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환(趙世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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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5년(광해군7)∼1683년(숙종9) = 69세]. 조선 중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자는 의망(嶷望), 호는 수촌(樹村)이다. 본관은 임천(林川)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홍주(洪州)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조석(趙碩)이고, 어머니 한산이씨(韓山李氏)는 별좌(別坐)이거인(李據仁)의 딸이며, 토정 선생(土亭先生)이지함(李之菡)의 증손녀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33년(인조11) 나이 19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생원으로 합격하였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서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후금(後金)에게 항복하였다는 소식과 중국 북경성(北京城)이 청(淸)나라에게 함락되어 명나라 숭정제(崇禎帝)의종(毅宗)이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자 그는 북쪽을 바라보면서 통곡하고, 마침내 벼슬에 나갈 생각을 버리고 고향으로 몸을 숨기고 농사를 지어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할머니 민씨(閔氏)가 울면서, “네가 벼슬에 나가 입신양명(立身揚名)할 뜻이 없으니, 나는 아무 희망이 없다.”고 하니, 그는 하는 수 없이 1657년(효종8)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나가서 갑과(甲科) 3등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3세였다.

효종∼현종 시대 생활

대과 급제 후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보임되었다가, 예조 · 병조의 좌랑(佐郞)을 역임하고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갔다. 조정에서 균전(均田) 제도를 시행하게 되자, 사자(使者) 민정중(閔鼎重)의 천거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앞장섰다. 1664년(현종5) 병조의 낭관(郎官)으로 있다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연안군수(延安郡守)로 나갔는데, 암행어사(暗行御史)박세당(朴世堂)이 그의 치적이 황해도수령 가운데 제일이라고 보고하여, 정3품하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승진하였다. 갑산군수(甲山郡守)로 옮겼다가 1668년(현종9)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어, ‘북로(北路)의 폐단 12가지’를 상소하였다.

1669년(현종10)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고, 1670년(현종11)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청나라 연경(燕京)을 다녀왔다. 산해관(山海關)에 이르자, 청나라에서는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는 모두 가마를 타고 서장관은 걸어서 가도록 하였다. 그러자 그가 강력히 항의하기를, “서장관도 사신(使臣)인데, 어찌 혼자만 걸어갈 수 있는가?” 하니, 청나라 예부에서 마침내 수레를 타고 가도록 허락하였다. 이때부터 이것이 전례(前例)가 되었다. 1674년(현종15)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숙종 시대 활동

1674년(숙종즉위) 사헌부 집의(執義) ·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서 무주부사(茂朱府使)로 나갔다. 이어서 고성현령(固城縣令)에 임명되었는데, 그를 미워하던 반대파가 그를 감시하기 위하여 암행어사로 내려왔다. 그러나 오히려 그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고 보고하게 되었고, 이에 숙종이 특별히 대구부사(大丘府使)로 옮겨서 피폐된 행정을 바로잡게 하였다. 숙종은 그에게 곧장 바로 대구부사로 부임하도록 하여, 서울에 와서 사은숙배하는 것을 면제하여 주었으나, 그때 그는 귀양살이 하던 송시열(宋時烈)을 만나서 문안드리다가 두 달 뒤에 대구에 부임하였다. 이로 인하여 결국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그는 파직되었다.

1680년(숙종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 일어나 조정에서 남인이 쫓겨나고 서인(西人)이 권력을 잡자,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진하여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임명되었다. 그가 동래부사로 재임하는 아홉 달 사이에 동래 상인[商賈]들에게 상세(商稅)로 징수하여 호부(戶部)로 보낸 은화가 무려 1만 4천여 냥이나 되었는데, 이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었다. 얼마 뒤에 조정으로 들어와서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다가 승지(承旨)로 발탁되었다. 1683년(숙종9) 승지로서 말미를 얻어 고향 홍주로 돌아갔는데, 갑자기 임금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 겨울철에 눈과 바람을 무릅쓰고 급히 상경(上京)하다가, 도중에 독감에 걸려서 1683년(숙종9) 11월 18일 신창(新昌)에서 객사(客死)하게 되니, 향년이 69세였다.

성품과 일화

조세환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순박하고 진실하며 정직하였다. 그래서 이익을 가지고 그를 유혹하지 못하였으며, 권력을 가지고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였다. 반대파가 나라의 권력을 잡았을 때에 그는 마치 눈앞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들을 무시하였다. 또한 <경신대출척> 이후 서인이 권력을 잡았을 때에는 도리에 어긋나게 기세를 부리는 사람들을 보고, 그 불평(不平)한 마음을 번번이 시(詩)를 지어서 음영(吟詠)하면서 풍자하였다. 그는 몸가짐이 청결하고 대의를 분명히 지켰으므로, 위기(危機)와 함정(陷穽)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아서 그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역대 동래부사는 반드시 화려한 복장을 갖추어 입고 왜인(倭人)들을 접대(接待)하였는데, 조세환이 동래부사로 있을 때 그는 평소의 옷차림으로 왜인을 접대하면서 말하기를, “어찌 사치스럽고 화려한 복장을 입는다고 적인(敵人)들의 마음을 복종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숙종은 그가 매우 가난하여 초라한 옷을 입는다는 얘기를 듣고 금(金) 30냥쭝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돈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충절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한 전 동래부사송상현(宋象賢)의 사당을 크게 수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돈은 국난(國難)에 순절한 관노(官奴)석매(石邁)의 자손들을 천적(賤籍)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하나 남김없이 모두 써버렸다고 한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처음에 충청도 진잠(鎭岑)의 구봉산(九峯山)에 있었는데, 나중에 충청도 공주(公州) 보문산(寶文山)의 선영으로 옮겼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 광산이씨(光山李氏)는 진사(進士)이의행(李誼行)의 딸인데, 그와 합장하였다. 자녀는 1남 4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조홍기(趙鴻紀)이고, 손자는 조봉령(趙鳳齡)과 조봉경(趙鳳慶)이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典)』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국조보감(國朝寶鑑)』
  • 『서계집(西溪集)』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성근보집(成謹甫集)』
  • 『태천집(苔泉集)』
  • 『백헌집(白軒集)』
  • 『장암집(丈巖集)』
  • 『농암집(農巖集)』
  • 『도곡집(陶谷集)』
  • 『도운유집(陶雲遺集)』
  • 『소곡유고(素谷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