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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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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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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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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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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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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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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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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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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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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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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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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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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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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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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時正偃,故以爲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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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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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人聞之,更取養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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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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及長,襲爲徐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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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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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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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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鵠蒼或名後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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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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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의 쇠퇴와 멸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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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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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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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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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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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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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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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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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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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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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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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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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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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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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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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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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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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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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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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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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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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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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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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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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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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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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기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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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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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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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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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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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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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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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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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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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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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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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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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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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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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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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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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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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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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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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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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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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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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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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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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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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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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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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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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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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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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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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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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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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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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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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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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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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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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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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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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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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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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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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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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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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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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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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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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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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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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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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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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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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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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룡(서언왕)|황룡]](黃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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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黃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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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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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서언왕)|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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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황룡(서언왕)|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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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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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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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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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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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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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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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창]](鹄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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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창(鹄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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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개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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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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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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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泰山(태산)=[[서산]](徐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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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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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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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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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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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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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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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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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병]](月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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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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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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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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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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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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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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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명나라)|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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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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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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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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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명나라)|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명나라)|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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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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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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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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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달(명나라)|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명나라)|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명나라)|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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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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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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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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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진나라)|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진나라)|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진나라)|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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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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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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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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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귀포(제주)|서귀포]](西歸浦)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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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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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불과차]](徐不過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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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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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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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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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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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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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진나라)|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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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과 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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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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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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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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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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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복(진나라)|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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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도경]](高麗圖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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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이 지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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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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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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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군산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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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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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 [[서긍(송나라)|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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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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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만금 [[서긍(송나라)|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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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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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송나라)|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송나라)|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482번째 줄: 823번째 줄: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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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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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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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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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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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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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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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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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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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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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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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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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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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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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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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서씨]]
 +
* [[멕시코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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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아서씨]]
 +
* [[헝가리서씨]]
 +
* [[중앙아시아서씨]]
 +
* [[카자흐스탄서씨]]
 +
* [[우즈베키스탄서씨]]

2024년 11월 5일 (화) 21:29 기준 최신판

서족(중국어: 畲族 Shezú[*], 중국조선어: 써족)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徐族)=여족(餘族)=여족(余族) =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한국의 서씨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서성현(徐城縣)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生時正偃,故以爲名。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宮人聞之,更取養之。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及長,襲爲徐君。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으로 변했다. 鵠蒼或名後蒼。」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서국의 쇠퇴와 멸망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중국기록에서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중의 하나이다.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공인한 56개의 소수민족 중 20번째로 많은 민족으로 중국의 2000년 통계에 의하면 709,592명이 살고 있고, 야오족과 먀오족과 관련이 깊다.

서족은 푸젠성에서 가장 많은 소수 민족이다. 또 저장성, 장시성, 광둥성, 안후이성 등에도 많은 서족들이 분포하고 있다. 푸젠 성 린장 현에는 소창 서족향이 있고, 저장 성에는 징닝 서족 자치현이 있다.


현재 서족의 대부분은 근처의 하카와 같이 중국어의 여러 어군 중의 하나인 하카어를 쓴다. 독자적인 언어인 서어중국어: 畲语는 몽몐어족에 속하며, 광둥성에 1,200여명 가량의 화자가 있다.

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56개 민족의 하나로 동남부의 소수민족이다. 현재 주요 분포지역은 저장성(浙江省) 징닝쉐족자치현(景宁畲族自治县, 경녕사족자치현) 및 푸젠성(福建省), 장시성(江西省), 광둥성(广东省), 안후이성(安徽省) 등지의 산간지역에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이 한족과 함께 거주한다. 2000년 통계조사에 따른 인구는 70.9만으로 55%가 푸젠성(福建省), 27.4%가 저장성(浙江省), 12.1%가 장시성(江西省), 4.2%가 광둥성(广东省)에 거주하고 있다. 서족(畲族, 사족)은 한족의 객가인(客家人)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언어와 풍습에 있어 상당히 유사하다.

써족의 주요 거주지는 중국 동남부의 구릉지대로서 평균 해발이 500-1,500m에 해당되는 지역이며 산들이 중첩되고 있다. 또한 해양과도 가까워서 습기가 많다.

써족 거주 지역은 대개 토양이 비옥하며 물산이 풍부하다. 주요 농산품으로는 쌀, 고구마, 보리류, 유채(油菜), 콩류, 담뱃잎 및 감자 등이다. 산지(山地)에서는 대나무 및 다양한 종류의 목재가 많이 생산된다. 써족 주요 거주지의 토산품은 찻잎, 순간(筍干), 땅콩, 유차(油茶), 마(麻), 향고(香菇)버섯, 장뇌(樟腦), 송유(松油)와 각종 약재가 있다. 복건성과 절강성의 찻잎은 명성이 높다. 써족 지역 산지에는 광산자원도 풍부한데 석탄, 철, 금, 구리, 석묵(石墨), 석고(石膏), 유황(硫黃), 운모(雲母) 및 도자기 흙 등과 각종 유색금속이 매장되어 있다.

써족의 민족 기원에 관해서는 견해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풍속 및 문화 등 연구 결과 일반적으로 써족은 요족(瑤族)의 한 갈래가 발전하여 독립된 민족 공동체를 형성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써족은 고대 양자강 하류에 분포하였던 월인(越人)의 후예이며 특히 그중에서도 춘추전국 시대의 월왕(越王) 구천(句踐) 또는 범려(范蠡)의 자손으로서 진한(秦漢) 시대 백월(百越)의 후예 또는 한진(漢晋) 시대 월(越)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써족의 발원지에 관하여는 각지의 써족 지계(支系) 모두 광동성 조주부(潮州府)의 봉황산(鳳凰山)을 민족의 발상지로 인식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써족의 시조인 반호(盤瓠)가 봉황산에 묻혀 있다고 하며, 써족 여성의 머리장식이 봉황양식인 것도 봉황산에 묻힌 시조를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서기 7세기 초 수당(隋唐) 교체기에 써족은 이미 오늘날의 복건성, 광동성 및 강서성이 접경하는 산악지대에서 거주하였다. 송(宋)대에는 복건성의 중부와 북부 일대로 계속 이주하였으며 명청(明淸) 시대에 복건성 동부 및 절강성 남부의 산악지역에 대거 출현하였으며 이 시기에 한족이 이주해 오면서 기본적으로 오늘날의 분포상황을 형성하였다. 강주(江州) 동북부의 써족은 원래 광동성 조주부(潮州府)의 봉황산에 거주하였으나 후대에 복건성 정주부(汀洲府)의 영화현(寧化縣)으로 이주하였다가, 대략 송원(宋元) 시대부터 명대 중엽 이전까지 강서성의 동북지역으로 재차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안휘성의 써족은 약 1백여 년 전에 절강성의 난계(蘭溪), 동려(桐廬) 및 순안(淳安)현 등에서 이주하였다.

써족은 역사적으로 한족과 오랜 동안 함께 살거나 교류를 하여 왔기에, 사회발전 및 경제수준 등이 한족과 비슷한 단계에 있어 왔다.

써족이 자신을 부르는 명칭은 “산커”(山客), “산거”(山蛤), “산다”(山達) 등인데, 이 가운데 “거”(哈)와 “다”(達)는 ‘손님’(客人)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써족의 자칭은 ‘산에 사는 손님’ 또는 ‘산을 타고 찾아 온 사람들’이란 뜻이다. 이러한 명칭은 이 종족집단이 대대로 산간지대에서 거주하여 온 역사를 반영한 것이다. 한족이 부르는 명칭인 ‘畬族’(여족, 한어 발음으로는 “써”족)은 화전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란 뜻으로, 남송(南宋) 말기의 사서(史書)에 ‘畬民’(여민) 이라는 기록에서 유래되었으며 당시 이들이 산간에 거주하며 화전(火田)을 경작했던 사실과 관계가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1954년부터 1960년까지 진행된 제2단계 민족조사 및 식별사업을 거쳐 1964년 중국의 제2차 전국 인사조사시에 새롭게 인정된 15개 소수민족에 포함되었으며, 동 민족 집단의 공식명칭을 ‘畬族’(여족, “써”족)이라고 정하였다.

써족의 언어는 시노 · 티베트 어계(漢藏語系)의 묘 · 요 어족(苗瑤語族)에 속한다. 실제 생활에서 써족 대부분은 한어(漢語)의 객가(客家) 방언에 매우 가까운 언어를 사용하나 발음상에 객가어(客家語)와는 다소 다르다. 광동성의 혜양(惠陽), 해풍(海豊), 증성(增城) 및 박라(博羅) 일대에 거주하는 써족은 묘어 갈래(苗語支)의 포노어(布努語)에 가까운 언어를 사용한다. 써족은 대개 거주지 한어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써족은 역사적으로 고유한 민족문자가 없으며 한문(漢文)을 통용하여 왔다.

2000년 현재 써족의 6세 이상(6세 포함) 전체 인구의 최종학력 비율을 살펴보면, 미취학자가 9.44%이며, ‘문맹 퇴치반’ 과정 3.43%, 초등학교 과정 49.73%, 중학교 과정 28.59%, 고등학교 과정 4.54%, 중등전문학교 과정 2.34%, 초급대학 과정 1.11%, 대학 과정 0.64%, 대학원 과정 0.03%이다. 한족 및 중국 전체 인구 평균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학력수준이 다소 낮다.

써족의 산가(山歌)는 민족적 특색이 잘 나타나며 써족 민간문학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산가 가운데 써족의 민족기원과 이동과정을 나타내는 《고황가(高皇歌)》와 《인표왕가(麟豹王歌)》가 있고 또한 노동과 생활을 찬양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잡가’(雜歌), 그리고 한족 소설이나 써족 신화전설 등에서 소재를 따온 《종경기(鍾景祺)》, 《난전옥(蘭佃玉)》 같은 ‘소설가’(小說歌)가 있다.

써족의 전통가요를 부르는 형식은 독창, 대창(對唱), 제창(齊唱) 등의 일반적인 방식 이외에 ‘쌍조락’(雙條落)이라고 부르는 두 목소리의 부분 이중창이 있는데 이는 한 사람이 2개 글자 또는 4개 글자를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다시 따라 부르는 방식이며, 이는 중국 내 민가(民歌) 부르는 방식 가운데 매우 드문 형식이다.

써족의 민간 공예예술에는 민족의 특색이 잘 나타나는데, 특히 복식의 자수와 두립(頭笠)의 편직(編織)방식이 대표적이다. 써족 부녀자들은 의상과 치마에 각종 꽃과 새 모양은 물론 기하문양을 자수(刺繡)한다. 써족의 두립(頭笠)과 합수건(合手巾)은 편직(編織)형식으로 만드는 특색 있는 민간공예로 명성이 있다.

써족은 복장에서 청색(靑色)과 남색(藍色)을 숭상한다. 남자들의 복장은 한족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자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상의에 자수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복건성 복정(福鼎)과 하포(霞蒲)지역의 써족 부녀자들은 상의의 옷깃, 우측 깃(右襟), 소매 끝 등 거의 모든 곳에 꽃과 새, 봉황 등의 문양을 자수로 장식하였다. 써족 여성들의 복장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봉황장(鳳凰裝)이다. 홍색의 머리끈으로 머리 정상부분을 꾸며 봉황의 머리를 나타내며, 상의와 치마 등에도 홍색, 황색 실 및 금실, 은실 등으로 테두리에 자수를 놓아 봉황의 목, 몸체 및 깃털을 나타낸다. 또한 허리 뒷부분에도 장식을 하여 봉황의 꼬리를 상징하고 전신에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은(銀)장식을 하여 봉황의 소리를 나타낸다.

최대 분포지인 복건성에는 중국 내 써족 전체 인구의 약 52.9%인 375,193명이 거주한다 (복건성 전체 인구인 34,097,947명의 약 2.1%임). 또한 절강성에도 중국 내 써족 전체 인구의 약 24.1%인 170,993명이 거주한다. 이외에 강서성(77,650명), 귀주성(44,926명)에 다수 거주하며 여타 각 성급 행정구역에는 각기 1천 명 미만의 극소수 써족이 산재한다.

2000년 현재 써족은 향촌지역 거주비율이 75.65%로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 평균치와 같지만 한족(61.83%) 및 중국 전체 인구 평균(63.08%)에 비하여 다소 높다. 반면 도시지역 거주비율 12.26%와 준도시화 지역인 진(鎭) 거주비율 11.18%는 중국 내 전체 소수민족의 도시 및 진(鎭) 거주비율인 11.87% 및 11.57%와 거의 같다.

써족의 산가(山歌)는 민족적 특색이 잘 나타나며 써족 민간문학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산가 가운데 써족의 민족기원과 이동과정을 나타내는 《고황가(高皇歌)》와 《인표왕가(麟豹王歌)》가 있고 또한 노동과 생활을 찬양하거나 애정을 표현하는 ‘잡가’(雜歌), 그리고 한족 소설이나 써족 신화전설 등에서 소재를 따온 《종경기(鍾景祺)》, 《난전옥(蘭佃玉)》 같은 ‘소설가’(小說歌)가 있다.

써족의 전통가요를 부르는 형식은 독창, 대창(對唱), 제창(齊唱) 등의 일반적인 방식 이외에 ‘쌍조락’(雙條落)이라고 부르는 두 목소리의 부분 이중창이 있는데 이는 한 사람이 2개 글자 또는 4개 글자를 선창하면 다른 사람이 이어서 다시 따라 부르는 방식이며, 이는 중국 내 민가(民歌) 부르는 방식 가운데 매우 드문 형식이다.

써족의 민간 공예예술에는 민족의 특색이 잘 나타나는데, 특히 복식의 자수와 두립(頭笠)의 편직(編織)방식이 대표적이다. 써족 부녀자들은 의상과 치마에 각종 꽃과 새 모양은 물론 기하문양을 자수(刺繡)한다. 써족의 두립(頭笠)과 합수건(合手巾)은 편직(編織)형식으로 만드는 특색 있는 민간공예로 명성이 있다.

써족은 복장에서 청색(靑色)과 남색(藍色)을 숭상한다. 남자들의 복장은 한족과 거의 차이가 없다. 여자들은 거주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는데 공통적인 특징은 상의에 자수를 많이 한다는 것이다. 특히 복건성 복정(福鼎)과 하포(霞蒲)지역의 써족 부녀자들은 상의의 옷깃, 우측 깃(右襟), 소매 끝 등 거의 모든 곳에 꽃과 새, 봉황 등의 문양을 자수로 장식하였다. 써족 여성들의 복장 가운데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봉황장(鳳凰裝)이다. 홍색의 머리끈으로 머리 정상부분을 꾸며 봉황의 머리를 나타내며, 상의와 치마 등에도 홍색, 황색 실 및 금실, 은실 등으로 테두리에 자수를 놓아 봉황의 목, 몸체 및 깃털을 나타낸다. 또한 허리 뒷부분에도 장식을 하여 봉황의 꼬리를 상징하고 전신에 부딪칠 때마다 소리가 나도록 은(銀)장식을 하여 봉황의 소리를 나타낸다.

써족은 산지에 주거함에 따라 과거에는 산지에서 재배가 잘 되는 고구마가 주식이었다. 그래서 써족 사회에는 “늙을 때까지 고구마 요리를 먹는다(番薯絲吃到老)”라는 말까지 있다. 오늘날 써족의 주식은 쌀이고 이외에 밀, 보리, 고구마류 및 콩류 등 다양한 잡곡을 보조식량으로 먹는다. 부식으로 육류와 사계절 채소를 먹는다.

써족 남성은 술을 매우 좋아하며 절강성 경녕(景寧)지역의 써족은 토속주인 녹곡주(綠曲酒)를 즐겨 마시며 복건성 복안(福安)지역의 써족은 고구마로 만든 번서주(番薯酒)를 즐겨 마신다.

써족의 전통적인 주택은 거주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 복건성 경녕(景寧)지역의 써족은 황토로 담벽의 토대를 만들고 허리 이상의 윗부분에는 나무를 가로질러 골격을 만든 후 대나무나 나뭇가지 등으로 밖을 덮은 후에 그 사이는 흙으로 채우는 방식으로 집을 짓는데 이를 진흙 집인 이간(泥間)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지역에는 흙과 나무를 이용하여 짓는 와방(瓦房)이 보편적이다.

또한 복건성 복안(福安)지역의 써족은 과거에 대나무로 건물 골격을 만들고 대나무 또는 갈대 줄기 등을 엮어 벽을 구성하고 지붕에는 풀이나 나무껍질 등으로 덮는 방식으로 집을 지었는데, 이를 현초료(懸草寮)라고 부른다. 오늘날 이 지역의 써족은 2층 또는 3층집을 지어 사는데, 위층에는 일반적으로 사람이 거주하지 않고 식량이나 물건을 둔다.

써족은 분산하여 사는데 대개 몇 가구 또는 수십 가구가 모여 자연적으로 촌락을 형성하였다. 또한 주변에 한족 마을들이 많다. 써족 마을에는 동성동조(同姓同祖)로 공유되는 ‘사당’(祠堂)과 혈연적 유대로 구성되는 ‘방’(房)5)이라는 사회생활 단위조직이 있다.

써족은 일반적으로 같은 성(姓)과는 결혼하지 않으며 특히 반호(盤瓠) 전설에 등장하는 성(姓)끼리는 혼인이 규제되고 있다. 성이 같더라도 조상이 다르면 결혼을 할 수는 있지만 매우 드물다. 2000년 현재 써족의 다른 민족과 통혼율(通婚率)은 49.9%로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통혼율이 6번째로 높다.(2000년 중국 인구조사통계)

여자들이 시집을 갈 때는 일반적인 예물 이외에 농기구와 두립(頭笠), 사의(簑衣: 띠 또는 짚으로 만들어 비올 때 입는 옷)를 가져간다.

써족 사회는 역사적으로 화장(火葬)이 성행하였으나, 20세기 전반기에는 토장(土葬)이 보편적으로 행하여졌다. 장례의식 및 절차는 한족과 거의 같다.


역사적으로 써족은 장기간 한족과의 교류와 접촉을 통하여 한족의 문화와 관습 등을 많이 수용한 결과 전통명절과 절기에 있어서도 한족의 명절과 절기의 대부분을 지낸다. 즉 춘절(春節: 구정), 원소절(元宵節: 정월 대보름), 청명절(淸明節), 단오(端午), 중추절(中秋節: 추석), 중양절(重陽節), 동지절(冬至節) 및 제석(除夕) 등을 지낸다.

한화(漢化)의 정도가 깊은 영향으로 민족의 역사가 오래되고 인구가 많은 다른 소수민족들과는 달리, 써족 단독의 고유한 명절과 절기는 없으며 다른 소수민족들과 공통으로 지키는 절기가 있다. 예를 들어, ‘삼월삼’(三月三)에는 잡곡밥을 만들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사월팔’(四月八)에는 산에 올라 노래를 부르고(對歌) 찹쌀밥 또는 보리밥 등을 먹는다. 조상 숭배를 중시하여 3년에 1번씩 대제(大祭)를 열기도 한다. 절기 중에는 금기도 많은데, 예를 들어, 2월 19일의 관음(觀音) 탄신일에는 분뇨를 버리지 않아야 하며 3월 3일에는 밭에서 일하지 않는다.

써족의 전통적인 신앙은 조상숭배이다. 써족은 민족 시조신인 반호(盤瓠)와 역대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매우 경건하게 지내는데 씨족 토템신앙과 전설 그리고 관련된 노래와 화상(畵像)이 전해져 내려온다. 민간신앙 중에는 다신숭배도 많이 남아있다. 이외에도 일부 지역에는 불교, 도교, 천주교와 개신교를 신봉하기도 한다.


써족은 1개의 현급(縣級) 민족자치구역이 있는데 주요 거주지인 절강성에 경녕 써족 자치현(景寧畬族自治縣, 1984.12.24 설립)이 있다. 이외에 복건성, 절강성 및 강서성 등지의 써족 밀집 지역에 약 30여 개의 써족 민족향(民族鄕)이 있다.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부여족(扶餘族)

서씨

檀君時代(단군시대) 예국(濊國) 군장 여수기(餘守己)라는 사람이 9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에게 고을을 나누어 다스리게 한즉 선정을 베풀었다 하여, 그 공을 못잊어 백성들이 "여러 사람이 고마움의 뜻을 표한다"하여 중인변을 부쳐 余자를 徐라고 고쳐 사성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동이족의 대영웅으로 우리는 지나(중국)의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蚩尤天王:배달국 제 14세 한웅인 자오지 한웅)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동이족의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 때 은의 침입을 받자, 조선은 은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지나 춘추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徐偃王)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동이족(東夷族), 아니 한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徐偃王)과 서이족=서씨족(徐夷族=徐氏族)=서씨족(徐氏族)=부여족(扶餘族)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서언왕은 중원에 진출한 동이족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끈 인물이다. 신시 배달로부터 개시된 동방민족(東方民族:동이족)의 중원개척사는 발해 연안을 발판으로 단군조선 때 까지 계속되었다. 한족 문헌에 동이 사람으로 명시된 인물은 신시(神市:배달국)의 태호복희(풍씨로, 동이족의 한 갈래인 풍이족의 조상), 염제신농, 청구(靑邱:배달국을 달리 이르는 말)의 치우천왕, 소호금천, 지나의 성군으로 알려진 순임금, 주 무왕을 도와 은 주왕을 토멸한 강태공 여상, 그리고 마지막 인물이 바로 지나족들이 치우천왕만큼 두려워한 서언왕(徐偃王)이다   고조선 시대 창의(昌意) 계통 백익(伯益)은 하우(夏禹)의 보좌관으로 공이 있어 아들 약목(若木)을 하대(夏代)에 서국(徐國)에 봉하였으니 서국은 하, 상, 주 대까지 제후국으로 건재하였으며 서성(徐姓)이 발생했다. 주나라 성왕은 四夷(동이)에 선린융화 정책을 실시하였고, 강왕 때 주(周)의 정책이 강성(强性)을 띠므로 숙신은 주(周)를 견제하기 위하여 서국(徐國)과 친선을 도모하여 동쪽(동이) 서언(徐偃)에게 왕을 호칭하게 하여 서언왕이라 하였다. 서언왕은 동이의 세력을 규합하고 주(周)에 대한 총력전을 실시하여 종주(장안과 낙양)까지 공략하여 주(周)의 세력을 쇠약하게 하고 주나라 소왕을 물에 빠져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주나라 목왕때 숙신은 서언왕을 회대 지역에서 이족(동이)의 대표로 하여 주(周)를 견제하고 주(周)에 대항하니 주나라 목왕은 동방의 동이 세력이 막강한 것을 두려워하여 서언왕에게 백(伯)의 직위를 주어 주(周)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정책을 폈다. 주나라 목왕은 초나라를 이용하여 서언왕을 제압하고 중원의 패자가 된 후 견융을 정벌코자 하나 실패하고 제후국들 사이도 나빠졌다. BC.512년 서국(徐國)은 오나라에게 멸망하고 서자 후대에 서씨(徐氏)라 하여 명성있는 세가대족(世家大族)으로 산동 연주 동해에 거처하였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최초의 부여씨 서부여왕 여현(현왕)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현

여울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부여성충(성충)(夫餘成忠): 백제의 좌평(佐平).

부여질(夫餘質): 8대 고이왕의 숙부.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훈해 - 15대 침류왕의 차남.

부여설례 - 15대 침류왕의 3남.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신제도원 - 17대 아신왕의 공주.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태아랑왕 - 진손왕의 아들. 진이왕의 증조부.

부여기

부여례 - 21대 개로왕의 사위.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순타태자 - 25대 무령왕의 아들.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사아군 - 순타태자(여순타)와 동일인물?

임성태자 - 아좌 태자와 동일인물?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아좌 태자 - 27대 위덕왕의 아들.

진이왕 - 진손왕의 현손.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문선 - 부여융의 아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부여태비 - 부여덕장의 딸.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경 - 31대 의자왕의 증손자.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부여창성 - 부여선광(여선광)의 아들.

부여양유 - 부여선광(여선광)의 2남.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부여사(扶餘絲): 풍왕의 아들로 전해지는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부여왕 계보

백제왕 계보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서일연(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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