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선지(尹先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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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01년(연산군 7)∼1568년(선조 1) = 68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 활동한 무신. 경상좌도 병마절도사(慶尙左道兵馬節度使)이다. 자는 여회(汝晦)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윤탁(尹倬)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현령(縣令)한사신(韓士信)의 딸이다. 승지(承旨)윤주(尹澍)의 5촌이고, 소론(少論)의 영수 윤증(尹拯)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의 고조부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어릴 때에 글을 읽기를 좋아하지 않고, 말 타고 활 쏘는 무술을 좋아하였다. 1525년(중종 20) 나이 26세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宣傳官)부터 시작하여 형조와 호조의 정랑(正郞)을 거쳐서 사복시(司僕寺)의 판관(判官)과 부정(副正)을 역임하였다. 1544년(중종 39) 상의원(尙衣院)정(正)으로서 국장도감(國葬都監)의 낭관(郎官)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39년 11월 15일) 1552년(명종 7) 6월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으며,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가,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3 「충청병사 윤공선지 묘표(忠清兵使尹公先智墓表)」]

외직으로는 나가서, 영천 군수(永川郡守)에 임명되었다가, 정주 목사(定州牧使)로 승진되었고, 안강 부사(安康府使)로 옮겼다. 그 뒤에 경기도 수군절도사를 거쳐서, 1555년(명종 10) 경상우도 방어사가 되었다가, 1557년(명종 12) 경상좌도 수군 절도사가 되었다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0년 5월 16일, 명종 12년 9월27일] 1563년(명종 18) 10월에 다시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옮겼다가, 경상우도 수군절도사를 거쳐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충청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가, 또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는데, 재임 중에 병에 걸려서 1568년(선조 원년) 10월 16일 충주의 관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8세였다.[『송자대전』 권193 「충청병사 윤공선지 묘표」]

성품과 일화

윤선지는 성품이 삼가고 또한 청렴하여, 부임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윤원형(尹元衡)과는 동서(同壻) 사이로 정의가 있었는데, 윤원형의 전횡이 심해지자 서로 연락을 끊고 찾아가지 않았다. 이에 윤원형이 그를 불렀으나 그가 응하지 않자, 윤원형이 그에게 몸을 굽히고 청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長湍郡) 청평원(淸平院)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93 「충청병사 윤공선지 묘표(忠清兵使尹公先智墓表)」] 두 번 장가들었는데,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 모두 평산 신씨(平山申氏)였다.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장남 윤희(尹曦)는 무과에 급제하여 부사(府使)를 지냈고, 차남 윤돈(尹暾)은 충청도 이산(尼山)에 옮겨가서 은거하였는데, 그의 증손자가 윤순거(尹舜擧) · 윤선거(尹宣擧)다. 외동딸은 이정신(李挺臣)의 처가 되었다. [<비문>]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동원집(東園集)』
  • 『백곡집(栢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