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조신원운동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864년 최제우(崔濟愚)가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힌(左道亂正)’ 죄로 사로잡혀 처형된 뒤 동학은 사교(邪敎)로 몰려 정부의 탄압을 받았다. 그러나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의 노력으로 동학은 경상·충청·전라의 삼남(三南) 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세력을 넓혔고, 교조(敎祖)인 최제우의 신원(伸寃, 억울함이나 원한을 품)과 포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1871년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신원(敎祖伸寃)을 내세워 동학 교도들을 모아 영해(寧海,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에서 민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뒤 동학은 정부에 더 가혹하게 탄압을 받았다. 하지만 1890년대에 들어서 호서,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동학의 세력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서인주(徐仁周)(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전봉준(全琫準) 등 남접(南接)의 주요 지도자들은 대규모 집회를 열어 교조의 신원과 가렴주구(苛斂誅求)의 중단 등을 요구하고, 이를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시키려 하였다. 1892∼1893년에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러한 사건을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이라고 하며, 일부 학자들은 ‘척왜양’을 내세운 정치운동을 따로 ‘척왜양운동(斥倭洋運動)’으로 구분해 나타내기도 한다. 이 운동은 삼남 지방에서 잇따라 대규모 집회를 열어 동학 조직을 중심으로 농민의 불만과 정치적 요구, 세력을 결집함으로써 1894년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1892년 동학 남접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서병학(徐丙鶴) 등은 동학의 2대 교주인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요청했으나, 최시형은 과거 이필제의 난에서 입은 피해 때문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와 서병학은 독자적으로 10월에 공주에서 집회를 열어 충청도 관찰사인 조병식(趙秉式)에게 의송(議送)을 냈다. 그 내용은 동학은 사도(邪道)가 아니므로 억울하게 옥에 갇힌 교도를 풀어주고, 각 읍의 수령들이 교도들을 침학(侵虐)하고 재물을 빼앗는 일을 금지해 주며, 교조 최제우의 신원을 조정에 품의(稟議)해 달라는 것이었다. 조병식은 동학을 금하지 않는 것은 조정에서만 처분할 수 있는 것이므로 충청 감영의 소관이 아니라며 교조 신원의 요구는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동학을 금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폐단을 없애달라는 요구는 받아들였다. 그리고 집회에 대해 별다른 제재 조치는 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官)의 미온적인 태도에 최시형의 동학 교단도 교조신원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해 11월에 전라도 삼례에서 다시 집회를 열었다. 삼례에 모인 군중은 두 차례에 걸쳐 전라도 관찰사인 이경직(李耕稙)에게 소장을 보냈다. 그 결과 전라 감영에서도 동학 교도에 대한 부당한 수탈을 금하겠다는 답변을 얻고 해산하였다. 이 때 전봉준 등 호남의 교도들은 ① 동학당을 사도(邪道)로 정하지 말 것 ② 외국의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나라 밖으로 쫓아낼 것 ③ 탐학하는 지방관리를 제거할 것 등 3개조의 요구조건을 제시하는 등 교조신원의 종교운동보다는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운동으로서의 성격을 중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당시 서인주, 전봉준 등의 남접 강경파는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인정에 초점을 두고 있던 북접의 교단 지도부와는 달리 농민의 사회 현실 개선을 위한 정치 개혁을 중시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이들은 복합상소를 통해 동학 교도를 한양으로 결집시켜 부패한 집권세력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12월에는 충청도 보은 장내리(帳內里)에서 다시 집회를 열었는데, 공주집회와 삼례집회의 영향으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여기에서는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상소운동을 벌이자는 요구가 높았으나 북접의 동학 교단은 복합상소는 추진하되 시기와 인원 등은 따로 정한다고 무마하여 집회를 해산시켰다.
최시형은 1893년 1월 소수(疏首)를 박광호(朴光浩)로 하고, 청주 손천민(孫天民)의 집을 임시 본부로 하여 복합상소의 절차를 정하고, 서병학을 2월 1일에 한양으로 먼저 올려보내 준비를 마치게 하였다. 그리고 2월 8일 한양에 도착한 손병희(孫秉熙), 김연국(金演局), 손천민(孫天民), 박인호(朴寅浩) 등은 2월 11일부터 광화문 앞에 엎드려 상소하였다. 그러다 13일 “각자 집에 돌아가 하는 일에 힘쓰고 있으면 소원에 따라 시행하리라”는 고종의 전교(傳敎)를 받고 복합상소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등은 복합상소와는 별도로 한양에 ‘척왜양’의 괘서를 붙이는 한편, 미국인 학당과 교회당, 프랑스 공사관, 일본 영사관 등에도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무장을 갖추어 3월 7일에 공격하겠다는 내용의 괘서를 붙였다. 부산 성문과 충청도 청산 등지에도 척왜양의 괘서가 붙었고, 전봉준 등은 세력을 모아 한양으로 진격하려고 준비하였다.
3월 7일의 거사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지만, 동학 교도는 각 지방에 방문을 붙여 3월 10일을 전후하여 삼남 지방에서 동시에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충청도에서는 보은에서, 전라도에서는 원평에서, 경상도에서는 밀양에서 각각 집회가 열렸는데, 이 집회들은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세워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단순한 종교운동의 차원을 넘어서 반봉건·반외세의 성격이 뚜렷이 나타났다. 참석자들은 소매 없는 푸른 두루마기에다 소매 끝은 붉은색으로 장식하는 등 조직적인 면모를 나타냈고, 이곳에는 동학 교도만이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염원하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곧 종교운동을 내세우며 출발했던 교조신원운동이 반봉건·반외세의 정치적 요구를 내세운 정치운동으로 전환하였으며, 이는 1894년 농민전쟁이 일어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보은에서는 삼문(三門) 밖에 관가에 보내는 통고문을 붙였는데 그 내용은 왜적과 양적은 같이 지낼 수 없는 원수라는 것이었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은 7∼8만 명에 이르렀는데, 이들은 성채를 쌓아 ‘척왜양창의’의 깃발을 내걸었고 전투 대형을 갖추었다. 어윤중(魚允中)이 조정에 보낸 장계(狀啓)에 따르면 보은집회에서는 “외국의 여러 나라에도 민회(民會)가 있어 조정의 명령이 민국(民國)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의논하여 정한다고 한다. 우리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어찌 비류(非類)로 취급하느냐”는 내용의 근대적 정치의식이 담긴 주장도 나타났다.
전라도 금구현 원평(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에서는 서장옥 등이 중심이 되어 집회가 열렸다. 집회에서는 한양으로 곧바로 올라갈 것을 결의하였고, 3월 21일에는 손화중(孫化中)이 1만여 명을 이끌고 보은집회에 참여했다. 경상도 밀양에서 열린 집회에도 전봉준의 상경 계획에 따라 수만의 군중이 모였다.
집회의 규모가 커지자 조정에서는 3월 17일 어윤중을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로 삼아 파견하였다. 어윤중은 3월 26일 보은에서 해산을 권유하는 왕의 칙유문(勅諭文)을 전하고, 그들의 뜻을 왕에게 전하겠다고 회유하였다. 그리고 4월 1일 청주영장, 보은군수를 대동하고 보은에 가서 왕의 윤음(綸音)을 전했다. 집회가 정치운동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최시형·손병희 등 북접의 교단 지도자들은 3일 안에 집회를 해산하겠다고 했고, 집회 참석자들이 이에 반발하자 4월 2일 밤에 몸을 피했다.
교단 지도부가 잠적해 버리고 관군이 해산을 압박하자 보은 집회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흩어졌다. 원평 집회도 어윤중이 원평에 도착하기 전에 스스로 해산하였으며, 밀양 집회도 보은 집회의 해산 소식이 전달되면서 흩어졌다. 보은·원평·밀양에서 동시에 열린 삼남 집회 이후 북접의 동학 교단 지도부는 전봉준을 위험 인물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교단 조직을 통제하기 위해 법소(法所)와 도소(都所)를 설치하여 교도들이 임의로 집단 행동에 나서지 못하도록 금하였다.
이처럼 1892년 10월 공주 집회에서 시작되어 1893년 4월 삼남 집회의 해산까지 진행된 교조신원운동은 겉으로는 ‘포교의 자유’라는 종교적 요구를 내세우며 시작되었지만, 삼례 집회와 괘서 투쟁, 삼남 집회 등을 거치며 반봉건·반외세의 투쟁 의지를 결집시키는 정치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종교의 이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온건한 북접의 교단 지도부와 구분되는 서인주(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전봉준, 손화중 등 남접의 강경파가 독자적인 세력으로 떠올랐다. 곧 1892∼1893년에 전개된 교조신원운동은 1894년 농민전쟁을 예비했던 사전 단계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동학의 지도자. '남접(南接)'이라는 세력을 구축하고 서포(徐布)의 지도자로서 제자 전봉준과 함께 봉기를 주도했다. 동학 의식의 제정에 깊이 참여했는데, 서병학이 유교 의식의 도입을 주장한 것과 달리 불교 의식을 많이 수용하게 했다.
일명 서장옥(徐璋玉: 徐長玉). 호 일해. 수원 사람이라 전해진다. 원래 30여 년간 불교 수양을 하였으나, 1883년(고종 20) 강원도 인제에 있던 최시형(崔時亨)을 방문한 이후로 동학의 지도자가 되었다. 1889년에 서울에서 체포되어 금갑도(金甲島)에 유배되었다가, 최시형이 식사때마다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행하고 김연국(金演局)으로 하여금 750냥을 마련하게 하는 노력을 기울여 석방되었다.
1892년 서병학(徐丙鶴)과 함께 최시형에게 교조신원운동을 제의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충청도와 전라도의 관찰사에게 제시한 교도 탄압중지 요청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교도를 모아 삼례집회(參禮集會)를 주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강경 노선을 펼쳐 온건한 교단 지도부와 자주 마찰을 빚었으며, 전라도의 손화중·김개남·김덕명·전봉준을 제자로 거느리고 새로이 '남접(南接)'이라는 세력을 구축하였다.
1894년 이른바 서포(徐布)의 지도자로서 제자 전봉준과 함께 봉기를 주도하였으나, 6월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풀려났다. 그뒤 남접의 봉기에 호응치 않고 도리어 압박하는 형세에 이른 북접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충청도에서 농민군을 규합한 것으로 보인다. 남접과 북접의 연합 위에 2차 봉기가 일어나자 청주 병영을 공격한 이후 행적을 감추었다가, 1900년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동학 의식의 제정에 깊이 참여하였는데, 서병학이 유교 의식의 도입을 주장한 것과 달리 불교 의식을 많이 수용하게 하였다.
서장옥은 수운최제우가 남원 은적암에 은둔하는 동안 만난 동승(童僧)으로 후에 최시형과 함께 동학을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동학의 양대 조직 중 하나인 남접(南接)의 대도주(大道主)로서 삼례집회를 비롯한 동학도들의 집단적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장옥은 어린 시절부터 절에서 자랐으며, 30여 년 동안 승려로 있다가 동학에 입교했다. 입교한 시기는 1883년경으로 보이며, 입교 후 동학교문의 여러 법식 등을 마련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오지영은 그의 “신체는 비록 작았지만 용모가 특이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경외지심(敬畏之心)을 일으키게 하였으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도승(道僧), 이인(異人), 진인(眞人), 궁적(窮賊) 등으로 다양하게 평가하였다”고 전했다.
서장옥이 1889년에 서울에 갔다가 관아에 체포되자 최시형이 전 교단의 힘을 기울여 석방운동을 벌였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 서장옥은 석방 후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 포교는 물론 교조신원운동을 주도하였고, 갑오농민전쟁 시기 내내 강경파로 활약하였다.
1893년 동학교단 북접에서 준비한 복합상소 때, 서장옥을 중심으로 한 남접 세력은 상경한 동학교도들에게 군복을 입히고 무장을 시켜 궁궐을 습격하여 중앙고관들을 제거하고 조정을 개혁하는 혁명적인 항쟁방법을 구상했다. 그 뒤 동학교단 상층부를 움직이는 것에 더 이상 의지하지 않고, 남접 또는 전라도 고부(古阜)라는 한 고을의 농민무장봉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서장옥은 1894년 6월에 붙잡혀 갑오농민전쟁의 전반에는 옥중에 있었다가 이후 석방되었다. 고문을 받은 후유증으로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지만, 9월에 다시 농민군 규합에 나섰다. 그 후 약 5년 동안 행적은 알 수 없지만, 1900년에 경군에 체포되어 동지 손사문과 함께 재판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본관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병부상서공파
이천 서씨 시조 1세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부총리) 후손.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 종 1품.국무총리)
4세 서유걸(徐維傑 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5세 서정(徐靖 중서시랑평장사.판삼사사(判三司事). 종 1품.국무총리)
6세 서균(徐鈞 판장작감사.검교상서우복야.
좌복야(尙書左僕射). 정 2품. 부총리)
7세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 종5품.평장사 정2 품 부총리)
8세 실전
9세 실전
10세 실전
11세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종 1품.국무총리- 병부상서 공파)
12세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육군참모총장급)
13세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고려충신).정 3품. 장관급)
14세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15세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16세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17세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18세 서혼(徐渾 군자감위정(軍資監正 종 3품.차관)
19세 서적(徐勣 종묘서령(宗廟署令.정 4품.차관보)
20세 서할(徐劼. 진사(進士)
21세 서몽린(徐夢麟 진사)
서응린(徐應麟. 선무랑(宣務郞).정 6품) 국장)
22세 서극진(徐克進 진사(進士)
서달증(徐達曾 학자)
서학증(徐學曾 진사)
23세 서탁(徐晫 현감(縣監). 군수)
24세 서국정(徐國楨 응교(應敎.정 4품. 차관보),전적(典籍).이조정랑(吏曹正郞)
목차
가족
- 시조 : 서신일(徐神逸 정2품 아간대부(阿干大夫) 부총리)
- 시조모 : 합천 홍씨(陜川 洪氏) 홍찬(洪贊)의 딸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큰증조할아버지 : 서효리(徐孝理.예롱공(豫聾公). 통훈대부(通政大夫). 정 3품. 차관)
- 큰증조할아버지 : 서효주(徐孝宙.수롱공(隨聾公) 무공랑별제(務功郞別提) 정 7품)
- 큰증조할아버지 : 서효환(徐孝寰.점롱공(漸聾公) 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장관)
- 증조할아버지 : 서효당(徐孝堂.익롱공(益聾公) 전생서승(典牲署丞 종육품아문(從六品衙門)으로 옥(獄) 에 수감된 죄수(罪囚)를 관장).이조판서(吏曹判書). 정 2품. 조선 충신). 정2품.장관)
- 할아버지 : 서지(徐祉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공조판서(工曹判書).함경도관찰사(觀察使).이조판서(吏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2품.서울시장장관)
- 작은할아버지 : 서우(徐祐 충순위병절교위(忠順衛秉節校尉).종2품.육군참모총장)
- 고조할아버지 ; 서호(徐顥(灝) 통훈대부 남원부사(南原府使).이조참판(吏曹參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정 2품. 전남도지사.서울시장.장관)
- 고고조할아버지 : 서운(徐暈 통훈대부 부선공부정(夫繕工副正).도승지(都承旨). 정 2품. 고려 명신.청와대비서실장)
- 작은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광준(사재감정.정 3품.장관.기은(箕隱). 고려충신)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준(徐希俊 중생원(中生員). 정 3품. 고려충신. 장관)
- 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수(徐秀 병부령(兵部令).종 2품.부총리)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린(徐鱗 병부상서(兵部尙書) 종1품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장관.국무총리)
- 실 전
- 실 전
- 실 전
- 서원(徐元 성불도감판관(成佛都監判官).정2품 평장사(平章事) 부총리)
- 서균(徐鈞 정2품 검교상서우복야(檢校尙書右僕射) 부총리)
- 서정(徐靖) 정2품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부총리)
- 서유걸(徐惟傑, 정2품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부총리)
- 서희(徐熙 종1품 내의령內議令) 국무총리)
- 서필(徐弼, 901~965, 종1품 삼중대광 태사 내사령三重大匡太師內史令) 국무총리)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1892∼1893년에 동학 교도들이 벌인 운동이다. 1864년에 처형된 동학의 창시자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조정으로부터 포교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을 내세웠으나, 서인주, 서병학,전봉준 등에 의해 ‘척왜양(斥倭洋)’의 정치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삼례집회(參禮集會)
1892년 10월과 11월에 걸쳐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을 요구하며 전라도 삼례에서 개최한 집회.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
1893년 2월에 교조 최제우(崔濟愚, 1824~1864)의 복권을 요구했던 서울 복합 상소(伏閤上疏) 운동 이경직이 확약한 부당 주구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동학에 대한 관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이에 최시형을 설득해 1893년 2월의 서울 복합상소운동(伏閤上疏運動)을 적극 주도하였다.
보은취회(報恩聚會)
서병학은 같은 해 3월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斥倭洋)’의 기치를 내건 동학의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적극 주도하였다. 이 당시의 위치는 ‘차좌(次座)’였으나 사실상의 보은취회 주도자였다. 그러나 양호선무사(兩湖宣撫使) 어윤중(魚允中)의 해산 명령 이후 동학의 상층 지도부가 몰래 도망, 보은취회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금구집회(金溝集會)
1893년 초 동학교도가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과 척왜양(斥倭洋)을 목적으로 전라북도 금구에서 개최한 집회.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