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길(崔惠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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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1년(선조 24)∼1662년(현종 3) = 72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도승지(都承旨)이고, 증직(贈職)은 영의정이다. 자는 자적(子迪), 호는 유하(柳下)다. 본관은 전주(全州), 주거지는 서울이다. 증조부는 빙고별제(氷庫別提)를 지내고 이조 판서에 추증된 최업(崔嶪)이며, 조부는 좌찬성에 추증된 최수준(崔秀俊)이다. 아버지는 영흥대도호부사(永興大都護府使)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 전주유씨(全州柳氏)는 병조 참판(參判)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영의정최명길(崔鳴吉)의 동생이고,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최후량(崔後亮)의 생부(生父)이다.

인조 전반기의 활동

1613년(광해군 5) 사마시(司馬試) 진사(進士)로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후기에 북인(北人)들이 정권을 잡고 서인(西人)들을 탄압하였으므로, 과거 시험을 보지 아니하고, 형 최명길(崔鳴吉)과 최래길을 따라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계획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에 ‘정사공신(靖社功臣)’을 정할 때 셋째 형 최명길이 1등 공신이 되고, 둘째 형 최래길이 3등 공신이 되었으나, 한 집안에서 너무 많이 공신이 나올 수 없다고 하여, 막내 최혜길은 제외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공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익찬(翊贊)으로 승진하였다. 1625년(인조 3) 별시(別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5세였다.(『방목』 참고.) 바로 예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1626년(인조 4)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그때 인조의 뜻을 거슬러 송화현감(松禾縣監)으로 좌천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1627년(인조 5) 홍문록(弘文錄)에 선발되었는데, 그때 최혜길은 김육(金堉) 등과 함께 모두 14명이 뽑혔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참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서 후금(後金)의 베이러[貝勒: 왕] 아민(阿敏)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안도 영변(寧邊)을 공략하고, 황해도 안주(安州)를 공격하였다. 최혜길은 관향사(館餉使)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서 급히 호남(湖南)에서 군량미를 모아서 배로써 강화도(江華島)로 운송하여 보관하여 두었다가,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영(軍營)으로 뱃길로 운송하였다. 1628년(인조 6) 홍문관에 들어가서 부수찬(副修撰)·수찬(修撰)을 연달아 맡았고(『인조실록』)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 예조 정랑(正郞)이 되었다.

1629년(인조 7)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었다가 종3품하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하여 이조 좌랑에 임명되었다. 그때 인조가 이조의 낭관(郎官)을 중요시하여 6품의 낭관에서 추천한 인물을 채용하지 못하도록 특명을 내렸기 때문에 처음에 낭관의 추천에 들어가지 않은 자를 의망(擬望)한 것이다.(『인조실록』 참고.) 1630년(인조 8) 이조 정랑이 되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임하였고, 혜민서(惠民署)교수(敎授)를 거쳐, 강원도 암행어사(暗行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1631년(인조 9)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고 제용감(濟用監)정(正)을 역임하였다. 1632년(인조 10)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

1633년(인조 11)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가, 호군(護軍)으로 옮겼고, 이듬해 우승지(右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좌승지(左承旨)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35년(인조 13)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로 있을 때 동지사(冬至使)에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으로 갔다.(『인조실록』 참고.) 이보다 앞서 사은사(謝恩使)송석경(宋錫慶)이 명나라에서 돌아올 때, 조선을 다녀간 명나라 사신들이 조선에서 전별금(餞別金)으로 받아간 은화(銀貨) 6천 냥을 도로 보내왔다. 마침 조선에서 동지사최혜길이 명나라에 가게 되자, 그 편에 표문을 받들고 가서 이를 사은하게 하였다.(『임하필기(林下筆記)』 권18 참고.) 중국에서 돌아와서,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의 필선(弼善)을 겸임하였다.(『호곡집(壺谷集)』 권18 「이조참판 최공혜길 묘갈명(吏曹參判崔公惠吉墓碣銘)」 참고. 이하 「최혜길 묘갈명」이라 약칭함.)

인조 후반기의 활동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직접 10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바로 서울로 남하하였다. 서울이 함락되자 인조는 황급히 강화도로 피난하려고 하였으나, 길이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가서 45일 동안 항전하다가 마침내 항복하였다. 최혜길 3형제도 임금의 어가(御駕)를 호위하여, 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때 성 안에서 김상헌(金尙憲)의 주전파(主戰派)와 최명길의 주화파(主和派)가 당파 싸움보다 더욱 살벌하게 논쟁을 벌였다. 최혜길은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된 성(城) 안에 있으면서도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전후에 호종(扈從)한 신하들에게 포상할 때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여, 대신(大臣)의 반열에 올랐다.

1637년(인조 15) 행 우승지(行右承旨)가 되었다가(『인조실록』 참고) 이듬해 병조 참지(參知)를 거쳐, 1638년(인조 16)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이때 홍문관에서 차자(箚子)를 올려서 대사간최혜길을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인조가 그대로 따랐으나 그해 말에 인조는 최혜길을 도승지(都承旨)로 발탁하였다.(『인조실록』 참고.) 이는 주화파와 주전파의 싸움에서 인조가 최명길의 손을 들어준 셈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조정 안에서 주화파의 영수 최명길을 받들고 주전파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청나라의 실세를 인정하는 외교 정책을 폈으나, 명나라를 섬기던 다수의 유학자들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았다. 1640년(인조 18)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1641년(인조 19) 세자시강원 우부빈객(右副賓客)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참고.) <병자호란> 직후에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청나라의 질자(質子)가 되어 만주 심양(瀋陽)의 질자관(質子館)에 있었으므로, 최혜길도 심양관으로 가서 소현세자를 보필하였다.

당시 국제 정세를 보면, 청나라 태종홍타지는 아버지 태조(太祖)누르하치의 뒤를 이어 ‘8기병(八騎兵)’을 거느리고 중국 명나라를 맹렬히 공격하고 있었다. 홍타지는 명나라의 후원을 없애려고 먼저 몽고와 조선을 차례로 침입하여 복속시켰다. 그런 다음에, 전쟁 물자를 공급받기 위하여 조선에 막대한 세폐(歲幣)를 요구하고, 또 명나라와 싸우는 데 필요한 조선의 원군을 요청하였다. 조선은 청나라의 요구에 응하여 세폐를 보내고 원군을 파견하였는다. 이때 청나라 장수 용골대(龍骨大)가 조선에 사신으로 오가면서 부린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그의 역관 정명수(鄭命壽) 등은 통역을 맡아서 조선 정부와 소현세자의 질관(質館)에 갖은 협박과 횡포를 일삼았다.

1641년(인조 19) 청나라 군사가 만주의 금주(錦州)를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명나라 군사의 저항이 완강하여, 쉽게 함락하지 못했다. 그러자 청나라 칸[汗] 홍타지가 ‘8기병’을 보내어 금주를 함락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청나라 칸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점령 지역으로 갔는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황제를 따라가게 되자, 빈객최혜길 등도 세자 일행을 수행하여 청나라 태종을 따라갔다.(『인조실록』 참고.) 최혜길은 그 뒤에 청나라 장수 용골대가 조선에 사신으로 와서 조선의 원병을 요청할 때 그와 동행하여 귀국하였다. 1644년(인조22) 9월 청나라 태종홍타지가 죽고, 어린 아들 세조(世祖)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하였다. 순치제의 숙부 예친왕(睿親王)도루곤이 명나라 북경을 점령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곧 청나라 정부도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遷都)하였다. 이때 최혜길은 동지사 겸 세폐사(歲幣使)가 되어, 부사김수현(金守玄), 서장관이규로(李奎老) 등과 함께 청나라 새 수도 연경(燕京)까지 가서 순치제에게 동짓날 하례를 드렸다. 이듬해 귀국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효종 시대의 활동

1649년 5월(효종 즉위)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이조 참판을 거쳐, 1651년(효종 2) 경연(經筵)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효종실록』 참고.) 그러나 1652년(효종 3) 사간원에서 최혜길을 탄핵하기를, “최혜길이 이조 참판 자리에 오래 있으면서 정사(政事)를 잘못한 실수가 많았습니다. 지난번 무과(武科)의 고시관으로 임명되었을 때 역적 안철(安澈)의 집에서 음식을 대접 받았습니다. 그러고 역적 안철을 장흥 부사(長興府使)에 의망(擬望)하였다가, 문제가 제기되자, 탑전(榻前)에서 대죄(待罪)한 적이 있었으니, 지금 파직하소서.” 하니, 효종이 그를 파직하였다.(『효종실록』 참고.) 그때 효종은 주전파의 서인들을 등용하여 <북벌(北伐)>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주화파의 인물들을 배척하였다. 그리하여 최혜길은 벼슬에서 물러나서, 한 동안 집에서 책을 읽으면서, 조용하게 지냈다.

1653년(효종 4) 영해부사(寧海府使)로 복직되었는데, 효종의 구언(求言)에 응하여 최혜길이 민폐(民弊)를 조목별로 진달하였다.(『효종실록』 참고.) 효종이 직접 비답을 내리고, 곧바로 그를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임명하였다. 1655년(효종 6) 개성유수(開城留守)로 옮겼는데, 그때 기근으로 황해도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그는 황해도 연변 여러 고을의 창고에 있는 곡식 3~4백 석을 풀어서 기민(饑民)을 구제할 것을 건의하니, 효종이 그대로 따랐다. 최혜길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개성유수 자리를 사직하였다. 그러자 1657년(효종 8) 효종이 말하기를, “근래 유수의 자리에 전혀 사람을 골라 보내지 않았는데, 최혜길과 같이 쇠약하고 병든 사람은 유수의 자리에 적합하지 않다.” 하고, 개성 유수를 교체하였다.(『효종실록』 참고.) 최혜길은 관직에서 물러났으나, 만년에 오랜 숙환으로 고생하였다. 유수에서 물러난 지 5년 만에 1662년(현종 3) 11월 16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2세였다.

<정묘호란> 때 군량미 공급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후금의 군사가 평안도 영변을 공략하고 황해도 안주를 공격하였다. 최혜길은 관향사의 종사관으로, 급히 호남에서 군량미를 모아서 배로써 강화도로 운송하고, 다시 황해도와 평안도의 군영으로 운송하였다. 그해 2월 양서(兩西) 지방 찬획사(贊畫使)성준구(成俊耈)가 장계(狀啓)하기를, “군량미 1천 8백 71섬과 인삼 60근을 올려 보내라고 하였는데, 종사관최혜길(崔惠吉)이 그 물건을 실은 배들을 영솔하고 같은 날에 강화도로 들어왔습니다.” 하였다.(『속잡록(續雜錄)』권2 참고.) 이를 통해, <정묘호란> 때 최혜길이 관향사의 종사관이 되어서, 호남 지방에서 거둔 군량미를 실은 선단(船團)을 직접 인솔하고 강화도로 운송하여, 일단 섬에 보관해 두고, 전쟁이 치열한 평안도와 황해도의 군영으로 바닷길로 운송할 작전을 세웠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배로 곡식을 운송하는 일은 폭풍을 만나서 유실될 위험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관리들이 아주 싫어하던 일이었다. 평상시 조세(租稅)의 운송에는 조운(漕運)을 이용하여 육지로 운송하고, 바닷길을 별로 이용하지 않았으나, 비상시 군량미의 운송에는 위험을 무릅쓰고 바닷길을 이용하여 군량미를 빨리 운송할 수 밖에 없었다.

<정묘호란> 때 청천강 이북의 모든 진(鎭)이 거의 함락되었으나, 오직 평안도 용골성(龍骨城)의 수성장(守城將)정봉수(鄭鳳壽)만은 승전하였는데(『연도기행(燕途紀行)』 상권 참고), 그 용골산성이 험준하여 군량미를 잇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문제였다. 1627년(인조 5) 5월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접반사(接伴使)원탁(元鐸)의 장계(狀啓)를 보건대, 용골성에 군량미를 잇대는 일을 염려하고 있는데, 용골성의 군량미는, 평안도에서 전후로 보낸 것이 거의 7백여 섬에 이르고 황해도관찰사도 4백 섬을 보냈으며, 어제 관향사 종사관최혜길이 보고한 바를 보니, 강화도에서 보낸 것과 해주(海州) 결성창(結城倉)에 보관 중이던 쌀과 콩 3천 2백여 섬을 이미 배에 실어서 서쪽으로 운송해 갔다고 합니다.” 하였다.(『승정원일기』인조편 참고.) <정묘호란> 때 최혜길은 37세였는데, 국가의 위기를 구하기 위하여 목숨을 내걸고 선단을 이끌고, 강화도를 중심으로 아래로는 호남 지방으로, 위로는 해서 지방으로 종횡 누비고 다녔다. 당시 형 최명길은 인조를 모시고 강화도에 피난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의 힘을 빌려서 보다 안전한 관직으로 옮겨가지 않고, 스스로 어렵고 험난한 자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묘호란> 때 최혜길은 관향사 종사관으로서 평안도의 용골성과 황해도 안주성 등지에 군량미를 공급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최혜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성품이 온화하고 용모가 순수하였으며, 말을 할 때 입에서 말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나지막하게 말하였으나, 말의 중심(中心)은 확실히 분명하였다. 그는 권세와 이익을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세상의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좇는 사람이나 조급하게 출세하려고 하는 자를 만나면, 자기 몸이 더럽혀질까봐 얼른 피하였다. 그의 문장은 맑고 간결하면서도 법도에 맞았고, 시(詩)도 시원스럽고 운치가 있어서, 한 시대의 문인(文人)들이 모두 칭찬하였으나, 그는 오히려 조그마한 기예(技藝)라고 겸손해 하면서 스스로 자랑하지 아니하였다.(「최혜길 묘갈명」 참고.) 그의 지위가 2품의 대신에 오른 지 30년이 되었으나, 벼슬에 관심이 없어서 끝내 품계 하나만을 승진하여 1품의 정승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사림(士林)에서 오히려 이것을 훌륭하게 여겼다.(「최혜길 묘갈명」 참고.) 그러나 사실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은 주전파가 그를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1641년(인조 19) 9월 청나라 군사가 만주의 금주를 포위하고 공격하였으나, 명나라 군사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청나라 칸 홍타지가, 8명의 베이러에게 ‘8기병’을 거느리고 가 공략하게 하였다. 그때 조선에서 파병한 포수(捕手)들이 전력을 다하여 싸우지 않는다고, 역과 정명수 등이 칼을 빼어들고 조선 군사를 죽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청나라 칸 홍타지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점령 지역으로 갔는데, 그때 청나라에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도 함께 황제를 따라갈 것을 강요하여, 빈객최혜길과 보덕(輔德)조계원(趙啓遠) 등이 세자 일행을 수행하여 황제를 따라갔다. 용골대가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선봉대로 금주로 갔다.(『인조실록』 참고.)

1644년(인조22) 9월 대신 최혜길이 동지사 겸 세폐사로 임명되어, 부사김수현, 서장관이규로 등과 함께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 그들이 사신의 임무를 띠고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갔는데, 도중에 청나라 칸 홍타지가 병이 심하다는 말을 듣고, 정사최혜길은 미리 상사(喪事)에 필요한 의물(儀物)을 구입해서 갔다. 심양에 도착하고 보니, 정말로 국상(國喪)을 당하게 되었으므로, 미리 도중에 구입한 물건이 있었기 때문에 사신 일행이 그 의물을 사용하여 창졸간에 부족한 일이 없었다. 이때 사람들이 “그가 계문자(季文子)와 같은 깊은 식견이 있다”고 칭찬하였다.(『임하필기』 권18 참고.)『논어(論語)』의 「공야장편(公冶長篇)」에, “노나라 대부(大夫) 계문자(季文子)는 무슨 일을 당하면 세 번 생각하고서 행동한다.” 하였는데, 최혜길이 계문자처럼 깊이 생각하여 사전에 만반의 준비를 다했기 때문이다.

1644년 9월 청나라 태종이 죽고, 그의 어린 아들 세조순치제가 즉위하였는데, 그의 숙부 예친왕도루곤이 ‘8기병’을 이끌고 명나라 북경을 점령하여 명나라를 멸망시키자. 청나라가 뒤따라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사신 최혜길 일행은 동지 때까지 심양에 머물던 있으면서, 심양의 남관(南館)에 있던 형 최명길을 만났으며, 또 질관에서 8년 동안 볼모 생활을 하던 아들 최후량도 만났다. 형제와 부자 세 사람은 함께 한 자리에 만나지 못하였으나, 이국의 하늘 아래에서 슬픔을 달랬다. 청나라가 수도를 연경(燕京: 북경)에 옮겼으므로, 사신 일행은 북경으로 가서 새 수도 연경의 자금성(紫禁城)에서 순치제를 알현하고, 동짓날 하례(賀禮)를 드렸다. 이것이 조선 사신으로서 연경에서 청나라 황제를 알현한 최초의 기록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개풍(開豊) 풍덕(豐德) 광대원(光大院)의 언덕에 있는데, 두 부인을 부묘(祔墓)하였다. 호곡(壺谷)남용익(南龍翼)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호곡집(壺谷集)』 권18 「이조참판 최공혜길 묘갈명(吏曹參判崔公惠吉墓碣銘)」)

첫째부인 함평이씨(咸平李氏)는 관찰사(觀察使)이춘원(李春元)의 딸인데, 2남을 낳았으니, 맏아들 최후정(崔後定)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다음 최후량(崔後亮)은 영의정최명길(崔鳴吉)의 후사(後嗣)가 되어 완릉군(完陵君)에 봉해졌으며 한성부 좌윤을 지냈다. 둘째부인 순흥안씨(順興安氏)는 생원(生員)안온(安溫)의 딸인데, 1남 2녀를 낳았다. 막내아들 최후원(崔後遠)은 교관(敎官)을 지냈고, 두 딸은 참봉(參奉)송이현(宋以鉉), 진사(進士)정윤(鄭鈗)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편)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호곡집(壺谷集)』
  • 『계곡집(谿谷集)』
  • 『동계집(桐溪集)』
  • 『묵재일기(黙齋日記)』
  • 『속잡록(續雜錄)』
  • 『약천집(藥泉集)』
  • 『연도기행(燕途紀行)』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조경일록(朝京日錄)』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오리집(梧里集)』
  • 『창석집(蒼石集)』
  • 『우복집(愚伏集)』
  • 『구원집(九畹集)』
  • 『월당집(月塘集)』
  • 『백강집(白江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동토집(童土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귀계유고(歸溪遺稿)』
  • 『지호집(芝湖集)』
  • 『해좌집(海左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만오집(晩悟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