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한(黃佑漢)"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XML 가져오기)
1번째 줄: 1번째 줄:
  
  
{{인명사전|대표표제=황우한|한글표제=황우한|한자표제=黃佑漢|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집필자=이현숙|자= 여충(汝忠) |호= 동산(東山), 보정(葆亭)『방목』|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41년(중종36) 8월 26일|사망=1606년(선조39) 2월 2일|본관=상주(尙州)|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 |증조부=(양증조)황준경(黃碩卿) (생증조)황석경(黃碩卿)|조부= 황기찬(黃耆贊) |부= 황세근(黃世懃) |모_외조=영월신씨(寧越辛氏): 신헌(辛獻)의 딸|형제=|처_장인=전주이씨(全州李氏): 이회인(李懷仁)의 딸|자녀=(1자)황정영(黃挺英) (2자)황정호(黃挺豪) (1녀)이유의(李惟義)의 처 (2녀)정홍좌(鄭弘佐)의 처 (3녀)임기(任夔)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437|실록연계=}}
+
{{인명사전|대표표제=황우한|한글표제=황우한|한자표제=黃佑漢|이칭=|대역어=|상위어=|하위어=|동의어=|관련어=|분야=정치·행정가/관료/문신|유형=인물|지역=한국|시대=조선|왕대=선조|집필자=최양규|자= 여충(汝忠) |호= 동산(東山), 보정(葆亭)『방목』 |봉작=|시호=|출신=양반|성별=남자|출생=1541년(중종 36) 8월 26일|사망=1606년(선조 39) 2월 2일|본관=상주(尙州)|주거지= 서울 |묘소소재지=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증조부=(양증조)황준경(黃碩卿) (생증조)황석경(黃碩卿)|조부= 황기찬(黃耆贊) |부= 황세근(黃世懃) |모_외조=영월 신씨(寧越辛氏): 신헌(辛獻)의 딸|형제=(형)황우상(黃佑商)|처_장인=전주 이씨(全州李氏): 이회인(李懷仁)의 딸 →(자녀)2남 3녀|자녀=(1자)황정영(黃挺英) (2자)황정호(黃挺豪) (1녀)이유의(李惟義)의 처 (2녀)정홍좌(鄭弘佐)의 처 (3녀)임기(任夔)의 처|유명자손=|저술문집=|작품=|실록사전URL=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10000840|실록연계=[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9_002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7년 12월 29일]}}
  
 
=='''총론'''==
 
=='''총론'''==
  
[1541년(중종36)∼1606년(선조39) = 6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여충(汝忠), 호는 보정(葆亭) · 동산(東山)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세근(黃世懃)이고, 어머니 영월신씨(寧越辛氏)는 신헌(辛獻)의 딸이다. 상산군(尙山君)[[황효원(黃孝源)]]의 현손이고, 군자감 정[[황기찬(黃耆贊)]]의 손자이다.
+
[1541년(중종 36)∼1606년(선조 39) = 6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자는 여충(汝忠)이고, 호는 보정(葆亭) · 동산(東山)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세근(黃世懃)이고, 어머니 영월 신씨(寧越辛氏)는 신헌(辛獻)의 딸이다. 상산군(尙山君)[[황효원(黃孝源)]]의 현손이고, [[군자감(軍資監)]][[(正)]][[황기찬(黃耆贊)]]의 손자이다.
  
 
=='''선조 시대 활동'''==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3) 사마시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574년(선조7) 34세에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에 보임되었다.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호조 정랑, 희천군수(熙川郡守), 성균관 사예 등을 차례로 맡았다. 1589년 승정원 동부승지, 좌부승지를 거쳐, 1591년(선조24) 도승지로 영전하였다. 1594년(선조2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고,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이 때 사간원에서 황우한이 중국에 사신으로 가 제독주사(提督主事)에게 [[유격(遊擊)]]심유경(沈維敬)의 공적을 칭찬하였다며 그를 탄핵하였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끝내기 위해, 조선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명나라는 심유경을 보내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협상을 하였다. 황우한은 협상을 지지하던 사람 중의 하나였는데, 이 때 사간원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
1570년(선조 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574년(선조 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고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호조 [[정랑(正郞)]]임명되었다가, 희천군수(熙川郡守)로 나갔으며, 돌아와서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 등을 지냈다. 1589년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좌부승지를 거쳐, 1591년(선조 24)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1595년(선조28) 경기도관찰사에 기용되었다가 한성부좌윤에 임명되었는데, 1596년(선조29)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30) 개성유수(開城留守)로 나가 선정을 베풀었고, 1599년(선조32)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어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600년(선조33) 수 중추부 지사, 1601년(선조34) 강원도관찰사와 홍문관 부제학, 1604년(선조37) 중추부 동지사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605년(선조38) 호조 참판이 되었다가 병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사옹원 제조를 겸임하였다. 1606년(선조39) 대사헌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2월 초2일 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
1594년(선조 2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그때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상호군황우한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제독주사(提督主事)와 문답할 때 망령되게 [[유격(遊擊)]]심유경(沈維敬)의 공적을 칭찬하기를 ‘왜적으로 하여금 항복하는 깃발을 세우고 도망가게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실언한 죄가 큽니다.” 하여, 파면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712029_002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7년 12월 29일]) 당시 전쟁 중에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대표 심유경과 일본의 대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여러 차례 만나서 강화(講和)를 맺으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다수의 유학자들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주화(主和)]]를 주장한 관료파의 하나였으므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
 
 +
1595년(선조 28)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 29)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개성유수의 임기를 마친 다음, 1599년(선조 32)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어,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1600년(선조 33) [[중추부(中樞府)]][[(守)]][[지사(知事)]]를 지냈고 1601년(선조 34)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곧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를 지냈고, 1604년(선조 37)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와 의금부 동지사를 지냈다. 1605년(선조 38) 호조 참판과 병조 참판을 역임하면서 [[사옹원(司饔院)]][[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606년(선조 39)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2월 초2일 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과 일화'''==
  
황우한은 종2품 이상 대신(大臣)이었지만 실록에도 졸기가 없다. 다만, 『선조실록』에 1605년(선조38) 2월 그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을 때 [[사관(史官)]]이 간지(間紙)에 “용렬하고 재주가 없다.”라고 써서 끼워 넣은 평이 있는데, 이와 같은 평은 반대파 사관의 악평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 한편, 해창위(海昌尉)[[오태주(吳泰周)]]가 그의 자료를 수집하여 비문을 묘석(墓石)을 세우려고 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별세하자 그의 동생 오진주(吳晉周)가 관봉(官俸)을 털어 그의 묘소에 묘표(墓表)를 세웠다. 오태주 · 오진주 형제는 황우한의 손자인 황연(黃埏)의 다섯째 사위 [[오두인(吳斗寅)]]의 아들들이다. 묘표에는 그가 선조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벼슬하면서 현직(顯職)을 두루 거친 본말을 개략하여 서술하였고, 자손들의 계대와 그 후손들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행에 대해서는 징험할 문헌이 없어 상세히 기록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죽은 지 1세기 후에나 작성된 황우한의 묘표는 전승(傳乘) 기록으로서 평가된다. 묘표의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 오태주의 유필(遺筆)을 모각(模刻)하였으므로, 서예적 가치가 있다.
+
황우한은 종2품 이상 대신(大臣)이지만 실록에 그의 졸기가 없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선조실록』에서 1605년(선조 38) 2월 그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반대파 [[사관(史官)]]이 “용렬하고 재주가 없다.”고 논평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록의 졸기가 아닌 간지(間紙)끼워 넣은 논평은 후세 반대파 사관의 악평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믿을 수 없다.[『선조실록』선조 38년 2월 19일]
 +
 
 +
황우한에 관한 기록은 문집이나 비문이 없어서 후세에 거의 전해지지 못하였다. 그의 손자 황연(黃埏)의 다섯째 사위 충정공(忠貞公)[[오두인(吳斗寅)]]의 아들 해창위(海昌尉)[[오태주(吳泰周)]]가 그의 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그 자료를 수집하여 비문을 써서 묘석(墓石)을 세우려고 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별세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동생 금성현령(金城縣令)오진주(吳晉周)가 관봉(官俸)을 털어서 돌에 글을 새기고 묘석을 묘소에 세웠다. 황우한이 죽은 지 1세기가 훨씬 지나서 묘표(墓表)를 지었기 때문에, 황우한이 조정에 벼슬할 때의 사적과 집에서 지낼 때의 언행은 징험할 만한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체로 선조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벼슬하면서 현직(顯職)을 두루 거친 본말을 개략하여 서술하였다. 묘표의 뒷면에는 자손들의 계대와 그 후손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였다. 황우한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나 문집의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그 묘표가 그에 관한 훌륭한 전승 기록으로 평가된다. 묘표의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이고 현종의 부마인 오태주의 유필(遺筆)을 모각(模刻)하였으므로, 서예 가치가 높다.
  
=='''묘소와 비문'''==
+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의 선영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오진주가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성균관 생원 이회인(李懷仁)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황정영(黃挺英)은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차남 황정호(黃挺豪)는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다. 딸들은 군수이유의(李惟義)의 처, 목사정홍좌(鄭弘佐)의 처, 사인임기(任夔)의 처가 되었다. 황정영의 양자 황연(黃埏)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다. 황연은 2남 6녀를 낳았는데, 장남 황인서(黃寅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를 지냈고, 차남 황진서(黃震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으며, 4녀는 별제남천석(南天錫)의 처, 5녀는 충정공(忠貞公)오두인의 처, 6녀는 판서정혜공(貞惠公)이규령(李奎齡)의 처가 되었다.
+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의 선영(先塋)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명중(明仲)오진주가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성균관 생원 이회인(李懷仁)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황정영(黃挺英)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차남 황정호(黃挺豪)는 [[사복시(司僕寺)]][[정(正)]]에 추증되었다. 딸들은 군수(郡守)이유의(李惟義), 목사(牧使)정홍좌(鄭弘佐), 사인(士人)임기(任夔)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로 황정영의 양자 황연(黃埏)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증손자와 증손녀를 보면, 황연은 2남 6녀를 낳았는데, 장남 황인서(黃寅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候)]]를 지냈으며 차남 황진서(黃震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4녀는 [[별제(別提)]]남천석(南天錫)에게, 5녀는 판서충정공오두인에게, 6녀는 판서정혜공(貞惠公)이규령(李奎齡)에게 각각 시집갔다. 오두인의 아들 중 오태주는 현종의 부마이고, 오진주는 김창협(金昌協)의 사위이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25번째 줄: 29번째 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간이집(簡易集)』       
 
*『간이집(簡易集)』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사류재집(四留齋集)』       
 
*『사류재집(四留齋集)』       
 
*『일송집(一松集)』       
 
*『일송집(一松集)』       

2018년 1월 10일 (수) 00:28 판




총론

[1541년(중종 36)∼1606년(선조 39) = 6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자는 여충(汝忠)이고, 호는 보정(葆亭) · 동산(東山)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세근(黃世懃)이고, 어머니 영월 신씨(寧越辛氏)는 신헌(辛獻)의 딸이다. 상산군(尙山君)황효원(黃孝源)의 현손이고, 군자감(軍資監)정(正)황기찬(黃耆贊)의 손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 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574년(선조 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고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호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희천군수(熙川郡守)로 나갔으며, 돌아와서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 등을 지냈다. 1589년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좌부승지를 거쳐, 1591년(선조 24)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1594년(선조 2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그때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상호군황우한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제독주사(提督主事)와 문답할 때 망령되게 유격(遊擊)심유경(沈維敬)의 공적을 칭찬하기를 ‘왜적으로 하여금 항복하는 깃발을 세우고 도망가게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실언한 죄가 큽니다.” 하여, 파면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7년 12월 29일) 당시 전쟁 중에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대표 심유경과 일본의 대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여러 차례 만나서 강화(講和)를 맺으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다수의 유학자들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주화(主和)를 주장한 관료파의 하나였으므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95년(선조 28)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 29)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개성유수의 임기를 마친 다음, 1599년(선조 32)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어,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1600년(선조 33) 중추부(中樞府)수(守)지사(知事)를 지냈고 1601년(선조 34)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곧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를 지냈고, 1604년(선조 37)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와 의금부 동지사를 지냈다. 1605년(선조 38) 호조 참판과 병조 참판을 역임하면서 사옹원(司饔院)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606년(선조 39)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2월 초2일 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우한은 종2품 이상 대신(大臣)이지만 실록에 그의 졸기가 없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선조실록』에서 1605년(선조 38) 2월 그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반대파 사관(史官)이 “용렬하고 재주가 없다.”고 논평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록의 졸기가 아닌 간지(間紙)로 끼워 넣은 논평은 후세 반대파 사관의 악평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믿을 수 없다.[『선조실록』선조 38년 2월 19일]

황우한에 관한 기록은 문집이나 비문이 없어서 후세에 거의 전해지지 못하였다. 그의 손자 황연(黃埏)의 다섯째 사위 충정공(忠貞公)오두인(吳斗寅)의 아들 해창위(海昌尉)오태주(吳泰周)가 그의 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그 자료를 수집하여 비문을 써서 묘석(墓石)을 세우려고 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별세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동생 금성현령(金城縣令)오진주(吳晉周)가 관봉(官俸)을 털어서 돌에 글을 새기고 묘석을 묘소에 세웠다. 황우한이 죽은 지 1세기가 훨씬 지나서 묘표(墓表)를 지었기 때문에, 황우한이 조정에 벼슬할 때의 사적과 집에서 지낼 때의 언행은 징험할 만한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체로 선조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벼슬하면서 현직(顯職)을 두루 거친 본말을 개략하여 서술하였다. 묘표의 뒷면에는 자손들의 계대와 그 후손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였다. 황우한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나 문집의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그 묘표가 그에 관한 훌륭한 전승 기록으로 평가된다. 묘표의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이고 현종의 부마인 오태주의 유필(遺筆)을 모각(模刻)하였으므로, 서예 가치가 높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의 선영(先塋)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명중(明仲)오진주가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성균관 생원 이회인(李懷仁)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황정영(黃挺英)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차남 황정호(黃挺豪)는 사복시(司僕寺)정(正)에 추증되었다. 딸들은 군수(郡守)이유의(李惟義), 목사(牧使)정홍좌(鄭弘佐), 사인(士人)임기(任夔)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로 황정영의 양자 황연(黃埏)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증손자와 증손녀를 보면, 황연은 2남 6녀를 낳았는데, 장남 황인서(黃寅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候)를 지냈으며 차남 황진서(黃震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4녀는 별제(別提)남천석(南天錫)에게, 5녀는 판서충정공오두인에게, 6녀는 판서정혜공(貞惠公)이규령(李奎齡)에게 각각 시집갔다. 오두인의 아들 중 오태주는 현종의 부마이고, 오진주는 김창협(金昌協)의 사위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간이집(簡易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일송집(一松集)』
  • 『태천집(苔泉集)』
  • 『우복집(愚伏集)』
  • 『동춘당집(同春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