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약조(壬申約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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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2년(중종 7) 조선과 일본 대마도주 사이에 맺은 무역에 관한 조약.

개설

대마도 정벌을 계기로 왜구 문제가 일단락된 뒤 통교왜인(通交倭人)이 증가하자 조선에서는 서계(書契)·도서(圖書)·문인(文引) 등의 왜인 통제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1443년(세종 25)에 대마도주 종정성(宗貞盛)과 계해약조를 체결하여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정약(定約)하는 등 통제를 강화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510년(중종 5) 4월 제포(薺浦)의 항거왜추(恒居倭酋)와 대마도 대관 종성친(宗盛親) 등이 중심이 되어 대마도주의 전면적인 지원 아래 삼포 항거왜인(恒居倭人) 4,000~5,000명을 이끌고 부산을 공격하여 부산포첨사이우증(李友曾)을 살해하고, 제포를 공격하여 제포첨사김세균(金世鈞)을 납치한 뒤 웅천과 동래를 포위하고 공격하는 삼포왜란을 일으켰다. 이에 조정에서는 전 절도사황형(黃衡)을 경상도좌방어사, 전 방어사유담년(柳聃年)을 경상도우방어사로 삼아 군사 5,000여 명을 보내 난을 진압하게 하였다

삼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지만 조선은 272명이 사망하고, 민가 800여 호가 불탔으며, 왜인은 선박 5척이 파손되고 300여 명이 참살되는 피해를 입었다. 조선이 난을 진압한 뒤 삼포를 폐쇄하고 대마도와 통교를 단절하자 조선과 교역을 통해서 식량 등 생활필수품을 조달해 오던 대마도는 많은 어려움에 처하였다. 이에 1511년(중종 6) 4월 족리(足利, [아시카가]) 막부에서는 일본국왕사 붕중(棚中)을 파견하여 대마도와 통교를 재개할 것을 요청하였다.

조선 정부는 군사 방위 시설 증가에 따른 국민의 부담 과중, 북방의 야인 때문에 긴장이 고조되는 시점에서 또 다른 한편에 긴장 요인을 둘 수 없다는 점, 후추·단목(丹木) 등 약용품의 수입 필요성, 조선이 지리적으로 일본과 절교하기 힘들며, 특히 대마도는 생활필수품과 식량 등이 궁핍하여 반드시 왜구의 재발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는 등의 이유를 들어 통교를 재개하는 것에 많은 반대가 있음에도 조건부로 통교를 허용하였다.

조선 정부는 강화 조건으로 삼포왜란의 수괴를 참수하여 보낼 것, 붙잡아 간 조선인 피로(被擄)를 송환할 것, 종성친(宗盛親)이 직접 와서 사죄할 것 등 3가지 조건을 제시하였고, 강화 교섭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국왕사 붕중은 1512년(중종 7) 윤5월에 대마도로 가서 삼포왜란 주모자를 참수하여 바쳤다.

조선에서는 참수해 온 주모자의 진위 여부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만, 형식상으로는 삼포왜란의 수괴를 참수해 보내라는 요구 조건을 이행한 것으로 처리하고, 대마도주의 접대를 이전보다 감하기로 하고 같은 해 8월에 임신약조(壬申約條)를 체결하였다. 3가지 요구 조건 중 피로인의 송환은 임신약조가 체결 된 후에 이행되었으나, 종성친이 ‘직접 와서 사죄하는[親來陳謝]’ 것은 후에 대마도주의 행동을 살피는 것으로 일단락되어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내용

임신약조의 내용은 다음 9개 항목으로 되어 있다. 첫째, 왜인의 삼포 거주를 허락하지 않고 삼포 중 제포만 개항한다. 둘째,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50척에서 25척으로 반감한다. 셋째, 대마도주의 세사미두 200석을 반감해 100석으로 한다. 넷째, 도주의 특송선을 폐지한다. 다섯째, 도주의 아들 및 대관(代官)·수직인(受職人)·수도서인(受圖書人)의 세견선과 세사미를 허락하지 않는다. 여섯째, 도주의 세견선 이외의 배가 가덕도 부근에 와서 정박하면 적선(賊船)으로 간주한다. 일곱째, 심처왜(深處倭)와 수직인·수도서인은 통교 기간과 공로 등을 참작하여 그 수를 가감하고, 통교가 허용된 자에게는 도서를 개급(改給)한다. 여덟째, 대마도에서 제포에 이르는 직항로 외의 지역을 마음대로 항해하는 자는 적왜(賊倭)로 논죄한다. 아홉째, 상경왜인(上京倭人)은 국왕 사신 외에는 도검(刀劍)의 소지를 금한다.

임신약조의 체결로 조선의 왜인 접대 비용은 크게 줄어든 반면 왜인들의 세견선 수는 삼포왜란 이전의 210여 척에서 60여 척(대마도주 30척, 도주 아들 2척, 제추 20여 척, 수직인 10여 척, 소이전 4척, 대내전 수다)으로 크게 줄어들었으며, 교역 규모도 크게 감소하였다. 이에 대마도주는 세견선의 증가, 대마도의 수직인·수도서인의 복권과 증가 등을 요구하면서 대 조선 무역의 이권을 대마도에 집중시키고자 하였다.

변천

임신약조로 대마도와 통교를 재개하였지만 삼포(부산포·제포·염포) 중에서 제포(내이포)만 개항하였다. 1521년(중종 16) 8월에 대마도주의 요청으로 부산포를 추가로 개항하고, 대마도주의 세견선 25척은 부산포 13척, 제포 12척으로 나누어 정박하도록 하였다. 이후에도 대마도주가 계속해서 세견선을 늘려 달라고 요청하자 1523년(중종 18) 9월에는 임신약조의 내용 일부를 개정하여 대마도주의 세견선을 5척 늘려 30척으로 하였다.

1544년(중종 39) 사량진왜변이 일어나 다시 통교가 단절되었다가 3년 뒤인 1547년(명종 2) 정미약조를 체결하여 대마도주의 무역량을 이전보다 더 제한하고 수직인과 수도서인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약조의 내용은 1557년(명종 12)의 정사약조를 거치면서 약간의 변동은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의의

임신약조는 계해약조에 비해서 대마도주의 세견선과 세사미두를 반감하는 등 통교를 대폭 강화한 것으로, 경제적인 요소와 질서 유지라는 측면에서 조선 정부의 강경한 입장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약조의 체결로 세견선 수가 210여 척에서 60여 척으로 줄어듦에 따라 조선의 왜인 접대에 따른 폐단과 비용을 줄일 수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임신약조는 왜인의 대 조선 무역을 제한하고,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임신약조로 왜인의 대조선 무역은 전반적으로 감소하였지만 대조선 통교권이 대마도주에게 집중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으며, 삼포 중 제포만 개항한 것은 조선후기 단일 왜관제의 효시가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조선시대 한일 관계에서 임신약조가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참고문헌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訂交隣志)』
  • 이현종, 『조선전기 대일교섭사연구』, 한국연구원,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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