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徐渻)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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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서성 |
한글표제 | 서성 |
한자표제 | 徐渻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인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현기(玄紀) |
호 | 약봉(藥峯) |
시호 | 충숙(忠肅)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8(명종13) |
사망 | 1631(인조9) 4월 18일 |
본관 | 달성(達城)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포천(抱川) 설운리(雪雲里)의 언덕 |
증조부 | 서팽소(徐彭召) |
조부 | 서고(徐固) |
부 | 서해(徐嶰) |
모_외조 | 고성이씨(固城李氏): 이고(李股)의 딸, 이원(李原)의 후손 |
처_장인 | 여산송씨(礪山宋氏): 송녕(宋寧)의 딸, 송일(宋軼)의 증손 →(자녀)7남 4녀 |
자녀 | (1자)서경우(徐景雨) (2자)서경수(徐景需) (3자)서경빈(徐景霦) (4자)서경주(徐景霌): 달성위(達城尉) |
저술문집 | 『약봉집(藥峯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서성(徐渻) |
총론
[1558(명종13)∼1631(인조9) = 74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에 활동한 문신.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이다. 본관은 달성(達成),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서해(徐嶰)이고, 어머니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목사(牧使)송녕(宋寧)의 딸이다. 참의(參議)서고(徐固)의 손자이고, 우의정서경우(徐景雨) ·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아버지다. 율곡(栗谷)이이(李珥) · 구봉(龜峯)송익필(宋翼弼)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6년(선조19) 알성시(謁聖詩) 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권지(權知)학유(學諭)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에 들어가서 검열(檢閱) · 대교(待敎) · 봉교(奉敎)로 승진되었고, 성균관 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 감찰(監察)이 되었으며, 예조 ·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호소사(號召使)황정욱(黃廷彧)의 요청으로 그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함경도 지방으로 갔다가 회령(會寧)에서 미리 와 있던 임해군(臨海君) · 순화군(順和君) 두 왕자와 합류하였다. 그러나 회령 주민 국경인(鞠景仁) 등이 모반하여 그들을 모조리 결박하여 왜적에게 넘기는 바람에 일행은 모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홀로 계교를 써서 탈출하였다. 그는 현지에서 군사를 일으켜 함경도 평사(評事)정문부(鄭文孚)를 도와 모반자 국경인 등을 잡아 죽이고 연달아 함경도의 왜적을 격파하자, 행재소(行在所)의 선조가 그를 불러 격려하였다. 1593년(선조26)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공조 · 병조의 정랑을 거쳐 성균관 직강(直講)이 되어, 명나라 제독(提督)유정(劉綎)을 접대하였다. 1594년(선조27) 병조 정랑에 임명되어, 전쟁 중에 감군(監軍)의 책임을 맡아서 군대의 숫자와 군량미 등을 총괄적으로 관리하였다. 이는 왕이 그를 신임하여 전쟁 중 군사 실무 책임을 맡겼기 때문이다. 1594년(선조27) 순안어사(巡按御史)에 임명되어 삼남(三南) 지방을 순찰하고, 선조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 제용감(濟用監)정(正)에 승진되었다가 전쟁 중에 경상도관찰사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대간(臺諫)에서 서성이 경력이 적고 인망도 미흡해 적임자가 아니라 하니, 선조는 그를 내섬시(內贍寺)정(正)에 임명하였다가 1595년(선조28) 경상도를 좌우도(左右道)로 나눌 때 서성을 경상우도관찰사로 임명하였다.
1596년(선조29)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좌부승지로 승진하였고, 병조 참의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 · 승문원(承文院)의 부제조(副提調)를 겸임하였으며, 특별히 강화부사(江華府使)에 임명되었다가,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강원도관찰사에 바꾸어 임명되었다. 1598년(선조31) 병조 참지 · 호조 참판을 거쳐, 1599년(선조32) 함경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돌아와서, 1601년(선조34)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 그때 경연(經筵)에서 성혼(成渾)과 정철(鄭澈)을 헐뜯는 정인홍(鄭仁弘)을 엄중하게 비판하였다. 명나라 조사(詔使)고천준(顧天峻) · 최정건(崔廷健) 등이 왔을 때 도승지로서 그들을 접대하여 시종 예의를 잃지 않았으므로, 칭찬을 받았다. 특별히 한성부 판윤(判尹)으로 승진하고, 비변사와 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의 직임을 겸임하였다. 1603년(선조36) 형조 판서로 전임되었다가,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때 북방 여진족 홀라온(忽刺溫)이 갑자기 국경을 침입하니 서성이 그들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는데, 병사(兵使)김종득(金宗得)이 그들을 토벌하다가 패배하여 군사를 후퇴시키자, 그 책임을 지고 파직되었다. 1605년(선조38)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돌아와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의금부 지사를 겸임하였다. 1607년(선조40)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임기가 차서 돌아온 후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1608년(선조41) 2월에 선조가 임종할 때 그가 신임하던 일곱 사람의 측근 신하를 불러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하였다. 이때의 일곱 신하가 이른바 ‘유교(遺敎: 유명)를 받은 7신(臣)’으로, 서성을 비롯하여 유영경(柳永慶) · 한응인(韓應寅) · 신흠(申欽) · 한준겸(韓浚謙) · 박동량(朴東亮) · 허성(許筬)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서성은 의정부 좌참찬에 임명되고, 산릉도감(山陵都監) 제조(提調)가 되었으나, 산릉의 병풍석이 갈라진 곳이 많았기 때문에 파직되었다. 1609년(광해군1)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이듬해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가 되었다. 1613년(광해군5)에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영창대군과 그 외조부 김제남(金悌男)이 죽음을 당할 때 ‘유교를 받은 7신’의 하나로 지목되어 체포된 후 혹독한 신문을 받고 단양(丹陽)에 유배되었다. 단양에서 영해(寧海)로, 또 원주(原州)로 옮기면서 유배지에서 11년을 보냈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명나라 사신 접대 비용으로 나라가 곤란했을 때, 나라에 은을 바쳐 그가 유배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기용되어 형조 판서가 되었고,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어 경연 지사를 겸임하였다. 의정부 우참찬에 임명되어 국청(鞫廳)에서 북인 정인홍 일당을 다스렸는데, 그 포상으로 가자(加資)되었다.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인조가 서성 등에게 자전(慈殿: 인목대비)과 중전(中殿)을 호종(扈從)하도록 명하였는데, 어가(御駕)가 천안(天安)에 이르렀을 때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반란이 평정되자, 서성의 호종에 대하여 자전의 평판이 좋았으므로, 두 직계를 올려서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판서로 옮겼다. 1625년(인조3)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춘추관 지사를 겸임하였고, 이듬해 종1품하 숭정대부(崇政大夫)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어, 경연 동지사를 겸임하였으며 관상감(觀象監) 제조 · 우참찬에 임명되었다.
1627년(인조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다시 자전을 모시고 강화도로 피난 갔다 왔다. 이듬해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어, 역옥(逆獄)을 다스리고 종1품상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승진하였다. 1628년(인조6)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의금부 지사에 전임되었다. 1630년(인조8) 국장도감(國葬都監) 당상(堂上)이 되었으나, 갑자기 병이 나서 휴가를 청하자 인조가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을 치료하고 약재를 보내주었다. 1631년(인조9) 4월 18일 노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74세였다.
그는 학문을 즐겨 이인기(李麟奇) · 이호민(李好閔) · 이귀(李貴) 등과 ‘남지기로회(南池耆老會)’를 만들어 항상 연못가에 모여서 역학(易學)을 토론하고, 저술도 남겼고,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저서로는『약봉집(藥峯集)』 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풍채가 준수하고, 수염이 아름다웠는데, 눈빛은 사람을 쏘아 보듯 빛났다. 성품은 강건하여 누구도 빼앗지 못할 기개가 있었는데, 어떤 일이 옳다고 여기면 굳게 믿고서 실행하였으며, 자신을 굽혀서 남을 따르지 않았다. 평생에 일을 가지고 남에게 부탁도 하지 않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부탁도 받지 않았다. 그는 독서를 좋아하여 읽지 않은 책이 없었는데, 『주역(周易)』의 역리(易理)를 강론하는 데 더욱 힘써서 체득한 바가 많았으므로, 유학자들이 그의 학문이 정밀하고 심오하다고 존경하였다. 그는 생활을 검약하게 하고 화려한 옷을 입지 않았으며, 죽을 때에는 자제들에게 자기 장례를 후하게 치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묘소와 제향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묘소는 경기도 포천(抱川) 설운리(雪雲里)의 언덕에 있고, 부인과 합장하였는데,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신도비문(神道碑文)이 남아 있다. 부인 여산송씨(礪山宋氏)는 목사송녕(宋寧)의 딸인데, 자녀는 7남 4녀를 두었다. 장남 서경우는 우의정을, 차남 서경수(徐景需)는 전첨(典籤)을, 3남 서경빈(徐景霦)은 현감을 지냈고, 4남 서경주는 선조의 부마 달성위이다. 인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대구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제향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재사초(寄齋史草)』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약천집(藥泉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일사기문(逸史記聞)』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