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비(王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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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배우자로서 정비(正妃)를 지칭함.

개설

왕의 부인은 정실과 측실, 즉 후궁이 있다. 왕비(王妃)는 이 중 정실부인, 즉 정비를 말한다. 왕의 후궁은 내명부(內命婦)의 품계를 받고 내관(內官)으로 구분되나 왕비는 품계를 초월한 무품(無品)으로 내명부를 통솔하는 지위에 있다. 이 외에도 왕비는 조선의 여성을 대표하는 국모(國母)이며, 이를 상징하는 의례를 통해 그 위상이 정립되었다. 왕비는 왕위를 계승할 후사를 생산하고, 여성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때로는 후사왕을 결정하는 등 권한과 의무가 있었다. 왕비는 승하한 후 왕후(王后)의 시호를 받으며, 종묘(宗廟)에 신위(神位)가 배향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에서 왕의 배우자를 왕비라고 부른 것은 세종대부터였다. 조선의 비빈제도(妃嬪制度)는 태종대 정비되었다(『태종실록』 2년 1월 8일). 세종은 이를 기반으로 제후국의 지위에 맞는 왕실 구성원의 명칭을 정하였다. 세종은 중국의 한나라에서부터 천자의 후(后)를 황후(皇后)라고 하였고, 제후의 부인은 비(妃)라 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중전은 비가 되어야 하며, 중궁(中宮)이라는 호칭은 황후를 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제후국의 예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다(『세종실록』 9년 1월 26일). 이로써 왕의 적처는 왕비로 칭호를 정하였다. 그러나 중궁이라 부르지 못하게 하였지만 실제는 칭하여 왕비의 위상을 유지하도록 하였다. 왕비는 생전에 왕비, 중궁, 중전(中殿), 중궁전(中宮殿), 곤전(坤殿) 등으로 불렸다. 왕비가 승하하여 국상을 치르는 기간에는 대행왕비(大行王妃)라고 하였으며, 사후에는 왕후의 시호가 주어져서 종묘에 신위가 배향되었다.

왕비가 되기 위해서는 왕비로 책봉을 받는 책비(冊妃)를 치러야 한다. 그런데 왕비에 책봉되기 이전의 상황은 왕과 혼인한 시기 및 지위에 따라 차이가 있다. 가장 전형적으로 왕비로 책봉을 받는 경우는 왕이 세자 시절 혼인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지내다가 남편이 즉위하면 왕비로 책봉을 받는 것이다. 대개 왕이 즉위 교서에 이러한 지위 변화를 함께 반포하였다. 즉위한 왕이 혼인을 치르지 않았거나, 왕비가 승하하였을 때에는 계비(繼妃)를 간택하고 책비가 치러진다. 즉 왕이 즉위한 후 혼인을 하고 왕비가 되는 경우인데, 단종, 선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이 이에 해당한다. 계비로 왕과 혼인을 하는 경우는 조선전기에는 따로 간택을 하지 않고 후궁에서 가려 뽑아 왕비로 삼았으나 중종과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혼인부터는 계비도 새롭게 간택하여 혼인을 치렀다. 이외에도 남편이 대군(大君) 혹은 군(君)으로서 왕위를 승계한 경우에는 군부인(君夫人)에서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는 왕의 후궁들이 내명부의 내관으로 품계와 직무를 부여받았던 데 비해, 품계를 초월하여 무품이며 내명부를 통솔하는 지위에 있었다. 그런 만큼 왕비에게 주어진 임무는 법제적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지만 왕의 배우자로서 중요하고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것들이었다. 왕비의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을 왕위를 계승할 아들을 낳는 것이었다. 왕비가 낳은 아들은 대군이라 하여 후궁 소생인 군과 구별하였다. 아들을 낳지 못하였을 때에는 후궁 소생의 군이 즉위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고, 때로는 그 소생을 키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들을 낳지 못하였을 때 이에 대한 책임보다는 아들을 낳았을 때 이로 인해 누릴 수 있는 점이 더 많았다. 세종비 소헌왕후(昭憲王后)는 8명의 대군을 낳았기에 친정이 멸문이 되는 위기에서도 폐비(廢妃)가 되지 않았다(『세종실록』 즉위년 12월 23일).

왕비의 또 다른 임무는 여성을 대표하는 국모로서 내치를 주재하는 것이었다. 왕비는 내·외명부를 이끌어가는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모아 내연(內宴)을 주재하였고, 친잠례(親蠶禮)와 같은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하례를 받았다. 백성들에게는 국모로서 양로연(養老宴)에 참석하여 위민(爲民)의 정을 나누었다. 왕비는 왕의 배우자이자 국모로서 국가의 의식에 함께 참석하여 정월과 동지에 백관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왕비가 정치적인 결정을 하거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왕의 상례(喪禮)를 주관하는 것 이외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는 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한 후 선조의 즉위를 발표하였다. 이는 왕대비 인성왕후(仁聖王后)가 있었음에도 예외적인 행보였다(『명종실록』 22년 6월 28일).

왕비는 왕의 배우자로서 그 위상이 정립되며, 왕비의 가족들도 그에 맞게 봉작이 되고, 우대를 받았다. 반면 왕비로서 도리에 어긋나거나, 반정을 비롯한 정치적인 변화가 발생했을 경우 폐비가 되기도 하였다.

변천

왕의 배우자의 호칭을 왕비로 정하기 전에는 미칭(美稱)을 사용하여 비로 책봉하였다. 태조비신의왕후(神懿王后)는 절비(節妃),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현비(顯妃), 정종비정안왕후(定安王后)는 덕비(德妃)였으며, 태종비원경왕후(元敬王后)는 정비(貞妃)로 책봉되었다. 세종비소헌왕후도 처음에는 공비(恭妃)였으나 세종이 미칭을 폐지한 후 다시 왕비로 책봉되었다. 세종이 미칭을 폐지한 이유는 고려후기 원나라의 영향으로 다처제(多妻制)가 시행되면서 여러 명의 왕비를 구분하기 위해 미칭을 사용한 것이나 이는 중원(中原)의 제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세종실록』 9년 1월 26일).

왕비는 살아있을 때 남편이 즉위하며 주어지는 지위였으나, 죽은 후에 왕비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왕조 건국 직전 사망한 태조비신의왕후는 아들 정종이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숭되었다. 문종비현덕왕후(顯德王后)는 왕세자빈으로 단종을 출산한 후 사망하였으나 문종이 즉위한 후 현덕왕후의 시호를 내린 경우이다. 경종비단의왕후(端懿王后)도 왕세자빈으로 사망하였다가 경종의 즉위로 왕후로 추존되었다. 진종비효순왕후는 남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세자로서 승하하였고, 자신도 왕세자빈으로 사망하였으나 정조가 양자로 입적되어 즉위한 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숭하자 왕비로 함께 추숭되었다.

한편 폐비되었다가 다시 왕비의 지위를 회복한 경우도 있다. 신덕왕후는 폐위된 것은 아니지만 존호를 받지 못하고 부묘(祔廟)도 되지 못하였다가 현종대 가서 신주가 종묘에 모셔졌다. 단종의 폐위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던 정순왕후(定順王后), 중종반정 후 폐위되었던 단경왕후(端敬王后)도 숙종과 영조대에 지위를 회복하여 시호를 받았다. 인현왕후(仁顯王后)처럼 폐비가 되었다가 생전에 다시 복위된 경우는 책봉례를 다시 치르게 했다(『숙종실록』 20년 6월 1일).

조선의 왕비였으나 대한제국기에 황후로 추존된 경우도 있다. 이는 태조를 고황제(高皇帝)라 칭하면서 그 배우자를 신의고황후(神懿高皇后), 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로 높였으며, 진종비는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 정조비는 효의선황후(孝懿宣皇后), 순조비는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헌종비는 효현성황후(孝顯成皇后)·효정성황후(孝定成皇后), 철종비는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가 되었다. 이때 사도세자는 장조(莊祖)로 추숭되어 혜경궁 홍씨도 시호를 받은 후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에 추존되었으며, 익종(翼宗)도 문조(文祖)로 추숭되어 신정왕후는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에 추존되었다(『고종실록』 36년 12월 7일). 명성왕후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의 배우자로 명성태황후(明成太皇后)로 추존되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춘관통고(春官通考)』
  • 변원림, 『조선의 왕후』, 일지사, 2006.
  • 임혜련, 「世宗妃 昭憲王后의 위상 정립과 역할」, 『한국인물사연구』 18,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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