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보(尹碩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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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미상 ~ 1505년(연산군 11) = 65세 전후(추정).]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갑자사화(甲子士禍)>의 화를 입고 유배지에서 죽은 사림파(士林派)의 인물. 자는 자임(子任), 호는 지퇴당(止退堂)이다. 홍문관(弘文館)직제학(直提學)을 지냈고, 두 번 청백리(淸白吏)에 선임되었으며, 증직은 도승지(都承旨)이다. 본관은 칠원(漆原)이고, 거주지는 경기도 풍덕(豊德)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윤사(尹思)이고, 어머니 양성 이씨(陽珹李氏)는 관찰사이맹상(李孟常)의 딸이다. 세종 시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양성당(養性堂)윤지(尹志)의 조카이고, 세종 때 유명한 천문학자 중추원(中樞院)판사(判事)이순지(李純之)의 생질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56년(세조 2)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고, 1472년(성종 3)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1479년(성종 10) 12월 정6품하 승훈랑(承訓郞)으로 승품(陞品)되어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1480년(성종 11) 11월 사간원 정언이던 윤석보는 유자광(柳子光)과 임사홍(任士洪)이 이극돈(李克墩) 등과 붕당(朋黨)을 만들어 전횡한다고 탄핵(彈劾)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성종 11년 11월 11일 · 11월 12일] 이때 우승지임사홍은 파면되어, 성종 후반기에 정권에서 소외되었는데, 임사홍은 그를 탄핵한 윤석보 등 대간(臺諫)의 관료들에게 원한을 품었다.

1481년(성종 12) 1월 한성부(漢城府)에서 경복궁(景福宮)을 임압(臨壓) 곧 지세를 억누르는 형세를 한 서울 주변의 산맥이나 산등성 위에 지은 민가 집 199채와 가묘(家廟) 31채를 철거하려고 하였다. 당시 정언이던 윤석보가 아뢰기를, “철거시킬 집이 너무 많으므로 백성들의 원통함이 적지 않습니다.” 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나도 그것을 알고 있다.” 하였다. 성종이 좌우 측근들에게 의견을 묻자, 지사(知事)강희맹(姜希孟)이 말하기를, “국초(國初)에 지은 집은 헐지 말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그렇지만 그것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이에 사숙재(私淑齋)강희맹이 대답하기를, “서류가 한성부에 있습니다.” 하니 성종이 말하기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라. 만약 그 기한을 넉넉하게 준다면 백성들의 원망이 풀릴 것이다.”라고 하여, 윤석보와 강희맹이 “성상의 하교(下敎)가 지당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481년(성종 12) 4월 사간원 정언윤석보가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평(李枰)과 함께 영의정한명회(韓明澮)를 탄핵하였다. 한명회가 주문사(奏聞使)로 북경(北京)에 가서 환관(宦官)정동(鄭同)의 부탁으로 사사로이 진상품(進上品)을 황제에게 많이 바쳐서 명(明)나라 헌종(憲宗)성화제(成化帝) 환심을 사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성종실록』 성종 12년 4월 30일) 1482년(성종 13) 2월 대간에서 성종이 해동청(海東靑)을 기르고 사냥하는 것을 반대하자, 성종이 언성을 높히기를, “내가 만기(萬機)의 여가에 한두 마리 해동청을 날려서 사냥하는 것이 어찌 정사에 방해가 된다고 하는가?” 하였다. 이에 정언윤석보가 아뢰기를, “신 등은 한두 마리의 해동청 때문에 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해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뒷날 임금들의 완호(玩好)의 조짐을 염려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3년 2월 14일]

1482년(성종 13) 4월 대간에서 사간원과 사헌부의 의견이 다를 때 서로 추문(推問)하게 되어 있었는데, 정언윤석보가 이것을 거절하다가 해임되었다. 사간원 정언이 되어 간관(諫官)으로 활동하다가 2년 5개월 만에 해임되었는데, 『성종실록(成宗實錄)』에는 정언윤석보의 간관 활동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뒤의 관력(官歷)은 실록이나 묘지명(墓誌銘)에 기록이 없으나, 고향 풍덕(豊德)으로 돌아가서 은거한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는 관리(官吏)로서 계속 활동하여, 나중에 종4품으로 승품되었기 때문이다. 1488년(성종 19) 2월 성종이 이조에 전지하기를, “가례도감(嘉禮都監)낭청(郎廳)윤석보 등에게 각각 한 자급(資級)씩을 더하라.” 하였다. 1490년(성종 19) 8월 경상도풍기군수(豊基郡守)에 임명되어,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고 홀로 부임하여 고을을 청렴하게 다스렸다. 그 뒤에 성주부사(星州府使)에 임명되어 가족을 데리고 갔는데, 녹봉(祿俸)만으로 살았으므로 관아의 생활이 항상 곤궁하였지만, 선정(善政)을 베풀어 칭송을 들었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윤석보는 다시 사간원으로 돌아와서 사간(司諫)에 임명되었다. 윤석보는 사간원의 정언과 사간으로서 그 명성을 날렸는데, 성종 시대에는 정언으로서 서슴지 않고 직언(直言)하더라도 성종이 너그럽게 수용하였으나, 연산군 시대에는 사간으로서 임금의 잘못을 직간(直諫)하면, 연산군이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에게 형벌을 내렸다. 더구나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戊午士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두 차례나 겪으면서, 끝내는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1496년(연산군 2) 5월 대간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이지 못한 연산군은 대간의 장무(掌務)를 옥에 가두고 발론(發論)한 자를 색출하려고 하자, 대간이 이에 반대하여 모두 스스로 옥으로 들어갔다. 연산군이 석방하고 직무를 보도록 명하자, 사간윤석보 등이 아뢰기를, “대간은 보통 관직이 아닙니다. 지금 옥에 갇혔다가 복직한다면 조정의 물의(物議)에 어떠하겠습니까. 차라리 사피(辭避)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2년 5월 7일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연산군 2년 5월 8일) 연산군 시대 고향 풍덕(豊德)에 돌아가서 은거하여, 연산군의 학정(虐政)을 피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났을 때, 윤석보는 벼슬에서 물러나서 고향에 머물렀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04년(연산군 10) 4월 은거한 지 6년만에 윤석보는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품(陞品)되어,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또 경연(經筵)시강관(侍講官)에 임명되어 춘추관(春秋館)편수관(編修官)을 겸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5월 임사홍(任士洪)이 연산군의 왕비 신씨(慎氏)의 오빠 신수근(慎守勤)과 손을 잡고,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켰다. 연산군의 생모(生母) 윤씨(尹氏: 제헌왕후)를 폐위(廢位)시킬 때 관련된 대신들과 관료들을 모두 체포하여 혹독하게 심문하고, 능지처참(陵遲處斬)하거나 부관참시(剖棺斬屍)하고, 직접 관련되지 아니한 사람들은 장 1백대, 장 80대 등을 집행하고 유배하였다. 부관참시는 무덤에서 관을 파헤쳐서 송장의 목을 베는 것을 말한다. 윤석보는 일찍이 임사홍의 원한을 샀으므로, 그해 6월 임사홍의 고발로 인하여 직첩(職牒)을 빼앗기고 파직되었으며, 체포당하여 심문을 받으면서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러나 직접 관련이 없었기 때문에 장 80대를 맞고, 황해도 강음현(江陰縣)으로 유배되었다. 유배된 지 1년 만에 1505년(연산군 11) 12월 25일 병으로 유배지에서 돌아갔다.

<갑자사화>와 윤석보

1480년(성종 11) 11월 사간원 정언윤석보는 유자광과 임사홍을 탄핵하기를, “유자광과 임사홍은 붕당을 교결(交結)하여 죄가 사직(社稷)에 관계되므로, 사유(赦宥)를 입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고 하였다. 사유는 죄인을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윤석보는 승지임사홍과 유자광이 이극돈과 결당하여 권력을 전횡하는 것을 공격하여, 임사홍 등이 파면되도록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1년 11월 11일 · 『성종실록』 성종 11년 11월 12일)

원래 성종은 임사홍을 싫어하였으므로, 성종 시대 임사홍은 정계에서 쫓겨나서 오랫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나중에 연산군 시대에 유자광과 임사홍은 연산군을 부추겨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이때 정언윤석보의 주장대로 성종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처형하였다면, 연산군 때 사화(士禍)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1498년(연산군 4) 7월 유자광이 사림파(士林派) 김종직(金宗直) 일파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세조(世祖)를 비난하였다고 무고(誣告)하여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이때 김종직과 그 제자 김일손(金馹孫) 등의 사림파가 대거 숙청되었는데, 이미 죽은 김종직은 부관참시되었으며, 그 제자 김일손과 권오복(權五福) · 권경유(權景裕) · 이목(李穆) · 허반(許盤) 등은 능지처참(陵遲處斬) 당하고, 정여창(鄭汝昌) 등은 유배되었다.

1504년(연산군10) 4월 임사홍의 밀고로 인하여 연산군은 비로소 어머니 윤씨(尹氏)가 폐비(廢妃)된 경위를 자세히 알게 되었다.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켰는데, 성준(成俊)을 비롯하여 이극균(李克均) · 윤필상(尹弼商) · 한치형(韓致亨) · 한명회 · 정창손(鄭昌孫) · 어세겸(魚世謙) · 심회(沈澮) · 이파(李坡) · 김승경(金升卿) · 이세좌(李世佐) · 권주(權柱)를 ‘12간신(奸臣)’이라고 지목하고 윤씨를 폐비한 사건에 책임을 물어서 모두 극형에 처하였다. 그때 성준을 비롯하여 윤필상 · 이극균 · 이세좌 · 권주 5명만 살아 있고, 나머지는 이미 모두 죽고 없었다. 연산군은 살아 있던 영의정성준 등을 군기감(軍器監) 앞에서 능지처참에 처하고 목을 베어 효시(梟示)하였다. 이미 죽은 한명회 · 정창손 등은 부관참시하고, 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1479년(성종 10) 6월 연산군의 생모 윤비를 폐비할 당시 사간원과 사헌부에 재직하면서 성종에게 윤씨의 소행을 비판하고 왕비에서 폐위하도록 주장한 대간의 관료들도 모두 연좌되어 화를 당하였다. 윤석보가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임명된 것이 1479년(성종 10) 12월이었으므로, 윤석보는 윤씨의 폐위 사건과 직접 관련이 없었다고 하여,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갑자사화>는 겉으로는 연산군이 생모 윤씨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극이었으나, 실제로는 임사홍이 성종 때 자기를 정권에서 소외시킨 조정의 대신들과 자기를 탄핵한 대간의 관료들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사적인 원한을 품은 임사홍은 연산군의 처남 신수근과 손을 잡고 연산군을 사주하여 훈구파(勳舊派)의 늙은 대신들과 사림파의 젊은 인재들을 닥치는 대로 고발하여 복수하였다.[『국조기사(國朝耆社)』]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고자질하기를, “윤석보는 성종 때 사간원 정언으로 있으면서 직언한 사람입니다.”고 하였으므로, 1504년(연산군 10) 4월 연산군은 윤석보를 홍문관 직제학에서 파직하고 직첩(職牒)을 거두게 하였다.(『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윤4월 22일)

임사홍 일당은 윤석보를 체포하여 윤비의 폐위와 관련된 죄상을 혹독하게 심문하였다. 심문을 당할 때 당시 대간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그에게 귓속말로 충고하기를, “일이 벌써 오래되었으니, 죽은 대간의 동료들에게 죄를 미룬다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윤석보가 통곡하면서, “나도 이 세상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는데, 어찌 차마 저승에 간 동료들에게 죄를 돌리겠는가? 설령 이로 인하여 내가 죄를 면한다고 하더라도 무슨 낯으로 저승에 돌아가서 죽은 동료들을 보겠는가?” 하였다.[『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권6] 1504년(연산군 10) 6월 연산군은 <갑자사화>에 연루된 죄인들을 문초한 공사(供辭)를 읽어보고 말하기를, “공사를 읽어보니 모두 죽은 사람에게 죄를 미루고 있다. 어찌 재상만이 앞장서서 주장하였다고 하겠는가? 젊은 관료들의 반박을 두려워하여 막지 못하였으니, 또한 그르다.” 하고 앞장서서 주장한 사람은 모두 능지처참하고, 죽은 사람은 부관참시하고, 허물이 적은 사람은 장(杖) 1백대, 또는 장 80대를 집행하여 유배하게 하였다. 윤석보는 윤씨의 폐비 사건에 직접 관련이 없었으므로, 장 80대를 맞고 황해도 강음현으로 유배되었다. 그때 연산군은 승지를 몰래 보내어 결장(決杖)을 제대로 하는지를 반드시 현장을 살펴보게 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0년 6월 19일]

<갑자사화> 때 화를 당한 사람들은 1백여 명이 넘었는데, 지위가 높고 행동이 점잖은 훈구파와 절의를 중시하는 사림파 가운데 당대의 인재라고 할 만한 인물들은 죽음을 면한 자가 드물었다. <무오사화>가 기성 훈구파와 신진 사림파의 정치 투쟁이었다고 한다면, <갑자사화>는 궁중 세력과 훈구 · 사림파 사이의 권력 투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성품과 일화

윤석보는 성품이 청렴하고 깨끗하여 직언을 잘하였다. 관리로서 직책(職責)을 청렴하고 공정하게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서도 살림살이가 끼니를 제대로 잇지 못할 정도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므로 성종 때와 선조 때 두 번씩이나 청백리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또 그가 사간원의 정언으로 있을 때 성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훈구(勳舊) 대신들의 비리와 잘못을 탄핵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1490년(성종 19) 8월 윤석보가 풍기군수로 부임할 때 가족을 데리고 가지 않고 사내종 하나와 계집종 하나만을 데리고 갔다. 고을 수령으로 부임할 때 부인과 아들 · 딸을 데리고 갈 수 있지만, 관가의 비용을 그만큼 소비하기 때문에 윤석보는 일부러 식솔을 데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부인과 자식은 풍덕(豐德)에 있는 본집에 남겨 두었는데, 그 부인 박씨(朴氏)는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배고픔과 추위로 살아갈 수가 없었다. 부인 박씨는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비단옷을 팔아서 1묘(畝: 약 20평 정도)의 밭떼기를 사서 텃밭으로 만들려고 하였다. 윤석보는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서 편지를 보내어 빨리 그 땅을 주인에게 되돌려주게 하고, “옛 사람은 한 자 한 치의 땅을 넓히는 일로써 그 임금을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지금 내가 큰 고을의 군수(郡守)가 되어 나라의 녹(祿)을 먹으면서 토지를 사서 둘 수 있겠소. 백성들과 서로 땅을 팔고 사는 일로써 나에게 죄를 더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리하여 박씨는 마지못하여 그 밭을 주인에게 되돌려주었다고 한다.[『연려실기술』 권6]

그 뒤에 윤석보가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었을 때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였는데, 부인 박씨가 임신 8개월의 몸인데도 말을 타게 하고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였다. 가마를 타면, 가마를 매는 몇 사람의 종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시 사대부 집안에서 남자는 말을 타고 부인은 가마를 타는 것이 관례였다. 부인이 말을 타면, 옷깃이 날리기 때문에 천으로 몸을 감싸서 덮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러므로, 정약용(丁若鏞)은 “조선 초기의 풍습을 살펴보면, 사족(士族)의 부녀자가 ‘말을 탈 때에는 천으로 몸을 감싸서 덮었던 것[羃䍦騎馬]’이 분명하다.”고 하였다.[『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5집] 그때 박씨의 남동생 박중간(朴仲幹)이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있었는데, 성주 관아에서 누나의 살림살이가 매우 빈궁하다는 말을 듣고 소금을 얼마 보내 왔다. 당시 소금은 비싼 생활필수품이었다. 윤석보는 즉시 이것을 처남에게 돌려보내면서 마치 그 소금이 자기 몸을 더럽히는 것처럼 여겼다.[『연려실기술』 권6]

1480년(성종 11) 6월 상산군(商山君)황효원(黃孝源)이 <사육신(死六臣) 사건> 때 연루되어 죽은 이유기(李裕基)의 딸 ‘작은 조이[少斤召史]’를 노비로 하사받아 10여년 간 계집종으로 부리다가 첩(妾)으로 삼았는데, 그녀가 아들을 낳자 적실(嫡室)로 삼고, 두 아들의 서자(庶子) 신분을 적자(嫡子)로 바꾸어 달라고 탄원하였다. 이것은 성종 시대 적서(嫡庶) 구분에 대한 논쟁으로 유명한 사건이다. 황효원은 상주 황씨(尙州黃氏)를 일으킨 세조의 정난공신(靖難功臣)인데, 세조의 왕비 정희대비(貞喜大妃)윤씨(尹氏)의 비호를 받고 있었다. 황효원은 한성부(漢城府)판윤(判尹)으로 있을 때 ‘작은 조이’와 정식으로 혼인하였다는 증서와 증인을 추후하여 만들어 호적 대장에 첨부하였다. 그러나 황효원이 ‘작은 조이’를 첩으로 데리고 살다가 아들을 낳은 뒤에 서류를 만들어 붙인 것이 발각되어, 4부 학당(學堂)에서 그 아들의 입학을 거절하는 등 큰 물의를 일으켰다. 황효원은 1476년(성종 7) 봄에 정난공신 홍윤성(洪允成)이 하사받은 노비를 후실(後室)로 삼은 예를 들어서 거듭 탄원을 하자, 성종은 의정부 대신들에게 이를 의논하였다. 성종이 할머니 정희대비의 하명을 받들어, ‘작은 조이’를 후실로 인정하려고 하자, 대간에서 논박하기를, “황효원은 공신(功臣)이니, 난신(亂臣)의 딸로 아내를 삼을 수 없습니다. 마땅히 첩으로 논하여야 합니다.” 하고 적극 반대하였다. 이때 윤석보 등은 주장하기를, “황효원이 난신의 딸에게 장가든 것이 노비로 급부한 시기에 있었으니, 어찌 성례(成禮)해서 혼인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작은 조이’를 첩으로 논정(論定)하소서.” 하였다.(『성종실록』성종 11년 6월 12일) 정통 유학자였던 윤석보는 적서(嫡庶)를 엄정하게 구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첩의 아들로 태어난 유자광(柳子光)은 서자(庶子) 출신임을 극복하려고 권모술수를 써서 정변을 일으켜서 정권을 잡았으며, 적자(嫡子)가 없었던 황효원은 첩의 아들을 적자(嫡子)로 만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거듭 탄원하여 마침내 성공하였다. 사림파 유학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구파 공신들은 자기들의 이익과 탐욕을 끝없이 추구하였던 것이다.

1481년(성종 12) 4월 사간원 정언윤석보는 대간의 동료와 함께 영의정한명회를 탄핵하였다. 한명회는 세조의 <계유정난(癸酉靖難)>을 계획한 1등 공신으로서 성종의 제 1왕비 공혜왕후(恭惠王后)한씨(韓氏)의 아버지였다. 한명회가 주문사가 되어 명나라 북경에 가서 환관 정동의 요구대로 성화제에게 진상품을 많이 바치고, 황제가 상으로 내려주는 궁각(弓角)을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사람들에게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정동은 조선의 화자(火者) 출신 명나라 환관으로, 조선에 칙사(勅使)로 나오면 온갖 횡포를 부렸던 인물이다. 정언윤석보가 아뢰기를, “한명회가 정동에게 아첨하여 후일의 폐단(弊端)을 만들고 임금의 명령을 욕되게 하였던 것은 그가 오직 재물을 탐하였기 때문일 뿐입니다.” 하니, 성종이 변호하기를, “정동은 사리를 아는 사람이 아니다. 한정승이 궁각을 받아 온 것도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성종실록』 성종 12년 4월 30일) 이때 사림파의 젊은 선비들은 훈구파의 늙은 공신을 싫어하여, 그들의 비리를 탄핵하였다. 훈구파의 원로 공신 한명회도 그 영광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였다. 1474년(성종 5) 작은 딸 공혜왕후는 19세의 나이로 돌아가고,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때에는 이미 죽은 한명회는 부관참시당하였다.

<갑자사화> 때 화를 당하여 윤석보는 황해도 강음현으로 귀양을 가서, 병환이 심해져서 1년만에 돌아갔는데, 그는 자기 몸을 걱정하지 않고 공부를 하지 않는 아들들을 걱정하였다. 그는 병중에 있으면서, 오히려 병을 수발하는 아들들에게 간절히 타이르기를,“내가 옛사람들의 글을 읽고 나라만을 위하고 집안을 생각하지 않다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은 때를 잘못 만난 것뿐이지, 공부한 잘못이 아니다. 너희가 지금 오래도록 글을 읽지 않는데, 이것이 옳은 일이냐.”하고, 아버지의 병 수발로 인하여 공부하지 못하고 있는 아들들을 엄하게 꾸짖었다.[「직제학 윤공 묘지명(直提學尹公墓誌銘)」]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풍덕 오곡동(梧桐谷) 언덕에 있다. 귀록(歸鹿) 조현명(趙顯命)과 쌍계(雙溪)이복원(李福源)이 지은 묘지명이 그들의 문집에 남아 있다.[『귀록집(歸鹿集)』 권50 「직제학 윤공 묘지명(直提學尹公墓誌銘)」, 『쌍계유고(雙溪遺稿)』 권6 「직제학 윤공 묘지명(直提學尹公墓誌銘)」]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 중종 때 도승지(都承旨)로 증직(贈職)되었다. 또 관리 생활을 오래도록 하면서 청렴결백하였기 때문에 이미 성종 때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다. 그러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청백리의 명부가 없어졌으므로, 그의 현손(玄孫) 윤상(尹詳)이 선조에게 상소하여 다시 포양(褒揚)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좌의정이원복이 왕명을 받고 이를 심사하여, 그 명부에 다시 기록하고 특별히 그 자손을 등용하였다.[『연려실기술』 권6]

첫째부인은 일찍이 돌아가서 자녀가 없고 기록도 남아 있지 않았으므로, 『방목(榜目)』에서는 김씨(金氏)라고 하고 묘지명에서는 경주 김씨(慶州金氏)라고 하였으나, 『순암집(順菴集)』에서는 진주 강씨(晉州姜氏)로서 강간(姜稈)의 딸이라고 하였다.[『순암집』 권26] 둘째부인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현감박인효(朴仁孝)의 딸인데, 자녀는 4남 6녀를 낳았다. 박씨는 남편이 <갑자사화>의 화를 당하여 돌아간 뒤에도 10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서 칠원 윤씨 문중에서 가장 번창한 집안으로 만들었고, 1550년(명종 5) 나이 97세에 돌아갔는데, 자손들이 박씨를 남편의 무덤 옆에 묻었다.[『쌍계유고』 권6 「직제학 윤공 묘지명」] 장남 윤중형(尹重亨)은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部將)을 지냈고, 차남 윤문형(尹文亨)은 내섬시(內贍寺) 판관(判官)을 지냈고, 3남 윤덕형(尹德亨)은 진사이고, 4남 윤풍형(尹豊亨)은 문과에 급제하여 감사(監司)를 지냈다. 딸 6명 중에 3녀는 군수(郡守)홍석견(洪碩堅)의 처가 되었고, 5녀는 사간원 정언강숭덕(姜崇德)의 처가 되었고, 6녀는 상원 군수(祥原郡守)안방진(安方進)의 처가 되었다.[『백사집(白沙集)』 권3]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문과방목(文科榜目)』
  • 『청선고(淸選考)』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 『쌍계유고(雙溪遺稿)』
  • 『귀록집(歸鹿集)』
  • 『허백당집(虛白堂集)』
  • 『남계집(藍溪集)』
  • 『백사집(白沙集)』
  • 『순암집(順菴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면우집(俛宇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