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용선 미술관
암태소작항쟁 기념 전시관 (서용선 미술관)은 작가 서용선이 ‘암태소작쟁의’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마련되었다
전남 신안군은 암태도 소작쟁의 발발 100주년을 맞아 암태면 단고리에 위치한 (구)암태농협창고에서 암태소작항쟁 기념 전시관(서용선미술관) 오픈식을 개최하였다.
암태소작항쟁 기념 전시관 (서용선 미술관)은 작가 서용선이 ‘암태소작쟁의’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마련되었다. 약 1년 4개월의 결실 끝에 전시관이 정식 오픈한다.
오픈식에는 신안군수를 비롯해 군·면 단위 관련 기관 사회 단체장, 미술계 관계자, 독립유공자 후손, 암태면 주민들 등 1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며 암태소작항쟁의 과정을 역사적·예술적으로 표현한 서용선 작가 작품의 진수를 느끼게 될 것이다
서태석(徐邰晳)
1884년(고종 21)∼1958년. 일제강점기 시인‧항일노동민중운동 지도자. 호는 해사(海舍)이다. 본관은 이천서씨(利川)이며, 전라남도 신안군(新安郡) 암태면(巖泰面) 출신이다. 부친은 서홍일(徐弘一)이다.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시인으로 배일사상(排日思想)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9년 3‧1운동과 신간회 사건에 연루되어 여러 차례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일제 식민지 치하의 식민지 수탈정책에 편승한 지주들의 과도한 소작료 징수로 인한 소작농들의 과도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동지를을 규합하여, 소작료 인하운동을 벌여 소작료를 종전의 8할에서 4할로 할인시키는 성과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 소작료 인하운동의 기화로 전국적으로 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소작농민들에게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는 조국 광복을 위한 거국적인 독립운동과 함께 국내 지주들의 소작농에 대한 불합리한 소작료 징수에 대한 문제에도 관심을 갖아온 민중적인 독립운동가로 평가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0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서창석은 7촌 재종숙(再從叔), 서상렬은 8촌 삼종제(三從弟)이다.
1884년 6월 17일 전라도 나주목 암태도 오산리(現 전라남도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 오산마을 991번지)의 자작농가에서 아버지 서두근(徐斗根, 1866. 4. 27 ~ ?)과 어머니 밀양 박씨 박남리(朴南里, 1864. 2. 27 ~ ?) 사이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서민석(徐岷晳, 1902 ~ 1931. 11. 7)과 여동생 서계초(徐啓肖, 1908 ~ ?)가 있었다. 7살 되던 1890년부터 18세 되던 1901년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면서 사서삼경을 비롯해 동의보감과 같은 의학서적을 섭렵했다. 이후 지도군 하의면 옥도리로 이주해 얼마간 의원 행세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했다.
1913년부터 무안군 암태면장을 역임했으며, 임기 동안에 구황작물로 무상 분배된 메밀 씨앗을 팔아먹은 관리들을 고발하는 등 부정척결에 앞장섰다. 1919년 11월 면장직을 사임한 뒤 12월 중화민국 봉천성 심양현(瀋陽縣), 대련시, 여순시(旅順市) 지방을 시찰차 여행했다. 이후 경기도 경성부로 내려와 제우교(濟愚敎) 신도들과 함께 12월 23일 만주보민회사(滿洲保民會社) 창립을 위한 준비회를 개최해 이날 회장에 취임했고, 경성부에 임시 사무소를 두었다. 이후 심양현으로 돌아가 그곳에도 임시 사무소를 두었으나, 1920년 1월 30일 신병을 이유로 귀국해 4일간 경기도 경성부 죽첨정(現 서울특별시 중구 충정로) 44번지 만주보민회사 사무소에 숙박해 이 기간 동안에 회사 관계자인 양정묵(梁正默), 최병기(崔炳基) 등을 만났다. 이 사이 2월 5일 열린 발기인 총회에서 총무에 임명되었다.그리고 전라남도 목포부(現 목포시)로 내려와 3일간 체류하다가 2월 20일 고향 무안군 암태면으로 돌아갔다.
1920년 2월 28일 무안군 안좌면 원산리(現 신안군 팔금면 원산리) 북진마을에서 지인인 잎담배 상인 박종선(朴鍾瑄)과 함께 목포부로 다시 떠나 영정1정목(現 영해동1가) 해안과 보정3정목(現 보광동3가) 등에서 체류하다가 헤어졌고, 대정정(現 목포시 명륜동) 13번지 경남(慶南)여관 내 김운재(金云宰)의 방에 숙박했다. 이날 밤 12시에 만주보민회사 발기인 중 한 사람인 표성천(表聲天, 1857 ~ 1950)[15]을 만났는데, 표성천은 일전에 경기도 경성부 인사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인사동) 21번지에서 하숙 중이던 중동학교 생도 장병상(張柄祥)[16]을 만나 '기미독립선언 제1주년을 기념해 각 학교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전개하고 상가는 폐점해 조선인은 일제히 자유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는 내용의 「대한국 독립 一주년 기념 축하 경고문」 200장과 태극기 2장을 신문지에 싸여 있는 채로 건네 받은 상태였다. 표성천은 이때 장병상과 협의한 대로 이튿날인 2월 29일 아침에 서태석에게 위 경고문과 태극기가 들어 있는 가방 및 가방의 열쇠를 서태석에게 건네 주었다. 이후 남교동 우편소에 가서 전주공립보통학교(現 전주초등학교) 앞으로 경고문을 싼 소포우편을 발송했다.
그리고 그날 오전 9시, 보정3정목 3번지에 있던 박종선의 집에 찾아가 "내일은 3월 1일로서 조선독립을 선언한 1주년 기념일에 해당하는 날로서 일반 조선인들에게 배포할 문서가 있다. 자네도 원조해서 배포하여 달라"며 힘을 보태줄 것을 권유했으나, 박종선은 이에 "지금 직업을 쉬게 되면 생계와 관계된다"며 거절해 결국 숙소로 돌아왔다. 오전 11시에는 숙소에서 김운재를 비롯해 행정(現 행복동) 재봉기회사 출장소에 근무하는 김귀현(金貴鉉)을 만나 앞서 언급한 경고문 배포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이후 다시 외출해 오후 4시, 명치정(現 대안동) 13번지 김영수(金永洙)의 잡화점을 방문해 직원 김재식(金在植)에게 금건(金巾)을 자른 천을 건네주면서 태극기 4장 제작을 의뢰했다. 이때 김재식에게 이 국기는 3월 1일 독립만세를 부를 때 필요한 것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발각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혹시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누설되면 때려 죽일 것이며, 목포 사람들도 내일은 전부 만세를 불러 조선독립을 기약하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라, 또 목포에서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경기도 경성부에서 여러 사람이 와서 여기에 있는 직원들 전부가 피살될 것이라는 등의 협박을 했다. 이어 5시에 다시 와서 태극기를 찾아 20전을 지불하고 떠났다.
이후 오후 6시에 숙소로 돌아와 김운재와 김귀현, 송정리(松汀里)의 정문국(鄭文國) 등에게 위 경고문을 건네면서 옆 방에 있는 주병진(朱炳晉)에게도 경고문을 보여주었고, 주병진은 그 경고문을 보고 두 손으로 뭉쳐서 버렸다. 이어 오후 6시 25분에 집을 나서면서 김운재에게 경고문 30장을 건네며 배포를 부탁했고, 경찰관에게 발각되면 좋지 않다며 주의를 당부했다. 이때 김운재가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되돌아 서서 "자네는 숙박업 영업을 하기 때문에 곤란한 점이 있을 것이지"하면서는 경고문을 되돌려 받았다. 이후 남교동 김종승(金宗勝) 댁을 들렀다가 오후 7시에 다시 박종선의 집에 찾아가 "오늘 이야기한 문서를 오늘 밤중 목포의 조선인들에게 배포할 예정이니 꼭 자네도 배포해달라"고 권유했고, 박종선이 이에 문서 내용을 묻자, "이 문서는 조선독립 1주년 기념일의 경고문으로서 조선인의 상점이라면 폐점 휴업하고, 학교 생도들은 휴교할 것을 썼다."고 말하자 재차 거절당했다. 이때 박종선은 "그런 일을 하면서 발견되지 않도록 하라"며 주의를 당부했다고 한다.
결국 박종선의 집을 나와 홀로 행정, 영정에 있던 조선인 상점마다 위 경고문을 한 두 장 또는 4, 5장씩 몰래 배포했고, 동선에 있던 마루오카(丸岡) 상점 앞, 죽동 배종구(裵鍾九)의 집, 창평정(現 창평동) 곽도순(郭道順)의 집, 명치정 최한홍(崔漢洪)의 잡화점 앞에도 위 경고문을 배포했다. 이어 바로 옆집인 김영수의 잡화점에 방문해 김재식 등 당시 근무하고 있던 점원들에게 위 경고문 6장을 배포했다. 이때 직원 김재식에게 돌아다니면서 배포하면 위험하므로 가게에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만 배부하라고 당부했다. 이후 밤 12시에서 1시 사이에 호남정 목포역 철도정거장 내에 있던 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했고, 송도정(現 목포시 동명동) 송도공원에 올라가서 저수지가 있는 남쪽 소나무에 태극기를 게양했다.
그러나 이튿날인 3월 1일 목포경찰서에 체포되었고, 1920년 12월 2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 바 정치범 처벌령 위반 및 출판법 위반,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1년형(미결 구류일수 중 20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으며, 귀국 후에는 서울청년회에 가입해 전라남도 책임자로서 목포부에서 활동했다. 그 뒤 1923년 8월 고향 암태도에서 암태소작인회를 조직해 회장에 취임했고, 문재철, 나카시마 세이타로(中島淸太郞), 천후빈(千后彬, 1870. 5. 9 ~ ?. 5. 15)[18] 등 암태도의 대지주들에게 소작료를 기존 70~80%에서 40%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나카시마 세이타로와 천후빈은 암태소작인회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합의했으나, 문재철은 이를 거절해 암태소작인회에서는 추수 거부 및 소작료 납부 거부 투쟁을 벌이며 문재철에 대항했다. 또한 암태도와 목포부를 연결하는 연락선의 운영 수익금으로 500여 명의 소작인을 대상으로 야학을 열고, 암태청년회에서 주최하는 민중극 공연을 통해 암태도 소작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에 문재철은 목포경찰서 소속 경찰들을 동원해 소작인들을 위협하며 강제로 소작료 징수를 집행하고자 했으나, 소작인들의 집단적인 항쟁은 계속되자 소작인들을 개별적으로 회유하거나 협박해 기어이 소작료를 징수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암태소작인회에서는 자체적인 순찰대를 조직해 문재철 측의 강압에 무력으로 대항하면서 1924년 봄까지 소작료 납부를 거부했다. 1924년 3월 27일에는 암태면민대회를 개최해 소작인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동시에 소작인의 요구를 주장했는데, 이때 만약 5월 15일까지 문재철 측이 소작료 인하 등의 요구에 불응하면 암태도에 있는 문재철의 아버지 문군옥(文君玉, 1848 ~ ?)의 송덕비를 파괴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문재철의 아버지 문군옥, 문재철의 4촌 동생 문응창(文應昌, ? ~ ?. 6. 27), 문재철의 5촌 종질(從姪) 문명호(文明鎬, 1888 ~ 1950. 9. 20)[21]를 비롯한 문재철의 일족 55명은 암태면 와리리 산기슭에서 이날 면민대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던 서태석과 박종유(朴宗有)·서동오(徐東五) 등 암태소작인회 간부들을 습격해 구타했고, 암태면민대회에서의 결의사항에 대해서도 묵살했다.
이후 암태소작인회에서는 신문이나 노동단체에 소작인의 요구를 직접 호소했고, 1924년 4월 15일 열린 전조선노농대회에 암태도 대표를 파견해 소작문제를 호소하기로 하여 상경하던 중 일본 제국 경찰의 제지를 받았고, 곧 체포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 송치되었다. 이후 1924년 7월 9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이른 바 소요, 상해 혐의에 대해 구류 갱신 처분을 받았다. 1924년 9월 18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위와 같은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이에 공소했으나, 1925년 3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소요 및 상해, 주거침입, 훼기,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그대로 적용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한편, 서태석이 투옥된 뒤 암태도 소작쟁의는 기존에 주체가 됐던 암태소작인회 외에도 박복영(朴福永)이 이끌던 암태청년회, 암태부인회의 여론까지도 환기해 그 결과 암태도 전 주민들이 가담하게 되었고, 전국 각계각층의 관심과 성원에 힘입어 종래에는 전라남도경찰부 고등경찰과장 고가 쿠니타로(古賀國太郞) 경부의 중재하에 문재철과 소작인 대표인 박복영의 합의를 이끌어 내는 등의 성과를 내었다. 당시 합의 내용은 소작료를 40%로 인하할 것, 지주는 암태소작인회에 2,000엔을 기부할 것, 1923년에 미납된 소작료는 향후 3년간 분할 상환할 것, 구금된 쌍방의 인사들은 재판정에서 쌍방이 고소를 취하할 것, 파괴된 문군옥의 송덕비는 암태소작인회의 부담으로 복구할 것 등 주로 소작인들에게 유리한 내용들로서 1년간의 소작쟁의가 소작인들의 승리로 일단락되었음을 증명해주었다. 자세한 것은 암태도 소작쟁의 문서 참조.
한편, 서태석은 출옥 후 암태소작인회를 '농민조합'으로 개칭하고 기존의 경제적 투쟁노선을 정치적으로 확대하는 동시에 신간회로 대표되는 조선민족단일당 조직을 촉구하고자 했다. 1926년 12월에는 정우회 선언에 따라 ML파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전라남도 대표 및 선전부 위원에 선임돼 활동했다. 1927년 9월 9일에는 조선농민총동맹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돼 활동하다가 제4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었고, 1928년 4월 평안북도 신의주부(現 신의주시)에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돼 1929년 7월 17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1930년 5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 공소가 기각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했으나 수 차례에 걸쳐 투옥되어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었고, 정신질환 및 일제의 감시로 인해 폐인이 되어 정상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주변의 냉대를 받으며 각지를 떠돌다가 여동생 서계초가 살던 무안군 압해면(現 신안군 압해읍) 장감리로 이주해 여동생의 집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그러나 1943년 6월 2일 압해면 장감리의 어느 논둑길에서 벼 포기를 움켜쥔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8.15 광복 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서태석이 과거 조선공산당원으로서 활동한 공산주의자 경력을 들어 적대시했고, 암태도의 이천 서씨 일가친척에까지 면사무소 서기 자리 조차 맡지 못할 정도로 연좌제를 적용하며 갖은 핍박을 가했다. 이천 서씨 집안 사람들이 목포시로 넘어가는 배를 타면 곧바로 경찰 계통으로 무선연락이 되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기도 했다고 한다. 암태도 주민들은 1976년 압해도에 안장돼 있던 서태석의 묘소를 암태면 기동리 선산에 이장했고, 이어 서태석을 기념하는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결성하려 했으나 정부 당국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1979년 가까스로 서태석의 묘 옆에 추모비를 세우긴 했으나 한동안 공식적인 제막식을 치르지 못했다.
그 뒤 문민정부 시절이던 1997년에서야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장고마을에 '암태도 소작인 항쟁기념탑'이 건립되었고,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본래 고향인 신안군 암태면 기동리에 안장되었다가 2008년 3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12세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16세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17세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18세 서연(徐演 참봉(參奉).종 8품)-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兵部尙書公)파 강호문중(江湖公派))
서옥(徐沃 무안현감(縣監). 군수.이천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兵部尙書公派)송정공파(松亭公派))
19세 서간(徐諫 진사(進士). 판관(判官).부장판사)
20세 서경춘(徐景春 병조좌랑(兵曹佐郞) .차관보)
서경인(徐景仁 진사(進士))
서경개 (徐景介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부이사관)
21세 서영조(徐榮祖 사헌부 감찰(司憲府 監察). 부장검사)
서윤조(徐胤祖 생원(生員))
22세 서국장(徐國章 의병장(義兵將). 호조참의(戶曹參議). 정3품. 차관)
서국보(徐國寶 선략장군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 종3품.차관보)
서국빈(徐國賓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정3품.차관)
서국평(徐國枰 공조참판(工曹參判).정3품.차관)
서국주(徐國柱 봉훈랑(奉訓郞) 도사(都事).부이사관)
서국로(徐國老 조선 문신)
목차
가족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 큰고고조할아버지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 고고조할아버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큰고조할아버지 :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 고조할아버지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작은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암태도 소작쟁의(巖泰島小作爭議)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 사이에 전라남도 무안군 암태면(오늘날의 신안군 암태면)에서 일어난 소작쟁의이다. 암태도는 암태도 인물들의 사유지로 수탈되어 온 땅으로서,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는 조선인 지주인 문재철, 천후빈, 그리고 일본인 지주인 나카시마 세이타로 세 지주가 암태도 땅을 삼분하고 있었다. 그 중 문재철은 중추원 직책까지 맡는 친일파로 친일을 통해 사업을 불린 신흥자본가였다. 문재철은 암태도 뿐 아니라 자은도 등 오늘날의 신안군 지역의 도서와 전라도 본토의 고창군 등지에 755정보의 대토지를 소유했다. 그 중 암태도에 소유한 땅은 논이 98정보, 밭이 42정보였다.
암태도 소작인항쟁기념탑(巖泰島小作人抗爭記念塔)
높이 6.7m 규모의 기념탑에 "巖泰島小作人抗爭記念塔" 이라는 우하 김정재의 글씨로 새겨져 있으며 탑 좌우면의 비문은 암태도 소작쟁의를 소재로 한 소설 암태도의 작가 송기숙이 지었다고 합니다
암태소작항쟁 기념 전시관
암태소작항쟁 기념 전시관 (서용선 미술관)은 작가 서용선이 ‘암태소작쟁의’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자 마련되었다.
서태석 평전
전남 신안군이 암태도 소작쟁의를 승리로 이끈‘서태석 선생 평전’헌정본을 특별 제작해 미국에 거주하고있는 서 선생의 직계 후손에게 전달했다.
암태도 소작쟁의 100주년 학술대회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이섭대천종합예술제(利涉大川綜合藝術祭)
새아침의 여명이 밝아오듯이 “빛으로” 찬란하게 예술인들은 자신만의 목소리와 몸짓으로, 또는 자신만의 색채로 우리 이천의 예술을 꽃피우고자 합니다. 우리 이천을 문화예술의 도시로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 문화와 예술이듯이 이천의 혼불로 르네상스를 이천예총 각협회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이천예총은 8개협회(국악협회/무용협회/문인협회/미술협회/사진작가협회/음악협회/연극협회/연예예술인협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천예총이 창의적 생각과 열린마음으로 예술인들의 끼와 혼을 발산시키고 시민들에게 감동과 희열을 느끼게 하는 자리가 바로 이섭대천종합예술제입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