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우한(黃佑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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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41년(중종 36)∼1606년(선조 39) = 66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냈다. 자는 여충(汝忠)이고, 호는 보정(葆亭) · 동산(東山)이다. 본관은 상주(尙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황세근(黃世懃)이고, 어머니 영월 신씨(寧越辛氏)는 신헌(辛獻)의 딸이다. 상산군(尙山君)황효원(黃孝源)의 현손이고, 군자감(軍資監)정(正)황기찬(黃耆贊)의 손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0년(선조 3)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으로 합격하였고, 1574년(선조 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고 삼사(三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호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가, 희천군수(熙川郡守)로 나갔으며, 돌아와서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 등을 지냈다. 1589년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좌부승지를 거쳐, 1591년(선조 24)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

1594년(선조 27)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다. 그때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사간원에서 그를 탄핵하기를, “상호군황우한이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제독주사(提督主事)와 문답할 때 망령되게 유격(遊擊)심유경(沈維敬)의 공적을 칭찬하기를 ‘왜적으로 하여금 항복하는 깃발을 세우고 도망가게 했습니다.’라고 하였으니, 그의 실언한 죄가 큽니다.” 하여, 파면되었다.(『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 27년 12월 29일) 당시 전쟁 중에 조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명나라 대표 심유경과 일본의 대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여러 차례 만나서 강화(講和)를 맺으려고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다수의 유학자들이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그는 주화(主和)를 주장한 관료파의 하나였으므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다.

1595년(선조 28) 외직으로 나가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고, 1596년(선조 29)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 1597년(선조 30) 개성유수(開城留守)에 임명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개성유수의 임기를 마친 다음, 1599년(선조 32)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어,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에 임명되었다. 1600년(선조 33) 중추부(中樞府)수(守)지사(知事)를 지냈고 1601년(선조 34)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곧 다시 홍문관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1603년(선조 36) 의금부(義禁府)지사(知事)를 지냈고, 1604년(선조 37) 중추부 동지사(同知事)와 의금부 동지사를 지냈다. 1605년(선조 38) 호조 참판과 병조 참판을 역임하면서 사옹원(司饔院)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 1606년(선조 39)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그해 2월 초2일 병으로 서울의 본가에서 별세하니, 향년이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우한은 종2품 이상 대신(大臣)이지만 실록에 그의 졸기가 없다.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선조실록』에서 1605년(선조 38) 2월 그가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을 때 그의 반대파 사관(史官)이 “용렬하고 재주가 없다.”고 논평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실록의 졸기가 아닌 간지(間紙)로 끼워 넣은 논평은 후세 반대파 사관의 악평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사실대로 믿을 수 없다.[『선조실록』선조 38년 2월 19일]

황우한에 관한 기록은 문집이나 비문이 없어서 후세에 거의 전해지지 못하였다. 그의 손자 황연(黃埏)의 다섯째 사위 충정공(忠貞公)오두인(吳斗寅)의 아들 해창위(海昌尉)오태주(吳泰周)가 그의 어머니의 소망에 따라 그 자료를 수집하여 비문을 써서 묘석(墓石)을 세우려고 하다가, 일을 이루지 못한 채 별세하였다. 이리하여 그의 동생 금성현령(金城縣令)오진주(吳晉周)가 관봉(官俸)을 털어서 돌에 글을 새기고 묘석을 묘소에 세웠다. 황우한이 죽은 지 1세기가 훨씬 지나서 묘표(墓表)를 지었기 때문에, 황우한이 조정에 벼슬할 때의 사적과 집에서 지낼 때의 언행은 징험할 만한 문헌(文獻)이 없어 상세히 기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대체로 선조 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벼슬하면서 현직(顯職)을 두루 거친 본말을 개략하여 서술하였다. 묘표의 뒷면에는 자손들의 계대와 그 후손들을 비교적 자세히 기술하였다. 황우한에 대한 기록은 실록이나 문집의 자료가 충분하지 않으므로, 그 묘표가 그에 관한 훌륭한 전승 기록으로 평가된다. 묘표의 글씨는 유명한 서예가이고 현종의 부마인 오태주의 유필(遺筆)을 모각(模刻)하였으므로, 서예 가치가 높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문수산(文秀山)의 선영(先塋)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명중(明仲)오진주가 지은 묘표가 남아 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성균관 생원 이회인(李懷仁)의 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낳았다. 장남 황정영(黃挺英)은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차남 황정호(黃挺豪)는 사복시(司僕寺)정(正)에 추증되었다. 딸들은 군수(郡守)이유의(李惟義), 목사(牧使)정홍좌(鄭弘佐), 사인(士人)임기(任夔)에게 각각 시집갔다. 손자로 황정영의 양자 황연(黃埏)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다. 증손자와 증손녀를 보면, 황연은 2남 6녀를 낳았는데, 장남 황인서(黃寅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우후(虞候)를 지냈으며 차남 황진서(黃震瑞)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를 지냈고, 4녀는 별제(別提)남천석(南天錫)에게, 5녀는 판서충정공오두인에게, 6녀는 판서정혜공(貞惠公)이규령(李奎齡)에게 각각 시집갔다. 오두인의 아들 중 오태주는 현종의 부마이고, 오진주는 김창협(金昌協)의 사위이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간이집(簡易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일송집(一松集)』
  • 『태천집(苔泉集)』
  • 『우복집(愚伏集)』
  • 『동춘당집(同春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