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주(尹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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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25년(중종 20)∼1569년(선조 2) = 45세.] 조선 중기 명종~선조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지냈다. 자(字)는 경림(景霖)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파주 적성(積城)이다.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첨정(僉正)윤회정(尹懷貞)이고, 어머니 임천 조씨(林川趙氏)는 군자감(軍資監)정(正)조익(趙翊)의 딸이다. 충청도 병마사윤선지(尹先智)의 5촌이다. 남봉(南峯)김홍도(金弘度) 등과 가깝게 지냈다.

명종 시대 활동

1543년(중종 38)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고, 9년 뒤에 1552년(명종 7) 28세의 나이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藝文館)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로 차례로 승진되었는데, 춘추관(春秋館)의 직책을 겸임하였다.[『간이집(簡易集)』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同副承旨尹公墓碣銘)」] 이어서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 · 저작(著作)을 거쳐서, 1555년(명종 10) 3월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전라도 지방을 염찰(廉察)하였다. 그 해 4월 홍문관 박사(博士)가 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을 거쳐 6월에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는데,『명종실록』명종 10년 4월 22일 · 5월 22일 · 6월 12일] 경연관(經筵官)과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그 해 6월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하였으며, 12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대간의 상소(上疏)차자(箚子)는 대부분이 그의 손에 의하여 작성되었는데, 그 내용은 임금에게 정책을 간절하게 건의하는 것들이었다.[『간이집』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

1557년(명종 12) 1월 황해도의 암행어사(暗行御史)에 임명되어, 황해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돌아와서 명종에게 자세히 보고하자,(『명종실록』 명종 12년 1월 20일) 명종이 그를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하였다. 병조 좌랑윤주가 명철하게 업무를 관리하니, 나이 많은 아전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였다.[『간이집』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 윤주는 영민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김홍도 등과 친했는데,[『명종실록』명종 10년 12월 21일] 이들은 날마다 당시 정사(政事)의 득실(得失)에 대해 논의를 하였다. 당시 이들의 과격한 논의는 결국 실권을 잡은 윤원형(尹元衡)의 미움을 사게 되었다. 윤원형은 윤주가 그의 반대파인 이량(李樑)에게 편당(偏黨)한다고 하여, 결국 그해 5월 윤주가 술을 좋아하여 직무를 소홀히 한다고 탄핵하여, 윤주는 병조 좌랑에서 파직당하여,[『명종실록』명종 12년 5월 26일] 경기도 파주 적성(積城)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5, 6년 동안 은거하였다.[『간이집』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

명종이 친정(親政)하고 외척 윤원형의 세력을 억제하자, 윤주도 다시 서용되었다. 1562년(명종 17) 9월 명종은 “전 병조 정랑윤주를 서용하더라도 현직(顯職)에 등용하지 말고 빈자리가 나는 대로 외직(外職)에 보임하라.”(『명종실록』 명종 17년 9월 16일)하였으므로, 영평 현령(永平縣令)에 임명되었다. 그 후 한산 군수(韓山郡守)에 임명되었으나, 미처 부임하기 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 상복을 입고 상례를 끝마치었다. 1565년(명종 20) 성균관 직강(直講)에 임명되었다가,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을 역임하였다. 1566년(명종 21) 12월 성균관 사성(司成)이 되었는데,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 이후 광주 목사(廣州牧使)가 되었는데, 춘추관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간이집』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

선조 시대 활동

1567년(선조 즉위)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고,(『선조실록』 선조 즉위년 10월 23일) 곧 사헌부 집의(執義)로 승진하였다. 그때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가자(加資)되어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가 서생(書生) 출신인 데다가 몸에 병이 있어서 북쪽 변방을 맡게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여 개정이 되었다. 곧 뒤이어 동래 부사(東萊府使)에 임명되었으나, 곧 파직당하여 고향 적성으로 돌아왔다. 1569년(선조 2) 8월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경연의 참찬관(參贊官)에 겸임하였다. 그해 12월 13일 지병이 악화되어 돌아가니, 나이가 45세였다.[『간이집』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

성품과 일화

윤주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간이집』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명민하며, 식견이 높고 고상하였다. 그는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였다.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밖으로 자기를 과시하지 않았으므로, 당시의 뛰어난 인물들이 그와 벗하기를 좋아하였다. 그와 가까운 친구들 김홍도 등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당시의 실권자 소윤 윤원형을 비판하다가, 윤원형의 미움을 받아서 두 사람은 거의 10여 년 동안 벼슬에서 쫓겨나서 은거하였다.

7~8세 어린아이 때부터 비범하고 영민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글을 지을 줄 알게 되어서는 굳이 스승이 이끌어 주고 부축해 줄 필요도 없이 자기 혼자서 학습하여, 날이 갈수록 학업이 진취하였다. 10세 때에 모친상을 당했는데, 마치 어른처럼 슬픔을 극진히 하며 상례(喪禮)를 행하다가, 몸이 몹시 야위었다. 이에 아버지가 혈기(血氣)가 쇠약해질 것을 염려하여 고기를 먹을 것을 권하였으나, 그때마다 빈번히 눈물을 흘리며 한사코 사양하였으므로 마침내 강권하지 못하였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에는 몸이 상할 정도로 슬퍼하며 상례를 행하였고, 장사를 지낸 뒤에는 여묘살이를 하면서 여막(廬幕)을 떠나지 않다가, 병에 걸려서 들것에 실려서 집으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의원의 치료를 받고서 기력을 회복한 뒤에는 처음과 같이 여막으로 돌아가서 다시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는 병이 위독해져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요직에 가까이 몸담고 있는 친지(親知)나 옛 친구 찾아와 위문하기라도 하면, 번번이 시사(時事)를 상의하면서 힘써야 할 일을 말하였고, 개인적인 일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 보니 집안 살림이 아무것도 없어서 장례를 치를 형편이 못 되었으므로,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가까스로 겨우 장례를 마칠 수가 있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松山)에 있는데, 간이(簡易)최립(崔岦)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간이집(簡易集)』 권2 「동부승지 윤공 묘갈명(同副承旨尹公墓碣銘)」] 부인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사헌부 장령정희등(鄭希登)의 딸인데, 아들을 두지 못하였다. 측실 소생의 1남이 있는데, 서출 아들은 윤경남(尹敬男)이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이집(簡易集)』
  • 『견한잡록(遣閑雜錄)』
  • 『사계전서(沙溪全書)』
  • 『미암집(眉巖集)』
  • 『문봉집(文峯集)』
  • 『겸암집(謙菴集)』
  • 『악록집(岳麓集)』
  • 『월사집(月沙集)』
  • 『용주유고(龍洲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