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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학]]은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 [[서병학]]은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 ||
− | 1893년 3월 11일, 報恩 帳內里에서 시작된 ‘보은취회’는 | + | 1893년 3월 11일, 報恩 帳內里에서 시작된 ‘보은취회’는 [[동학농민전쟁(조선)|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를 밝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라도 金溝懸 院坪에서 이루어진 ‘院坪聚黨’과 함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금구취당]]’이 [[동학농민전쟁(조선)|동학농민전쟁]]의 前史로서 그 정치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은취회]]’는 물리적 투쟁을 되도록 자제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보은취회]]가 동학교단의 조직역량을 확인시킨 집회였던 점, 이전의 신원운동이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요구 중심으로 이뤄졌던 데 비해 보은취회는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집회였던 점, 그 목적이 척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탐학관리와 세도가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보은취회]] 역시 사회개혁운동의 한 맥락으로, 또한 [[동학농민전쟁(조선)|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
[[보은취회]]는 우선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만 명의 道人들이 참가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宣撫使 魚允中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 데, 필경에는 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外夷가 우리의 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 하는 자, 貪士·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京鄕에서의 武斷과 협박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京外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營邑屬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常賤民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 왔다”0633)라고 하여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사회구조에 큰 불만을 가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 들었음을 보여 준다.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모여든 인원은 대략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산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斥倭洋倡義’라고 쓴 기를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느는 데다 통문을 나붙이는 등 세가 더해지자 3월 16일 보은 군수 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으나 이에 대해 도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巡營의 甘飭이나 主官의 面諭라도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하여도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서는 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에 진력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다시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삼아 가둔다면 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혹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라는 榜을 내걸어 척왜양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 [[보은취회]]는 우선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만 명의 道人들이 참가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宣撫使 魚允中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 데, 필경에는 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外夷가 우리의 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 하는 자, 貪士·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京鄕에서의 武斷과 협박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京外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營邑屬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常賤民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 왔다”0633)라고 하여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사회구조에 큰 불만을 가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 들었음을 보여 준다.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모여든 인원은 대략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산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斥倭洋倡義’라고 쓴 기를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느는 데다 통문을 나붙이는 등 세가 더해지자 3월 16일 보은 군수 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으나 이에 대해 도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巡營의 甘飭이나 主官의 面諭라도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하여도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서는 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에 진력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다시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삼아 가둔다면 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혹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라는 榜을 내걸어 척왜양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 ||
− | 이처럼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보은군수의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 + | 이처럼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보은군수의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보은집회]]의 세력들이 척왜양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물론 그것이 큰 목적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림에 풍미하고 있던 衛正斥邪사상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집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척왜양은 조선사회를 이끌고 있던 봉건적 지배층에 의해 무난하게 용납될 수 있었던 봉건적인 대외사상에 부합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3월 22일 보은군수의 해산령도 거절하고 “지금에 이르러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함과 세호가의 무단에 있으니 만약 지금 소청하지 못하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지방수령들의 탐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갈수록 확대되는 [[보은취회]]의 양상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게 된 조정에서는 3월 25일 충청감사 趙秉式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고 이들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洪在羲에게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장내리로 가게 했다.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보은출신이었다. 그는 장내리로 가서 접도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왕의 칙유문을 발표했다. 이에 보은취회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집회는 이합집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보은취회 지도부는 4월 1일 순무사 어윤중이 公州營將, 淸州兵營 軍官, 報恩 군수를 대동하고 찾아와 왕의 綸音을 읽고 퇴산을 명하자 3일 안에 해산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崔時亨·孫秉熙·[[서병학]](徐丙鶴) 등은 도인들을 남겨 둔 채 4월 2일 밤을 틈타 도망하고 말았다. |
− |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취회 역시 무력하게 해산되고 만 것은 결국 지도부가 무력투쟁을 회피한 결과였다. 이같은 보은집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는 보은집회 지도부의 기만성, 불철저성, 패배주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한 점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고, | + |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취회 역시 무력하게 해산되고 만 것은 결국 지도부가 무력투쟁을 회피한 결과였다. 이같은 보은집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는 보은집회 지도부의 기만성, 불철저성, 패배주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한 점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고,둘째는 이 집회를 통해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간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그 의의를 어느 정도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금구취당]]을 주도한 세력의 독려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성과로 볼 때 [[보은집회]]는 [[동학농민전쟁(조선)|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큰 위상을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신원운동의 차원에서 정치적 투쟁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
− | 한편, [[보은취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취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구취당]](金溝聚黨)’이 바로 그것이다.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른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全羅道 金溝懸 水流面 院坪里에서도 동학교도들의 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원평은 전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큰 場이 서 인근에서 생산되는 物産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데다 官衙가 있는 금구로부터 적당한 이격거리를 두어 여러 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母岳山과 金山寺로 상징되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은 종교적 집회장소로의 선택에 중요한 고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원평지역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결신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민간신앙의 근거지였고 이 곳을 항상 감싸고 있는 적당한 신비로움이 고단한 현실에 찌들고 지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모아 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평집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이곳이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지역 교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평은 정읍·고창·장흥·영광·나주·함평·무안·순천·영암쪽에서 올라 오는 교도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거점이었다. 더욱이 金溝는 동학지도자 金德明包의 본거지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 + | 한편, [[보은취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취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구취당]](金溝聚黨)’이 바로 그것이다.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른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全羅道 金溝懸 水流面 院坪里에서도 동학교도들의 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원평은 전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큰 場이 서 인근에서 생산되는 物産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데다 官衙가 있는 금구로부터 적당한 이격거리를 두어 여러 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母岳山과 金山寺로 상징되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은 종교적 집회장소로의 선택에 중요한 고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원평지역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결신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민간신앙의 근거지였고 이 곳을 항상 감싸고 있는 적당한 신비로움이 고단한 현실에 찌들고 지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모아 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평집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이곳이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지역 교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평은 정읍·고창·장흥·영광·나주·함평·무안·순천·영암쪽에서 올라 오는 교도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거점이었다. 더욱이 金溝는 동학지도자 金德明包의 본거지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김덕명(金德明)이 동학교단의 大接主 위치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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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 초에 전개되는 교조신원운동 당시 사실상의 주도자로서, 7월부터 당시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해 교조(敎祖)의 신원(伸寃)과 동학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부당 주구(不當誅求)에 반대해, 전라도 삼례(參禮)에서 동학교인들을 모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 + | 1890년대 초에 전개되는 [[교조신원운동]] 당시 사실상의 주도자로서, 7월부터 당시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해 교조(敎祖)의 신원(伸寃)과 동학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부당 주구(不當誅求)에 반대해, 전라도 삼례(參禮)에서 동학교인들을 모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
그리하여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경직(李耕稙)으로부터 부당 주구를 금지하는 명령을 받아냈으나, 이경직이 확약한 부당 주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을 설득해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적극 주도하였다. | 그리하여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경직(李耕稙)으로부터 부당 주구를 금지하는 명령을 받아냈으나, 이경직이 확약한 부당 주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을 설득해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적극 주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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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병학]]의 혁신적 노선은 1892∼1893년의 동학[[교조신원운동]]에 당시 농민층들의 반봉건·반침략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함으로써, 1894년에 일어났던 | + | [[서병학]]의 혁신적 노선은 1892∼1893년의 동학[[교조신원운동]]에 당시 농민층들의 반봉건·반침략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함으로써,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전쟁(조선)|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선구로 작용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
− | 즉,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 + | 즉,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전쟁(조선)|동학농민전쟁]]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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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 ||
−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 + |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고려1)|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고려1)|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고려1)|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고려1)|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고려1)|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고려1)|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고려2)|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고려7)|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고려)|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고려8)|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 상장군 [[서보(고려3)|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고려2)|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고려)|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고려2)|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고려3)|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고려2)|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고려5)|서찬]](徐贊),[[서정(고려3)|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고려)|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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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 | +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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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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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13일 (토) 20:52 기준 최신판
보은취회(報恩聚會) = 보은집회(報恩集會)
서병학은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1893년 3월 11일, 報恩 帳內里에서 시작된 ‘보은취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를 밝히는 역사적 사건으로서 전라도 金溝懸 院坪에서 이루어진 ‘院坪聚黨’과 함께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학계의 연구성과에 따르면 ‘금구취당’이 동학농민전쟁의 前史로서 그 정치적 성격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것에 비해 ‘보은취회’는 물리적 투쟁을 되도록 자제하려 했기 때문에 한계를 보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보은취회가 동학교단의 조직역량을 확인시킨 집회였던 점, 이전의 신원운동이 ‘교조의 신원’이라는 종교적 요구 중심으로 이뤄졌던 데 비해 보은취회는 ‘척왜양’의 기치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집회였던 점, 그 목적이 척왜양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탐학관리와 세도가들을 처단하고자 하는 데 있었던 점으로 볼 때 보은취회 역시 사회개혁운동의 한 맥락으로, 또한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 투쟁으로서 일정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보은취회는 우선 전국 각 지역에서 수만 명의 道人들이 참가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조정에서 파견된 宣撫使 魚允中이 올린 보고서를 보면, “처음에는 부적, 주술로써 무리를 현혹하고 참위를 전하여 세상을 기만하였는 데, 필경에는 才氣를 갖추고도 뜻을 얻지 못한 자, 貪墨이 횡행하는 것을 분하게 여겨 민중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자, 外夷가 우리의 利源을 빼앗는 것을 분통하게 여겨 큰소리 하는 자, 貪士·墨吏의 침학을 당해도 호소할 바 없는 자, 京鄕에서의 武斷과 협박때문에 스스로를 보전할 수 없는 자, 京外에서 죄를 짓고 도망한 자, 營邑屬들의 부랑무리배, 영세농상민, 풍문만을 듣고 뛰어든 자, 부채의 참독을 견디지 못하는 자, 常賤民으로 뛰어나 보려는 자가 여기에 들어 왔다”0633)라고 하여 당시 사회의 기층민중과 사회구조에 큰 불만을 가진 세력 등 다양한 계층에서 모여 들었음을 보여 준다. 3월 말까지 지속적으로 모여든 인원은 대략 3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산아래 평지에 성을 쌓고 그 안에서 대오를 정비하며 ‘斥倭洋倡義’라고 쓴 기를 내거는 한편 새로운 방문과 통문을 냈다. 날이 갈수록 숫자가 느는 데다 통문을 나붙이는 등 세가 더해지자 3월 16일 보은 군수 李重益이 해산령을 내렸으나 이에 대해 도인들은 “창의함은 오직 척왜양에 있으니 비록 巡營의 甘飭이나 主官의 面諭라도 그칠 수 없다. 또 동학은 처음부터 邪術이 아니며, 설사 사술이라 하여도 임금이 욕을 당하고 신하가 죽는 지경에서는 忠義 하나 뿐이니, 각처 유생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죽음을 맹세하고 충에 진력하고자 한다”라고 하여 해산을 거부하고 다시 “왜양지사를 치는 것으로 죄삼아 가둔다면 和를 주장하는 매국자를 상준단 말인가? 어찌 우리 순상의 밝음으로써 헤아리지 못함이 이처럼 심하단 말인가? 혹 미혹하여 왜양의 신복이 되려는 자는 관령을 따르라”라는 榜을 내걸어 척왜양의 의지를 과시하였다.
이처럼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들은 보은군수의 해산령을 거절하면서 척왜양의지를 더욱 강력하게 표출했다. 보은집회의 세력들이 척왜양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물론 그것이 큰 목적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림에 풍미하고 있던 衛正斥邪사상과 동일한 선상에 놓여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그들이 집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척왜양은 조선사회를 이끌고 있던 봉건적 지배층에 의해 무난하게 용납될 수 있었던 봉건적인 대외사상에 부합되는 것이었던 셈이다. 이들은 3월 22일 보은군수의 해산령도 거절하고 “지금에 이르러 생명이 도탄에 빠진 것은 방백수령의 탐학무도함과 세호가의 무단에 있으니 만약 지금 소청하지 못하면 어느 때에 국태민안이 있겠는가”라고 하여 지방수령들의 탐학을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갈수록 확대되는 보은취회의 양상을 방관하고 있을 수 없게 된 조정에서는 3월 25일 충청감사 趙秉式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고 이들을 해산시킬 선무사로 어윤중을 보내는 한편, 충청병사 洪在羲에게 군사 3백 명을 이끌고 장내리로 가게 했다. 양호선무사 어윤중은 보은출신이었다. 그는 장내리로 가서 접도들을 온갖 감언이설로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왕의 칙유문을 발표했다. 이에 보은취회 지도부는 해산을 약속하고 노약자와 어린이를 돌려 보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집회는 이합집산의 양상을 드러내게 되었다. 특히 보은취회 지도부는 4월 1일 순무사 어윤중이 公州營將, 淸州兵營 軍官, 報恩 군수를 대동하고 찾아와 왕의 綸音을 읽고 퇴산을 명하자 3일 안에 해산하기로 약속을 하였고 崔時亨·孫秉熙·서병학(徐丙鶴) 등은 도인들을 남겨 둔 채 4월 2일 밤을 틈타 도망하고 말았다.
광화문 복합상소에 이어 보은취회 역시 무력하게 해산되고 만 것은 결국 지도부가 무력투쟁을 회피한 결과였다. 이같은 보은집회에 대한 학계의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집약되고 있다. 첫째는 보은집회 지도부의 기만성, 불철저성, 패배주의로 인해 별다른 성과없이 실패한 점을 들어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높은 위치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고,둘째는 이 집회를 통해 민권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종교운동에서 벗어나 정치적 방향으로 나아간 성격을 보이고 있는 점에서 그 의의를 어느 정도 평가하고는 있지만 그것은 금구취당을 주도한 세력의 독려에 힘입은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지금까지 학계의 연구성과로 볼 때 보은집회는 동학농민전쟁의 전단계로서 큰 위상을 부여하기는 어렵지만 신원운동의 차원에서 정치적 투쟁의 단계로 발전하는 과정을 보여 주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수 없다.
한편, 보은취회가 열리던 시기에 전라도 금구현 원평에서도 취회가 열리고 있었다. ‘금구취당(金溝聚黨)’이 바로 그것이다.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서 이른바 보은취회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全羅道 金溝懸 水流面 院坪里에서도 동학교도들의 별도 집회가 열리고 있었음은 여러 자료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원평은 전라감영이 자리잡고 있는 전주에서 서남쪽으로 15㎞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큰 場이 서 인근에서 생산되는 物産이 풍부하게 거래되었으며 따라서 사람의 왕래가 잦은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규모 집회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된 데다 官衙가 있는 금구로부터 적당한 이격거리를 두어 여러 모로 안성맞춤이었다. 또한 母岳山과 金山寺로 상징되는 독특한 지리적 배경은 종교적 집회장소로의 선택에 중요한 고려가 됐을 가능성이 높다. 즉 금산사를 중심으로 한 원평지역 일대는 예나 지금이나 비결신앙의 상징처럼 일컬어지고 있다. 당시에도 민간신앙의 근거지였고 이 곳을 항상 감싸고 있는 적당한 신비로움이 고단한 현실에 찌들고 지친 민중들을 효과적으로 끌어모아 주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원평집회가 수월하게 이뤄질 수 있었던 배경 중의 하나는 이곳이 보은으로 가는 전라도지역 교인들의 중간 기착지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원평은 정읍·고창·장흥·영광·나주·함평·무안·순천·영암쪽에서 올라 오는 교도들이 반드시 거쳐 지나야 하는 거점이었다. 더욱이 金溝는 동학지도자 金德明包의 본거지로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김덕명(金德明)이 동학교단의 大接主 위치에서 일정 정도의 역할을 맡았으리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하다.
?∼1894(고종 31). 동학교인·농민운동가.
일명 서병학(徐丙學). 충청북도 충주 출신. 1880년대 서인주(徐仁周)(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등과 동학에 입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890년대 초에 전개되는 교조신원운동 당시 사실상의 주도자로서, 7월부터 당시 동학교주 최시형(崔時亨)을 설득해 교조(敎祖)의 신원(伸寃)과 동학교도들에 대한 관(官)의 부당 주구(不當誅求)에 반대해, 전라도 삼례(參禮)에서 동학교인들을 모아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전라도관찰사 이경직(李耕稙)으로부터 부당 주구를 금지하는 명령을 받아냈으나, 이경직이 확약한 부당 주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을 설득해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적극 주도하였다.
복합상소를 이용해 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병대(兵隊)와 협력, 정부간당(政府奸黨)을 소탕하고 조정을 대개혁할 것을 결정, 행동에 옮기려 했으나 보수파의 반대로 중지하였다.
이에 ‘외교배척(外敎排斥) 외상축거(外商逐去)’를 요구하는 글을 서울의 기독교회와 각국 영사관 벽에 붙이는‘괘서사건(掛書事件)’을 주도하기도 했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서병학의 혁신적 노선은 1892∼1893년의 동학교조신원운동에 당시 농민층들의 반봉건·반침략의 요구를 일정하게 반영함으로써, 1894년에 일어났던 동학농민전쟁의 역사적 선구로 작용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즉, 1894년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전쟁은 혁신파였던 서병학의 노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1세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의 19세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 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 국무총리)
4세 서유위(徐惟偉 장야서령(掌冶署令).정 3품.장관)
5세 서면(徐冕 주부(注簿).정 4품.차관보)
6세 서린(徐嶙 판대부사(判大府事).정 2품.부총리)
7세 서찬(徐瓚 장령(掌令). 정 4품. 차관보)
8세 서인(徐諲 교수(敎授).도승지(都承旨).정 3품.장관.대학자)
9세 서욱(徐勖 도승지(都承旨).정 3품. 장관)
10세 서효손(徐孝孫 판사재사(判司宰事).종 2품.부총리)
11세 서유(徐愈 예조판서(禮曹判書).이성군(利城君). 정2품. 장관.양경공파(良敬公派))
12세 서경흥(徐敬興. 목사(牧使). 정3품.당상관.차관)
13세 서미수(徐眉壽.사직(司直). 정5품.국장)
14세 서석손(徐碩孫. 모의당공(慕義堂公)
15세 서세호(徐世豪. 연순교위(衛尉)
16세 서희안(徐希顔. 사용공(司勇公)
17세 서득천(徐得天. 의병장(義兵將).부사용(副司勇) · 창의순절(副司勇 · 倡義殉節)
18세 서사도(徐思道. 의병장(義兵將).율곡 이이(栗谷 李珥) 문인.임진란 순절(壬辰亂殉節 )
서사근(徐思近 통정대부 판결사(通政大夫判決事)·.의병장(義兵將))
서사원(徐思遠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서사적(徐思迪) 조선 중기 의병장(義兵將))
19세 서일원(徐一元 .용기위사정(龍驥衛司正).학자(學者)
서종언(徐從彦 이흥군(利興君).오위부총관(五衛副摠官). 종 2품.차관)
서일회(徐一會)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목차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삼례집회(參禮集會)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
1893년 2월에 교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복권을 요구했던 서울 복합 상소(伏閤上疏) 운동 이경직이 확약한 부당 주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을 설득해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적극 주도하였다.
보은취회(報恩聚會)
서병학은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