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상(朴泰尙)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636년(인조 14)~1696년(숙종 22) = 61세]. 조선 중기 현종·숙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자는 사행(士行)이고, 호는 만휴(萬休)·존성재(存誠齋)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박세견(朴世堅)이고, 어머니 해주최씨(海州崔氏)는 판관(判官)최연(崔渷)의 딸이다. 증조부는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박동선(朴東善)이고, 조부는 금주군(錦洲君)으로 이조 참판(參判)을 지낸 박정(朴炡)이며, 계부(季父)가 박세당(朴世堂)이다.

현종 · 숙종 시대 활동

1654년(효종 5)에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仕)로 합격하였고, 1671년(현종 12) 11월 문 과(文科) 정시(庭試)에 장원하였다.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이틀 만에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672년(현종 13)에 다시 전적과 병조 낭관(郎官)을 거쳐 이 해 6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고, 8월에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 1673년(현종 14) 2월에 다시 정언이 되었다가 5월에 지평이 되었고, 7월에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다가 북평사(北評事)로 나가 변읍(邊邑) 군민(軍民)에게 해(害)가 되는 오랜 폐단을 방백(方伯)에게 알려 바로 잡게 하였다. 1674년(현종 15) 가을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가 정랑(正郞)에 올랐다.

1675년(숙종 1) 1월에 전라도암행어사(全羅道暗行御史)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3월에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 해 5월에 부수찬(副修撰)을 제수받았는데, 상소하여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논하다가 시휘(時諱)에 저촉되어 면직되었다. 가을에 사예(司藝)에 오른 뒤, 상주목사(尙州牧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76년(숙종 2) 4월에 다시 암행어사로 함경도 지역을 염찰(廉察)하였다. 이 해 가을에 홍주목사(洪州牧使)가 되었는데, 다스림을 평이하게 하였고, 백성들을 가까이하여 아랫사람들의 사정을 이해하는 데 힘썼다. 1677년(숙종 3) 가을에 어버이가 늙었다 하여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678년(숙종 4)에 군자감(軍資監)정(正), 1679년(숙종 5)에 종부시(宗簿寺) 정이 되었다가 다시 사예, 예빈시(禮賓寺) 정, 사복시(司僕寺) 정이 되었다. 이 해 겨울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10월에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였고, 11월에 승지(承旨)가 되었다.

1680년(숙종 6) 3월에 동부승지(同副承旨), 4월에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고, 7월에 다시 승지가 되었다가 10월에 예조 참의, 11월에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1681년(숙종 7) 1월에 다시 이조 참의를 제수받았으나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겪은 그는 붕당을 조성하는 것이 싫어 다섯 차례나 사임하는 상소를 올렸고, 왕이 재차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해 5월에 다시 승지가 되고, 1682년(숙종 8) 9월에 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가 10월에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11월에 대사간이 되었다.

1683년(숙종 9) 봄에 외간상(外艱喪)을 당하였다. 1685년(숙종 11)에 탈상(脫喪)하고 형조 참의, 병조 참의가 되었으며 3월에 다시 대사성이 되었다. 이 해 5월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는데, 재임기간이 겨우 5개월이었지만 공평무사한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해 12월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1686년(숙종 12) 1월에 대사성이 되었다가 대사간이 되었으며, 4월에 다시 이조 참판이 되고, 9월 초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4일 만에 도승지(都承旨) 겸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이 되었으며, 이 해 10월에 이조 참판이 되고 그 뒤 공조 참판·예조 참판·병조 참판을 역임하였다.

1687년(숙종 13) 5월에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는데, 그가 부임하여 백성들의 세금과 부역을 감해 주고, 창곡(倉穀)을 비축하게 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등의 선정을 베풀었다. 1689년(숙종 15) 여름 조정에 돌아와서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가 형조 참판이 되고, 가을에 호조 참판이 되었다. 이 해 겨울에 조위사(弔慰使)로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1690년(숙종 16) 봄에 돌아와 다시 예조 참판이 되었다. 이 해 가을에 강릉부사(江陵府使)가 되었는데, 역시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그가 돌아온 뒤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계부 박세당과 함께 여생을 보내려 하였다.

1694년(숙종 20) <갑술옥사(甲戌獄事)> 이후, 이조 참판 겸 의금부(義禁府) 동지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홍문관 제학, 세자우빈객(世子右賓客)을 거쳐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兩館)의 대제학(大提學)으로 「중궁복위 옥책문(中宮復位玉冊文)」을 찬진하였다. 이 해 7월에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고 경연 동지사·춘추관 동지사를 겸하였으며 12월 말경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1695년(숙종 21) 2월 초에 좌참찬이 되었다가 이 해 2월 중순에 다시 예조 판서 겸 의금부 지사가 되었다. 이 해 4월에 대사헌이 되고, 그 뒤 다시 좌참찬이 되었다가, 8월에 예조 판서, 9월에 공조 판서, 12월에 다시 예조 판서가 되었다. 1696년(숙종 22) 2월에 다시 또 이조 판서가 되어 공평하게 하니 청탁이 행해지지 못하였다. 이때 지병으로 사직하였는데, 이 해 5월 7일 건덕방(建德坊)의 집에서 임종을 맞으니, 향년 61세였다.

성품과 일화

박태상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인품이 담박(淡泊)하고 청백하여 세상의 번잡한 일을 마음에 두지 않고, 곤궁을 견디는 것으로 자기를 단속하여 스스로 행실을 닦았다. 후한 녹을 받는 벼슬을 두루 지냈으나 항상 가난하게 지냈다. 그는 인재를 보는 훌륭한 감식(鑑識)이 있어서 과시(科試)를 맡아서는 인재를 잘 뽑고, 전형(銓衡)을 맡아서는 청탁을 거절하여 한결같이 공도(公道)를 실천하였다. 상신(相臣) 김석주(金錫冑)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사람들은 예(禮)를 아는 선비를 꼽을 때 반드시 임하(林下)를 일컫지만, 내 소견으로는 학식이 넓고 예문(禮文)에 깊은 이로는 박태상보다 나은 이가 없다.” 하였다. 그는 출신은 서인(西人)에 해당되나 편당(偏黨)을 싫어하였으므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에도 다른 서인들에 비하여 관로(官路)가 무난한 편이었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묘소는 양주군(楊州郡) 수락산(水落山) 묘좌원(卯坐原)에 있고, 윤증(尹拯)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부인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조속(趙涑)의 딸인데, 2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필순(朴弼純)이고, 2자는 박필건(朴弼健)이다. 1녀는 신확(申瓁)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이수함(李壽涵)의 처가 되었으며, 3녀는 이병철(李秉哲)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서계집(西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