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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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사안에 관한 해석이나 견해를 유연하게 서술하는 한문 문체.

개설

설(說)은 전국시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의견을 말하던 책사(策士)들의 ‘유세(遊說)’에서 비롯되었으며, 명칭은 『주역(周易)』의 설괘(說卦)에서 유래하였다. 당나라 때 고문운동의 와중에 정식 산문 문체로 성립되었다. 『문체명변(文體明辨)』에 수록된, 위(魏)나라 시인 조식(曹植)의 「촉루설(髑髏說)」 등 7편이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이다. ‘설’은 직서(直敍)로 이루어진 작품과, 우언(寓言)으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구분된다. 직서는 자신의 의견과 주장을 곧바로 전개하는 것으로, ‘논(論)’과 다르지 않다. 한유의 「사설(師說)」·「잡설(雜說)」이 여기에 속하는 최초의 작품이다. 그에 비해 우언은 허구적인 상황으로부터 유추된 결론에 근거하여 새 의론을 전개하는 것으로, 서사성 및 문학성이 높다. 유종원의 「포사자설(捕蛇者說)」·「승부설(乘桴說)」이 대표적이다. ‘설’은 일반 논변문에 비해 내용과 체재가 다양한 잡문(雜文)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형식도 자유로운 편이어서, 논변류 산문 중에서 작품 수가 가장 많다.

내용 및 특징

문헌에 기록된 우리나라 최초의 ‘설’은 이규보의 작품으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경설(鏡說)」·「주뢰설(舟賂說)」 등 12편이 실려 있다. 고려시대 말기의 학자인 이곡(李穀)은 최초의 명자설(名字說)인 「경부설(敬夫說)」이나 호설(號說)인 「내옹설(乃翁說)」을 비롯해, 잘못된 풍속과 관리의 비리를 풍자한 「시사설(市肆說)」 등 8편의 작품을 남겼다. 조선시대 초기의 문인인 강희맹은 「훈자오설(訓子五說)」에서 다섯 토막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통해 자손을 훈계하고자 하였다. 성현의 「타농설(惰農說)」과 「흑우설(黑牛說)」은 각각 게으른 농부를 질타하고, 관리와 백성들 사이에 뇌물이 오가는 폐해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설’이 도입되어 창작되기 시작한 고려시대 후기에서 조선시대 전기까지에는 우언을 통해 인정세태를 비판하거나 풍자하는 작품이 많았다.

그에 비해 중기에는 성리학설, 경설, 예설이 많이 창작되었다. 서경덕의 「이기설(理氣說)」을 비롯한 3편의 성리학설이 나온 뒤, 이황은 「태극도설(太極圖說)」·「심통성정도설(心通性情圖說)」을, 신흠은 「불가경의설(佛家經義說)」·「도가경의설(道家經義說)」·「독역설(讀易說)」 등을 남겼다. 기대승의 「고봉상퇴계사단칠정설(高峯上退溪四端七情說)」 등 7편의 작품과, 이이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극기복례설(克己復禮說)」·「논사칠설(論四七說)」 등도 같은 맥락에서 거론할 수 있는 작품이다.

조선시대 후기의 학자인 정약용은 「애체출화도설(靉靆出火圖說)」·「칠실관화설(漆室觀畵說)」·「자설(字說)」·「의설(醫說)」 등 19편의 설 작품을 남겼다. 단일 작가의 작품으로는 편수가 많을 뿐 아니라 내용도 다채롭다. 현실 비판과 권계를 다룬 작품도 있지만, 과학 이론과 신기술의 이치를 설명하는 실용적인 내용이 많다. 18~19세기의 달라진 학문 풍토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례로, 연작(連作) 구성과 도설(圖說)의 활용 등 형식상의 새로운 시도도 돋보인다. 한편, 19세기에도 김매순의 「작치설(鵲鴟說)」, 이건창의 「응설(應說)」 등 다양한 설 작품이 창작되었다.

참고문헌

  • 민병수, 『한국한문학개론』, 태학사, 1997.
  • 양현승, 『한국 ‘설’문학 연구』, 박이정, 2001.
  • 박철완, 「다산 ‘설’체 산문의 서술양상과 특징 고찰」, 『청람어문교육학』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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