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수왜(館守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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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倭館)을 총괄하고 두 나라의 외교를 관장 또는 조절하는 왜관의 최고 책임자.

개설

관수의 왜관 상주는 1637년(인조 15) 내야권병위(內野權兵衛, [우치노 곤베에])로부터 시작되었다. 관수의 왜관 상주는 국서개작사건(일본에서는 柳川一件)이 매듭지어진 후 대마도주인 종(宗, [소우])씨를 중심으로 번정기구(藩政機構)가 정비되어 가는 가운데 왜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통솔할 사람이 필요하게 되면서 이루어졌다. 관수는 이후 마지막 관수인 심견육랑(深見六郞, [후카미 로쿠로]) 때까지 105대, 230년간 파견되어 왜관의 주관자로 역할을 수행하였다.

관수제의 성립

관수의 왜관 상주는 1637년(인조 15) 내야권병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측의 사료인 『화관사고(和館事考)』 「관수사고(館守事考)」에는 관수의 상주 배경에 대해서 왜관이 설치된 후로부터 일찍이 주관하는 사람이 없어서 송사(送使)와 대관(代官)·재판(裁判)이 그 일을 맡았는데 1637년에 내야권병위로 하여금 이 일을 맡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변례집요』권1, 「차왜」에 의하면 내야권병위는 본래 일본 표류민 송환을 위한 회사사(回謝使)로 파견된 차왜였다. 그러나 도항 이후 그는 회사사와는 다른 행동을 하였다. 한양 상경을 요청한다든지, 숙배(肅拜)의 방법이나 서계의 문자 개정 등에 관한 7개조의 요구서를 조선에 제출하였으며, 2년이나 왜관에 체류하였다. 1639년(인조 17) 두 번째의 관수 도웅권지개(嶋雄權之介, [시마오 곤노스케: 平知連]) 때부터는 상주로 인정하고 접대를 항례화하게 되었다.

관수의 임기는 원칙적으로 2년이었는데, 일단 대마도로 귀국한 사람이 다시 임명되기도 하였다. 호전뢰모(戶田賴母, [도다 다노모]) 등은 1779년(정조 3)에 70대 관수가 되었는데, 그 뒤로도 74·77·79대를 역임하여 모두 4기에 걸쳐 근무를 하였다.

담당 직무

관수의 담당 직무는 왜관 내 업무의 총괄이지만 만송원종가문고(萬松院宗家文庫)에 전하는 『관수조서(館守條書)』를 보면 조금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그 대략을 정리해 보면 첫째, 왜관 내 규약 준수와 조선과의 통교·무역의 원활한 수행이었다. 왜관에서 발생하는 범죄자에 대한 단속, 왜관 시설의 확충을 위한 교섭에 이르기까지 그 업무는 매우 넓은 범위에 걸쳐 있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왜관 내부의 통제라고 할 수 있다. 왜관 안에서는 무기 등 금수품의 반입 금지를 비롯하여, 밀무역 금지, 각종 의식이나 규례의 준수, 불조심 등 26개 조항에 걸친 ‘벽서(壁書)’라고 하는 관내 규약이 있었다. 새로 왜관에 부임하게 될 관수는 임명되기 전에 대마도에서 이 벽서의 내용을 읽은 다음 법률의 준수를 맹세하게 되었다. 둘째, 한반도나 중국 대륙에 관한 정보 수집과 그 통보였다. 정보의 수집은 막부의 요청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더불어 막부가 왜관을 나가사키와 연결 지어 해외 정보의 수집 경로로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였다. 셋째, 외교 서한의 검사였다. 관수는 서승왜(書僧倭: 東向寺僧)의 보좌를 받아 조선으로부터의 외교문서를 점검하였다. 마지막으로, 관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일기를 작성하는 것이었다. 새로 관수 자리에 임명된 순간부터 임기를 마치고 공무를 후임 관수에게 넘겨준 뒤 왜관을 출항하는 날까지, 그날그날 일어났던 모든 일을 일기에 적어서 기록으로 남겨 두는 작업이었다. 작성된 일기는 그대로 집무 기록으로 왜관에 보관되었다. 관수의 일기는 제목을 『관수일기(館守日記)』라고도 하고, 그냥 줄여 『매일기(每日記)』라고도 부른다. 일본의 국립국회도서관에 총 860책 정도가 보관되어 있는데 현존하는 일기 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은 1687년(숙종 13) 9월 23일 관수길전작우위문(吉田作右衛門, [요시다 사쿠에몽])이 대마도 와니우라 항구를 출발한 날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하한은 1870년(고종 7) 윤10월 5일 104대 관수번봉전개(番縫殿介, [반 누이노스케])가 근무하던 날까지로 되어 있다. 『관수일기』는 왜관의 실태 및 조선후기 한일 관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였다.

의의

관수왜의 출현은 왜관의 역사에서 왜관무역을 활성화하고, 더 나아가서는 왜관의 경제적 발전과 더불어 중세의 항거왜인과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주민들이 왜관에 출현하고 있음을 의미하였다.

참고문헌

  • 『변례집요(邊例集要)』
  • 『통문관지(通文館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다시로가즈이 지음, 정성일 옮김, 『왜관-조선은 왜 일본사람들을 가두었을까?』, 논형, 2003.
  •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