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趙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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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4년(성종5)∼1547년(명종2) = 74세]. 조선 중기 연산군∼명종 때의 문신. 중국어와 이문(吏文)에 능통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자는 익지(翊之)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조원경(趙元卿)이고, 어머니 평산신씨(平山申氏)는 호군(護軍)신인로(申仁老)의 딸이다. 대사헌민휘(閔暉)의 사위이고, 승지조원(趙瑗)의 조부이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04년(연산군10)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兵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정자(權知正字)에 보임되었다. 이때 부친상을 당하였는데, 우연히 사복시(司僕寺)에 갔다가 관원으로부터 술과 소찬(素饌)의 접대를 받았다. 조익은 이 접대로 술에 취하자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 좋은 고기를 가지고 오라.”라고 말했다. 연산군 때에 만들어진 상기를 단축하는 법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이 일은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중종 시대에 그의 벼슬길을 줄곧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승문원의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정자(正字)로 승진하던 1508년(중종3) 대간(臺諫)에서 그가 상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개차(改差)하기를 청하였던 것이다. 그 뒤에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전임되었다가, 성균관 박사(博士)를 거쳐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던 1514년(중종9)에도 대간에서 “전적조익은 부친상을 당하여 행동이 이미 일그러졌으니, 어찌 사표(師表)에 적합하겠습니까.” 라고 하였고, 이에 중종이 그를 파면하였다. 그때 승문원 제조(提調)가 중국어와 이문에 능통한 그를 승문원에 유임(留任)시켜 달라고 요청하여 승문원 검교(檢校)에 임명될 수 있었다.

승문원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사지서(司紙署) · 중추부(中樞府)도사(都事)를 거쳐, 사온서(司醞署)영(令)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사섬시(司贍寺)첨정(僉正)·봉상시(奉常寺) 첨정 · 군기시(軍器寺) 첨정을 거쳐서,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 · 봉상시(奉常寺) 부정으로 승진하고, 예빈시(禮賓寺) 정(正) · 제용감(濟用監) 정 · 사옹원(司饔院) 정 · 선공감(繕工監) 정 · 사재감(司宰監) 정 · 내섬시(內贍寺) 정 · 군자감(軍資監) 정을 역임하였다. 1528년(중종23) 사옹원 정에 임명되었을 때와 1529년(중종24) 예빈시(禮賓寺)정(正)에 임명되었을 때에도 사헌부에서 그를 탄핵하였다. 이어 1542년(중종37)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역시 사헌부에서 “조익은 소행이 비루하여 사표에 합당하지 못하니 체직하소서.”라고 탄핵하였고, 중종은 그를 파면하였다. 결국 그는 벼슬을 단념하고 한가롭게 지내다가 1547년(명종2) 병으로 죽으니, 춘추가 74세였다.

승문원의 이문 활동

조익은 중국어에 능통하여 당시 중국의 외교문서 표전문(表箋文)에 쓰이던 이문(吏文)을 해독할 수 있었다. 이문은 중국 황실에서 쓰던 구어(口語)인데, 황제의 말을 함부로 문어체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여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에 구어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외교 문서를 다루는 승문원에서 젊은 문신(文臣)에게 이문과 중국어를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업무에 능통한 자는 조익과 최세진(崔世珍) 두 사람뿐이었다. 최세진은 이문의 권위자로서 표전문에 많이 쓰이는 용어를 뽑아 모아서 『이문집람(吏文輯覽)』을 편찬하였다. 중종이 일찍이 편전(便殿)에 나가서 조익과 최세진(崔世珍)에게 중국어로 왕패(王伯)에 대하여 토론하도록 하였는데, 두 사람이 묻고 대답하는 데에 아무런 막힘이 없자, 중종이 특별히 두 사람에게 품계를 가자(加資)하기도 하였다.

1516년(중종11) 중종이 빈청에서 문신들에게 이문과 중국어를 강론하게 하였는데, 조익이 중국어를 강론하여 ‘통(通)’을 얻고, 김정국(金正國)이 이문을 강론하여 ‘통’을 얻으니, 중종이 두 사람에게 각각 활을 1벌씩 내려주었다. 또 1524년(중종19) 중종이 사정전(思政殿)에서 이문과 중국어를 문신들에게 강론하게 하였는데, 교감(校勘)조익이 『노걸대(老乞大)』를 강론하여 ‘약(略)’을 얻고, 설서(說書)이억손(李億孫)이 이문을 강론하여 ‘조(粗)’를 얻었다. 통(通) · 약(略) · 조(粗)란 점수의 상 · 중 · 하를 말한다. 1525년(중종20) 승문원 제조가 아뢰기를, “이문과 중국어를 잘하는 사람은 최세진과 조익뿐입니다. 인재를 선발하여 학습시킨 지 10여 년인데, 그 중에 조금이라도 성취된 사람들을 서로 교대해서 북경(北京)에 보내도록 해야 합니다.” 하였다. 조익도 중국 명(明)나라에 가는 사신(使臣)을 수행(隨行)하여 두 번이나 북경에 가서 이문과 중국어를 질정(質正)하였다. 그 뒤에 조익이 승문원을 떠나서 다른 관직으로 옮겼을 때에도 항상 승문원의 직함을 겸임하여, 승문원의 일을 도왔다. 당시 중국과 왕래한 표문과 전문은 이문(吏文)을 사용하였는데 현재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이것의 해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국역에 가장 어려운 난제가 되고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부지런하고 민첩하였다. 매사를 완급에 따르며 일을 잘 처리하였고, 또한 성품이 강직하여 권력에 대하여도 기개를 굽히지 않았으므로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평소 집에 있을 때에는 자신을 엄격히 다스렸고, 사물을 접할 때에는 모난 행동을 하지 않았다. 자제(子弟)들을 교육하는 데에도 법도가 있어서 문무(文武)의 재능에 따라 각기 그 기량을 다하도록 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가운데 넷이 과거에 급제하여 명성을 날렸다. 평소 남의 과실(過失)을 말하기는 것을 꺼려하였고, 길을 걸어갈 때에도 도로의 한 가운데로 다니지 않고, 가장자리로 조심스럽게 다녔다.

그가 만년에 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집안 식구들이 의원에게 약을 지어 치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내가 벼슬도 구경(九卿)에 이르렀으니 신분이 낮은 게 아니다. 더구나 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였고, 내 나이도 일흔이 넘어 여든을 바라보니, 분수가 이미 과람(過濫)한 셈이다. 좋은 약이 정말 있다고 할지라도 이제 어디에 다시 쓸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여러 아들들이 빙 둘러 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약을 쓰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끝내 허락하지 않고 병마의 고통을 참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비문과 후손

정사룡(鄭士龍)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호음잡고(湖陰雜稿)』 권7) 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는 대사헌(大司憲)민휘(閔暉)의 딸인데, 자녀는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조응겸(趙應謙)은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지냈고, 차남 조응순(趙應純)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훈련원(訓練院) 부정(副正)을 지냈으며, 3남 조응공(趙應恭)은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좌랑을 지냈고, 4자 조응침(趙應忱)은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또한 손자 조원(趙瑗)은 승지를 지냈는데, 여류시인 이옥봉(李玉峯)이 바로 조원의 소실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호음잡고(湖陰雜稿)』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청음집(淸陰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우계집(牛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