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가(分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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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차남 이하가 결혼 후에 부모의 집으로부터 독립하는 살림.

개설

친족 구조에서 직계 가족은 분가 제도를 수반한다. 장남이 부모의 집을 계승하여 이루는 집을 본가 즉 큰집이라고 하고, 차남 이하가 결혼 후에 부모의 집에서 독립하여 이루는 집을 분가 즉 작은집이라고 한다(『세종실록』 21년 4월 25일).

분가에는 시기와 상속이 문제되는데, 상속은 생산 수단인 토지와 노비의 일부를 부모에게 물려받는 것으로, 관행에 의하면 토지와 노비 외에도 생활할 거처를 부모가 정하여 주었다고 한다. 분가의 시기는 지방에 따라 다르겠으나 일반적으로 차남 이하는 10여 년간 부모와 동거하다가 분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경우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것이었고, 여유가 없는 경우는 분가가 더 빠른 시기에 이루어졌고 재산 분배 역시 매우 미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분가는 고려와 조선 모든 시기에 이루어졌지만 그 양태는 달랐다. 분가의 양태는 그 시대 풍속과 맞물려 있어 이른바 가계 계승 의식과 결혼 풍속, 재산과 제사상속 등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양측(兩側)적 친족 의식과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른 후 일정 기간 신부 집에서 사는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 딸을 포함한 자녀가 돌아가며 제사 지내는 윤회봉사(輪回奉祀), 제사 지내 줄 직계 자손이 없는 경우 외손이 대신 제사 지내는 외손봉사(外孫奉祀), 균분(均分) 상속 등의 생활 풍속이 분가의 전제가 된다. 즉 대개 처가에 함께 살다가 분가하게 되고,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의 균분 상속이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분가는 좀 더 용이하였다. 또한 불교와 친연(親緣)적인 윤회봉사의 관행에서 분가 이후에도 제사를 중심으로 친족 간의 관계를 유지하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부계 중심의 친족 의식과 신부를 신랑 집에 맞이해 들이는 친영례(親迎禮), 장자(長子) 중심의 제사상속과 재산상속이 분가의 전제가 되었다(『중종실록』 11년 1월 25일). 즉 분가는 본가와 가까이 위치함으로써 동족 마을이 형성되었고, 장자 중심의 상속제가 정착되면서 본가는 종가로서 입지를 가지게 되며 분가는 본가를 중심으로 결속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중종실록』 35년 3월 4일).

변천

분가에는 재산상속이 수반되었다. 재산상속의 형태는 남녀 균분 상속에서 남녀 차등 상속으로, 다시 장자 중심의 상속으로 그 유형이 변하였다. 이러한 상속 형태의 변화는 고려시대에서 조선전기, 조선후기로 이어지는 종적인 시대 변화의 산물이다.

조선후기에는 장자 중심의 제사·재산상속이 보편화되었고, 차남 이하의 재산상속은 상대적으로 축소되어 갔다. 이로써 본가·종가의 위상은 한층 강화되었으며 차남 이하의 분가는 한층 열악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서민층의 경우 분가는 대부분 곁방살이 형태였을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는 사회적 변화를 수반하였다. 비록 분가는 경제적·사회적으로 독립된 개체로서의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만, 이른바 집안의 격식을 의미하는 가격(家格)은 본가·종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분가는 본가·종가의 가격에 편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풍속으로 분가와 본가의 관계는 한층 돈목(敦睦)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분가는 본가를 위호(衛護)하는 생활을 삶의 표상으로 가지게 되었다. 결국 종가와 본가는 친족 관계를 넘어서는 문중 조직에서도 한층 입지가 강화되면서 그 조직의 구심점 역할을 이행하였다.

참고문헌

  • 이광규, 『한국 가족의 구조 분석』, 일지사, 1975.
  • 노명호, 「고려시대의 분가 규정과 단정호(單丁戶)」, 『역사학보』172, 2001.
  • 문숙자, 「조선시대 분재(分財) 문기와 명대(明代)의 분가 문서 : 근세 한국과 중국의 재산 분할 관행 및 문서 비교」, 『고문서연구』29, 2006.
  • 여중철, 「한국 산간 부락에서의 분가와 재산 상속」, 『한국학보』15,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