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순(朴應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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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6년(중종 21)~1580년(선조 13) = 55세]. 조선 중기 명종 · 선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돈령부(敦寧府) 영사(領事)이고, 증직(贈職)영의정(領議政)이다. 자는 건중(健仲)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사간원 사간(司諫)박소(朴紹)이고, 어머니 남양홍씨(南陽洪氏)는 사섬시 정(司贍寺正)홍사부(洪士俯)의 딸이다. 증조부는 상주목사(尙州牧使)박임종(朴林宗)이고, 조부는 이조 정랑박조년(朴兆年)이다. 박응천(朴應川)의 동생이고 박응남(朴應男), 박응복(朴應福), 박응인(朴應寅)의 형이다.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아버지이다. 유조순(柳祖詢)·성제원(成悌元)·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명종 · 선조 시대 활동

1555년(명종 10)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556(명종 11)에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가 되었고, 1559년(명종 14) 사복시(司僕寺)주부(主簿)가 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법에 연루되어 면직되었다. 1560년(명종 15)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 1561년(명종 16) 안음현감(安陰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는데, 1563년(명종 18)봄 양모(養母) 상(喪)을 당하면서 사임하였다. 1565년(명종 20) 상복(喪服)을 벗은 후, 돈령부(敦寧府) 주부(主簿)가 되었다가 내섬시(內贍寺) 주부를 거쳐, 용인현령(龍仁縣令)이 되었다. 이어 돈령부 도정(都正)을 지냈다.

1569년(선조 2) 11월에 딸이 선조의 왕비(王妃)가 되자 반성부원군(潘城府院君)돈령부 영사(領事)가 되었고, 1570년(선조 3)봄에 도총부(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겸임하였다. 1580년(선조 13) 11월 향년 5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응순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단아하였고, 담소할 때에 얼굴이 화평하였다. 성품이 검소한 것을 좋아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형제간에 우애하였고 친족들과 화목하였다. 아버지를 잃은 생질(甥姪)들을 자신의 자식처럼 돌봐 주었다. 그는 왕비(王妃)의 아버지로서 조금도 정사에 간여하지 않았고 집안 생활이 사치스럽지 않아서 남들이 그가 국구(國舅)인지를 알지 못할 정도로 청렴결백하였다고 한다.

묘소와 추증

사후에 나라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하였고 1696년(숙종 22) 7월 정의(靖懿)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촌(金村)에 있다. 이이(李珥)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문천정(文川正)이수갑(李壽甲)의 딸인데, 자녀 1남 1녀를 두었다. 1자는 박동언(朴東彦)이고, 1녀는 선조비(宣祖妃) 의인왕후(懿仁王后)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잠곡유고(潛谷遺稿)』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