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권(沈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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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3년(인조 21)~1697년(숙종 23) = 55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자는 성가(聖可),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심희세(沈凞世)이고, 어머니는 밀양 박씨(密陽朴氏)박안정(朴安鼎)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의정심열(沈悅)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성천부사(成川府使)를 지낸 심예겸(沈禮謙)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일하다가 천거되어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방목(榜目)』] 이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을 거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등을 역임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0년 3월 8일, 숙종 12년 12월 21일]

한편 1685년(숙종 11) 한림원 학유(學諭)김성대(金盛大) 등이 팔도에 통문을 돌려 윤증(尹拯)을 모함하자 이것이 옳지 못하다고 여긴 심권(沈權)은 관료(館僚)들과 함께 김성대의 처벌을 청하였다. 이에 이진안(李震顔)이라는 자가 투소(投疏)하여 김성대를 구원하려 하자 심권이 소를 올려 그것을 비판하였다.[『숙종실록』숙종 11년 2월 4일,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숙종 11년 2월 6일]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南人)이 집권하게 되자, 서인(西人)인 조태구(趙泰耉)와 이징명(李徵明), 조형기(趙亨期) 등과 함께 남해에 유배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남인이 실각하면서 풀려났다.[『숙종실록』숙종 20년 9월 24일] 이후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교리(校理), 사간원 헌납(獻納), 이조 좌랑(佐郞)을 거쳐 지제교(知製敎)문학(文學)을 겸하였다.[『숙종실록』숙종 20년 9월 24일, 숙종 20년 12월 26일, 숙종 21년 7월 8일, 숙종 21년 7월 12일] 다시 의정부 사인(舍人)에서 홍문관 응교(應敎)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 및 사헌부 집의(執義) 등을 거쳐 1696년(숙종 22) 승지(承旨)와 병조 참지(參知), 예조 참의(參議)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1년 11월 6일, 숙종 22년 2월 10일, 숙종 22년 4월 21일, 숙종 22년 6월 16일, 숙종 22년 8월 23일] 그리고 그해 4월 손자인 심호(沈浩)의 딸이 왕세자빈으로 간택되었는데, 훗날 경종(景宗)의 비인 단의왕후(端懿王后)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2년 4월 8일] 한편 1697년(숙종 23)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가, 그해 4월 15일 갑자기 발생한 병으로 사망하였으니, 향년 55세였다.[『숙종실록』숙종 23년 1월 7일, 숙종 23년 4월 19일]

성품과 일화

심권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풍모와 몸가짐이 침착하고 무게가 있었으며 기상은 온화하고 맑아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말할 때 정성스러움이 있었다. 안으로는 지조를 지켜 옳지 못한 일로 도리를 저버리지 않았으며, 성품이 따뜻하고 후하여 사람을 해하는 일은 참지 못하였다. 조정에서 의논할 때는 오로지 공평하고 부드럽게 하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기를 잘해, 비록 그것으로 비방을 받아도 후회하지 않았으며 옳고 그른 것만을 분별하였다. 세상의 도리에 대해서는 굽은 것을 바로잡고 간사한 것을 고하며 시세(時勢)와 이해(利害)로 뜻을 삼지 않았다. 왕실의 외척이 되어서는 순순히 스스로를 삼가며 두려워하고 조심스러워하기에 더욱 애쓰니 진신(搢紳)들이 그를 칭송하였다.[『심권묘갈명(沈權墓碣銘)』]

또한 심권은 정사를 함에 있어서 부서(簿書)가 복잡하게 뒤섞인 것에 대해 번거롭게 하지 않고도 깨끗하게 처리하며 간명하게 일을 거행하여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게 하였다. 연기현(燕岐縣)에 있는 읍에 억울한 옥사가 있었는데 이상(李翔)이 대사헌이 되어 자기가 증거를 만들어 힘으로 밀어붙였다. 이에 안찰사(按察使)가 심권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사실을 조사하게 하자 옥리(獄吏)가 자백을 하였으나, 심권은 이상에게 포섭 당한 옥졸들을 거칠게 다루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관대함을 칭찬하였다.[『심권묘갈명』]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님을 봉양함에 늘 즐겁고 정성을 다하였으며, 맏형을 섬김에는 엄부(嚴父)를 대하듯이 하였으므로 그 형이 항상 이르기를, “효자의 깊은 애정이 있는 자도 어찌 이보다 더 잘하겠는가?” 하였다. 누이와 아우와 더불어 분가(分家)할 때는 자신이 황폐한 토지를 차지하였으며, 늙어 쇠약한 자나 서족(庶族)의 소원하였던 형제까지도 심권에게 의지하여 먹고 입으며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많았다.[『심권묘갈명』]

묘소와 후손

심권의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에 있으며, 최석정(崔錫鼎)이 작성한 묘갈명이 남아있다.[『심권묘갈명』]

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는 이만웅(李萬雄)의 딸로 1녀를 낳았다. 딸은 판관(判官)조태수(趙泰壽)에게 시집을 보냈고, 첨추(僉樞)인 맏형의 둘째 아들 심봉서(沈鳳瑞)를 양자로 삼았다. 심봉서는 두 아들 심호(沈浩)와 심수(沈洙)를 두었는데, 심호의 맏딸이 경종의 비인 단의왕후이다.[『심권묘갈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사마방목(司馬榜目)』
  • 『농암집(農巖集)』
  • 『명곡집(明谷集)』
  • 『심권묘갈명(沈權墓碣銘)』
  • 『약천집(藥泉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