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문거(尹文擧)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06년(선조 39)∼1672년(현종 13) = 67세]. 조선 후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이조 참판(參判)을 지냈고,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경(忠敬)이며, 자는 여망(汝望)이고, 호는 석호(石湖)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윤황(尹煌)이고,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는 성혼(成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이조 참판에 추증된 윤창세(尹昌世)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윤돈(尹暾)이다. 소론(小論)의 영수 윤증(尹拯)의 삼촌이기도 하다. 김집(金集)과 조익(趙翼)의 문인이고, 송시열(宋時烈)과 유계(兪棨)와 절친한 사이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30년(인조 8)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1633년(인조 11)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방목(榜目)』]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명재유고(明齋遺稿)』 권35 「숙부참판부군묘표(叔父參判府君墓表)」 이하 「윤문거묘표」로 약칭] 1634년(인조 12)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가 되었고,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를 거쳐 1636년(인조 14)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승진하였으며, 예조 좌랑(左郞)을 거쳐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승정원일기』],[『송자대전(宋子大全)』 권162 「석호윤공신도비명(石湖尹公神道碑銘)」 이하 「윤문거비명」으로 약칭],(『인조실록』 14년 11월 13일)

그해 겨울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10만여 명의 팔기병(八旗兵)을 이끌고 침입하면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생하였다. 인조는 강화도(江華島)로 피난 가려고 하였으나, 적병에 의하여 길이 막히면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윤문거(尹文擧)도 아버지와 함께 어가(御駕)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조선의 군대는 45일 동안 남한산성에서 오랑캐와 싸웠으나 결국 패배하면서 청나라와 화의(和議)를 하게 되었고, 청 태종은 조정의 척화파(斥和派) 강경론자를 잡아서 보내도록 요구하였다. 윤문거의 아버지 윤황은 척화파의 강경론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므로 본인 스스로 청나라에 잡혀가기를 자청하였다. 그러자 아들 윤문거가 아버지를 대신하여 청나라로 가겠다고 상소하였는데, 마침 다른 사람이 잡혀가게 되면서 두 부자가 모두 화를 면하게 되었다.[「윤문거묘표」] 1637년(인조 15) 병자호란이 끝나자, 청나라의 요구로 윤황은 충청도 영동으로 유배되었다. 이때 윤문거의 막냇동생 윤선거(尹宣擧)가 아버지를 따라갔으나, 그는 감히 벼슬에서 물러나지 못하였다.[「윤문거비명」] 인조가 서울로 돌아온 후, 윤문거는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으며, 그 뒤에 사간원 정언을 거쳐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敎理)에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윤문거묘표」]

1638년(인조 16)순검사(巡檢使)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삼남(三南) 지방의 수군(水軍)을 시찰하였다. 그때 아버지 윤황이 병으로 유배에서 풀려나서 고향 충청도 이산(尼山)으로 돌아온 후 그 이듬해에 세상을 떠나자, 윤문거 6형제가 모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으며, 상복을 벗은 후에는 고향에서 가까운 금산(錦山)의 산골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후 윤문거는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윤문거묘표」] 당시 막냇동생 윤선거는 상처(喪妻)한 후 아들 윤증(尹拯) 형제를 데리고 고향에 돌아와서 살고 있었는데,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되면서, 부인 이씨가 자결하였기 때문이었다. 윤선거는 부인과 함께 죽기로 약속하였으나, 남한산성에 있던 아버지 윤황이 부르는 바람에 같이 죽지 못한 것을 항상 괴로워하였다. 이에 윤문거는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윤선거와 그의 아들 윤증을 특별히 돌보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서로 토론하며 지냈다.

1642년(인조 20) 다시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으로 나가기를 자청하였다.(『인조실록』 20년 6월 23일) 그리하여 1643년(인조 21)제천현감(堤川縣監)에 부임하였으며, 1645년(인조 23) 임기를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윤문거묘표」] 그리고 1646년(인조 24) 역적 안익신(安益信) 등을 고발한 공로로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하였다.(『인조실록』 24년 8월 9일),(『인조실록』 24년 9월 9일) 당시 그의 고향에서 안익신 등이 반역을 도모하자, 김충립(金忠立)이 윤문거를 찾아와 이 사실을 고하였다. 윤문거는 이 사실을 급히 친구 송시열에게 통지하여 역적 일당을 체포한 후 처형하도록 하였다. 그는 고발 사실을 숨겼으나 김충립과 함께 공을 다투던 자가 김충립을 모함하는 바람에 윤문거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찾아가서 그 사정을 자세히 밝힐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그에게 상을 내리고 품계를 더해 주었던 것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매우 부끄럽게 여겼는데, 뒤에 반대당에서 이를 강력히 비난하였다.[「윤문거비명」],[「윤문거묘표」]

1648년(인조 26)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윤문거묘표」] 어머니는 이이(李珥)와 함께 서인(西人)의 정신적 지주였던 성혼의 딸이었으므로, 윤문거와 윤선거 형제는 서인의 송시열·송준길(宋浚吉) 등으로부터 대단한 예우를 받았다. 윤선거와 윤증 부자가 송시열과 싸우다가, 소론(少論)노론(老論)으로 분당한 배경도 여기에 있었다.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상복을 벗은 후, 두 번에 걸쳐 승정원 승지(承旨)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윤문거비명」],[「윤문거묘표」] 그러나 이무렵 일본의 정황이 심상치 않아 중외에 위기감이 고조되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윤문거를 특별히 발탁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 2년 8월 3일) 동래부사는 두모포(豆毛浦)의 왜관(倭館)을 관리하는 중요한 관직이었으므로 효종(孝宗)이 일부러 그를 발탁하여 은화를 징수하는 일을 맡긴 것이었으므로 그 또한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하였다. 1651년(효종 2) 동래에 도착한 그는 학교를 수리하고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였다.

그런 가운데 1652년(효종 3) 윤문거는 왜관에서의 교역을 이전에 맺은 <임신약조(壬申約條)> 대로 행할 것을 비변사(備邊司)에 청하였다. 비변사에서 효종에게 이를 보고하고 허가하도록 청하자, 효종 또한 허락하였다. 이에 윤문거가 임신약조의 규정대로 왜관에서 공무역을 행하고, 사무역을 일체 금지시키자, 대관왜(代官倭) 3인이 왜관의 교역을 거부한 채 자기 심복 90여 명을 거느리고 왜관을 뛰쳐나가 부산진(釜山鎭) 앞에서 칼을 뽑아들고 난동을 부렸다. 이튿날 아침에 부산진첨사(釜山鎭僉使)정척(鄭倜)이 그들을 간곡히 타일러 가까스로 왜인들의 소란은 중지되었다. 대관왜의 난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동래부사윤문거도 심문을 받았는데, 의정부에서는 왜관의 폐단을 개혁하려던 윤문거의 뜻을 높이 평가하여 관직만 교체하였다.[「윤문거비명」],[「윤문거묘표」],(『효종실록』 3년 9월 22일)

이에 윤문거는 다시 고향 이산으로 돌아온 후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하려던 뜻을 지켜 나갔다. 그런 가운데 1654년(효종 5) 4월 이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자, 윤문거는 일찍이 아버지 윤황과 함께 척화론을 주장하였다며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서울로 올라오라고 명하였으므로,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효종실록』 5년 4월 21일) 그러나 그는 이해 겨울 갑자기 고질병에 걸려 경기도 별장에서 고향 이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654년(효종 5) 5월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고, 1657년(효종 8) 7월에는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효종실록』 5년 5월 27일),(『효종실록』 8년 7월 5일) 1658년(효종 9) 11월 이조 판서(判書)송시열이 “종2품 관원이 항상 부족하여 걱정이니, 대신들로 하여금 관리를 임명할 때 당상관 중에서 승진시킬만한 자를 가려 뽑게 하소서”하자, 이경여(李敬輿)가 윤문거와 신천익(愼天翊) 등 4명을 천거하였다.(『효종실록』 9년 11월 17일) 그리하여 윤문거는 1659년(효종 10) 3월 홍문관 부제학(副堤學)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효종실록』 10년 3월 18일) 그런 가운데 그해 5월 효종이 승하하자, 윤문거는 병든 몸으로 들것에 실려 동생 윤선거와 함께 서울로 올라와서 대궐문 밖에서 통곡 하였다.[「윤문거묘표」] 그는 효종 시대 10여 년 동안 겨우 한두 번 밖에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으나, 누구보다도 효종의 <북벌계획(北伐計劃>을 적극 지지하며 청나라 정벌을 기대하였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윤문거가 효종의 국장(國葬) 때문에 상경하였는데, 현종은 이때 윤문거를 특별히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윤문거가 이를 사면해 달라고 거듭 간청하였으므로 현종은 마지못하여 이를 허락하고 “내가 강요하지 않을 테니, 아무쪼록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고, 가까운 서울에 머물도록 하라”고 부탁하였다.[「윤문거비명」] 이때 이조 판서송준길이 아뢰기를, “윤문거는 바로 윤황의 아들입니다. 윤황은 인조 때 척화를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윤문거의 형제들이 벼슬하지 않으려는 것은 자기 아비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것입니다. 윤문거가 평소 재상감이라고 하여 선왕(先王)께서도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내린바 있습니다만, 그에게 병이 있어서 직임을 수행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그를 서울에 머물러 있게 하면 국정을 논의할 수 있으므로, 나랏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기 때문이다.(『현종개수실록』 즉위년 11월 1일)

이후 윤문거는 여러 차례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청원하였으나, 현종이 워낙 간절히 만류하는 바람에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였다. 1660년(현종 1) 효종의 소상(小祥)이 끝난 뒤에도 윤문거는 상소를 올려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간청하였으나, 현종이 허락하지 않자, 마침내 상소문만 남겨 두고 고향으로 돌아갔다.(『현종개수실록』 1년 5월 24일) 그 이후 그는 고향에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칩거하였는데, 이 기간 동안 사헌부 대사헌에 15회, 사간원 대사간에 3회, 이조 참판에 5회 임명되었으며, 그 사이사이 경연청(經筵廳) 동지사(同知事)와 세자시강원 빈객(賓客)으로 초빙되기도 하였다. 또 정책을 결정할 때 구언(求言)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언제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였다.(『현종개수실록』 1년 12월 19일),(『현종개수실록』 3년 4월 5일),(『현종개수실록』 3년 4월 20일),(『현종개수실록』 3년 7월 19일),[「윤문거묘표」]

1672년(현종 13) 전염병이 전국에 돌면서, 그의 부인이 먼저 전염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어 윤문거도 전염병으로 고향 이산의 옛집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7세였다.[「윤문거비명」] 그해 12월 이경억이 아뢰기를, “고 참판윤문거가 돌림병에 걸려 죽었는데, 그의 부인도 같이 사망하여 온 집안이 슬픔에 휩싸여 있으므로, 수개월 이내에는 장사지내기가 쉽지 않다고 합니다. 몹시 불쌍한 일입니다”라고 하니, 현종이 충청도에서 상제(喪祭)에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도록 하였다.(『현종개수실록』 13년 12월 30일) 이후 윤문거는 1673년(현종 14) 2월 그의 사위 이선(李選)의 요청으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윤문거비명」]

한편 윤문거는 뛰어난 글씨로 유명하였는데, 특히 해서(楷書)를 잘 썼다. 그의 필법이 정밀하고 장중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옛날 중국의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체가 남아 있다”고 칭찬하였다.[「윤문거비명」]

저서로는 『석호유고(石湖遺稿)』 3권이 남아 있다.

동래부사 윤문거와 대관왜의 소란

1650년(효종 1) 모친의 상복을 벗자, 조정에서 윤문거를 특별히 동래부사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 2년 8월 3일) 이때 일본에서는 동래의 두모포 왜관을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거듭 요청하였으나, 조선에서 오랫동안 이를 묵살하면서 양국 간에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일본의 사송선(使送船)과 교역선은 점차 증가하였으나, 두모포의 선창(船倉)은 너무 비좁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45세의 윤문거가 경륜과 수완을 두루 갖춘 인재라고 하여, 효종이 특별히 윤문거를 발탁하여 동래부사에 임명하였다.(『효종실록』 2년 8월 3일) 두모포 왜관을 관리하는 동래부사가 국가의 외화를 벌어들이는 중요한 자리라고 임금이 일부러 임명하였으므로, 그동안 관직에 나서지 않으려 하였던 윤문거는 감히 피하지 못하고 드디어 부임하였다. 이것은 윤문거가 청나라에 항복한 조선 정부에서는 벼슬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한 자기의 약조를 어기는 일이었으나, 효종이 청나라를 치기 위한 북벌사업의 자금을 마련하는 일이었으므로, 나름대로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윤문거비명」]

1651년(효종 2) 동래부사로 부임한 윤문거는 동래부의 두모포 왜관에서 교역을 감독하는 훈도(訓導)와 두모포 왜관의 동문·서문·남문을 지키는 각 진(鎭)의 해당 진장(鎭將)을 불러서 두모포 왜관의 교역에 대한 문제점을 직접 조사하였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후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두모포 왜관의 각 방(房)에서는 조선의 내상(萊商 : 동래 상인)과 일본의 쓰시마[對馬島] 상인들이 역관을 끼고 훈도의 눈을 피해 비밀히 사무역을 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진의 포구에서는 진장 몰래 잠상(潛商)들이 쓰시마 상인들과 밀무역(密貿易)을 행하며 막대한 세금을 포탈하고 있었다. 왜관에서는 양국이 공무역을 행할 때 조선과 일본 상인으로부터 각각 10%의 세금을 징수하였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일본의 중개 무역을 통하여 막대한 이익을 보았는데, 동래부사는 동래 왜관의 무역을 관장하고 은화를 상세(商稅)로 거두어들이는 중요한 자리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상세가 크게 감소한 것은 동래부사가 왜관의 무역을 철저하게 관리 감독하지 못한 탓이라고 질책하였으나,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로부터 조선 무역을 위임받았던 대마도주(對馬島主)는 세금을 내지 않고 교역할 수 있는 사무역이나 밀무역을 선호한 탓도 있었다.

1652년(효종 3) 윤문거는 비변사에 청하기를, “동래부의 두모포에 왜관을 설치할 때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에 맺은 임신약조가 있으니, 앞으로 두모포 왜관에서 교역할 때 옛날 규정대로 교역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비변사에서 임금에게 이를 보고하고 허가하도록 청하자, 효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비변사를 통하여 효종의 허락을 얻은 윤문거는 관수왜(館守倭)와 공(公) 대관왜 3명을 불러 임신약조의 규정을 분명하게 밝히고 일찍이 양국이 약속한 대로 왜관의 교역을 임신약조의 규정대로 공정하게 시행할 것을 촉구하였다.

대관왜가 대마도주에게 이를 보고하자, 대마도주는 사무역이 줄어드는 것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러자 공 대관왜 3인도 대마도주가 에도[江戶]에 들어가 있으므로, 자기들 마음대로 시행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윤문거가 역관을 시켜 이들에게 규정을 지키도록 강요하자, 공 대관왜 3인이 그 심복 90여 명을 거느리고 왜관의 문을 뛰쳐나와, 몽둥이와 칼을 휘두르며 소동을 벌였다. 왜관의 수문(守門)을 지키던 우리 군졸들이 이들 왜인을 제지하지 못하자, 이들은 곧바로 부산진 본영(本營)으로 달려가 항의 소동을 벌였다. 이튿날 아침에 부산진첨사정척이 그들을 간곡하게 타이르자 비로소 왜관으로 되돌아갔다.(『효종실록』 3년 9월 22일)

윤문거와 정척은 각각 장계를 올려, 왜관의 대관왜가 난동을 부린 사건을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경상도관찰사(慶尙道觀察使)유심(柳淰)이 윤문거와 정척이 사태의 진전에 따라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였다며 죄를 청하였으므로, 효종은 예조에 명하여 의논하게 하였다. 예조에서 훈도와 별좌(別座)를 잡아다가 국문하고, 윤문거와 정척은 의정부에서 죄를 의논하도록 청하자 임금도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성문을 지키던 군졸과 역관들도 서울의 감옥으로 잡아와서 죄를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이때 비변사에서 복계(覆啓)하기를, “부산진첨사정척은 왜인의 난동을 막지도 못했고 미봉하지도 못했으니, 잡아다가 신문하여 법에 따라 죄를 처단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동래부사윤문거는 지금 소란이 일어나게 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의도는 폐단을 개혁하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교체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하니, 추고하소서” 하니, 효종이 그대로 따랐다.(『효종실록』 3년 9월 22일) 이 사건으로 윤문거는 다시 고향 이산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서 은거하려던 뜻을 지킬 수 있었으므로, 오히려 이를 홀가분하게 여겼다.

성품과 일화

윤문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침착하고 온화하여 보는 사람마다 ‘옥 같은 사람[玉人]’이라고 칭송하였다.[「윤문거묘표」] 그의 50여 년 친구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에 보면, “천성이 온화하고 인정이 많으며 겸손하였으므로 자신을 화려하게 내세우지 않아서, 마음속에 간직만 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에 쌓인 것이 충실하고 성대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겉으로 나타났다. 그가 생존했을 때는 사람마다 친애하고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그가 별세한 뒤에는 사람마다 슬퍼하고 사모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라고 하였다.[「윤문거비명」]

또 그의 조카 윤증이 지은 「묘표」를 보면, “그는 타고난 자질이 독실하였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아 내면의 세계에 마음을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보존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몸으로 실천하고 외물을 접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진실한 마음을 근본으로 삼았고, 조금도 가식적인 마음을 가지지 않았다. 신독(愼獨 : 혼자 있을 때 근신하는 것)과 수약(守約 : 약조를 지키는 것)의 두 가지 과제를 나이가 들어서도 게을리 하지 않았으므로, 덕이 높아질수록 예는 더욱 공손하였고, 몸을 낮출수록 도(道)는 더욱 높아져서, 밖에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빛을 발하였다. 덕행과 도량을 하늘로부터 타고났으며, 장중하고 과묵하여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면, 두려운 마음을 가지기도 하지만, 진정으로 남의 아픔을 함께하는 어진 마음은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주었다” 하였다.[「윤문거묘표」] 또한 “그가 과감히 관직을 그만두고 물러나겠다는 한 가지 신조를 지킨 것은 옛사람들이 자기 신조를 지킨 것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할 만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현종개수실록』 졸기]

윤문거는 너그러우면서도 절제가 있었고, 곧으면서도 막히지 않았으며, 겉으로는 화순하였으나 안으로는 엄밀하였고, 사물에 대하여는 보편적이었으나 마음의 분별은 매우 분명하였다. 그는 항상 말하기를, “나는 평생에 사람을 속인 적도 없거니와, 또 남이 나를 속인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하였다. 집안의 관혼상제는 사례(四禮)대로 행하였고, 평소에는 일찍 일어나고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으며, 의관은 반드시 단정히 갖추었고 책상은 깨끗이 정돈하였다. 본래 성품이 기호(嗜好)를 싫어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유교의 경전을 주로 읽었으나, 만년에는 『근사록(近思錄)』과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등 주자(朱子)의 글에 마음을 두어 차분히 글을 읽고 복습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을 처리하는 데 치밀하여 마치 그물의 벼릿줄을 들면 그물의 눈이 따라서 펴지듯 하였다. 큰일을 처리하고 큰 의혹을 결단하는 데 음성과 기색을 움직이지 않고, 항상 정(靜)으로써 동(動)을 제어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경륜과 수완을 갖춘 재상 그릇이다” 하였다. 또 자기의 신념을 지키는 바가 확고하여 금석(金石)처럼 변하지 않았다.[「윤문거비명」]

묘소와 후손

충청도 이산현(尼山縣)의 남쪽 갈산(葛山)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조카 윤증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명재유고』 권35] 원래 그의 50년 친구인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었으나,[「윤문거비명」] 그의 막냇동생 윤선거의 신도비명을 둘러싸고 송시열과 윤증이 <회니시비(懷尼是非)>를 벌이면서 노론과 소론이 갈라지자,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문을 세우지 않다가, 최근에 다시 세웠다. 충청도 연산(連山)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노성(魯城)의 노강서원(魯岡書院), 석성(石城)의 봉호서원(蓬湖書院)에 제향되었다.[『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권18]

부인 평창 이씨(平昌李氏)는 선교랑(宣敎郞)이탁(李琢)의 딸인데, 남편보다 20일 앞서 전염병으로 별세하여 같은 무덤에 안장되었다.[「윤문거묘표」] 자녀는 3남 5녀를 두었다. 장남 윤단(尹搏)은 유일(遺逸)로서 해촌처사(海村處士)라고 일컬었고, 차남 윤원(尹援)은 일찍 죽었으며, 3남 윤윤(尹掄)은 음직으로 수천현감(水川縣監)을 지냈다. 장녀는 참봉(參奉)이순악(李舜岳)의 처가 되었고, 차녀는 현감최세경(崔世慶)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별좌이옹(李顒)의 처가 되었다. 4녀는 사인(士人) 심해(沈楷)의 처가 되었고, 5녀는 친구 유계(兪棨)의 아들인 유명흥(兪命興)에게 시집갔다.[「윤문거비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석호유고(石湖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명재유고(明齋遺稿)』
  • 『교린지(交隣志)』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청음집(淸陰集)』
  • 『포저집(浦渚集)』
  • 『석호유고(石湖遺稿)』
  • 『동춘당집(同春堂集)』
  • 『송곡집(松谷集)』
  • 『창주유고(滄洲遺稿)』
  • 『노서유고(魯西遺稿)』
  • 『구당집(久堂集)』
  • 『정관재집(靜觀齋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