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순(閔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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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9년(중종14)∼1591년(선조24) = 73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유일 · 학자.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 · 습정(習靜)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경기도 고양(高楊)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郞)민학수(閔鶴壽)이고, 어머니 유씨(柳氏)는 증 병조 참의 유자공(柳自恭)의 딸이다. 성균관 전적(典籍)민량(閔樑)의 손자이고, 좌찬성민제인(閔齊仁)의 8촌이다. 낙봉(駱峰)신광한(申光漢) · 화담(花潭)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신광한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장(文章)을 잘 짓는다고 명성이 났고 향시(鄕試)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부터 과거 공부를 위한 학문을 포기하고, 성리학의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는 데에 몰입하였다. 선조 초기에 효행(孝行)으로 추천되어 효릉(孝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 학문과 덕행을 모두 갖추었다고 하여 전생서(典牲署)주부(主簿)로 임명되었다. 형조 · 공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축서(司畜署)사축(司畜)을 거쳐, 사온서(司醞署) 영(令)에 임명되었다. 1574년(선조7)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는데, 그때 명종 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국상을 당하여, 예관(禮官)들이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여 오사모(烏紗帽) · 흑각대(黑角帶)의 상복 체제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지평민순(閔純)이 상소하여 졸곡(卒哭) 뒤에 송(宋)나라 효종(孝宗)의 예(例)에 따라 흰 의관(衣冠)의 차림으로 정사를 볼 것을 청하자, 선조가 그의 의논을 옳다고 여겨 특별히 따랐다. 그러나 조정의 구신(舊臣)들 대부분은 이를 좋아하지 않았고, 관직 2품 이상의 중신회의에서도『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그는 세상의 일을 오래도록 겪으면서 도학(道學)의 정치를 끝내 시행할 수 없다는 것과 자신의 의지를 끝내 펼 수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벼슬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였다.

1576년(선조9) 용강현령(龍岡縣令)으로 나갔고 이어 청풍군수(淸風郡守)가 되었으며,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나갔으나 오래지 않아 사임하였다. 고향 고양으로 돌아와 향리에서 후진 교육에 힘을 기울여,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 뒤에 연안부사(延安府使) · 성천부사(成川府使) · 인천부사(仁川府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고, 공조 정랑과 종묘서(宗廟署) 영과 군자감(軍資監) · 장악서(掌樂署) · 사도시(司䆃寺) · 사재감(司宰監)첨정(僉正)과 사재감 · 예빈시(禮賓寺)의 정(正)통례원(通禮院)통례(通禮)에 임명되었는데, 각각의 관직이 지닌 의미에 따라 어떤 때에는 부임하고 어떤 때에는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조정에서 교정국(校正局)을 설치하고 중앙과 지방의 유신(儒臣)들을 널리 뽑아서 『소학(小學)』과 ‘사서(四書)’의 음(音)과 해석을 교정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그를 불렀으나, 그는 모두 병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1591년(선조24) 10월 초9일 경기도 고양군 행주리(幸州里)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73세였다.

저서로는 『행촌집(杏村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민순은 서경덕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에게서 마음을 가라앉혀 외물(外物)의 유혹에도 움직이지 않는 ‘주정(主靜)의 설(說)’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자기가 거처하던 서재의 이름을 ‘습정재(習靜齋)’라 하였다. 이후 그는 문하생들에게 “옛날 내가 공부할 때에 마음과 몸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되면, 말을 하는 데 힘이 생기고, 한번 눈으로 스쳐 지나간 글도 모두 암송할 수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주정(主靜)을 잘 할 수 있다면 총명함이 모두 계발되는데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는 평소에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衣冠)을 정제하고 방안에 혼자 단정히 앉아 꼼짝하지 앉아서 명상(冥想)에 잠겼는데, 마치 진흙으로 만든 사람 같았다고 한다.

그는 입신출세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여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거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후학의 교육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는 스승이라고 자처하지 않고 단지 문답만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당시 정국은 사론(士論)이 갈라져서 서로 모함을 일삼았으므로 명유(名儒)나 명사(名士)라 하더라도 비방을 받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민순은 이러한 조짐을 잘 분변하여 조용히 처신하였으므로, 어떤 소인도 감히 그를 비방하지 못하였다. 그는 가업(家業)이 궁색하여도 온화하고 여유 있게 처신하였고, 손님이 찾아오면 가난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였다. 간혹 술을 마시고 취하여도 말과 행동이 평상의 법도를 잃지 않았다.

묘소와 제자

묘소는 경기도 고양군 행주리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그의 제자 홍가신(洪可臣)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그의 문하에서 홍가신 · 한백겸(韓百謙) · 홍치상(洪致祥) 등이 배출되었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과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첫째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청풍부령(淸風副令)이철옥(李哲玉)의 딸이고, 둘째 부인 평양조씨(平壤趙氏)는 충의위(忠義衛)조감(趙瑊)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 민경남(閔敬男)은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간이집(簡易集)』
  • 『계곡집(谿谷集)』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석담일기(石潭日記)』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여헌집(旅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하곡집(霞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