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여족)
고구려(高句麗)
고구려는 서기전 1세기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이다. 압록강 중류 지역에서 초기 성읍국가로 출발하여 주변의 예·맥족은 물론 옥저·동예·부여·조선 등 여러 종족들을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하면서 강대한 국가로 발전했다. 중국 한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의 군현이 설치되는 등 위축된 시기도 있었으나 이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국력이 더욱 강해졌고 중국의 통일 왕조인 수와 당의 침략도 물리치며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존재했다. 그러나 후기에 성립한 귀족연립정권의 내부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어, 당나라와 연합한 신라의 공격으로 멸망했다.
정의
서기전 1세기에서부터 668년까지 존속한 고대 왕국.
고구려의 어원
국호 ‘고구려’의 어원은 ‘구려(句麗)’에서 비롯하였다. 몽골고원 오르혼 강 기슭에 서있는 돌궐(突闕) 제2제국의 빌게가한과 그의 동생 퀼테킨을 기린 2개의 고돌궐비(古突闕碑)에서 고구려를 배크리(Bokli)라 기술하였다. 돌궐어에서 B음과 M음이 상호전환 될 수 있으므로 배크리는 매크리(Mokli)이며, 그 밖에 범어잡명(梵語雜名)과 돈황문서(敦煌文書) P.1283 등에서 고려를 ‘무구리(畝久理)’ ‘Mug-lig’라 하였다. 이는 모두 맥구려(貊句麗) 즉 ‘맥족(貊族)의 구려’를 기술한 것이다. 이는 곧 고구려에서 ‘구려’가 어간이고, ‘고’는 관형사임을 말해준다. 고구려어에서 성(城)을 ‘구루(溝漊)’, ‘홀(忽: khol)’이라 하였다. 이는 읍(邑), 동(洞), 곡(谷)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통하는 말이다.
‘고구려’는 ‘구려’에다가 ‘크다’, ‘높다’는 뜻의 ‘高’=‘大’를 덭붙인 말로서, ‘큰 고을’ ‘높은 성’의 뜻을 지닌 말이다. 고구려라는 명칭이 처음 역사상에 등장한 것은 현토군(玄菟郡) 설치 때(B.C. 107) 그 속현(屬縣)의 하나로 고구려현(高句麗縣)이 두어지면서였다. 즉 토착민들이 ‘큰 고을’이라고 부르던 읍락에 현을 설치하고, 이를 고구려현이라 하였던 것이다. 그 뒤 서기전 75년 현토군이 퇴축된 이후 이 읍락을 중심으로 고구려 연맹체가 형성되었고, 이후 국호로 사용되었다. 5세기 중엽 이후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한자의 뜻을 살려 고구려를 줄인 말인 ‘고려(高麗)’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전승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고구려인의 기원
고구려 발흥지인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의 종족 계통을 중국 측 사서에서 맥족이라 기술하였다. 맥족은 선진문헌(先秦文獻)에서부터 등장하는데, 그들의 거주지역이 북중국의 여러 지역에서 부터 요동(遼東) 지역에 이르는 넓은 범위에 걸치는 공간이었다. 그래서 압록강 중류 지역의 맥족은 먼저 문헌 상에 등장하였던 북중국의 맥족이 한족(漢族)에 밀려 동으로 이동한 이들이라는 설이 기원후 2세기에 제기된 바 있고 근대에도 같은 주장이 이어졌다. 그러나 선진문헌의 맥족은 특정한 종족을 지칭한다기보다 한족 거주지의 북쪽에 사는 농경문화가 덜 발달된 족속들에 대한 범칭(汎稱)이다. 맥족 이동설은 아무런 구체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다.
주민이동설의 또 하나의 예는 근래 중국학계의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고이족설이다. 즉 일주서(逸周書) 왕회편(王會篇)의 에서 서기전 12세기 말 성왕(成王)이 낙양에서 사방의 제후와 종족들의 조회를 받았는데 그 중 고이족(高夷族)도 있었다고 전한다. 이 기사의 ‘고이(高夷)’에 대해 4세기 초 공조(孔晁)가 주(注)를 달아 고이가 곧 고구려다고 하였다. 이런 공조의 주를 근거로 삼아, 고이족이 산동반도를 거쳐 요동반도 방면으로 이주하여 고구려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고이족이 고구려였다고 한 것은 공조의 주가 유일하고, 그것은 낙양에서 조회가 있었다는 주(周) 성왕(成王) 대로부터 무려 1,400여 년이 흐른 뒤에 기술된 것이다. 고이가 고구려를 지칭한다는 객관적인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으며, 고이족 이동설도 그러하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의 기원을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방안은 이 지역에 널리 분포해 있는 적석총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소박한 형태의 무기단 적석총(積石塚)에서부터 거대한 방단(方壇)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여러 시기에 걸친 다양한 양식의 적석총이 존재한다. 이들 적석총의 기원을 요서 지역 능원(凌原)의 홍산 문화 유적인 우하량(牛河梁) 적석총에서 찾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설은 시간적 · 공간적으로 압록강 적석총 유적과 너무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우하량 유적은 서기전 3000∼2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압록강 중류 지역의 적석총은 형태와 시간적 측면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요동 반도 남단의 청동기 시대 무덤인 적석총유적(강상묘 · 루상묘 등)이다. 압록강 하류 관전현 · 봉성현 등지의 적석총을 매개로 양 지역의 유적이 서로 연결되는 면을 보인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구려를 세운 이들로서 한인들에 의해 맥족이라고 호칭되었던 압록강 중류 지역의 주민들은 외부에서 이주해온 이들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토착해서 살아왔던 족속이다. 청동기 문화단계에서 요동 방면으로부터 청동기 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어 서기전 3세기 대에 연(燕)나라가 요동군을 설치한 이후 연의 철기 문화를 수용하면서 서서히 발전을 도모해나갔다. 이들은 서기전 1세기 중반 고구려연맹체를 형성한 이후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국의 성장과 함께 그 세력 하에 포괄되어 들어온 예맥계의 옥저(沃沮) · 동예(東濊) · 부여(夫餘) · 조선(朝鮮) 등의 여러 종족들이 원 고구려인을 중심으로 상호 융합하여 보다 확대된 고구려인을 형성케 되었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한인들도 융합되어 들어왔으며, 남녁의 한(韓)족의 일부도 그러하였다.
고구려의 경제와 수취제도
고구려가 발흥한 압록강 중류 지역은 비교적 척박하고 농경지가 적었으며, 서북쪽으로 몽골고원의 초원지대로 나아갈 수 있으며, 동북으로는 삼림지대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인은 일찍부터 유목민이나 삼림지역의 종족과 관계를 맺었다. 고구려인은 기본적으로는 정착 농경민이었지만, 그 생업에서 목축과 수렵도 일정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고구려가 발전하여 요동과 서북한 지역 등 넓은 농경지대를 확보한 된 뒤에도 그 생활문화에선 목축과 수렵을 중시하는 면을 유지하였다. 유목지대로의 진출과 북으로 삼림지대의 지배는 이런 면을 뒷받침하였다.
즉 고구려인의 생업은 농업 일변도만은 아니었으며, 지역에 따라 일종의 복합경제적인 성격을 지닌 경제를 운영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의 일부가 몽골 고원의 돌궐로 이주해가 몇몇 집단을 형성하여 거주하였다. 이런 면은 망국 전부터 고구려인들이, 유목 생활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축 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음을 말한다. 고구려는 기원 전후부터 선비족(鮮卑族) 등 일부 유목민 집단과 관계를 맺었고, 멸망할 무렵까지도 일부 거란족(契丹族)과 말갈족(靺鞨族)을 그 휘하에 두고 있었다. 이 역시 목축경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연결된다.
고구려의 수취제도는 고구려 초기 연맹체적인 부체제(部體制) 단계에선 피복속 읍락들을 단위로 공납(貢納)을 징수하는 형태였다. 구체적인 공납물의 내용은 각 읍락의 산출물에 따라 차이가 있어, 옥저의 읍락에선 해산물 등도 징수하였고, 미녀들이 공납에 포함되기도 하였다. 공납물은 집단을 단위로 부과되고 징수되었다. 그런데 읍락 단위로 집단적으로 계산되어 부과되었더라도, 구체적으로 읍락 내부에서는 그 구성원들에게 나누어서 부과된 것을 모아 바치는 형태였을 것이다. 그럴 때 무엇을 기준으로 읍락구성원에게 분담시켰을 것인지가 문제이다. 이에 대해선 당대의 상황을 전하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는 만큼, 뒤 시기의 수취 면모를 통해 거슬러 추론해 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후기 민(民)에게 부과된 조세에 대해 『주서(周書)』 고려전에서 “부세는 견(絹), 포(布), 속(粟)으로 내는데, 그 가진 바에 따르며, 빈부를 헤아려 차등으로 내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수서(隋書)』 고려전에서는 “인(人)은 포 5필, 곡 5석을 세(稅)로 내며, 유인(遊人)은 3년에 1번 세를 내는데 10인이 세포(細布) 1필을 함께 낸다. 호(戶)마다 1석의 조(租)를 내며, 차등호는 7두, 하등호는 5두를 낸다”라고 하였다. 『주서』는 세 부담 내용을 포괄적으로 기술하였고, 『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전한다. 후자의 내용에서 포 5필과 곡 5석은 모든 이에게 부과하기에는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 이는 일종의 호조(戶調)로서, 이에서 말하는 인은 호주인 남정(男丁)을 지칭하는 것이고, 호마다 균일하게 부과되었다. 이것이 부세의 주된 것이고, 호(戶)마다 그 빈부에 따라 3등급으로 구분지어 차등으로 내는 조는 부가세적인 성격의 이다.
이외에 노동력 징발을 하는 부역이 있었다. 즉 고구려 후기 시행되었던 수취제도에서 조세는 인정(人丁)을 기준으로 균일하게 부과되는 인두세가 그 주된 부분을 차지하였다. 통일기(統一期) 신라에서는 호를 9등으로 세분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산출한 계연(計烟)에 의해 조세를 부과하였다. 9등호를 구분하는 기준이 인정을 중심으로 한 총체적 자산이었다고 보는 설이 유력하다. 신라 말 고려 초 이후 점차 토지가 주된 기준이 되어 조세가 부과되었다. 이런 진전을 보면 고구려 초기에는 인정을 기준으로 한 부세가 정해졌고, 그것이 읍락 단위로 부과, 징수되었던 것 같다. 공동체적인 관계가 해체되고 지방제도가 정비되어진 고구려 중기에 접어들면서 관료조직을 통해 개별 호에 대한 수취가 행해지게 되었다.
고구려사의 시기구분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소재처에 따라 구분하는 시각이 있다. 즉 환인(桓因) 시기, 국내성(國內城) 시기, 평양 시기 등으로 나누는 설이다. 수도의 소재처에 따른 구분은 구분의 기준이 간단명료하고, 유적 · 유물과 직결하여 파악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미술사와 고고학에서 선호하는 방안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도의 변천이 한 나라의 역사적 변화 발전상을 단계 별로 반드시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내성 천도 시기조차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특히 그러하다.
정치사적 측면에서 시기구분을 하여, 국초에서 3세기 말 봉상왕(烽上王)대까지를 초기, 6세기 중반 안원왕(安原王)대까지를 중기, 양원왕(陽原王)대 이후 보장왕(寶藏王)대까지를 후기로 설정하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 설은 각 시기 별의 특징적인 국가의 성격이나 그 정치운영 양상에 따라 시기구분을 하였다. 즉 전기는 연맹체적인 부체제의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중기는 군현제(郡縣制)적인 중앙집권체제의 영역국가(領域國家)가 형성되어 운영되던 시기였고, 후기는 중앙집권체제는 지속되었지만, 그 정치 운영이 귀족연립체제(貴族聯立體制)적인 성격을 지녔던 시기로 파악하였다. 현재 이 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에 입각해 각 시기의 고구려사의 면모를 살펴본다.
고구려의 형성 및 변천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와 정치운영
고구려 5부체제의 성립
현토군이 퇴축된 뒤, 압록강 중류 지역에는 소노(消奴)집단이 중심이 되어 여러 지역집단(那: 內, 奴, 壤)들을 규합한 완만한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나(那)’는 압록강 중류 지역 각지를 흐르는 하천 변에 형성된 집단으로서, 부족이나 시원적인 소국(小國: chiefdom)이었다. 퇴축된 후 현토군은 고구려 연맹체 내의 각각의 나와 외교 · 무역 관계를 가져 이를 개별적으로 조종하여 고구려사회 내에서 강력한 통합세력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런 현토군의 간접지배 정책이 상당 기간 효과를 발휘해, 고구려 사회 내에서 혼돈상황이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부여 방면에서 남하해온 계루(桂樓)집단이 두각을 나타내 소노집단을 누르고 연맹체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주몽이 신통술 대결을 통해 송양왕(松壤王)을 눌렀다는 설화는 소노집단에서 계루집단으로 연맹체 장이 교체된 사실을 전하는 바이다. 『후한서(後漢書)』 고구려전에서 전하는 고구려후 ‘추(騶)’는 추모(鄒牟) 즉 주몽(朱蒙)으로서, 기원 전후 무렵 고구려의 군장인 추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은 부여에서 남하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주몽설화는 그 구성이 부여의 동명설화(東明說話)와 흡사하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볼 때 예(濊)족인 부여인의 묘제(墓制)는 석관묘(石棺墓)와 토광묘(土壙墓)였는데 비해, 맥족인 고구려인의 그것은 적석총이어서 차이가 난다. 만약 부여족의 일단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세웠다면 압록강 중류 유역에 석관묘나 토광묘 무덤 떼가 확인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이런 점을 들어, 주몽설화는 부여의 동명설화를 대폭 차용하여 후대에서 만든 것으로써 실제상의 사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설이 제기되어왔다.
그런데 계루집단은 부여 방면에서 이주해온 주몽집단을 중심으로 여러 계통의 이들이 결합한 혼성 집단이었으며, 점진적인 과정을 거쳐 대두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주몽설화는 4세기 후반 공식적인 고구려의 건국설화로 정립되어질 때 부여의 동명설화가 이에 대폭 차용되어졌으나, 이에는 고구려 건국기의 일정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즉 주몽설화의 사실성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이해이다.
인근의 다른 ‘나’들을 통합하며 계루집단의 세력이 확대해나가자, 이를 억제하려는 한군현(漢郡縣) 세력이 개입하여 다른 나를 지원하거나 직접 침공하여, 고구려 내부의 분열을 유발하였다. 그에 따라 일부 집단이 한군현의 작용력에 따라 고구려 연맹체에서 이탈해 나가기도 하였고, 나들 간의 상쟁을 불러일으켜, 1세기 후반 이후 장기간에 걸친 내분과 혼란이 지속되었다.
오랜 혼란을 수습하고 2세기 초 재차 고구려연맹체의 통합력이 형성된 것은 태조왕(太祖王: 國祖王) 때였다. 태조왕궁(宮)은 아마도 주몽의 직계 후손이 아니라 계루부 내의 방계 세력이었던 것 같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한군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압록강 중류 지역의 여러 나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외부와의 교섭 창구를 일원화하였다. 즉 각 나의 자치권의 일부를 박탈해, 무역 · 외교 · 전쟁권을 왕권에 귀속시켰다. 나아가 일부 나들은 계루부에 병합하였다.
압록강 중류 유역의 나들은 그간 그들 사이에서 진행되어오던 상쟁과 통합으로, 태조왕대에 이르러 다섯이 되었고, 계루부 왕권에 의해 이들 다섯 집단의 자치력 일부가 통제되었다. 이것들이 곧 5부(五部)이다. 대내적 통합력을 강화한 뒤 태조왕은 개마고원을 넘어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옥저와 동예의 읍락들을 공략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서남쪽으로는 현토군과 낙랑군(樂浪郡) 등과 대결을 벌려나갔다. 북으로는 부여와 상쟁을 이어갔다. 이런 형세는 그 뒤 상당 기간 동안 지속되었다.
고구려 5부체제의 정치구조
계루부 왕권의 통제를 받아 대외교섭권은 상실하였지만, 각 부는 그 내부의 일에 관해서는 자치력을 지녔다. 왕족 대가(大加)들과 각 부의 장들은 휘하에 자신의 관인을 두었다. 그렇지만 동일한 관등을 지녔을지라도 각 대가들 휘하의 관인은 왕에 속한 관인과 동열에 서지 못하였다. 분립하는 가운데서도 상하 서열이 주어졌다. 주요 국무는 왕족 대가와 각 부 대가들로 구성된 회의에서 처결되었다. 왕은 고구려 전체의 왕인 동시에 계루부의 장이었다. 그는 초월적인 권력자라기보다는 대가들의 대표와 같은 성격을 지녔다. 곧 ‘primus inter pares’(동료들 중의 최상위자)라 할 수 있다. ‘사연나(四椽那)’ 즉 연나부(椽那部) 내의 4개의 집단과 같이, 각 부에는 그 안에 부내부(部內部)라고 불릴 수 있는 하위의 자치체들이 존재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5부에 의해 정복된 집단들에 대해선, 그 집단 내부의 일은 자치에 맡기고 수장을 통해 공납을 징수하는 식으로 간접 지배하였다. 동예와 옥저의 읍락 등이 그러하였다. 양맥(梁貊)의 읍락들도 그러하였다. 초기 고구려국은 이런 각 급 자치체의 연합체였다. 여러 자치체 중 5부는 지배종족으로서 고구려국 내에서 집단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옥저와 동예, 양맥의 읍락들은 피정복민으로서, 일종의 집단예민적(集團隸民的)인 성격을 지녔다. 당시 ‘고구려’라 하였을 때, 『삼국지』 동이전에서처럼 이를 5부만을 지칭하는 경우가 있고, 이와는 달리 5부와 함께 옥저 · 동예 · 양맥의 읍락 등 5부에 정복된 예민 집단들을 포괄하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경우 5부와 여타 피복속집단들은 실제상 고구려 국가 구조 내에서 그 정치적 위상이 엄연히 구분되어졌다.
각종 자치체들을 상하 위계에 따라 누층적으로 쌍아올린 형태가 고구려 초기의 국가구조였다. 주요 정책의 결정과 집행은 회의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런 국가구조를 형성케 된 것은 각급 자치체들을 해체하고 관료조직을 통한 일원적인 지배방식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이는 근본적으로는 당시까지 읍락에 공동체적 관계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배조직이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가적 통합력과 동원력을 확보하는 데에는 제가(諸加)회의와 같은 기구를 통한 정책결정 방식과 함께, 전통적인 제의(祭儀)가 주요한 기능을 발휘하였다. 고구려는 매년 10월 전국적인 규모로 동맹제(東盟制)라는 축제가 열렸다. 동맹제는 일종의 추수감사제의 성격을 지녔다. 동맹제의 구체적인 진행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일신(日神)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 이어 수도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동굴에서 수신(隧神)을 불러내어 나무로 깎아 만든 신상(神像)에 접신케 한 뒤, 천으로 신상을 덮고 배에 태워 압록강을 통해 국내성의 제사 장소로 옮겼다.
수신이 도착하여 수신에 대한 감사의 제사를 올리며 신상을 덮고 있던 천을 벗기면, 햇빛이 신상에 가득 비치어 제의가 절정을 맞는다. 즉 수신(隧神)은 수신(水神)으로서 여신인데, 이에 남신인 햇빛(日神)이 비쳐, 양신(兩神)이 교접하는 형상을 이루게 된다. 이는 곧 한 해의 풍성한 수확을 준 일신과 수신에게 감사를 드린 후 두 신을 교접케 함으로써, 새 생명을 잉태하여 내년에도 풍성한 수확을 약속받는다는 것을 제의를 통해 나타내었다. 이런 제의의 진행과정을 주관하는 최고 사제가 곧 고구려왕이다. 왕은 인간들의 감사와 바람을 신들에게 전하고 신들의 약속을 인간들에 전하는 신성사제였던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왕 자신이 신성왕(神聖王)으로 형상화되었다.
동맹제 때, 5부의 유력자들은 왕이 집전하는 제의에 참여하였다. 만약 이 제의에 참석치 않는다면 이는 곧 반의(反意)가 있다고 간주되어진다. 왕이 집전하는 신께 올리는 제사에 참석한다는 것은 곧 왕의 권위에 승복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왕은 이런 제의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할 수 있고, 지배층의 결속을 도모하였던 바이다. 아울러 동맹제가 수도에서 행해질 때 각 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그와 함께 물자교류가 행해지며 기예를 다투는 각 종 놀이가 행해질 뿐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이러저러한 만남이 이루어졌다. 이 역시 각 부와 부내부의 주민들 간의 소통과 교류를 통한 정서적 결속 도모에 큰 작용을 하였을 것이다.
고구려 정치정세의 변화
5부체제 하에서 고구려 내부의 정치정세는 서로 길항(拮抗) 관계에 있던 계루부 왕실의 통제력과 각 부의 자치력 간의 관계의 진전에 따라, 그리고 왕과 왕족, 대가들 간의 관계에 따라 결정되었다. 점차 왕실의 집권력이 각 부의 분권력을, 그리고 왕권이 왕족대가들의 권력을 압도해가는 상황으로 진전되어갔다. 그와 함께 왕위계승 관행도 바뀌게 되었다. 이런 변화의 기저에는 사회분화의 진전에 따른 친족관계와 읍락의 공동체적 관계에서의 변화가 가로놓여 있었다. 사회분화에 따라 발생하는 빈농(貧農)을 구제하기 위한 조처인 진대법(賑貸法)이 고국천왕(故國川王)대에 시행된 사실은 이런 추세를 말해준다.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고구려 초의 왕위계승은 부자계승이 확립되지 못한 형태였다. 다분히 형제계승의 모습을 띄었다. 그러다가 2세기 후반 신대왕(新大王) 사후 그 아들인 고국천왕이 왕위를 이었다. 그런데 그가 아들이 없이 죽자, 왕비 우씨(于氏)가 시동생인 발기(拔奇: 發岐)와 이이모(伊夷模: 延優) 중 나이가 적은 이이모를 다음 왕위계승자로 추대하고 신왕과 결혼한 일이 일어났다. 이에 발기가 반발하여, 요동의 공손씨(公孫氏)와 연결해 반란을 일으키는 왕위계승분쟁이 발발하였다. 이를 고비로 이후에는 부자계승이 정착되었다. 즉 이이모(산상왕)의 사후 그 아들 동천왕(東川王)이 왕위를 이었고 그 뒤로 왕위의 부자계승이 확립되었다.
또한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여 아내로 삼는 취수혼(娶嫂婚: levirate)도 동천왕대 이후 더 이상 지배층의 혼인관행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왕위의 형제계승과 취수혼이 반드시 서로 동반하는 관행인 것은 아니지만, 상호 적합적 관계에 있다. 모두 친족의 공동체적 관계가 잘 유지되던 사회에서 흔히 행해지던 습속이다. 그런데 사회분화의 진전과 함께 친족관계도 분화되어져 감에 따라 취수혼이 더 이상 선호혼(選好婚)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각 부의 자치력도 점차 약화되고 반면에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되어 갔다. 대외전쟁은 이런 추세를 촉진하였다. 그 결과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고유한 명칭을 띄었던, 자치력을 지닌 정치단위로서의 5부는 소멸되었다. 이제 부(部)는 수도의 행정구획 단위가 되었다. 방위명(方位名) 5부가 그것이다. 이와 함께 같은 시기에 형(兄) 등 새로운 관등을 핵으로 하는 관등제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고구려 대외관계의 확대와 관구검의 침공
고구려 건국기의 대외관계의 주된 대상은 한(漢)의 변군(邊郡)이었다. 이와의 관계에서 소극적으로는 한군현의 침투와 분열 책동을 막고 그들의 문물을 수용하는 교역관계를 유지하였다. 적극적으로는 요동군과 현토군 · 낙랑군 등 한군현 지역을 공략하여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였다. 한편으로는 인근의 부여를 압박하고 일부 유목민 집단들을 규합하여 세력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에 대해 한군현은 고구려 내부의 각 자치집단과 고구려에 귀속해 있던 유목민 집단 등의 한군현으로의 이탈을 부추기거나, 산상왕 즉위 분쟁 때처럼 고구려 내부 상황을 이용해 무력침공을 감행하여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고, 일면으로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고 있던 부여를 지원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고구려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런 양자의 관계는 3세기 중반에 들어 변화하는 면을 보였다. 후한제국이 멸망하고 중국대륙에 세 나라가 대치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중국의 오(吳)가 북중국의 위(魏)를 공략하기 위해 요동의 공손씨 세력과 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위의 보복을 두려워한 공손씨가 오와의 동맹을 거부하자, 오는 동편의 고구려에 손을 내밀었고, 고구려도 이에 응하여 사신을 오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런 중 위가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공략하여 멸하였다. 이제 고구려가 위와 직접 국경을 접하며 그 압박을 받은 상황이 되었다. 동천왕이 오와의 관계를 끊어 위에 우호적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남쪽의 오와 동북쪽의 고구려가 연결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동북방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위는 고구려 원정을 감행하였다.
244년 관구검(毌丘儉)이 이끄는 위군(魏軍)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고구려군은 혼강(渾江) 유역에서 위군을 맞아 분전하였다. 근접하여 벌리는 단병접전에선 고구려군이 우세하였으나. 진을 치고 대규모 집단적 전투에서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마침내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었다. 동천왕은 옥저 방면으로 피난해야만 하였다. 고구려군의 저항으로 추격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위군은 회군하였다. 이 때 관구검이 환도성 인근인 소판차령에 기공비를 남겼다. 이듬해 재차 위군이 침공하여, 북옥저(北沃沮: 두만강 유역)를 거쳐 부여(길림시 일대)로 우회하여 귀환하였다.
관구검의 침공으로 고구려는 큰 타격을 받았다. 수도인 환도성이 파괴되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전후 동천왕은 수도를 임시로 ‘평양’에 옮기었다. 이때의 평양은 지금의 평양시 일대가 아니라 독로강(禿魯江: 將子江) 유역의 강계 지역으로 보거나 집안의 평지 지대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분명치 않다. 전란에 따른 피해가 컸었지만, 위군은 고구려 영토에 주둔치 못하고 곧 회군하였으며, 이후 중국 내에서의 삼국 간의 분쟁과 이은 위나라 지배층 간의 권력투쟁으로 위군의 압박은 지속적인 것이 못되었다.
고구려는 전란의 피해를 복구하고 국가체제를 재정비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중앙정부의 집권력이 강화되었다. 아울러 비록 유효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못하였지만, 고구려는 3세기 중반 이후 북중국 왕조와의 교섭하면서 별도로 남중국 왕조와도 관계를 맺는 등 그 대외교섭의 폭을 크게 확대하였다. 그와 함께 당시 복잡한 국제 관계와 각 국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새로운 경험을 쌓는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다음 세기에 들어 전개된 급격한 국제정세의 변동을 이해하고 그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는 데에 유효한 경험이 되었다.
고구려 중기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형성과 천하관(天下觀) 4세기 이후 고구려의 대외적 진출 4세기에 접어들면서 동아시아는 격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도하던 중국의 진(晉)제국이 무너지고 주변의 유목민들의 이동과 정복전쟁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그간 동아시아 고전 문명의 중심지였던 북중국 지역이 혼돈에 빠졌다. 많은 북중국의 주민들이 장강(長江) 이남으로 이주하였고, 북중국에선 흉노(匈奴) · 선비(鮮卑) · 저(氐) · 갈(羯) · 강(羌) 등의 유목 종족이 이주하여 왕조를 세우며 그들 간에 엎치락뒤치락 흥망을 거듭하는 이른바 5호16국(五胡十六國) 시대가 전개되었다. 그에 따라 그간 동아시아 국제정세를 주도하던 중심축이 붕괴되고 국제적인 혼란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런 상태는 오히려 그간 중국왕조의 압박을 받아왔던 중국 주변의 종족과 국가들에게 변화와 발전의 호기를 제공하였다.
고구려는 (서)진제국의 몰락에 따라 지원 세력이 없어진 낙랑군과 대방군을 공격하여 313년과 314년에 각각 이를 병탄하였다. 서로는 요동평야로 진출하여 그 지배권을 둘러싸고 모용선비(慕容鮮卑) 등의 유목민 집단들 및 한(漢)인 잔여세력 등과 벌였다. 북으로는 부여 방면으로 세력을 뻗쳐나갔다. 당시 부여국은 지금의 길림시 일대에 중심지를 두고 있었는데, 285년 모용선비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왕이 자살하고 부여인들이 대거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곧 이어 진나라의 지원을 받아 국가를 회복하였다. 이 때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던 부여인들 중 일부는 옛 터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그 지역에 머물다가 점차 자립하였으니, 이것이 동부여이다. 복국(復國)한 뒤, 부여는 북진하는 고구려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이에 길림 지역을 포기하고, 서쪽 농안 방면으로 그 중심지를 옮겼다.
한편 서북 방면으로 뻗어나가던 고구려의 기세는 모용선비의 공세로 벽에 부딪쳤다. 342년 무순의 현토성(玄菟城) 방면에서 국내성으로 나아가는 교통로 중 비교적 험준한 남로(南路: 南道)를 통해 진군해온 모용황(慕容皝)의 침공군에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수도가 함락되는 등의 큰 타격을 입었다. 그런데 북로(北路: 北道)를 택해 침공하였던 모용선비군이 고구려 주력군에게 격파되었기 때문에 모용황은 고국원왕(故國原王)의 아버지인 미천왕(美川王)의 시신을 발굴해 가져가고 왕의 모후(母后)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 급히 귀환하였다.
고국원왕이 곧 수도를 회복하였으나, 모용연(慕容燕)과의 관계에 수세적인 입장에 놓여졌다. 고구려에게 타격을 가한 뒤, 모용연은 346년 농안 방면에 있던 부여국을 공략하여 그 왕과 5만여 명의 주민을 사로잡아갔다. 크게 약해진 부여는 이후 고구려에 의지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렇듯 4세기 중반 요동평원의 지배권을 둘러싼 투쟁에서 고구려는 모용연에게 기선을 제압당하여, 그 세력의 팽창이 저지되었다. 한편 이 무렵 남에서부터 백제의 세력이 북진해와 낙랑 · 대방 지역을 둘러싸고 고구려와 쟁투를 벌리었다. 양군은 371년 평양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이때 고국원왕이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전사하였다.
고구려 소수림왕대의 개혁
고구려는 서와 남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수도가 불타고 그 국왕이 전사하는 등 타격을 입어, 위기에 빠졌다. 모두루(牟頭婁)와 고자(高慈)의 묘지명(墓誌銘)에서, 자기 집안의 시조가 주몽의 건국에 기여하였음과 중시조가 모용황의 침공에 대항하여 공을 세웠음을 강조하였다. 이는 곧 모용황의 침공에 따른 위기가 당시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인식되고 기억되었던가를 잘 말해준다.
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소수림왕(小獸林王)대에는 몇몇 개혁이 추진되었다. 먼저 약화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국가적 결속을 도모키 위해, 건국 설화와 시조 이래의 왕실 계보를 확립하였다. 고구려 건국 신화는 하백(河伯) 즉 강의 신의 딸인 유화(柳花)가 햇빛을 받아 임신하여 낳았던 주몽이 부여에서 박해를 받아 남하하여 고구려 지역에서 건국하였고, 그 아들인 유리(琉璃)가 뒤에 아버지를 찾아 부여에서부터 와서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손자인 대무신왕(大武神王)대에 부여를 공격해 격파하여 그 압박에서 벗어나 강대국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간 고구려 초기사에 관한 이러 저러한 설화가 여러 갈래로 전해져 왔는데, 그것들을 모아 정리하고, 그 과정에서 부여의 동명설화의 많은 부분을 차용하여 수식하기도 하여, 왕실의 공식적인 전승(傳承)으로 확립하였다. 고구려 초기의 역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장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건국설화의 정립은 곧 고구려 건국사에 대한 국가적 공인이라고 하겠다.
이와 함께 왕실의 계보를 정립하여 공인하였다. 시조 주몽의 직계 후예로 이어져오던 계루부 왕실은 앞서 말했듯이 1세기 후반 이후 상당 기간의 정치적 혼란을 거친 뒤 태조왕이 재차 통합력을 강화하였다. 이후 태조왕 직계들이 왕위를 이어갔고 그들은 사실상 태조왕을 시조로 하는 계보의식을 지녔다. 그에 따라 태조왕 이전 시기 재위하였던 왕들과 그들의 계보에 관한 전승이 일정치 않았다. 그런 면은 현전하는 문헌의 단편에서도 확인된다. 이제 왕실이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주몽왕계(朱蒙王系) 태조왕계(太祖王系)를 결합한 단일 왕계를 공인하였다.
즉 공식적인 건국 전승과 왕계를 정립하고, 왕실의 존엄성과 정통성을 확립하여, 현 왕실을 중심으로 한 결속을 도모하였다. 곧 왕실의 정통성과 존엄성을 기리는 내용을 담은 건국설화를 확정하고, 왕실의 계보를 정립함을 통해, 패전과 왕의 전사 등에 따른 충격을 계기로 일어날 수 있는 국내 여타 정파의 이탈이나 다른 정치적 움직임을 누르고 현 왕실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결속을 다지는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아울러 현 상황이 요구하는 위대한 군주의 모습을 건국설화를 통해 표현하려 하였다. 3대 대무신왕이 그 좋은 예이다. 그는 강력한 정복군주로 형상화되었다.
대내적으로는 소수림왕 3년(373)에 율령(律令)을 반포하였다. 이 때 제정된 율령이 중국 어느 왕조의 율령을 모법(母法)으로 한 것이며, 그 구체적인 편목이 무엇들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어 추정이 제기될 뿐이다. 그렇지만 굳이 『삼국사기』에서 전하는 이 기사의 사실성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율령은 나라의 제도와 형벌에 관한 규정을 담은 중국왕조의 법률체계이다. 다른 역사적 · 문화적 배경을 지닌 나라에서 율령을 수용할 때 모법이 그대로 이식될 수는 없고, 받아들이는 나라의 상황에 맟게 변용하거나 선택적으로 수용되게 마련이다. 그런 만큼 율령의 반포가 곧 전체 법률체계를 중국적인 것으로 바꾼다는 것을, 달리 말하자면 나라의 체제를 율령에 입각한 체제로 전반적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373년에 중국적인 법률체계인 율령을 반포한 후 고구려의 법에는 율령적 요소와 함께 고유법적인 요소도 상당히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소수림왕 3년에 율령을 반포하였다는 것은 율령이 지향하는 체제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율령은 혈연이나 출신 지역의 차를 넘어서 보편적인 성격을 띈 제도와 형벌체계의 수립을 지향하였다. 직접적으로는 군현제에 입각한 제민(齊民)지배를 지향하였다. 3세기 말 4세기 초 이후 고구려에서는 군현제를 지향하는 지방제도의 면모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런 움직임의 연장선상에서 율령이 반포되었고, 그것은 곧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겠다는 개혁 방향의 제시였다. 그런 의지는 율령반포 한 해 전인 소수림왕 2년(372) 태학(太學)을 설립한 데서 이에 표명되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수립에 필수적인 요소가 문서행정에 밝은 인력이다. 태학의 설립은 새로운 관료조직의 확대에 대비한 인재의 양성 조처였다.
소수림왕대에 있었던 또 하나의 개혁 조치는 불교의 공인이다. 이때 고구려에 전해진 불교는 북중국에서 성행하던 이른바 북방불교(北方佛敎)였다. 북방불교에선 ‘왕이 곧 부처임(王卽佛)’을 표방하였다. 이는 5호16국의 혼란한 시기에 호(胡)족 왕조의 보호를 받으며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또한 북방불교는 호족 취향에 맞게 주술(呪術)적이고 기복적(祈福的)인 요소를 다분히 많이 띠었다. 불교는 별다른 저항 없이 고구려에 수용되었으며, 왕실이 이를 적극 지원하였다. 왕즉불의 사상은 왕실의 천손의식(天孫意識)과도 부합할 수 있는 바였다. 아무튼 불교는 고구려 영내에 포괄된 종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신앙을 보다 보편성을 지닌 종교의 세계로 귀합시켜 나가, 고구려 영내 주민들의 융합을 촉진하였다. 아울러 인도-서역-중국으로 이어지는 전파 경로를 거치면서 각 지역의 다양한 문화가 녹아져 있는, 당시 최고의 국제문화인 불교를 통해 고구려는 보다 넓고 다양한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5세기∼6세기 전반 고구려 중앙집권화의 진전
광개토왕 · 장수왕대의 대외적 팽창
4세기 후반 개혁을 통해 내적 체제 정비에 주력하였던 고구려는 391년 광개토왕(廣開土王)의 즉위와 함께 급격한 대외적 팽창을 해나갔다. 고국양왕(故國壤王) 대에 고구려의 북변을 침량하였던 거란을 원정하여 일부 부족을 공략하고 피랍된 고구려인을 귀환시키었다. 서로는 요동평야를 둘러싼 쟁패전에서 모용씨의 후연(後燕)을 격퇴하고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다. 이어 남으로 세력을 뻗쳐 백제를 압박하여 한강 하류 이북 지역을 차지하였으며, 나아가 한강 상류 지역으로 세력을 뻗치었다. 한편 신라가 백제와 왜(倭)의 침공을 물리치기 위해 고구려의 지원을 요청하자, 보병과 기병 5만을 파견하였다. 고구려군은 신라 수도를 거쳐 낙동강 하류 지역에까지 진출하여 백제군과 왜군 및 가야군의 연합세력을 격파하였다.
이 원정으로 한반도 남부 지역 주민에 대한 고구려 조정의 이해가 깊어졌으며, 신라에 깊이 고구려 세력을 부식하였다. 아울러 고구려의 중장기병(重裝騎兵)은 한반도 남부 지역 여러 나라들의 전력 정비와 군사전략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동북방으로도 진출하여 동부여를 병합하였다. 동부여는 앞서 말했듯이 부여의 일부 세력이 두만강 유역으로 망명하여 자립한 나라이다. 고구려군이 수도로 밀려오자 동부여 왕실은 저항치 못하고 항복하였다. 412년 왕이 죽자 시호를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 하였다. 즉 ‘국강상(國原)에 능이 있는, 크게 땅을 넓히고 세상을 평안하게 한 좋은 태왕(太王)’이란 의미를 지닌 시호이다.
이어 즉위한 장수왕(長壽王)은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였다. 평양천도는 국가의 중심지를 옮긴 것인 만큼 그 자체로 큰 의미를 지녔을 뿐 아니라, 이 이후 고구려의 대외정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조처로서 의의를 지녔다. 전략상으로 국내성에서 서쪽으로 혼강 상류로 나가 소자하(蘇子河) 유역을 거쳐 무순 · 심양 방면으로 진출하여 요동 평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런 뒤 요서(遼西) 지역을 차지하고 내몽고 초원 지대로 나아가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계의 제압을 도모하는 진출방향이 상정될 수 있겠다. 이와 함께 요서에서 서남방의 북중국 방면으로 나가 중국 천하를 놓고 쟁패전을 벌리는 방략이 상정될 수 있다. 청나라의 팽창 과정이 그것을 잘 말해주며, 여진족의 금나라도 크게 보면 이런 경로를 취해 팽창하였다.
그런데 고구려는 평양천도를 함으로써, 요하 서쪽으로의 팽창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실제 그 이후 고구려 조정의 대외정책도 그러하였다. 그 대신 한반도로의 남진책(南進策)을 강화하였다. 그에 따라 고구려와 백제 · 신라 · 가야 간의 화전(和戰) 양면에 걸친 교류가 증진되었다. 물론 이후 고구려가 요서 지역의 정치 정세에 개입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430년대에 들어 선비족의 탁발씨(拓拔氏)가 세운 북위(北魏)가 세력을 동으로 확장해와 북연(北燕)을 압박하니, 북연 황제 풍발(馮跋)이 동으로 고구려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436년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북연의 수도 용성(龍城: 현 朝陽)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가, 고구려군이 먼저 성에 들어가 성내를 석권하고 북연 황제와 그 주민을 몰아 동으로 귀환한 사건이 벌어졌다.
북위군과 고구려군이 직접 무력 충돌을 하진 않았지만, 양측은 이후 상당기간 동안 첨예한 대립상을 보였다. 520년대에도 북위의 내분에 따른 혼란한 상황에서 고구려군이 용성 지역에 진주하여 많은 수의 그 지역민을 고구려로 이주시킨 일이 있었다. 그리고 요하 상류 방면의 거란 부족들 중 일부를 고구려 세력 하에 귀속시켰다. 470년대에는 고구려가 유연(柔然)과 모의하여 흥안령산맥(興安嶺山脈) 동록에 거주하던 지두우족(地豆于族)을 분할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자 그 남쪽의 해(奚)족과 거란족이 동요하여 이동하는 등의 분란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이런 일들은 고구려가 요서지역과 그리고 요하 상류나 흥안령 지역으로 진출함에 따른 일들이다. 그렇지만 고구려가 적극적으로 북중국 방면으로의 진출이나 몽골 초원의 제패를 도모하였던 것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몽골고원이나 북중국 방면으로 뻗어나가려 하였다기보다는 그 방면으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고구려 세력권을 공고히 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광개토왕대 이래로 신라에 미친 고구려의 영향은 장수왕대에도 이어졌다. 경주평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이 그런 면을 증언해준다. 호우총(壺杅塚)의 청동 호우(壺杅), 금관총(金冠塚)의 네 귀 달린 청동제 항아리, 서봉총(瑞鳳塚)의 연수명(延壽銘) 은그릇(合杅) 등은 그런 예이다.
한편 475년 장수왕은 3만군을 파견하여 백제 수도인 한성(漢城)을 공략하고 개로왕(蓋鹵王)을 참살하였다. 이후 한강유역의 상태에 대해서는, 고구려군이 귀환한 뒤 한강 하류 지역은 사실상 방기되었다는 견해도 있었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에 따라 백제군이 북진하여 한강 하류를 회복하였다고 보는 설도 있다. 전자는 한강 하류 지역에 고구려 관계 유적 유물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였다. 그런데 근래 이 지역에서 고구려 유적이 다수 발견되어 더 이상 이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후자의 경우, 551년 백제군이 다시 한강 하류 지역을 탈환하였을 당시 이 지역에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6개의 행정 단위(郡)가 설치되어 있었던 만큼, 475년 이후 얼마 안 있어 백제가 탈환하였다고 단정키 어렵다. 475년에서 551년 사이 기간 중, 지역에 따라 그 구체적인 양상에서는 변동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한강 하류 지역에는 고구려의 지배력이 미치고 있었다.
한강 상류 지역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세력이 뻗치고 있었다. 나아가 죽령(竹嶺)을 넘어 영주 · 봉화 · 영양 · 울진 · 영덕 등 경북 북부 지역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쳤다. 고구려는 금강 상류의 청주시(淸州市) 청원구(淸原區: 옛 청원군) 방면으로도 세력을 뻗쳐 남성골에 산성을 축조하니, 그에 대응해 맞은 편 보은지역에 신라가 486년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축조하였다.
이렇듯 5세기 종반 고구려가 남으로 한반도의 중부 지역을 석권하고 계속 남진세를 보이자 이에 대응해 백제 · 신라 · 가야가 연합하여 대응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한편 고구려는 서북 방면에서는 거란족의 일부 부족을 그 영향력 하에 두었으며, 중 · 동부 만주의 말갈 부족들 다수를 복속시켰다. 그와 함께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걸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런 형세는 5세기 말 6세기 초 물길(勿吉)의 성장에 따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였지만 대체로 6세기 중반까지 유지되었다.
지방제도의 정비
4세기대 이래로 지속되었던 대외적 팽창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보한 고구려 조정은 중앙집권체제의 구축에 주력하였다. 중앙 관서조직의 확충과 함께 확대된 영역을 지방제도로 편제하여 통치해나갔다. 고구려 발상지였던 압록강 중류 지역은 5부의 자치력 약화와 함께 곡(谷)을 단위로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4세기가 진전되면서 영토가 늘어난 일부 변경지역에 축성(築城)을 하고 성을 중심으로 주변 지역을 포괄하는 지방통치 단위가 설정되었다.
4세기 이후 6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군(郡)제가 고구려 영내에, 모든 지역은 아니지만, 상당히 널리 시행되었다. 이 시기 군제가 시행되었음은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에 구체적으로 ‘군(郡)’이란 표현이 있고, 한강 유역 16개 ‘군’의 존재나 고구려 후기 무관직인 ‘말약(末若)’을 일명 ‘군두(郡頭)’라 한 것 등의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군 아래에 몇 개의 하위 성이 있었고, 그 아래 촌(村) 등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어진다. 군에 파견된 지방관이 수사(守事)였던 것 같다. 군은 통상적으로는 성(城)이라 칭하고 그 지방관의 칭호를 통해 군임을 나타내었다.
지방제도의 시행은 피복속민을 지역단위로 편제하여 지배코자 한 조처이며, 이는 곧 피복속 지역의 주민과 토지에 대한 일정한 지배권을 중앙정부가 장악함을 의미한다. 율령이 반포된 이후에는 그에 입각해 지방관이 지역민을 통치하였다. 곧 중앙집권적 영역국가체제의 수립과 제민지배(齊民支配)를 지향하였던 것이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에 보이는 ‘대왕국토(大王國土)’라는 표현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지방지배가 공납제적인 것에서 조세제로 전환되었음을 뜻한다. 한편 고구려 세력 하에 있던 말갈족과 일부 거란족은 지방제도 바깥에 존재하면서 그 족장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배되어 공납과 군사적 조력을 하였다.
군제는 6세기 중반 이후 변화가 있게 되었다. 중앙정계의 재편과 함께, 수사는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고, 욕살(褥薩: 都督), 처려근지(處閭近支: 刺史), 루초(婁肖: 縣令) 등이 새로 지방관의 명칭으로 등장하였다. 욕살과 처려근지 등은 군정권과 민정권을 함께 지니고 있었으며, 그 치소(治所)가 산성 안에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지방제도와 군사제도가 밀접히 연관되어 있어, 군사국가적인 면모를 강하게 띠었다. 고구려 말기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는 상황에서 점차 광역의 지역별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할 필요성이 증대함에 따라, ‘욕살’이 주재한 성을 중심으로 다수의 성들을 통괄하는 광역의 행정 · 군사구역이 편성되는 경향을 보였다. 667년에 작성된 일종의 전황표(戰況表)인 ‘목록’에서 보듯, 욕살의 성을 가르킨 ‘주(州)’라는 새로운 명칭이 등장한 것도 이런 면을 말해준다.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天下觀)
5세기대를 통해 고구려는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포괄하는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고구려 지배층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형성하였다. 이 천하관은 당시 고구려를 둘러싼 객관적인 형세가 반영된 것인 동시에, 고구려 대외정책 수립에 기본 토대로 작용하였다. 천하관은 국내외의 현실 정치질서에 대한 인식을 담은 것이다. 구체적으로 자국의 성격이 어떠하고, 국제사회에서 자국과 인접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며,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를 개진한 것이다. 5세기대의 금석문(金石文)에서 이에 관한 고구려인의 의식이 기술되어 있다.
먼저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한 가치를 지녀 천하 사방에서 가장 신성하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된 논거로 만유를 주재하는 신인 천제(天帝)가 고구려 왕실의 조상신이며, 고구려왕은 천제의 신성한 핏줄을 이은 ‘천손(天孫)’임을 내세웠다. 이런 천손이 다스리는 나라는 여타 주변국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 나라를 신성한 천손국으로 여김은 곧 주변의 나라나 집단들은 마땅히 고구려에 복속하여야 할 존재들로 규정하는 의식과 연결된다.
그래서 고구려 지배층은 자국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상하 조공관계(朝貢關係)로 규정하였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상하 조공질서를 형성한 그러한 국제정세를 유지하는 것을 ‘수천(守天)’, 즉 천제의 뜻을 지켜나가는 것이라고 하였고, 고구려왕은 ‘수천’의 주체임을 자부하였다. 또한 중원고구려비에서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였음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조공국을 대비해 이를 화(華)와 이(夷)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화’와 ‘이’는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계에 의거한 구분일 뿐이었다. ‘대왕국토’ 주민의 존재 양태가 신라 · 백제 주민의 그것과 사회적 · 문화적으로 현저한 차이가 있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 당시 고구려인들은 그들이 알고 있는 세계 즉 동아시아는 몇 개의 천하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겼다. 몽골고원의 유목민들의 천하, 중국인들의 천하, 그리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천하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 간의 관계에서 중국적 천하의 상대적인 우위성을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 각 천하는 병존하여야 하는 존재로 보았다. 실제 이 시기 고구려는 중국의 남 · 북조 및 몽골고원의 유연과 각각 교류하면서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세력균형 상태를 유지케 하는 방향에서 대외관계를 추진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당시 가장 강대하고 팽창적인 북위와 밀접한 교섭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의 남조와 유연의 연결을 도와주는 등 북위의 팽창을 견제하여, 국제 정세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려 하였다.
또한 이런 다원적 천하관(多元的 天下觀)에 의해,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의 천하에 속한다고 여긴 주변 나라들에 대해서는 자연 그 바깥에 있는 집단들과 구별하여 인식되었다. 그러한 측면이 객관적인 지리적 · 문화적 · 정치적 및 종족계통적 측면 등과 결부되어, 신라 · 백제 · 동부여 · 북부여 등에 대해 일정한 동류(同類)의식을 형성케 해주었다.
아무튼 고구려 지배층의 천하관은 고분벽화의 구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령 통구사신총(通溝四神塚), 집안오회분(集安五灰墳) 4호분, 강서대묘(江西大墓) 등의 벽화 구성은 황룡과 북극성으로 상징되는 오방위 우주관과 천하관이 반영되어 있다. 즉 중앙을 상징하는 천청에 황룡과 북두삼성(北斗三星)이, 사방의 고임돌에 사신도(四神圖)와 별자리들이 그려져 있다. 왕이나 그에 준하는 인물이었던 피장자가 누워 있는 이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표현이다. 죽은 자에 대한 표현은 현세에 대한 의식을 나타낸 것으로써, 당시인들이 지닌 천하관의 반영이었다.
고구려 후기 귀족연립정권체제로의 변화
6세기 후반 고구려의 정세 변동
왕위계승 분쟁과 내우외환
6세기가 진전되면서 고구려는 정치적 안정이 흔들리고, 귀족들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모습을 나타냈다. 531년 안장왕(安藏王)이 피살되고 그 동생인 안원왕(安原王)이 즉위하였다. 귀족 간의 갈등은 안원왕 대에도 지속되었다. 안원왕 말년인 544년 12월 마침내 그것은 대규모 정란(政亂)으로 분출되었다. 안원왕은 세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첫째 왕비는 소생이 없었고, 둘째 왕비와 셋째 왕비가 각각 아들을 두었다. 당시 귀족들이 각각 이 두 왕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결집하여, 이를 추군(麤群)과 세군(細群)으로 불리었다. 왕의 병이 위중해지자, 추군과 세군은 서로 먼저 왕궁을 장악하여 우세한 지위를 선점하려 하였다. 마침내 양측 간의 무력충돌이 궁문 앞에서 벌어졌다. 이후 3일간 수도에서 양측 간의 격렬한 대결이 벌어졌고, 추군이 승리하여 정국을 장악하였는데, 이듬해 초 8세의 어린 왕자가 즉위하니, 이가 양원왕(陽原王)이다. 패배한 세군 측의 피살자가 2천여 명에 달하였다.
수도에서의 전투는 일단락되었지만, 분쟁의 여파는 지방 각지에서 이어졌다. 그래서 551년 당시 한강 상류의, 아마도 충주지역의 사찰에 머물고 있던 승려 혜량(惠亮)이 진격해온 신라군에 투항하면서 “우리나라는 정란으로 언제 망할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던 것은 그런 측면을 잘 말해준다. 이렇게 고구려 내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백제와 신라가 551년 북진을 단행하였다. 백제는 한강 하류 6개 군을 차지하였으며 신라는 한강 상류 10개 군을 공취하였다.
그런데 이무렵 고구려는 서북방면에서부터 또 다른 위협에 직면하였다. 북제(北齊) 문선제(文宣帝)가 552년과 553년에 걸쳐 요하 상류 지역의 해(奚)와 거란에 대한 대규모 토벌전을 전개하고, 창려성을 직접 순시하여 요하 선을 압박하였다. 이와 함께 552년에는 외교적 압박을 가해 북위 말기인 520년대에 고구려로 넘어온 북위 유민(流民) 5천 호를 다시 쇄환해갔다. 거란의 일부를 휘하에 두고 있던 고구려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한편 이 시기 몽골고원에서 새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간 고구려와 우호적 관계에 있던 유연이 멸망하였다. 유연의 피복속민으로서 야철업(冶鐵業)에 종사하며 알타이 산맥 서남록 준가르 초원에서 세력을 키워왔던 돌궐(突闕)이 흥기하여, 552년 옛 상전국인 유연을 격파하였다. 이 활기찬 신흥 유목제국은 조만간 흥안령을 넘어 요하 유역으로 그 세력을 확대할 기세였다. 초원에서의 세력교체에 따른 파장은 급속히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신흥 돌궐의 영향력이 고구려 휘하의 거란과 말갈에 뻗쳐오고 나아가 고구려 본토에까지 밀려들어 온다면 심각한 위기 상황이 도래할 수도 있게 된 바이다.
550년대 초에 진행된 이러한 일련의 내우외환의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 귀족들은 방안을 모색하였다. 먼저 귀족들 간의 내홍을 중단하고 그들 간의 갈등을 수습하기 위해 실권자의 직인 대대로(大對盧)를 귀족들 간에서 선임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그리고 방어력이 크게 강화된 평산성(平山城) 형태의 새로운 수도 건설을 제기하였다. 기존의 궁성은 동평양(東平壤)의 안학궁(安鶴宮)터 자리에 있었고, 궁성 외곽에 시가지가 조영되어 있었다. 새로운 수도는 지금의 평양 중심부에 위치하며 궁성과 시가지 전체를 나성(羅城)으로 둘러싸는 그러한 형태였다. 실제 신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천도가 이루어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뒤인 586년이었다.
대외적으로는 남북 두 방면에서 맞이하는 외침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남쪽의 신라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다. 마침내 신라와 밀약(密約)을 맺었다. 양국 간 화평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고구려는 이미 상실한 한강 유역에 대한 영유권과 그리고 함흥평야를 포함한 동해안 일대를 신라에게 넘겨주기로 한 것 같다. 신라로서도 평야지대이고 중국과의 교통로를 확보할 수 있어, 백제의 점령지인 한강 하류 지역이 탐이 났던 것이다. 이런 양국이 평화 협약을 맺었다는 사실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신당서(新唐書)』 신라전, 『일본서기(日本書紀)』등에서 전하고 있고,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 마운령비(摩雲嶺碑)에서도 “인접국이 신의를 서약하고, 평화의 사절이 오고 갔다”고 하였다.
이어 553년 백제가 점령한 한강유역을 신라가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차지하였다. 오랜 숙원인 고토회복에 성공하였지만, 곧이어 동맹국 신라의 공격으로 이를 상실하게 되니, 백제 성왕(聖王)은 크게 분노하였다. 이듬해 백제군과 가야군 및 1천여 명의 왜군을 동원한 백제의 반격전이 벌어졌다. 백제군은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에서 신라군의 매복에 걸려 괴멸적인 패배를 당하였다. 이 때 성왕도 포로가 되어 처형되었다. 관산성전투 이후 신라와 백제 간에는 해를 이은 공방전이 벌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남부 국경 일대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그런 뒤 고구려는 주력을 서북으로 돌려 돌궐의 침공에 대비하여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귀족연립정권 체제 형성
양원왕 즉위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귀족들 간의 분쟁은 내외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자 대대로 선임제를 매개로 한 귀족들 간의 절충에 의해 수습되었다. 그런데 이 타협책이 잠정적인 수습안에 불과하였던 것이 아니라 그 뒤까지 큰 영향을 주었다. 6세기 후반의 상황을 전하는 『주서(周書)』 고려전에서 “대대로는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상쟁을 벌여 이긴 자가 스스로 취임하며 왕이 임명치 못한다”고 하였다. 『구당서』 고려전과 『한원』에 인용된 「고려기(高麗記)」 등에서도 같은 내용을 좀 더 상세히 전한다. 즉 6세기 후반 이후 국정을 총괄하는 직임인 대대로를 3년마다 고위 귀족들이 선임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이에 비해 『위서』 고구려전 등 6세기 전반 이전의 상황을 전하는 사서에서는 이런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왕권이 강대하였던 6세기 이전 시기에는 대대로가 귀족들 간에서 선임되지 않았거나, 선임되었더라도 대대로의 지위가 권력의 중추이지 않았음을 뜻한다. 그런 상태에서 변화가 생겨, 양원왕 즉위를 둘러싼 귀족들 간의 대규모 분쟁을 거친 후, 대대로가 귀족들의 이해를 조정하고 대표하는 지위가 되었고, 대대로를 3년마다 선임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대로의 직임을 잘 수행하면 연임도 가능하다고 하였다. 즉 유력 귀족이 세력을 유지하면 계속 집권할 수 있었다. 6세기 후반 이후 일종의 귀족연립정권체제(貴族聯立政權體制)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대대로의 선임은 곧 연맹체장 선임의 유제(遺制)를 되살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임의 주체는 중앙귀족이었다. 귀족연립정권 하에서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고 왕권이 크게 위축되었지만, 지방할거 상태가 아닌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가 유지되었다. 6세기 후반 이후 새로운 귀족들이 전면에 대두하였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 집안도 6세기 후반 이후 두각을 나타낸 신흥 귀족이었다.
대외관계 상에서의 변화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정세에서 두드러진 변화의 하나는 신라의 약진이었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한 후 중국왕조와의 교섭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특히 남조와의 교섭에 치중하였던 종전과는 달리 북조와의 교섭도 전개하였다. 그에 따라 북제(北齊)는 565년 진흥왕을 “사지절도독동이교위낙랑군공신라왕(使持節都督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이에서 유의되는 것은 종전에 중국왕조의 고구려왕에 대한 책봉벼슬에서 관행적으로 주어지던 “동이교위(東夷校尉)”나 “동이중랑장(東夷中郎將)” 등 동이를 주관한다는 벼슬이 신라왕의 책봉 벼슬로 주어졌다는 점이다.
물론 당시 중국왕조의 책봉호가 실제적인 의미를 지닌 벼슬은 아니었지만, 동이 문제는 고구려에 일임한다는 자세에서 이제 고구려만이 교섭의 대상이지는 않다는 식의 변모를 나타내었다. 당시 백제도 북제와의 교섭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신라와 백제의 움직임에 대응하여 고구려는 남조의 진(陳)과의 교섭을 강화하였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교섭이 없던 왜국과 공식적으로 통교(通交)하여 570년에서 574년 사이에 세 차례 사절을 파견하였다. 이 역시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의도를 지녔다. 한편 동쪽으로 진격해오는 돌궐를 격파하여 그 동진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제적으로 볼 때 6세기 후반 이후 고구려의 대외관계의 상황은 종전과 다른 면이 많아졌다. 삼국간의 관계는 종전의 고구려에 대항해 신라 · 백제 · 가야가 연합하던 형태에서 삼국이 각개 약진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백제와 신라 간의 상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고구려 남부 국경 일대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어졌다. 북제와의 관계도 북제 자체가 돌궐의 압력을 방어하는데 주력해야 했던 만큼, 고구려와의 갈등은 저절로 수그러들었다. 돌궐의 팽창세력 또한 동으로는 고구려에 의해 저지되었고, 남으로는 만리장성을 넘지 못한 선에서 머물렀다.
이처럼 6세기 중반 이후의 정세변동은 기존의 국제관계의 틀에 상당한 충격을 가하였지만,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581년 수(隋)제국의 등장은 기존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상황 변화를 야기하였다. 그와 함께 고구려의 대외관계도 격류에 휩싸이게 되었다.
고구려와 수(隋)의 전쟁
581년 수(隋)가 건국되었고, 이어 동돌궐(東突闕)을 격파, 복속시켰다. 나아가 589년 남중국의 진(陳)을 통합하였다. 삼백여 년 만에 강대한 통일중국왕조가 등장하였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은 인접한 나라들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고구려는 진의 멸망 소식에 바로 전쟁 준비에 착수하였던 것은 그런 위기의식에서였다. 통일중국제국의 등장은 기존의 국제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재편을 요하였다. 즉 5∼6세기 대에 유지되었던 다원적 세력균형 상태를 타파하고, 중국왕조 중심의 일원적인 질서를 확립하려 하였다.
그간 다원적 세력균형 상태를 지탱하던 주요 세력들인 몽골초원의 유목민 국가, 남중국의 왕조, 북중국의 왕조, 티베트 고원 동북 사면의 토욕혼(吐谷渾), 한반도와 만주의 고구려 중에서 고구려를 제외하고 모두 수제국에 통합되거나 격파 · 복속되었다. 그럼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수의 압박이 가중되었다. 이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돌궐과의 협력을 통해 수제국을 견제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의 세력 하에 굴복한 돌궐이 더 이상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수와 고구려 간에 전쟁이 발발하자, 오히려 수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고구려원정에 동원되었다. 고구려와 수의 대결은 후자의 네 차례에 걸친 침공으로 진행되었다.
수나라는 수륙 양 방면으로 대병을 동원하여 속전속결로 일거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려 하였다. 그에 대응해 고구려는 성곽을 중심으로 한 방어전을 벌였다. 그리고 일면으로는 적의 최대 약점인 긴 보급선을 교란, 차단하면서 가을이 되어 추위와 보급 부족에 시달리게 되기를 기다리는 장기 지구전을 펼쳤다. 이에 조급해진 적군이 별동대(別動隊)로 무리한 침투 기습전을 벌리면, 이를 내륙 깊숙이 유인하여 타격을 가하는 방책을 취하였다. 이런 고구려의 작전에 말려 수군은 번번이 패배하였다. “요동에 가서 헛되이 죽지마라(無向遼東浪死歌)”가 수나라 말기 민중 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였음에서 보듯, 고구려 침공에서의 거듭된 패배와 전쟁에 따른 고통과 재정파탄이 주요 원인이 되어 수제국은 멸망하였다.
고구려와 수의 전쟁에서 유의되는 점은 양국 간의 전쟁이 한반도 내의 삼국관계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다는 사실이다. 백제와 신라는 수에 청병하여 고구려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수군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이에 부응해 고구려 남부 국경을 공격하는 형태의 공동 작전을 전개하지는 않았다. 정작 전쟁이 벌어졌을 때 백제와 신라는 모두 한 걸음 물러서 정세를 관망하는 자세를 견지하였다. 아무튼 수제국의 등장에 따른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의 움직임은 고구려에 의한 수군 격퇴에 의해 저지되었고, 요하 이동으로 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집권
정변
수를 이어 등장한 당(唐)은 혼란에 빠진 중국을 재차 통합하고, 이어 수나라 말기 이후 강성해진 돌궐을 격파하여 몽골 초원의 유목민 사회를 제압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동안 당과 고구려 사이에는 평화가 지속되었고, 당고조(高祖) 이연(李淵)은 “당과 고구려가 각기 자기의 영토를 지키며 평화 공존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자신은 굳이 고구려를 신속(臣屬)시키려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평화공존론은 곧 당의 신료들의 이념적인 반대에 봉착하였으며, 이어 당이 국내를 통일하고 주변의 인접국들을 정복해나가자 고구려 정벌론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그런 흐름의 중심에는 당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있었다. 그는 돌궐의 힐리가한을 격파한 뒤, 몽골 고원 유목민집단의 수장들로부터 630년 유목세계의 패자라는 의미를 지닌 ‘천가한(天可汗)’으로 추대되었다. 이제 그는 농경세계와 유목세계를 아우른 ‘황제-천가한’이 되었다.
이에 팽창해오는 당의 세력을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고구려 조정은 631년 2월 북으로 부여성(夫餘城)에서 동남으로 바다에 이르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이해 7월 당 조정은 요서지역에 고구려가 만든 경관(景觀)을 파괴하였다. 이 경관은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전사한 수군(隋軍)의 시체를 모아 쌓고 그 위에 흙을 덮은 것으로써 고구려에게는 일종의 전승기념탑적인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 시점에 경관을 파괴하는 당의 조처는 명백히 고구려에 대한 위협이고 도발이었다. 이에 고구려 조정은 대륙 정세의 추이와 당의 정책을 더 예의 주시하였다.
이어 당은 토욕혼을 격파하였고, 나아가 640년에는 천산북로(天山北路)에 있는 고창국(高昌國)을 병탄하고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하였다. 이제 사실상 당의 서부와 북부 방면에 있던 주요 나라들을 대부분 병탄한 셈이 되었다. 당의 다음 예봉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이세민은 다음해 641년 5월 고구려에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파견하였다. 직방낭중은 병부 소속으로서 국내외의 주요 군사시설을 포함한 지도 제작을 관장하는 직으로서 군사정보 수집의 실무를 총괄하였다. 그는 고구려에 입경한 뒤, 산천 지리와 군사시설 주민동향 등에 관한 광범위한 정보를 수집하여 돌아가 보고하였다. 그 때 당태종은 곧 고구려에 대한 정벌전을 감행하겠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개진하였다.
한편 진대덕이 평양성을 방문하였을 무렵 고창국 멸망 소식을 접한 고구려의 상하는 크게 당황하였다. 다가올 국가적 위기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귀족들 간의 내홍을 촉발하였다. 당시 고구려 조정은 연개소문의 거취를 둘러싸고 갈등이 깊어지고 있었다. 앞서 연개소문이 그의 부친의 직임인 동부대인(東部大人: 욕살) 직을 계승하려 했는데, 강대한 연개소문 집안의 세력과 그의 위세를 두려워한 다른 귀족들이 거부하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무리에게 호소하여 간신히 계승할 수 있었다. 그 뒤 그의 세력이 강화되어가자 위협을 느낀 왕과 다른 귀족들이 모의를 하여 그를 제거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를 천리장성 감역(監役)으로 임명하여 일단 중앙정계로부터 분리시키려 하였다.
자신을 향한 압박이 가중되어지자, 642년 10월 연개소문은 사열을 한다면서 귀족들을 초치한 뒤 부병(部兵)을 동원해 귀족들을 대거 살육한 뒤, 궁성을 침범하여 영류왕(營留王)을 죽이고 보장왕(寶藏王)을 옹립하였다. 그는 막리지(莫離支: 太大兄)로서 대모달(大模達: 大將軍)에 취임하여 군권을 쥐었으며, 대대로와 귀족회의를 무력화시켰다. 그리고 중리제(中裏制)를 시행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중리제는 조정의 공식적인 관서조직(外朝)과는 별도로 궁중에 설치하여 내조(內朝)라 할 수 있는 왕 직속 행정조직이라고 여겨진다.
중앙에서의 정변에 성공하였지만, 지방 각지에 있는 그의 반대세력에 대한 토벌이 필요하였다. 유명한 안시성(安市城) 성주는 그의 반대파였다. 연개소문은 안시성에 대한 군사적 공격을 감행하였지만, 승리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양자는 타협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였다. 연개소문은 그를 안시성주로 인정하고, 그는 연개소문이 새로운 집권자임을 승복하는 선에서 절충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연개소문과 김춘추의 평양성 회담
그 무렵 남으로부터 신라의 김춘추(金春秋)가 평양성을 찾아왔다. 642년 8월에 백제의 공격을 받아 대야성(大耶城)이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그 성주가 죽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어, 신라의 낙동강 서편 지배권이 흔들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김춘추는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기 위해 평양성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연개소문은 그를 환대하였고, 모처럼 양국의 정치 실세들 간에 담판이 벌어졌다. 김춘추는 고구려가 상쟁을 중지하고 화평관계를 맺으며 군사적 지원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연개소문은 죽령 이북 고현(高峴) 이남의 한강 유역을 신라가 고구려에 돌려준다면 그렇게 하겠다고 응수하였다. 김춘추가 이를 거부함에 따라 모처럼의 담판은 무위로 돌아갔다.
이듬해 고구려가 백제와 협력하여 신라의 대당 교통로인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립된 신라가 당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당이 이에 적극적으로 응하려는 자세를 보였다. 이제 당이 개입함에 따라, 더 이상 신라와 고구려 간에 타협이 진전될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다. 당의 고구려 침공이 임박한 상황에서 스스로 찾아온 김춘추의 제안에 대한 연개소문의 거부는 고구려로 하여금 남북에서 적을 맞이하게 하는 운명적인 선택이었다. 이는 고구려의 안위에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연개소문이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유혈 정변을 거쳐 집권한 그로서는 대외강경책이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키는 데 유효하다고 판단하였던 데서 비롯하였던 것 같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
645년의 전쟁
고구려의 정변과 뒤이은 신라의 당에 대한 구원 요청은 고구려 침공의 기회를 노리던 당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당은 수차례 외교적 압력을 가하고 고구려가 그것을 거부하는 과정을 거쳐 명분을 쌓은 뒤, 마침내 644년 7월 고구려 원정을 선포하고 물자와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하였다. 대략 20여 만에 달하는 당군(唐軍)은 수륙 양면으로 침공을 기도하였다. 수군(水軍)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 남단을 공격하는 길을 취하였고 육군은 요하를 건너 요동평야로 나아가는 길을 취하였다. 당의 선봉장인 이적(李勣)은 평탄한 북로 길을 택해 요하를 건너 지금의 푸순 고이산성(高爾山城)인 신성(新城)을 공격하였다.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으나 이곳에 고구려군을 묶어둔 뒤, 그 남쪽의 개모성(蓋牟城)을 공략하고 이어 요동성(遼東城)을 포위하였다.
한편 당태종 이세민의 본군은 중로 길을 택해 요하를 건너 바로 요동성으로 밀려들었다. 치열한 공방전 끝에 요동성을 함락시키고 이어 백암성(白巖城)도 공략하였다. 그 다음으로 안시성을 향해 진격하였다. 요동벌에서 평양으로 나아갈 때 취하는 평탄한 대로의 길목에 안시성이 위치하고 있는 만큼, 이 성의 함락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였다. 한편 이 무렵 고구려 중앙군 15만이 안시성으로 접근해왔다. 안시성 교외에서 벌어진 양군의 회전에서 당군의 기동력과 포위전술에 휘말려 고구려군은 사령관 이하 3만 7천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대패를 당하였다. 당군은 승세를 몰아 안시성 공략에 힘을 쏟았다. 그러나 완강한 안시성민들의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고 공방전이 장기간 지속되었다.
그러던 중 음력 9월에 접어들면서 요동 평원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재차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며 당군의 보급선을 위협하였다. 한편 그간 연개소문이 정성을 쏟았던 설연타(薛延陀)에 대한 공작이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즉 연개소문은 몽골 고원의 터키계 유목종족인 설연타에게 막대한 물자를 제공하면서, 당시 당군의 주력이 요동으로 나가있는 동안 방어력이 약화된 당의 관중(關中) 지역을 기습 공략할 것을 종용하여 왔다. 설연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안시성 함락을 기약할 수 없으며, 추위와 보급품 부족이 닥쳐오고 있는 상황에서 당군은 신속한 철수 외에 대안이 없었다. 철수는 막대한 피해를 동반하였다.
한편 요동 전선에서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던 이 해 5월에 전쟁의 불꽃이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옮겨 붙었다. 신라군 3만이 임진강을 넘어 북진하였다. 신라는 644년 당으로부터 ‘참전하여 조병(助兵)하라’는 요구를 받아왔다. 그러나 신라 조정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고, 645년 2월에도 출병 독촉을 받았다. 정통성을 둘러싼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선덕여왕(善德女王)으로서는 참전 여부와 그 결과가 경우에 따라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마침내 선덕여왕은 참전을 선택하였다.
그런데 신라군이 북진하자 백제군이 그 공백을 노려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백제 역시 당으로부터 조병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행동으로서 백제의 선택을 분명히 하였다. 645년 4월 당군이 요하를 건너 고구려 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어 5월에 전쟁의 불꽃은 한반도 내의 삼국관계에 직접 옮겨 붙었다. 나아가 6월에는 왜국에서 정변(大化改新)이 일어나 일본열도에 까지 그 파장이 뻗쳐 나갔다.
고구려 · 백제 · 왜의 연대 형성
철수한 뒤에도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번 침공을 통해 그는 고구려를 일거에 정복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에 그는 새로운 방안을 안출하였다. 그 하나는 장기소모전이다. 즉 소규모 단위의 병력을 고구려 변경 지역이나 해안지대에 투입하여 치고 빠지는 것을 되풀이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고구려인이 제대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고, 지치게 될 것이며, 그런 뒤 대규모 원정군을 투입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구려 남부 국경지대에 강력한 제2전선을 구축하여, 그 방어력을 분산시키고 원정군의 최대 약점인 군수품 조달을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게 한다는 방안이다. 그럴 때 새삼 주목되는 것이 신라와 신라군의 가치이다.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에 이어 647년 왜국으로 건너가 양국 간의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을 시도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에 648년 당으로 건너가 이세민과 논의하여 양국 간에 군사동맹을 맺었다. 신라 조정은 당의 연호와 관복을 채용하는 등 적극적인 친당정책인 한화정책(漢化政策)을 시행하였다. 신라의 끈질긴 노력에도 불구하고 왜국은 끝내 당-신라 축에 가담치 않았으며 기존의 백제-고구려 축에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런 두 진영으로 갈라져 대치하는 상태는 660년 백제 멸망전을 거치면서 종국을 향해 치닫게 되었다.
고구려의 멸망
오랜 당과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크게 피폐해졌다. 당의 군사적 압박을 견제할 목적으로 북아시아 초원 국가들과 동맹을 맺는 방안은 계속 추구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시 외곽에 있는 아프라시압 언덕의 궁전 유지(遺址)의 벽화에서 확인되는 고구려 사신의 모습은 그러한 절박한 시도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 성과는 여의치 않았다. 특히 660년 백제의 멸망으로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더 악화되었다. 이어 661년 당군이 침공해와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그런데 이어 겨울철이 되자 당군은 고구려군에게 격파되고 역으로 고구려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식량마저 떨어져가고, 본국과의 보급선이 차단된 위기상황에 몰렸다. 그때 남으로부터 신라군이 진격해와 군수품을 보급해주니, 그것을 먹으며 점진적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새삼 신라군의 전략적 중요성이 부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제 침공군이 동계 작전도 벌일 수 있게 되어 고구려의 전략적 위치는 크게 악화되었다. 상황이 악화되니 연개소문의 후계구도에 대한 관심이 커져갔다. 연개소문은 아들들에게 일찍부터 각급 단위 기관이나 부대의 지휘관직을 역임케 하였다. 장남인 남생(男生)은 중리소형(中裏小兄), 중리대형(中裏大兄)을 거쳐 23세에 중리위두대형(中裏位頭大兄)이 되었고 이듬해 장군이 되었으며, 28세에 막리지(태대형) 삼군대장군(三軍大將軍)이 되었으며, 연개소문 사망 직후인 665년 32세로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가 되어 군국(軍國)을 총괄하였다. 차남인 남산(男産)도 비슷한 과정을 걸었다. 삼남인 남건(男建)도 비슷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이런 승진의 길을 세 아들에게 열어준 것은 이들이 군권을 장악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남생이 막리지 삼군대장군이 된 해가 바로 백제 멸망 이듬해였다. 이 해에 남생이 삼군대장군으로서 당의 침공군을 방어하는 역할을 맡게 하여, 군권을 실제적으로 장악케 하였다. 그러면서 연개소문은 남산과 남건에게도 군권을 이관하여, 세 아들 모두가 군국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세 아들이 군권을 나누어 장악하고 서로 협력하여 국정을 이끈다면 연씨 집안의 권력은 더욱 탄탄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다.
연개소문 사후 남생이 665년 태대막리지가 되어 군국 대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곧이어 동생인 남산 · 남건과 권력 투쟁을 벌이다가 밀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국내성에서 반기를 들고 당에 투항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은 당은 666년 9월 군대를 보내어 남생을 지원하였다. 그에 따라 요하에서 국내성에 이르는 고구려 서북부 깊숙이 당의 세력이 뻗쳐 들어온 형세가 되었다.
고구려 중앙정부는 군대를 파견하여 남생군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옛 수도인 국내성은 천혜의 요새로서 외부에서 공략하기 어려우며, 무엇보다 조금 전까지 고구려 최고 권력자이던 남생이 반란을 주도하는 상황이다 보니 진압이 어려웠다. 남생은 667년 당에 입조하였다. 이후 남생은 고구려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당에 알렸고, 당군의 향도(嚮導)가 되어 적극 협력하였다. 이처럼 남생 형제들 간의 이전투구가 지속되자 남녘을 지키던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淵淨土)가 이탈하였다. 그는 666년 12월 자신의 관할구역인 함경남도 남부 일대와 강원도 북부 지역 12성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였다.
그런데 내분이 터진 뒤에 이를 수습하기 위한 어떤 적극적인 조처도 마련되지 못하였다. 이런 양상은 20여년에 걸친 연개소문의 집권과 무관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대규모 유혈 정변으로 집권한 후 강력한 권력을 구축하려 하였고, 권력을 아들이 세습하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억압적 권력행사는 불가피하였다. 자연히 여타 귀족들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무엇보다 기존 권력 장치를 무력화하였다. 연개소문에게 집중된 권력은 그가 죽자 엄청난 권력 공백을 초래하였다. 그의 아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을 때, 갈등을 조정한다든가 어느 한 편으로 힘을 몰아주든지 하여, 권력의 혼돈상태가 빨리 종결되게 하는 데에 왕이나 귀족회의 등 어떠한 권력 장치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였다.
최고 집권층 내부에서 일어난 분열과 배신, 투항은 고구려인들의 저항력을 마비시켰으며, 오랜 동안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구려 사회에 패배주의를 만연케 하였다. 한편 667년 2월 이적이 이끈 대규모 당의 침공군이 요하를 건너 신성을 포위하였다. 신성은 오랜 저항 끝에 그해 9월에 내부 투항자들의 항복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군은 요동성 방면을 거쳐 압록강 하구로 진격하였다. 그에 따라 요하 이동 고구려 영역 내에 두텁고 깊게 당의 점령지가 마련되어졌다. 이어 이듬해 봄에는 북으로 북부여성 일대가 당군에 의해 공략되어졌다.
당군은 이제 평양성을 향한 총진군에 나섰다. 이런 당군의 진격에 보조를 맞추어 신라군이 남에서 북진하였고, 평양 남쪽의 대곡성(大谷城)과 한성(漢城)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투항하였다. 이제 평양성을 향해 나아가는 남북 양 방면의 진격로에 방어벽이 없어졌다. 드디어 당군과 신라군에 의해 평양성이 포위되었다. 이어 9월 21일 평양성 방어를 총괄하던 장수가 투항함에 따라 마침내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고구려부흥운동과 유민의 향방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당은 평양성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고 2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그런 뒤 5부 176성 69만 호의 옛 고구려국을 9도독부(都督府) 42(州) 100현(縣)으로 재편하고, 고구려인으로서 당에 투항하거나 협력한 자를 도독(都督) · 자사(刺史) · 현령(縣令)으로 임명하여 표면에 내세우고 당인(唐人) 관리가 실제적으로 통치하도록 조처하고 안동도호가 이들을 총괄케 하였다. 새로이 행정단위를 구획하는 등의 일에는 장안에 머물던 남생이 깊이 간여하였다.
안동도호부는 고구려인들의 반발을 원천적으로 약화시키고 당의 지배를 원활히 하기 위한 방책으로 부유하고 힘 있는 고구려인 2만 8천여 호를 당의 내지에 대거 강제 이주시키는 정책을 감행하였다. 이는 고구려인 사회를 뿌리채 뒤흔들었고, 고구려인의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고구려 유민의 반발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나는 적극적으로 당의 지배에 대한 무력 저항이었다. 다른 하나는 당의 지배 망에 벗어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전자의 경우, 평양 일대를 중심으로 한 검모잠(劍牟岑)의 봉기가 그 한 예이다. 요동지역에서도 안시성을 위시한 봉기가 있었고, 부여성 일대에서도 봉기가 잇따랐다. 고구려 유민들의 무력 봉기는 부흥운동군이 상호 연대하는 조직성의 부족과 우세한 당군의 무력에 밀려 673년 무렵까지는 진압되었다. 한번 국가가 붕괴되면 그것을 대체할 조직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지난(至難)한 일이다. 정복자가 자행한 억압과 약탈에 따른 고통스런 현실은 고구려인의 저항을 촉발하였으나, 70년에 걸친 장기간의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력(民力)과 최고 지배층의 배신적 행위를 경험한 이들에게 국가나 그에 준한 조직체에 대한 믿음과 상호 신뢰감을 회복하는 데에는 더 많은 시간을 요하였다. 무엇보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와 내일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확신을 구성원 개개인의 가슴 깊이 심어주는 데에는 장기간의 헌신과 승리에 대한 실제적 경험이 필요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적군은 그런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고 밀어붙였던 것이다.
한편 반당(反唐) 저항운동 과정에서 다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그들의 이주는 소규모 단위로 이루어졌고 상당기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들의 향방은 몇몇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신라로 합류한 이들이다. 이에는 그들의 원주지가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함께 귀속케 된 이들이 있고, 668년 전후 이래로 일련의 격동에서 연정토 일파나 안승(安勝)의 무리와 같이 집단적으로 신라로 내투한 이들이 있었다. 전쟁 포로로 잡혀온 이들도 적지 않았다. 고구려부흥운동에 참여하였던 이들 중 상당수는 당군에 밀리자 신라로 넘어와 신라군에 합류하였다. 신라와 당의 전쟁이 종결된 676년 이후에도 당의 지배에 저항하던 고구려 유민이 산발적으로 소규모 단위로 신라로 넘어왔다. 668년 이후 고구려 유민으로서 신라에 합류한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둘째, 발해(渤海) 건국과 함께 발해인이 된 이들이다. 이들은 고구려 멸망 후에도 계속 원주지인 동부 만주지역에 거주하던 집단과, 대조영(大祚榮) 집단같이 요서지역으로 옮겨져 거주하다가 동으로 탈주한 집단, 그리고 요동방면에서 동부 만주 지역으로 옮겨온 이들이 있었다. 셋째, 일본열도로 이주해간 이들이다. 험한 바다를 건너간 보트피플 같은 난민이었던 이들은 일본열도 여러 곳에 정착하여 생을 이어갔다. 관동지역의 가나가와현에 있는 고려절터(高麗寺址)는 이 지역에 정착하였던 고구려 유민들의 존재를 증언하고 있다. 이곳은 일본조정으로부터 고려왕(高麗王)이라 성[姓: 카바네(かばね)]을 받았던 약광(若光)의 일족이 정착하였던 지역이다.
넷째,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된 집단이다. 이들은 크게 관내도(關內道) · 농우도(隴右道) 등에 옮겨진 이들과 회하(淮河) 유역 등 강 · 회(江 · 淮) 방면에 배정된 이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전자를 보면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부와 감숙성(甘肅省) 방면에 정착케 되었다. 이 지역은 티베트의 토번(吐蕃)과 몽골고원의 유목민 세력의 연결을 차단하는 긴 회랑지대이자 농경과 목축이 함께 행해지던 곳으로서, 실크로드의 요지이다. 당은 고구려인의 군사적 능력을 활용하기 위해 이 지역에 정착시키고, 일종의 지역 자위를 위한 지방병인 단결병(團結兵)으로 편성하였다. 유명한 장군인 고선지(高仙芝)는 이 지역에 정착케 된 고구려인의 후예였다. 강 · 회 방면으로 옮겨진 이들은 회하 유역의 황무지에 정착하여 생활을 꾸려나갔다.
다섯째, 몽골고원 돌궐의 지배 하로 이주해간 이들이다. 이들은 당의 지배를 피해 집단적으로 옮겨갔는데, 그 중에는 고문간(高文簡)처럼 묵철가한(黙啜可汗)의 사위가 되어 ‘고려왕막리지(高麗王莫離支)’라 칭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 중 고문간, 고공의(高拱毅), 고정부(高定傅) 등이 각각 이끄는 고구려인 집단은 돌궐에서 내분이 일어나자 몽골고원을 떠나 당으로 내투하여 내몽골 지역에 정주하였다. 여섯째, 요동 지역에 그대로 계속 머문 이들이다. 이들은 668년 이후 당의 안동도호부 통치를 받았는데, 여러 차례 저항과 당 내지로의 강제 이주를 겪었고, 많은 이들이 동부 만주나 몽골고원 및 신라로 이주해가 안동도호부 관내에는 가난한 소수만 남게 되었다. 일곱째, 고구려에 근접한 영주(營州) 방면에 옮긴 이들이다.
당 내지로 끌려갔거나 돌궐로 갔다가 당으로 흘러들어간 이들의 운명은 여러 형태를 보였다. 676년 당은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재건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 그 일환으로 보장왕을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으로 봉해 677년 당 내지로 옮겨졌던 고구려 유민과 함께 요동에 귀환시켜 고구려 유민들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맡겼다. 보장왕은 요동에 귀환한 뒤 얼마 안 있어 옛 복속민이었던 속말말갈(粟末靺鞨)과 연결하여 당에 반대하는 거사를 도모하려 하였다. 그러나 발각되어 다시 당 내지로 유배되었고, 보장왕과 함께 귀환했던 고구려 유민은 다시 당 내지로 강제 이주되었다.
한편 당에 끌려간 뒤 개인적인 역량을 발휘하여 고선지, 왕모중(王毛仲), 백제 유민인 흑치상지(黑齒常之), 사타(택)충 등과 같이 크게 입신한 이들도 있었다. 이들의 출세는 당제국의 국제성과 개방성으로 말미암아 한결 용이하였다. 그러나 외형상의 개방적 분위기에서도 당 사회 내면에 흐르는 한족의 배타성 때문에 멸시와 모멸이 심하였으며, 대개 역모 등의 혐의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변경지대에 거주하게 된 고구려 유민들은 집단적으로 정착하였는데, 주위에 상대적으로 저급한 문화를 지닌 북방 종족들이 거주하였고 한족의 문화적 압박이 상대적으로 덜하였으므로, 비교적 후대까지 고구려인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들은 때에 따라 독자적 세력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영주 지역에 정착하였던 대조영 집단이 그러하였다. 계속 영주지역에 머물렀던 이정기(李正己) 집안의 경우, 안록산(安祿山)의 난 이후 두각을 나타내어, 산동 지역으로 옮겨 몇 대에 걸쳐 독자적인 군벌로 군림하였다.
이처럼 일부 고구려 유민들은 자취를 약간 남겼지만, 당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대부분은 장졸들에게 전쟁 포로로 넘겨져 노예로 처분되거나, 변경지대나 황무지에 집단으로 정착하게 되어, 어려움과 천대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다가 자취 없이 동화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지배 하에 있던 말갈족 사회도 고구려 멸망 후 큰 변화가 있었다. 7세기 대의 말갈 7부 중 제일 서쪽에 거주하던 속말말갈은 그 일부가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고, 일부는 원주지에 있으면서 고구려 부흥운동과도 관계를 지니는 등 격렬한 진통을 겪었으며, 일부는 당군에 종군하는 등 다양한 양태를 나타내어 전체적으로 분산되어졌다. 당의 영주지역으로 이주하였던 속말말갈인들은 7세기 말 대조영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발해를 건국하는 데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백산말갈(白山靺鞨)은 일찍부터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관계로 전쟁 피해를 심하게 받아, 고구려 멸망 후 그 무리의 다수가 당으로 끌려갔다.
안거골부(安車骨部), 호실부(號室部), 백돌부(伯咄部) 등의 말갈 부족들은 고구려에 협력하여 전쟁에 참여하였던 만큼, 668년 이후 그간 말갈 사회에 개입하여 작용해왔던 고구려의 세력과 조직이 붕괴되자 말갈족의 기존 질서도 유지될 수 없게 되었다. 오히려 고구려에 협력하였던 관계로 다른 말갈족 촌락들의 이탈과 저항을 받게 되어 “분산 미약”하게 되었다. 그 대신 철리부(鐵利部) · 월희부(越喜部) 등과 같은 새로운 말갈 부족들이 두각을 나타내었고, 고구려 영향권 바깥 지역에 있던 흑수부(黑水部)가 강성해졌다.
그러나 가장 강성하다는 흑수말갈도 대추장이 없이 열여섯 부락으로 나뉘어 자치를 영위하였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른 말갈족도 같은 형편이었다. 이런 상태에서 고구려 유민들이 소규모 단위로 계속 동부 만주지역으로 유입하여 각지에 분산 정착하였다. 세월이 흘러 전쟁의 상흔이 회복되면서, 이들이 지닌 높은 생산력과 문화는 이 지역 사회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신라와 당의 전쟁 결과에 따라 7세기 중반 이 지역은 국제적으로 힘의 공백상태가 되었고, 각지에 산재한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 촌락들이 각지에 산재하여 자치를 영위하는 상태가 지속되었다. 이들 집단들을 아우르는 새로운 정치적 구심력의 형성은 요서지역에서 탈주해온 대조영 집단의 등장을 기다려야 하였다.
고구려사의 역사적 의의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뒤 당은 그 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평양 땅에 외국의 통치기구가 설치된 것은 B.C. 108년 고조선(古朝鮮)이 망하고 낙랑군 조선현(朝鮮縣)이 설치된 이후 776년 만이다. 낙랑군과 안동도호부는 동일하게 평양지역에 설치한 중국왕조의 통치기구였지만, 이 지배 기구를 설치하는 과정은 양자가 판이한 면을 보였다. 즉 한제국이 고조선을 멸망시키는 데 육군 5만과 해군 8천이 동원되어 1년여의 공방전이 소요되었다. 평양 지역에 설치되었던 낙랑군은 그 뒤 400여년을 지속하다가 313년에 고구려에 의해 구축되었다.
그에 비해 668년 평양성 함락에는 수와 당 2개 왕조에 걸쳐 70년이 소요되었다. 통일중국왕조인 수는 고구려 원정에서의 패배가 주요 원인이 되어 멸망하였다. 당은 오랜 전쟁 끝에 신라의 도움을 받아 평양성을 함락시킬 수 있었다. 이어 설치된 안동도호부는 불과 8년 만에 고구려부흥운동군과 신라에 밀려 만주지역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이런 차이를 낳게 된 것은 무엇보다 B.C. 108년과 A.D. 668년 사이에서 일어났던 변화에 기인한다. 즉 고조선 사회와 중국의 전국시대 사회 간에는 현격한 문화적 · 물질적 격차를 보였다. 진 · 한제국이 성립한 뒤에도 그 격차는 여전하였다. 그 결과는 고조선의 멸망과 한군현의 설치로 나타났다.
서기전 108년 이후 예 · 맥 · 한족의 여러 집단들은 한편으로 한군현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한편으로는 한군현의 지배에 저항하면서 자기사회의 발전을 도모하여, 중국 사회와의 격차를 좁혀나갔다. 선두에서 이런 움직임을 이끌어나간 것이 고구려였다. 고구려의 문화는 신라 · 백제 · 가야 등에 전해져 그들의 발전을 견인하였다. 삼국시대의 후반에 들어서, “문자와 무기가 중국과 같다”라는 상징적 표현이 함축하고 있듯이, 한국 고대사회는 중국 고대사회와 별다른 큰 격차 없이 대등한 경쟁을 벌일 수 있었다. 그에 따라 고구려의 70여 년에 걸친 수 · 당제국과의 항쟁, 이은 나당전쟁을 수행할 수 있었던 바이다.
서기 전후 무렵부터 668년에 이르는 고구려의 존립기간은 삼국시대의 대부분을 점하는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고구려국은 작은 성읍국가에서 한반도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큰 영역국가로 성장하였고, 그 영역 내의 예(濊) · 맥(貊) · 한(韓)계의 여러 집단들과 일부 한인(漢人)과 말갈인들을 융합하여 고구려인이라는 보다 큰 단위의 족속을 형성하였다. 그와 함께 한반도와 만주 지역의 여러 갈래 문화를 수렴하고 중국과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문화를 건설하였다. 고구려 문화는 신라 · 백제 · 가야와 바다건너 왜국에 영향을 주었으며, 말갈족은 고구려 문화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곧 고구려는 고대 중국사회와 고대 한국사회 간의 발전의 격차를 극복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고 독자성과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건설하였으며, 고구려인은 한국인의 형성에 한 축이 되었다.
고구려의 문화
고구려의 문학과 예술
고구려의 한문학
고구려에서 이른 시기부터 한자를 사용하였던 것 같다. 2세기 중반 고구려의 관인으로 주부(主簿)가 보이는데, 주부는 원래 현(縣)의 속리(屬吏)의 직명이었다. 현토군의 지배에서 벗어난 뒤, 이 속리의 명칭을 습용하여 고구려왕 휘하의 실무행정을 주관하는 관인의 직명으로 삼았던 것 같다. 구체적으로 각 시기 문서행정의 보급이 어느 정도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고구려 국가의 성장에 따라 점차 그 보급이 확대되었을 것이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대에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세웠는데, 이는 문서 행정의 보급을 전제로 한 조처였다. 그런 만큼 한자와 한문 보급이 상당히 진전되어진 상태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율령의 반포와 지방제도의 확충에 따라 한문은 관리의 필수 교양이 되었다. 불교의 공인과 함께 한역(漢譯) 불경(佛經)의 보급 또한 한문 보급을 촉진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문 사용이 널리 행해지면 질수록, 구어와 문어 사이의 불일치에 따른 불편함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한자의 음과 훈(訓: 새김)을 빌어서 우리말을 기록하는 차자표기법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지명 · 인명 · 관명 등의 표기에 쓰였다. 이어 이두(吏讀)와 같은 표기법이 고구려에 나타나게 되었고, 이것이 신라에 전해져 더 진전된 형태로 발달하였다.
한편으로 한문학(漢文學)이 발달하였다. 이 시기 한문학 작품으로는 한시(漢詩)와 비문 등이 전해지고 있다.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시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을 원용한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유리왕의 황조가(黃鳥歌)는 남녀간의 애틋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고구려의 비문으로서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있고, 묘지(墓誌)로서 중급 귀족인 모두루(牟頭婁)의 묘지 등이 전해진다. 장중한 예서체(隸書體)의 광개토왕릉비는 이 시기 한문학의 높은 수준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고구려의 기원과 광개토왕의 훈적을 간결하게 압축해서 표현한 부분은 사료로서도 높은 가치를 지닌다.
한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은 역사서이다. 고구려에서 유기(留記), 신집(新集) 등의 사서가 편찬되었으나, 그 실체가 온전히 전해지지는 않는다. 그 내용은 몇 차례의 전승 과정을 거치면서 윤색되어, 그 일부가 중세사서인 현전하는 『삼국사기』에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의 고분은 그 나름으로 종합예술의 결정체였다. 특히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그러하다. 적석총의 경우, 소박한 무기단 적석총에서 장군총(將軍塚)과 같은 정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계단식 적석총에 이르기까지 서기전 3세기에서 서기 5세기 전반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시기의 축조양식을 보여준다. 적석총에 이어 고분의 주된 양식이 된 것은 석실봉토분이다. 석실봉토분 중에는 무덤 안길과 무덤방의 사방 벽과 천장에 벽화를 그렸던 것들이 있다. 대부분 평양과 집안 일대 지역에 밀집해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숫자는 90여 기(基)에 달한다.
고분벽화는 그 소재에 따라 생활풍속도, 장식문양도, 사신도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초기 고분벽화의 주된 화제(畵題)는 생활풍속도였다. 이어 장식문양도, 사신도 순으로 주된 화제가 변천해갔다. 생활풍속도에서는 묘주의 가정생활 모습, 그의 막료 · 하인 등의 인물도, 외출 때의 행렬도, 사냥하는 모습, 전투도, 묘주 인물상, 성곽도, 가옥 모습 등이 그려져 있어, 당시 생활상을 생생히 전해준다. 이들 초기 고분벽화는 막돌을 쌓아올린 무덤 벽면에 두텁게 회를 바른 뒤 회가 채 마르기 전에 그려졌다. 안악3호분, 춤무덤, 씨름무덤 등이 대표적인 초기 벽화고분이다.
후기에는 묘실 벽면의 고르게 다듬은 판석에 바로 그림을 그리는 식이 유행이었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강서대묘 등은 웅혼한 화필과 빼어난 색감의 벽화로 유명하다. 이들 고분벽화를 통해 볼 때 고구려 후기의 벽화에는 생동감과 역동성을 지닌 활력이 여전하였다. 곧 문화적인 측면에서 고구려가 내부적으로 이미 기력이 쇠잔해져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던 것이 아니라, 목 잘린 해바리기처럼 외부세력의 침략에 의해 멸망되었음을 느낄 수 있다.
고분을 크게 축조하는 것은 내세를 현세의 질서가 그대로 이어지는 세계로 보는 계세적(繼世的) 내세관에 따라 죽은 자가 내세에서 복락을 누릴 수 있도록 많은 물자와 사람 등을 넣고 시체를 잘 보관하기 위해서였다. 불교나 도교 등이 퍼지면서 이런 계세적 내세관을 떨치고, 내세는 현세와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라고 인식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불교적인 전생적(轉生的) 내세관이나 도교사상에 따른 승선적(昇仙的) 내세관이 퍼져나갔고, 그런 면은 벽화 내용에도 반영되어 연화전생도(蓮花轉生圖)나 승선도(昇仙圖) 등이 그려졌다. 사신도는 중국에서 한대 이래로 유행하던 바로서, 도가적(道家的) 세계관의 영향을 나타낸다.
고구려의 음악과 춤, 놀이문화
고분벽화에는 음악 · 춤 · 교예 등에 관한 내용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 문화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고려악, 백희). 357년에 만들어진 안악3호분의 무덤 안길에 꼬는 동작으로 춤을 추면서 악기를 연주하는 소그드인 무용수가 그려져 있고, 장천 1호분 현실 북벽 상단에 채찍을 든 사람이 가면을 쓴 사람을 따라가는 소그드 대면극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각저총, 무용총, 안악3호분 등 비교적 이른 시기의 생활풍속도 벽화에서 씨름과 수박(手搏)이 주요 부분을 차치하고, 이어 장천1호분, 수산리, 약수리, 팔청리 벽화 등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의 것들에선 다양한 재주와 곡예를 주 내용으로 하는 백희기악도(百戱伎樂圖)가 그려져 있다. 씨름과 수박이 주요 구성요소였던 잡희(雜戱)에, 서역(西域: 중앙아시아)으로부터 전해진 다양한 도구와 동물을 이용한 곡예나 가면극이 추가되면서 더욱 다양해져 이를 통칭해 백희라고 불렀다. 교예를 하는 서역인들이 실제 고구려에 왕래하였던 것 같고, 서역의 음악과 춤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런 고구려의 백희가 신라에 영향을 주고 고려로 이어졌던 것 같다.
고구려의 건축-성
고구려인들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 축조물은 성곽(城郭)이다. 성은 평지성(平地城) · 산성(山城) · 평산성(平山城) 등으로 나눠지는데, 고구려 성의 대부분이 산성으로서, 산의 능선을 활용해 성벽을 쌓았다. 고구려 산성의 다수가 고로봉식(栲栳峰式) 또는 포곡식(包谷式)이라 불리는 형태를 지녔다. 즉 뒤에 높은 주봉우리를 배경으로 해서 계곡을 끼고 좌우 능선을 따라 내려와 평지에 닿게 하는 성벽을 축조하여, 성내에 일정한 공간과 수원(水源)을 확보하는 형태이다. 모양이 안락의자처럼 보인다.
성벽 축조 재료에 따라 석성(石城), 토성(土城), 토석혼축성(土石混築城)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산성은 둘레가 1∼2백 미터에 불과한 보루성(堡壘城)에서부터 10㎞가 넘는 대형 산성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가 있다. 대형 산성들은 적지 않은 경우 지방 행정단위의 치소(治所)였던 것 같다. 성벽의 아랫부분은 들여쌓기로 쌓았으며, 치(雉)와 옹성(甕城)이 있는 예도 있다. 평지성인 요동성의 경우, 요동성총(遼東城塚) 벽화에 그 평면도가 전해져, 전모를 아는데 도움이 된다. 평산성은 평지성과 산성을 결합한 형태로서 전자의 편이성과 후자의 방어에 용이함을 결합한 독특한 면모를 지녔다. 평양성(장안성)의 경우가 그 전형이다. 장안성은 그 내부가 북성(北城) · 내성(內城) · 중성(中城) · 외성(外城)으로 이루어졌으며, 중성과 외성에는 정연한 구획이 지워져 계획도시의 면모를 확연하게 보여준다.
고구려의 민속
고구려의 민속으로서 후대에까지 이어져 온 것으로 솔서혼(率壻婚)적인 혼속(婚俗)과 희생물로 돼지를 쓰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인들은 돼지를 인간계와 영계(靈界)를 이어주는 신성 동물로 여겨, 이를 하늘에 올리는 제사에서 희생물로 썼다. 이런 민속은 오늘날에도 무속 제사와 각종 공사 관련 제사 등에 돼지머리를 제상에 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세기 전반까지도 간간히 행해지던 솔서혼은 결혼 후 사위를 데리고 사는 혼속이다.
이 혼속은 『삼국지』 동이전에서 전하는 고구려 혼속인 서옥제(婿屋制)와 연결된다. 즉 결혼식 후 신부 댁에서는 새로이 작은 집[婿屋]을 지어놓고, 사위가 저녁이 되어 신부 부모에게 서옥에 들어가 잘 수 있게 허락해줄 것을 청하기를 몇 차례 하면 이를 허락하였다. 사위는 처가살이를 하다가 첫 아이가 태어나 어느 정도 자라면 처와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돌아갔다. 즉 처를 맞이하는 대가로, 다른 말로 하면 처가의 노동력 손실을 보상하는 의미로, 처가에 수년간 노동 봉사를 하는 혼속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아이와 외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돈독이 함을 도모한다는 기능도 있다. 이 서옥제 혼속은 이후 시기 가난한 사람의 혼속으로 행해졌던 솔서혼, 즉 처가살이 혼인 양식과 연결되는 바이다.
고구려의 종교
고구려의 불교
불교가 처음 소개되었을 때 그것은 다분히 기복(祈福)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391년 고국양왕의 하교(下敎)에서 “불교를 믿어 복을 구하라”고 하였음은 그런 면을 잘 말해준다. 이런 측면은 당시 가람(伽藍) 배치도를 통해서도 확인되어진다. 498년에 세워진 평양의 청암동 절터를 보면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중문, 탑, 금당이 있고 탑과 금당의 평면적 비율이 0.7 : 1이다. 탑의 평면적 비율이 후대에 비해 매우 높고, 사원 구조에서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이런 가람 배치와 탑의 비중은 석가모니의 사리나 그와 연관된 물건을 봉안하는 곳으로 여겨진 탑이 당시인의 주요한 신앙 대상이었음을 말해준다. 이는 또 당시의 신앙이 석가모니의 설법 내용과 해탈을 위한 자신의 수행보다는, 사리의 영험에 의거하려는 신비적이고 기복적인 면이 강했음을 말해준다.
고구려 불교의 특성 중 하나는 왕실 불교 내지는 국가불교적인 면이다. ‘왕이 곧 부처’임을 표방하는 북방불교가 전해졌고, 왕실은 이의 홍포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승려들은 왕권의 존엄과 국가에 대한 충성심 함양에 적극 복무하였다. 사찰에서는 외적으로부터 국가를 보호하고 전사한 이들의 영혼이 왕생극락(往生極樂)하기를 기원하는 백고좌회(百高座會)와 팔관재회(八關齋會)와 같은 법회들을 국가적 행사로 개최하였다. 호법(護法)과 호국(護國)이 동일시되었다. 이런 면들은 백제나 신라도 동일하였다.
불교 수용 이후 시간이 흐름과 함께, 점차 불교 교리에 대한 연구가 진전되었다. 모든 존재는 인연에 따라 일어나는 것일 뿐이며, 독자적인 존재성(存在性: 自性)이 없다고 보아, 만유(萬有)의 실상은 공(空: sunya-ta)이라고 주장한 삼론학(三論學)이 널리 퍼져나갔다. 삼론학에 조예가 깊은 승려 혜관(慧灌)은 625년 왜국에 파견되어 삼론학을 홍포하여 일본 삼론종(三論宗)의 시조가 되었다. 승려 혜자(慧慈)는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어 삼론학을 널리 펴 일본 삼론종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말기에는 일체 중생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지녔다고 주장한 『열반경(涅槃經)』이 전해졌다. 승려 보덕(普德)이 이 경전에 밝았다. 그는 7세기 중반 연개소문이 도교를 장려하는데 반발하여 백제로 이거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통일기 신라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불교의 확산과 함께 점차 불교적 윤리관이 퍼져나갔다. 그것은 내세관의 변화와도 결합되었다. 불교 수용 후 종전의 지배적 내세관이었던 계세적 내세관이 점차 바뀌어졌다. 내세는 현세의 삶이 무대를 바꾸어 이어지는 것이 아니며, 죽은 자는 현세에서 저지른 자신의 업(業)과 쌓은 공덕(功德)에 따라, 즉 현세에서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불교적 윤리관에 의한 평가에 의해 내세의 삶이 주어진다고 여기는 전생적(轉生的) 내세관이 퍼져나갔다. 자연 계율에 맞게 생활하려 하고, 그에 따라 불교적 가치관과 윤리의식이 일반인의 생활 속에 널리 자리 잡아 나가게 되었다.
고구려의 도교
중국의 잡다한 민간신앙을 신선술(神仙術)을 중심으로 체계화한 것이 도교이다. 그에 비해 도가사상은 만물의 근원인 도(道)와의 합일을 추구하는 노자와 장자의 사상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도교에서 노자를 신격화하여 숭앙하고 도가사상을 교리정비에 많이 이용하였으나, 양자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북위 때 정비된 종교 형태의 도교는 삼국 말기에 이 땅에 전해졌다. 한국 고대의 민간신앙에는 도교의 내용에 비길 수 있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에, 도교는 별다른 큰 마찰 없이 수용되었고, 한국 민간신앙과 결합되어 이해되었다.
5세기 이후 고구려 고분벽화에 여러 가지 모습의 신선이 등장함을 보아 이 무렵에는 도교가 상당히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남조의 모산파(茅山派) 도교의 중심인물인 도홍경(陶弘景: 456∼536)의 『신농본초(神農本草)』에서 고구려의 유명한 약재로서 인삼과 함께 금가루를 정제한 일종의 연단(煉丹)을 진약(珍藥)으로 소개하였다. 이는 연단의 복용을 통해 신선이 되고자 하는 도교 신앙이 고구려에 존재하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이때의 도교는 교리체계와 조직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연개소문 때에 불교 사찰을 뺏어 도관(道觀)으로 삼고, 도사(道士)를 우대하는 도교진흥책을 취함에 따라 교단 조직을 갖춘 도교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불교의 반발 등으로 도교가 그렇게 널리 퍼져나갔던 것 같지 않다.
한편 4세기 이래 노장(老莊)의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도 진전되었다. 불교의 교의를 도가사상의 개념에 의거해 풀이하기도 한 격의(格義)불교도 도가사상을 이해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아무튼 도가사상은 당시 귀족층의 생활과 철학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을지문덕의 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듯이 도가사상에 대한 이해는 불교 · 유교에 대한 그것과 함께 고구려 후기 당시 최고 지식인들의 교양을 가름하는 주요한 한 부분이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구려사연구 현황과 전망
고구려사에 대한 실증적 연구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의해 그 단초가 열렸다. 한백겸(韓百謙) · 안정복(安鼎福) · 정약용(丁若鏞) 등에 의해 주로 문헌고증학적인 방법으로 역사지리에 관한 문제들이 논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학풍이 미처 만개하기도 전에, 국권 상실과 함께 연구의 주도권은 일본인 학자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독일의 랑케사학을 이어받은 일본 근대사학은 이른바 고등문헌비판에 의거해 관계 사료를 검토하여 모순되거나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을 제거하고 객관적으로 논증되는 사실들만을 취하여 고구려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었다.
자연 연구의 주된 부분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 사료적 가치에 대한 검토에 모아졌다. 그 결과로 제시된 것이 산상왕 이전의 기사는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판별하여, 고구려는 3세기 이후에 들어 비로소 믿을 수 있는 역사의 시대로 들어선다고 보았다. 그 이전의 왕계를 위시한 『삼국사기』 기사는 후대인의 작위에 의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초기 고대사 관련 기록에 대한 사료비판은 근본적으로 고대사를 복원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것인데, 일인학자들의 과도한 의고주의(疑古主義)적 자세와 고대사회와 고대 사료의 성격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사료비판이 사료 말살로 치달아, 초기 고구려사를 허구로 돌리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특히 그런 작업은 유사 이래로 왜소하고 허약한 나라라는 한국의 역사상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식민지 현실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이용되어지는 잘못을 낳게 하였다.
해방 후 뒤이은 분단과 전쟁에 따른 대립으로 고구려사의 무대였던 현장을 접근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고구려사 연구는 상당 기간 큰 진전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1960년대에 들어 북한학계에서 광개토왕릉비에 관한 새로운 연구가 제기되어 논란이 이어졌다. 고구려사의 전개에 대한 북한 학계 나름의 이해체계가 제시되어졌고, 그것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즉 고구려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수립하였고 그 사회의 성격을 중세로 본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남한 학계에선 1970년대 이후 고구려사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초기 기사의 사료적 신빙성 검토에서 비롯하여 고구려 초기의 국가 구조와 정치운영 형태, 고분벽화의 검토, 대외관계, 천하관(天下觀), 영역확대와 지방제도의 정립과정 등의 주제로 그 연구 영역이 확산되어 나갔다. 1990년대에 들어 한중관계(韓中關係)의 정상화에 따라 만주지역 답사가 가능해졌고, 나아가 21세기에 들어 평양 방문이 가능해짐에 따라, 고구려사의 무대였던 지역에 대한 접근과 북한 및 중국 학계와의 직 · 간접 교류는 연구를 촉진시켰다. 아울러 새로운 연구 인력의 확충과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대한 이해의 축적은 연구역량을 크게 강화하였고, 상당한 연구 성과를 내었다.
한편 1990년대 이후 중국학계의 고구려사 연구가 양적, 질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특히 21세기에 들어 중국의 국가적 사업인 동북공정(東北工程)에 따른 일련의 주장이 제기됨에 따라 고구려사 연구는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고구려사에 대한 기존의 이해체계를 변개시키려는 것이었다. 고구려사의 성격을 중국사에 귀속되는 중국의 한 지방사(地方史)로 규정하고, 그에 입각해 고구려사를 해석하려는 것이다. ‘중국고구려사론(中國高句麗史論)’이라 할 수 있는 이 시각은 20세기 초부터 제기된 바 있고, 다민족 국가인 중국의 민족이론인 ‘중화민족론(中華民族論)’에 뿌리를 둔 것이다.
즉 현재 중국 영토 내에 포괄되어 있는 55개 소수민족들은 유사 이래로 중앙의 한족(漢族)과 긴밀한 교류를 하여 왔으며, 언젠가는 한족과 완전 융합하여 하나의 중화민족을 형성할 것이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 중국 영내의 소수민족들은 과거에도 한족과 교류 융합하여왔고 현재도 그러하며 미래에는 한족에 완전 융합 동화될 것이다는 주장이다. 자연 이에 따라 “중국 영내의 모든 지역의 주민들은 중국인이며 그들의 역사는 중국사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고구려사의 무대는 오늘날의 중국 영역 내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제기되었던 것이 ‘일사양용론(一史兩用論)’이다. 즉 지금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고구려사의 귀속을 규정하려 하니, 427년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에는 중국사이고 그 이후로는 한국사가 되어, 하나의 역사가 중국사도 되고 한국사도 된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427년을 경계로 고구려사의 성격과 그 귀속을 달리 규정할 수 있느냐는 반론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런 점을 의식하여 중국학계에선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였다. 즉 현재의 국경이 기준이 아니라 역사상 중국왕조가 가장 멀리 팽창하였던 시기의 경계를 기준으로 한 ‘역사영역론(歷史領域論)’이 그것이다. 이에 따르면 한나라 제국의 영역의 남쪽 한계인 한강유역을 경계로 하여 그 이북 지역을 중국의 역사영역으로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한강 이남 지역만이 한국사의 역사영역이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고구려사의 의의는 중국의 역사영역을 한족(韓族)의 나라들의 침탈로부터 지켰다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는 일사양용론에 비해 더 적극적이고 팽창적인 시각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기본 입장에 서서 중국학계는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속한다는 공식적인 논지를 여러 주제들을 통해 개진하였다. 단군조선은 존재하지 않았고, 기자조선은 실재하였으며, 위만조선은 중국인들에 의한 정복국가였다고 풀이하였다. 그리고 이어 한군현(漢郡縣)이 설치되었고, 그 하나인 현토군에서 고구려가 발흥하였으며, 고구려는 중국의 고대종족인 고이족(高夷族)이 세운 나라이며, 예맥족(濊貊族)은 중국의 고(古)민족이었다고 하였다.
즉 고구려는 중국의 역사영역에서 중국의 고대 종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고, 건국 이후 계속 조공책봉관계를 통해 중원의 왕조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왔던 중국의 지방정권이었으며, 고구려 멸망 이후 그 유민의 다수가 중국의 한족에 흡수 동화되었으므로, 고구려사는 중국사에 속한다고 주장하였다. 왕건의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므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것은 그릇된 주장에 불과하며, 그리고 고구려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10세기 이후의 중국사서의 기술은 착오였다고 풀이하였다.
이런 중국 학계의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검토와 비판이 행해졌다. 기자조선은 허구적인 전설에 의거한 것이며, 위만조선은 중국계 유이민과 고조선 토착민의 연합정권이었는데 이를 중국계 주민에 의한 정복왕조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이며, 고조선 지역의 주민은 종족적으로는 예족이었고 일찍부터 농경과 청동기 문화를 영위해왔던 만큼 고조선 지역의 문명의 여명이 마치 한(漢)족의 이주와 정복에 의해 열린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그리고 고구려인의 기원을 고이족으로 보는 견해는 근거가 없는 설이다. 즉 『일주서(逸周書)』의 왕회(王會)편에서 성주지회(成周之會)에 참가한 종족 중 고이가 보이는데, 이 고이를 고구려라고 한 언급은 성주지회가 있었다고 하는 시기로부터 무려 천 육백여 년 뒤인 4세기 초 사람 공조(孔晁)의 주(注)가 유일한 것이며, 고이가 산동반도에서 요동반도로 이주하여 혼강 유역에 정착케 되었다는 이동경로에 대한 주장도 전혀 문헌적 ·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중국왕조와 고구려 간의 조공책봉관계의 성격은 어디까지나 의례상의 상하관계를 설정하는 정도 이상의 의미를 지닌 것은 아니며, 더욱이 이를 고구려가 중국왕조의 지방정권이었다는 주장의 근거로 상정하는 것은 역사적 실상에 부합치 않는다. 고려가 고구려 계승을 표방한 것은 한반도 중부 지역 주민들이 공유하고 있던 고구려계승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고구려유민과 발해유민의 다수가 중국 내지로 끌려가 한족에 흡수 동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들 유민들은 한족들에 비해 절대 소수이며, 동화된 뒤에 이들이 고구려계승의식이나 고구려의 문화유산을 한족 사이에 전혀 남기지 못하였다. 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한족들 사이에 고구려 계승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중국고구려사론은 정치적 주장 이상의 객관적 근거를 지닌 설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데 앞으로도 계속 중국 학계에선 이런 주장이 견지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대응하기 위한 근본적인 방안은 한국의 연구역량의 확충과 객관적 연구의 심화이다. 현지 조사와 발굴이 사실상 어려운 상황에서 일방적인 중국 학계의 보고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지만, 광범위한 자료 수집과 객관적인 실증적 연구를 통해 고구려사를 재구성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요구되어지는 바이다.
써족(서족)(여족)(畬族)=서족(徐族)=여족(餘族)=여족(余族) =도족(涂族=凃族=塗族=途族)=사족(佘族) 동이시조의 한집안
고구려 속의 부여씨
부여 멸망(494) → 왕족과 귀족 상당수가 고구려로 피신. 고구려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부여의 후계자”**라고 내세움. 실제로 『삼국사기』에는 “고구려는 본래 부여에서 나왔다”는 기록이 있음. 고구려 지배층 안에 부여씨 성을 가진 왕족/귀족이 편입됨.
백제 속의 부여씨
백제는 건국 때부터 스스로를 “부여씨 왕조”라고 칭했음. 백제 왕들은 정식 칭호에 “부여 ○○왕”이라고 기록됨. 예: 부여 구태(온조왕), 부여 여왕, 부여 의자왕 등. 백제 왕실은 철저히 부여 혈통 계승을 강조 → 한반도 남부에서도 정통성 확보. 백제가 망할 때(660년)까지 왕들은 계속 “부여씨”라 불렸어요.
발해 속의 부여씨
고구려 멸망 후 세워진 발해(698~926) 역시, 스스로를 **“고구려-부여의 후계자”**라 주장. 발해 지배층 가운데서도 “부여씨”를 자처한 기록이 남음. 이는 중국 왕조와 외교할 때도 정통성 강조 카드로 사용.
이후의 운명
고구려와 백제가 모두 멸망하면서, 공식적으로 **“부여씨 왕조”**는 끊어짐. 고려 시대 기록에도 일부 가문이 부여씨 계통을 자처했다는 전승이 있어요. 일본 고대 문헌에도 백제 왕족 후손 중 “부여씨”가 건너가 귀족이 되었다는 기록 존재.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라, 이름은 흐려졌지만 한반도와 일본 귀족 사회 속에 혈통 흔적이 남았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서성현(徐城縣)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生時正偃,故以爲名。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宮人聞之,更取養之。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及長,襲爲徐君。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으로 변했다. 鵠蒼或名後蒼。」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서국의 쇠퇴와 멸망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중국기록에서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동양에서 용의 기원에 대해 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서이족의 토템신앙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서이족은 황하유역에서 뱀과 가까이 살면서 공포의 대상인 뱀을 회유하기 위한 방법으로써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고 숭배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뱀은 자연계의 뱀의 형상이 아닌 용으로 신격화되었고 보족의 풍습, 금기들을 용으로 상징화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사공포설이나 사신신앙설도 용의 기원을 뱀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뱀은 자연계에 실존하지만 용은 상상의 산물로서 상룡, 마룡, 어룡 등과 같이 실존하는 동물에 다른 속성이 첨가, 혼합, 왜곡되어 새로운 형태로 되었다고 하여 용충설, 용수설, 용어설, 용조설 등이 보여 지고 있다.
용이 번개, 무지개, 천둥, 구름 등 자연천상의 신격화의 결과로 생성되었다는 용위섬전설은 공중에 나타난 번개의 형상을 보고 그것을 기점으로 가늘고 긴 네발 달린 신비한 용을 상상해냈다는 설이다. 용권설에서는 바다에서 태풍이 불 때 바닷물이 회오리바람과 함께 휘감겨 올라가는 현상, 즉 기상상이 구체화 하여 용을 상상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이러한 용위섬전설과 용권설은 용의 기원을 뱀의 형태 발전에서 보다는 각 민족의 풍토 속에서 기상에 의한 자연적인 발생으로 본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용에 관한 기록 가운데 가장 연대가 빠른 것은 중국 상나라 때 갑골문자에 남아있는 것이다. 갑골문자에서 완전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용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글자가 70여 자나 되어 적어도 상나라 때에는 용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상나라 사람들은 용머리에 뿔을 달아 주었다. 이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지닌 뿔 숭배의 원시 종교 개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뿔은 특별한 신성을 의미한다. 뿔이 없는 동물에도 뿔을 달아 주었는데 이는 신통한 동물에게 신성을 부가하여 천지를 교류하는 사명을 잘 완수하도록 원했기 때문이다. 이로서 용은 모방된 자연 생물의 울타리에서 뛰쳐나와 환상과 창조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다.
상나라 때의 용은 통일된 것이 아니라 유형별로 차이가 있으며 구조도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올수록 점점 복잡해지며 송나라 때에는 용의 모습이 구체화 된다.
한마디로 상나라 때 용의 모습과 송나라 때 용의 모습은 큰 차이가 난다. 이는 시간이 흘러갈수록 조금씩 용의 모습에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러한 변화는 만일 상나라 이전에도 용이 있었다면 상나라 때와는 그 모습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중국인들은 삼성타라촌에서 발견된 C자형 옥저룡, C자형 옥으로 만든 돼지용이라는 뜻으로 최초의 ‘중화제일용’으로 생각한다. 용의 모습의 원형으로는 도마뱀, 뱀, 악어, 말, 소, 뱀 등 많은 동물이 있다. 그런데 옥저룡을 원시용으로 보는 것은 용의 원형이 돼지라는 것을 뜻한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이런 점은 홍산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용은 물을 뜻하고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다.
1971년 중국 내몽고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 문화유적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높이 26cm의 ‘C자형 옥저룡(玉猪龍)’이 발견됐다.
중국인들을 깜짝 놀라게 한 이 옥조룡(玉猪龍으로도 적음)은 묵록색을 띠며 길이 26센티미터, 무게는 1킬로그램으로 완벽한 형태를 갖고 있었다. 추후에 굽어진 형태가 마치 영어 문자 C와 같아 C형 옥저룡(玉猪龍)이라고도 불린다. 이를 옥저룡이라고 부르는 것은 옥으로 만든 돼지 용이라는 뜻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형 옥룡은 하나의 옥 원료의 조각으로 입술부분은 앞으로 튀어나오고 약간 위로 굽었으며, 입은 꼭 닫았고 두 눈은 돌출돼 마름쇠형을 띈다. 용체의 횡단면은 타원형을 띠고 용의 등부에는 단공이 있으며 부조(浮雕)와 전조(淺雕)수법의 운용이 섬세하고, 통체를 잘 다듬어 빛나고 매끄럽다.
옥저룡(玉猪龍)이란 이름은 중국의 손수도 박사가 처음으로 제기했다. 그가 옥저룡이 원시용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매우 큰 의미가 있다.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보아도 용을 돼지로 보는 견해는 매우 많은 지지를 받았다. 당시에 이미 농경사회로 들어섰으므로 적어도 돼지를 사육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타당하게 여겨졌다.
고대 농경사회에서 돼지가 중요시된 것은 물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역』에는 ‘용은 구름이다’ 또는 ‘용은 물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용이 물과 동일시됐는데 물 없이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물 즉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제사 지낼 때 제물로 돼지를 사용했다고 추측한다. 이런 점은 우하량 지역의 동산치에서 발견된 한 무더기의 돼지 뼈로도 증명된다.
고대인들이 돼지를 기우제 지낼 때 사용했는데, 물이나 용이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을 볼 때 돼지 또한 물을 만드는 데 사용됐기 때문에 결국 용과 돼지는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는 논리이다.
손보기의 용에 대한 견해가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오늘날 보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할 때도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즉 요서지방의 홍산문화 유적에서 이와 비슷한 기물 또는 문양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자연스럽게 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중국인들이 옥룡을 중요시하는 것은 옥룡을 홍산인들이 숭배하던 신의 형상으로 추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인들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용이 홍산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중국인들은 홍산인이 중국에서 최초로 용을 신령으로 숭배한 민족이며 이후 용이 신격화돼 중원지역으로 전파돼 현재 중국인들이 용을 생활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홍산의 용이 중국 용의 시조로 확정되기까지에는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1987년 하남성(河南省) 복양시(?陽市) 서수파(西水坡) 앙소문화유적지 1호 묘에서 놀라운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것은 흰색의 조개껍질로 정성스럽게 형상을 만들어 놓은 원용문으로 된 용형상물로 이를 방소룡(蚌塑龍)이라고도 부른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 용은 힘차게 앞으로 기어가는 느낌을 준다. 특히 무덤 주인의 좌측에는 용의 형상이 있고 우측에는 호랑이 형상이 있어서 보다 큰 주목을 받았다. 그것은 음양오행론과 풍수지리에 입각한 좌청룡, 우백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학근은 이 발굴을 근거로 사신도(四神圖)의 기원이 서수파에서 기원한다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탄소연대측정에 의해 적봉시 옹우특기(翁牛特旗) 삼성타라촌(三星他拉村)의 홍산문화 문화유적보다 빠른 기원전 4460±135년으로 확인되자 ‘중화제일용’의 자리가 바뀌었다. 그러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이를 ‘천하제일용’으로 부르기도 한다. 복양시에서는 재빨리 천하제일용 발굴을 기념해 ‘중국 용의 고향’이라는 ‘중화용향(中華龍鄕)'이란 기념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도 잠시 1994년에 또 다시 놀라운 용 형상물이 사해문화에서 발견됐다. 사해문화는 요령성 서부 의무려산 동쪽의 부신(阜新) 몽고족 자치현에서 발달된 문화로 흥륭와에서 세계 최초의 옥 귀걸이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세계제일옥’이 발견된 지역이며 역시 흥륭와에서 ‘중화제일촌’이 발견되기 전까지 ‘요하제일촌’으로 불리던 집단 주거지가 발견된 곳이다.
<사해문화의 용무늬 토기>
사해유적지에서 발견된 용형상물을 석소룡(石塑龍)이라고 부르는데 길이가 19.7미터, 넓이가 1~2미터에 이르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한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석소룡이 서수파에서 발견된 ‘중화제일용’보다 무려 1200년이나 앞선 기원전 5,600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학자들은 서수파의 것이 중원의 앙소문화에서 발견됐음을 우대해 서수파의 방소룡을 ‘중화제일용’으로 계속 고집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의한 연대측정 결과를 마냥 거부할 수는 없는 일로 결국 2004년 중국학자들은 사해유적에서 발굴된 용형상물을 ‘중화제일용’으로 확정했다. ‘중화제일용’의 영예가 홍산문화 쪽으로 다시 돌려진 것이다.
우리가 아는 용은 후대로 갈수록 많은 변화를 겪었다. 손 박사는 그 원시적인 형태가 홍산문화에서 발원됐다고 주장했다. 중국에서는 현재 ‘중화오천년역사’(中華五千年歷史)를 주장하며 용의 탄생을 홍산문화와 연계시키고 있다.
붉은색 산으로 유명한 내몽고 적봉시(赤峰市) 오한기(敖漢旗) 보국토향 인근의 흥륭와촌에서 발견된 흥룡화문화는 기원전 6200년까지 올라가는 신석기문화 유적이다. 방어 용도의 성과 대형 주거지 등이 발견됐으며 현재 중국 국경 내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래된 신석기 집단 주거지다. 이곳에서 세계 최초의 옥귀걸이가 출토됐다. 중국은 이곳을 ‘중화원고제일촌’(中華遠古第一村) 또는 ‘화하제일촌’(華夏第一村)이라 부른다.
흥륭와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옥은 적봉시에서 동쪽으로 450km나 떨어져 있는 압록강에 인접한 요령성 수암(岫岩)에서 나오는 ‘수암옥’이다. 이는 흥륭와문화 시대인 기원전 6000년경에 이미 만주 벌판 서쪽과 동쪽이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후 사해문화(査海文化, 기원전 5600~5200), 부하문화(富河文化, 기원전 5200~기원전5000년), 조보구문화(趙寶溝文化, 기원전 5000~기원전 4400년)을 거쳐 국가단계로 진입했다고 보이는 홍산문화(紅山文化, 기원전 4500~기원전 3000년)가 꽃피게 된다. 중국학자들은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모두 넓은 의미의 홍산문화라고 부르기도 하며 홍산문화를 석기와 청동기를 같이 사용하는 시대로 간주한다.
홍산문화의 중심지였던 조양시는 요령의 서쪽에 위치한다. 1996년 새의 공룡진화설을 뒷받침하는 ‘공룡중화용조’(시노사우롭테릭스)가 발견돼 세계 최초의 새인 시조새가 날아오른 지역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다. 이후 계속하여 시조새 화석들이 발견되어 ‘세계고생물화석의 보고’로도 알려져 있다.
홍산문화와 상문화 간의 시간적인 차이는 약 2천 년, 거기다 지역적으로도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 손 박사는 시공차를 극복하기 위해 요서지역의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무늬 도안을 용의 모습으로 추정하고 이것이 이리두문화와 상문화로 전해졌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찬반 논란에 직면했다. 하가점하층문화의 채회도에서 나타나는 짐승의 얼굴 모습을 용의 모습으로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는 것. 현대의 용 뿐 아니라 원시용과도 전혀 닮지 않았다는 얘기다.
Human Genetics에 발표된 김욱교수의 논문을 보면 한국인의 유전자가 한족(베이징인)보다도, 더 남쪽의 운남인과 가깝고 심지어 베트남인과도 매우 가까운 혈연관계에 있다고 한다.
스펜서 교수의 유전자 이동지도에 의하면, 중국인은 M175유형의 돌연변이형을 가지는데, 티벳고원에서 남쪽으로 이주하여, 동남아를 거친 후 북상하여, 북중국지역에서는 다시 아형인 M122형 돌연변이를 가진다. 김욱교수가 북경인과 운남인을 분류한 이유는 두 지역의 언어가 같은 티벳-중국어족이라하더라도 영화의 자막 처리를 못하면 보지못할 정도로 언어가 매우 다르며 실제로 얼굴 모습도 중국내에서 남방계, 북방계를 나눌 정도로 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역의 위치상 사실, 우리나라 사람은 북방계 중국인과 더 가까워야 한다. 그런데, 김욱교수의 논문은 거꾸로 한국인의 유전자는 남방계 중국인과 가까움을 실증하고 있다. 즉 한국인에게는 M122형보다 오래된 M175유형이 더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전자 증거를 굳이 들지않더라도 한국어의 한자발음이 표준 북경어보다 남부 지방의 광동어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예를 들면, 장개석을 북경어로 하면 장제스가 되지만 광동어로 하면 장카이섹이 된다.
최근 홍산문화나 앙소문화보다 오래된 선홍산문화유적인 발해만의 "사해문화유적"에서는 빗살무늬토기의 변형인 지자문토기가 발견되고, 특이할 만한 사실은 용에 대한 토템이 있다는 사실이며, 문화유적의 특징상 "모계사회"의 여군장 제도를 가진 사회라고 한다.
용 토템의 진실을 캐는데는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신화가 더 도움이 된다.
"神農氏의 三世孫 데 밍(帝明)이 데 응이(帝宜)를 낳고, 얼마 후에 남방을 순방하던 중 응우 링(五嶺)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서 부 띠엔(惨僊)의 딸과 결혼하여 록 뚝(綠續)을 낳았다. 록 뚝이 총명하기 그지없기에 데 밍은 몹시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록 뚝이 극구 사절하기에 데 밍은 하는 수 없이 長男 데 응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북방을 다스리게 한 다음, 次男 록 뚝을 낑 즈엉 브엉(涇陽王)에 봉하여 씩 꾸이(赤鬼, 운남성에서 바다에 이르는 지역)라고 하는 남방을 다스리도록 했다. 낑 즈엉 브엉은 동 딩 꾸언(洞庭君, 용왕)의 딸 턴 롱(神龍)과 혼인하여 락 롱 꾸언(怷龍君, 출룡군)을 낳았다. 어려서 숭 람이라고 불리웠던 락 롱 꾸언은 데 라이(북방을 다스린 데 응이의 후손 임금)의 딸 어우 꺼(垯姬, 달희)와 결혼하여 100개들이 알 하나를 낳았다. 그 알에서 100명의 아들이 나왔는데 이들이 百越族의 선조인 것이다. 어느날 왕이 어우 꺼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의 종족이요, 당신은 산의 종족인지라 水와 火는 서로 다른 까닭에 합하는게 실로 어렵지 않겠소"라고 하였다. 즉시 이들은 헤어졌는데 어우 꺼는 50명의 아들들을 데리고 산으로, 락 롱 꾸언은 나머지 50명을 데리고 남쪽 바다로 갔다. 이 때 이들은 장남을 훙 브엉(雄王)으로 봉하여 왕위를 계승하도록 하였다. 일백명 아들 중 장남은 기원전 2879년 락비엣 족의 왕이 되는데 이 왕국이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반랑(Van Lang)왕국으로 명명 된다. 이 반랑 왕국은 홍하 델타지역을 중심으로 턴롱(天龍)의 후예로서 웅왕이라고 불리우는 역대왕이 통치하며 기원전 258년까지 2,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다고 하나 그 연대는 확실 하지 않다.
분명히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난생신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발음이 좀 어렵지만, 티벳-중국어족인 베트남인은 "신농"씨와 관련이 있는 벼농사의 농경민임과 동시에, 바다의 "용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용"토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과의 혼혈인이다. 베트남 민족에 영향을 준 용토템의 바다로 부터 들어온 오스트로네시아인은 거꾸로 "한반도"기원의 "해상 남방 이주경로"를 가진 집단을 일컫는 것으로 본다.
용은 가상의 동물이다. 어로민족 특히 남쪽으로 내려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의 경우에는 에스키모어족과는 달리 태풍, 회오리와도 같은 날씨변동에 민감할 수 밖에 없다. 소용돌이치는 물살이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태호 복희씨의 직책이 "우사"란 이야기 한마디가 어로민족의 "풍어기원"의 개념과 "벼농사의 기우제"의 개념이 복합된 "동해 용왕제"를 수행하는 북방 알타이계 "샤먼"이었다는 말로 통한다. 무엇보다 복희와 여왜가 원형으로 소용돌이치는 "팔괘와 태극"이라는 동양사상의 시조라는 사실이다.
목차
- 1 역대 서국(徐國) 국왕
- 2 백제 부여씨의 분파
- 3 부여 부여씨의 인물
- 4 백제 부여씨의 인물
- 5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 6 일본의 백제계 성씨
- 7 역대 서국(徐國) 국왕
- 8 부여왕 계보
- 9 백제왕 계보
- 10 황룡(黃龍)
- 11 곡창(鹄蒼)
- 12 泰山(태산)=서산(徐山)
- 13 월병(月餠)
- 14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15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16 서귀포(西歸浦)
- 17 서불과차(徐不過此)
- 18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19 고려도경(高麗圖經)
- 20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21 고군산군도
- 22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23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24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25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26 숭렬전(崇烈殿)
- 27 온조왕묘(溫祚王廟)
- 28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 29 삼충제(三忠祭)
- 30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31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32 효양산 은선사
- 33 희성당(希聖堂)
- 34 같이 보기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기원전 1세기 무렵부터 약 1,000년 동안 북만주에서 부여국을 세워 활동한 예맥족의 종족. 철기를 사용하고 영고(迎鼓)라는 제천 의식을 행하였으며 순장과 일부다처제의 풍습이 있었다.
부여: 동물의 토템인 말, 소, 개, 돼지라고도하고, 방위인 동, 서, 남, 북으로하여 행정체계로하여 관리를 파견하였다고한다. 이외에 대사와 사자라는 벼슬이 존재하였다. 아마 동물의 토템이면서 방위이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마가, 우가, 구가, 저가중에 어디가 동, 서, 남, 북인지는 현재 알 수 없다. 성씨 또한 전해지지 않는다.
1. 마가: 말을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2. 우가: 소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3. 구가: 개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4. 저가: 돼지를 토템으로하는 부여의 행정관.
백제: 중국의 사서인 수서에서 백제에는 큰 성씨가 8개의 족속이 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각각 예족(濊族), 부여족(扶餘族), 고조선 유이민으로 추측이되는 한족(韓族)과 중국계 귀화 성씨가 전해진다.
1. 진씨: 부여족 계열의 성씨가 아닌 한강 이북에 존재한 예족으로 추정된다. 13대 근초고왕대에 왕비족이 나오는 성씨이다.
2. 해씨: 온조왕과 함께 고구려에서 내려와 백제를 세운 부여족 계열이다. 왕실의 성은 부여씨를 쓰고,
함께 온 세력을 해씨로 사성하였으리라 본다 부여의 왕성과 고구려 초기 태조왕 이전의 왕성과 같은 성씨이다.
부여(扶餘) 녹산왕조(鹿山王朝)(아사달)의 왕손이 부여가 망하자, 본래 왕성(王姓)인 여씨(餘氏).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하였다. 백제(百濟)왕조(王朝)는 부여(扶餘) 왕조를 계승하여, 왕성(王姓)을 부여씨(扶餘氏) 혹은 여씨(餘氏)로 사용하였다.
부여씨(扶餘)는 백제 왕족을 상징하는 고유 성씨이다. <삼국사기> 건국서문에 부여씨 기원이 나온다. ‘온조(溫祚)의 조상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성씨를 부여(扶餘)로 삼았다.’ <삼국사기>는 부여씨 원조를 시조 온조왕로 설명한다.
문헌상 최초의 부여씨는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서부여 여현(餘玄-부여현(현왕)) 왕이다. ‘영화4년(346년) 부여는 처음 녹산(鹿山)에 거주했으나 백제가 침범해 부락이 쇠잔해져 연(燕)에 가까운 서쪽으로 이주했다. 연왕 모용황(慕容皝)이 세자 모용준으로 하여금 부여를 습격했다. 드디어 부여왕 현왕(玄王)과 그 부락민 5만여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당시 서부여 본거지는 녹산(鹿山-요녕성 건창현)지역이다. 346년 여현(현왕)은 백제의 침범을 받아 녹산지역을 떠나 서쪽 전연(前燕-모용황)에 가까운 곳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곧바로 모용황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다.
또한 <자치통감>은 여현왕의 아들 여울(餘蔚)도 소개한다. 전연의 산기시랑(散騎侍郎)‘부여왕자[胡三省: 餘蔚扶餘王子]’이다. 370년 여울은 전연의 업성(鄴城) 북문을 열어 전진(前秦-부건) 군사를 맞아들이며 전연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여현과 여울은 부자지간으로 대륙 부여 기마족을 대표하는 서부여(녹산 세력) 왕과 왕자이다.
서부여는122년 북부여왕족 출신 위구태(우태)(백제 3번째 시조)가 대흥안령산맥의 서자몽(西紫蒙-화북성 승덕 북쪽)에 세운 나라다. 이후 위구태 후손집단은 요서지방으로 내려와 대방(하북성 노룡현) 세력과 녹산(백랑산-요녕성 건창현) 세력으로 분리된다. 녹산세력은 서부여를 계승하고, 대방세력은 한반도로 백가제해(百家濟海)하여 부여백제로 재탄생한다. <진서>에 동진(東晉-사마예) 황제가 수여한 관작에 부여 백제 왕의 이름이 나온다.
372년 ‘진동장군영낙랑태수’의 관작을 받은 여구(餘句)왕과 386년 ‘사지절도독진동장군백제왕’의 관작을 받은 여휘(餘暉)왕이다. 여구와 여휘는 부자지간으로 한반도 부여기마족을 대표하는 부여백제(대방세력) 왕이다.
중국왕조의 망명객 부여씨들
그런데 부여씨는 전연 멸망(37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용선비 국가들에서 나타난다. 후연(後燕-모용수)에는 건절장군 여암(餘巖)을 비롯하여 진동장군 여숭(餘嵩)과 건위장군 여숭(餘崇), 산기상시 여초(餘超)가 있으며, 남연(南燕-모용덕)에는 진서대장군 여울(餘鬱)과 수광공 여치(餘熾)가 있다. 모두 <자치통감> 기록에 나오는 인물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연(燕-후연,남연)에 부용하여 큰 벼슬을 받는다. 부여의 성씨와 이름으로 중국사서에 기록을 남긴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 부여기마족의 상징인 부여씨들
이 중 후연의 건절장군 여암은 꼭 기억해야 할 인물이다. 385년 7월 무읍(武邑-하북성 형수)에서 갑자기 봉기한 여암은 한때 유주(幽州-하북성 베이징)를 점령하며 기세를 올린다. 그러나 난하 유역의 영지(令支-하북성 천안)로 본거지를 옮긴 직후인 그해 11월 모용농의 공격을 받고 진압된다. 서부여 왕족 출신 여암은 4개월이라는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대륙을 종횡무진 휩쓸고 다닌다. 우리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또 하나의 걸출한 영웅이다. 여암은 멸망한 서부여의 재건을 꾀한 것은 아닐까.
▲ 여암의 활약 (385년 7월~11월)
부여씨는 부여 기마족을 상징하는 성씨이다. 부여씨 성립시기는 4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대방 세력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백가제해하는 시기로 부여 기마족이 본격적으로 대륙과 한반도로 양분화하는 과정에서 탄생한다. 결론적으로 백제 부여씨 기원은 온조왕이 아니다. 서부여 창업자인 위구태(우태) 즉 구태이다. 온조 계열은 해씨 왕조이며, 구태 계열은 부여씨 왕조이다. 다만 <삼국사기>는 온조왕을 시조로 확정하며 구태(우태)계열의 부여씨를 온조왕 계열의 성씨로 편입시킨다. 백제 역사는 적잖은 부분이 잘못 해석되고 있다.
백제 부여씨의 분파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이 확실한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흑치씨'를 제외하면 660년 사비백제 멸망 이후 일본 조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은 경우가 많다.
귀실씨(鬼室氏) - 일본 측 기록인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귀신의 감화를 받아 '귀실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에 참여했던 무왕의 조카 귀실복신(부여복신), 귀실복신(부여복신)의 친족인 귀실집사, 귀실집신이 있다.
쿠다라노키미씨(百濟公氏, 백제공씨) - 761년 본래 귀실씨였던 여민선녀(餘民善女)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흑치씨(黑齒氏) - <흑치상지 묘지명>에 의하면, 흑치씨는 본래 부여씨였으나 흑치(黑齒: 예산군 덕산면 추정)에 봉해져 '흑치씨'가 되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흑치상지, 흑치준 부자가 있다. 대성팔족 중 연씨와의 관계가 보이기 때문에 부여곤지의 아들들 중 왕위에 오르지 못한 3~5남 중 한 명이 선계였다고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기》 <동성왕조>에 따르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등용되고, 관등이 사약사 > 백가 > 연돌 순으로 높기 때문에 5남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쿠다라노코니키시씨(百濟王氏, 백제왕씨) - 31대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선광이 시조로 660년 백제 멸망 이후 일본에 망명하여 지토 덴노 시기에 하사받았다. 현재는 미마쓰씨, 스가노씨, 야마토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쿠다라노아손씨(百濟朝臣氏, 백제조신씨) - 758년 여증인(餘益人), 여동인(餘東人) 등 4명이 성씨를 하사받았다.
타카노노미야츠코씨(高野造氏, 고야조씨) - 663년 백제부흥운동 실패 이후 일본으로 망명한 부여자신(여자신)을 조상으로 한다.
타카노노아손씨(高野朝臣氏, 고야조신씨) - 25대 무령왕의 아들로 일본에 갔다가 그곳에서 죽은 순타태자를 조상으로 한다. 헤이안 시대를 개막한 제50대 간무 덴노의 모후인 타카노노 니이가사(高野新笠)가 유명하다.
오우치씨 - 26대 성왕 또는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추정되는 백제 왕자 임성태자의 후손으로, 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센고쿠 시대에 무가 다이묘로서의 위명을 일본 열도에 떨쳤으며, 현재는 오우치씨, 토요타씨, 스에씨가 후예로 전해진다.
억례씨(憶禮氏) - 억뢰씨(憶頼氏)라고도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 백제부흥운동 이후 일본에 망명한 억례복류(憶禮福留)가 있다. 《신찬성씨록》에 의하면 억례복류는 13대 근초고왕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손자(후손이라고도 해석)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휴씨(汶休氏) - 《일본서기》에서 문휴마나(汶休麻那), 문휴대산(汶休帶山)이 확인되며, 《신찬성씨록》에서 이 성씨는 5대 초고왕의 손자인 문휴해(汶休奚)라는 인물을 선조로 떠받든다고 한다. 이외에 같은 가문에서 분적된 '문사씨(汶斯氏)'는 《일본서기》에서 문사간노(汶斯干奴)라는 인물이 확인된다.
백제의 왕성에서 갈라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 성씨들은 다음과 같다. 확실하지는 않으나 부여씨의 분파로 추정되는 이유는 해당 성씨들이 백제 국왕과 관련있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이씨(古爾氏) - 대표적인 인물로 고이만년, 고이해가 있다. 백제 제8대 고이왕(古爾王)의 후손이기에 왕명에서 따왔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외에도 음운적으로 19대 구이신왕 및 부여곤지와의 연관성이 보인다. 다만 고이해의 경우 '해'(解)가 이름이 아닌 존칭접사라는 주장이 있어 '고이'(古爾)가 성인지 이름인지 의견이 엇갈린다.
동성씨(東城氏) - 대표적인 인물로 26대 성왕 시기 인물인 동성도천, 동성자언, 동성자막고가 있다. 이는 백제 24대 국왕인 동성왕(東城王)에게서 따온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일단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왕력편>에 따르면 25대 무령왕은 동성왕의 2남이기 때문에 동성왕의 맏아들은 분명 따로 존재했다. 다만 무령왕릉 발굴 이후 무령왕이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았음이 밝혀지면서 무령왕이 동성왕의 아들일 가능성은 사라졌고, 실제로는 부여곤지의 아들일 가능성을 높게 보는 편이다. 한편 동성자언과 동성자막고는 동성도천과 다르게 '동성자(東城子)' 부분이 성씨가 아닌 "동성왕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도 있다.
마지막으로, 후대의 기록에서 부여씨의 분파로 나오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계백씨(階伯氏)? - 1860년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지지》의 기록을 근거로 계백이 이름이 아닌 성씨이며 이름이 '승'(㐼)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서야 나오는 기록이기 때문에 반론도 만만치 않다.
부여씨 이외의 백제 왕성?
다만 왕비족이자 대성팔족으로 남은 해씨와 달리, 우씨와 진씨, 모씨의 경우 설이 제기된 정도라 실존했는지부터가 불분명하다.
해씨(解氏) -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부여씨와 연관이 있다.
우씨(優氏) - 제8대 고이왕의 동생인 내신좌평 우수(優壽), 내법좌평 우두(優豆), 제11대 비류왕 대 내신좌평 우복(優福) 등 이름에 '우(優)'가 연달아 사용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고이왕계의 성씨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진씨(辰氏) - 직계 선조-후손 관계인 제16대 진사왕, 진손왕, 진이왕이 모두 이름에 '진'(辰)을 포함했기에 제기되었다. 여기에 일본 도래계 성씨 중 하나인 '하타'(秦)씨 또한 동계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만 하타씨는 다른 이런저런 근거로 신라계 설이 좀 더 대세이다.
모씨(牟氏) - 《남제서》와 《양서》에 따르면 제22대 문주왕의 이름이 '모도'(牟都)'로 기록되어 있고, 제24대 동성왕 역시 이름이 '모대'(牟大)여서 제기된 설이다. 다만 《일본서기》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오류로 나왔기에 현재는 사장된 가설이다. 신라 법흥왕도 성씨가 '모'(牟)인 것으로 추측되기도 했으나, 현재는 '모도, 모대, 모즉' 모두 고유어인 맏이를 음차한 것으로 본다.
부여 부여씨의 인물
부여가 전연에 의해 멸망한 후, 주로 모용선비 세력 휘하에서 활동했던 인물들이다. 부여 왕실의 국성 '해(解)씨'가 아니라 '여씨(餘)'로 표기되어 있는데 중국의 백제 기록에서 나온 백제 역대 왕들의 성씨처럼 부여씨의 약칭일 가능성이 크다. 여호규, 강종훈 교수는 이들을 부여의 유민으로 보았다. 다만 부여울과 달리 확실하게 부여인으로 나오지 않은 점이 특징. 정확히는 부여 국왕의 아들로 기록된 여울, 동이로 표현된 여화는 부여계일 가능성이 높고 나머지 여씨 인물들을 부여계로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정도일 뿐이다.
여화(餘和): 생몰년도 미상. 후연의 모용농이 한단 일대에서 군사를 모았을 때 호응했다. 칙륵과 함께 동이라고 언급한 점이 있어 선비족이 아닌 부여인으로 볼 여지가 있다.
여암(餘巖) 형제: ? ~ 385년. 여암은 후연에서 건절장군을 지냈다. 385년 7월 무읍에서 반란을 일으킨 뒤 요서로 넘어가 요서의 하구인 영지 일대에 거점을 구축했다. 이후 4개월만인 385년 11월 모용농에게 패배하고 동생과 함께 참수당했다.
여숭(餘嵩): ? ~ 396년. 396년 후연에서 평규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싸움에서 패배하고 사망한다.
여숭(餘崇): ? ~ 398년. 위의 여숭의 아들. 후연의 외척이었던 난한에게 암살당했다.
여초(餘超): ? ~ 399년. 후연의 산기상시. 모용성에게 역모죄로 몰려 399년에 처형당했다.
여울(餘鬱): ? ~ 406년. 남연의 서중랑장, 북위로 달아났던 봉연의 공격을 받고 사망한다.
여치(餘熾): 생몰년도 미상. 남연의 인물. 지위는 수강공에 이르렀으며, 단풍의 과부인 모용씨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두 남편을 섬길 수 없었던 모용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선비 모용씨가 건국한 후연과 남연에서 관료 생활을 했다. 이중 여암의 반란에 대한 견해 중에서는 중국에서 벗어나 부여로 달아나려던 것이 아닌가하는 주장도 있다.
백제 부여씨의 인물
우복(優福)
주군(酒君) - 《신찬성씨록》에는 '주왕(酒王)'이라고 되어 있다.
부여홍(扶餘洪) - 15대 침류왕의 서자. 17대 아신왕의 아우(이름미상) -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396년 고구려에 볼모로 끌려갔다. 부여홍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
부여신 - 17대 아신왕의 서자. 407년 전지왕(18대) 시기에 처음으로 상좌평에 임명되어 428년에 사망했다.
진손왕 - 일본 측 기록에서만 확인되는 인물로, 16대 진사왕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고(夫餘古)
부여력(夫餘歷)
부여고(夫餘固) 21대 개로왕의 아들- 이름 미상. 《일본서기》 기록에 의하면 475년 한성 함락 때 개로왕, 왕후와 함께 사망했다고 한다.
부여곤지(곤지) - 20대 비유왕의 아들로, 21대 개로왕의 형제.
마나군 - 문휴마나와 목리마나 두 명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문휴마나로 본다.
소비 부여씨 - 553년에 신라 진흥왕과 혼인한 백제 26대 성왕의 딸.
왕흥사지 사리장엄구에 등장하는 왕자(가칭) - 이름 미상.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577년에 사망했다.
부여교기 - 30대 무왕의 아들이자 31대 의자왕의 동생.
부여효 - 31대 의자왕의 차남.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태 - 31대 의자왕의 3남.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연(扶餘演) - 31대 의자왕의 아들. 백제가 멸망한 뒤 당으로 압송된다.
부여궁 - 31대 의자왕의 서자. 해석에 따라서 궁이 인명이 아니라고 보기도 한다.
부여용 - 부여융의 동생.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부여선광과 동일인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확인되지는 않았다.
여자신 - 백제 왕족 출신의 부흥운동가이자 백제계 도래인.
부여충승(扶餘忠勝)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충지(扶餘忠志) - 백강구 전투 이후 당나라에 투항.
부여선광(여선광) - 부여용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백제 왕족.
부여문사 - 부여융의 아들. 부여효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부여덕장(扶餘德章) - 부여융의 아들. 딸 부여태비 묘지명에서 언급된다.
길온의 부인 부여씨 - 부여덕장의 딸로 부여태비의 언니.
일문낭장의 부인 부여씨 - 낙양 용문석굴 877호의 부조에서 언급된 인물.
부여준(扶餘準) - 백제 유민 출신의 당나라 무장.
헌왕태자(獻王太子) - 이름 미상. 성주사 비문에서는 백제국 헌왕태자가 절을 창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헌왕이 혜왕의 시호이기 때문에 그 아들인 법왕과 동일인이라는 설이 있다.
부여사(扶餘絲) - 일본 《비목대명신록기》에 기록된 부여풍의 아들. 백제부흥운동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비록대명신록기》에 전설상의 백제 왕족인 정가왕이 등장하기 때문에, 이와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다.
그 외에 성씨가 기록되지 않고 이름만 남은 성충(백제), 충상(忠常) 등 여러 인물들도 부여씨라는 추정이 존재한다.
전설상의 부여씨의 인물
정가왕 전설이 기록된 신사문헌 비목대명신록기(比木大明神縁起)에만 확인되는 인물로, 해당 문헌에 의하면 일본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일본 큐슈 미야자키현의 미사토 정에서는 그와 그의 아들인 정가왕, 복지왕을 기리는 축제인 시와스마츠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정가왕: 일본 규슈 미와자키 현의 미카도 신사의 제신으로 모셔진 인물. 역사적인 인물인지는 불분명하나, 정가왕이 나온 기록의 말미에 부여풍의 아들인 부여사가 일본으로 도피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어 백제 부여씨 왕족과 연관있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존재한다. 다만 정가왕이 백제 왕족이라면, 왜 일본 《육국사》에는 정가왕에 대한 언급이 없는지가 불명이다.
복지왕: 정가왕의 아들. 정가왕을 추격한 적군을 무찔렀으나, 아버지인 정가왕은 적군과의 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전승이 전해온다.
일본의 백제계 성씨
쿠다라(百濟くだら)), 오우치씨(大內おおうち), 토요타(豊田とよた), 후지와라(藤原ふじわら),마쓰다(松田まつだ), 이시노(石野いしの), 스가노(菅野すがの), 오오카(大丘おおか)), 오카야(岡屋おかや), 하루노(春野はるの),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나카노(中野なかの), 쿠니모토(國本くにもと), 나가다(長田ながた) 등의 복성과, 하야시(林はやし), 후미(文ふみ)씨 등의 단성이 있습니다.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徐姓(서성) 同祖者還有 嬴(영)、秦(진)、趙(조)、黃(황)、江(강),司馬(사마) 共七姓禁通婚(7성은 결혼 금함)
중국에서는 嬴(영), 徐(서), 秦(진)、趙(조)、黃(황)、江(강), 司馬(사마) 7성은 동성동본으로 결혼을 못한다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