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적(賤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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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천적 |
한글표제 | 천적 |
한자표제 | 賤籍 |
관련어 | 속안(續案), 장적(帳籍), 정안(正案), 형지안(形止案), 호적(戶籍) |
분야 | 정치/행정/문서·행정용어 |
유형 | 개념용어 |
시대 | 고려, 조선 |
왕대 | 고려, 조선 |
집필자 | 문숙자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천적(賤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광해군일기』 4년 12월 15일, 『순조실록』 1년 1월 28일 |
공·사노비의 이름과 나이, 전래별 세계(世系) 등을 기록한 천인 장부 또는 노비안(奴婢案).
개설
천적(賤籍)은 특정 문서명 또는 서명(書名)이 아니라 공노비의 명부(名簿)인 정안(正案)·속안(續案)·형지안(形止案)이나, 주인집의 호적에 노비가 등재된 것 등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고려시대부터 작성되었고 조선에 와서 작성 원칙이 더 체계화하였다. 이를 통해 노비에 대한 국가 및 노비 주인의 관리, 나아가서는 신분제 운영이 더 철저해져 감을 알 수 있다.
내용 및 특징
천적은 양적(良籍)과 대비하여 쓰는 용어로, 양적이란 명칭의 문서가 없듯이 천적 역시 특정 문서를 지칭하는 용어가 아니다. 흔히 노비 관련 쟁송이 있으면 근거 자료로 천적을 제출하게 하고 이를 상고(相考)하여 판결을 내린다는 문구가 소지(所志)·입안(立案) 등 고문서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해당 문서에서 제시하는 천적은 분재기인 경우도 있고, 매매문기나 호적인 경우도 있다. 즉 쟁송에 연루된 노비가 기록되어 있는 문서, 노비의 내력을 알 수 있는 문서는 모두 천적이라 불렸다.
사노비의 경우 고려시대부터 천적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노비가 소유주의 호적에 부적(付籍)되어 있을 때, 이 소유주의 호적을 노비의 관점에서 천적이라 일컬었다. 이러한 관행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주인집에서는 주기적으로 노비의 변동 사항을 상세히 작성하여 관리하면서 이를 노비안이라 칭하였다. 노비안은 전답안과 함께 재산 목록으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하지만 노비안 작성에 대한 공식 규정은 없다. 다만 주인집에 솔거하는 사노비의 경우 『경국대전』 호구식(戶口式)에 의거하여 주인집의 호(戶)에 등재하도록 되어있다. 기록 내용은 비교적 소략한 편이고 노비의 부모 중 한 사람만 기록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노비안뿐만 아니라 노비가 등재된 호적 역시 천적의 범주에 포함된다.
공노비의 경우는 천적의 작성·관리가 사노비에 비해 보다 체계적이다. 『경국대전』의 규정에 의거하여 공노비의 명부 또는 장적(帳籍)을 의미하는 노비정안(奴婢正案)이 작성되었다. 해당 규정은 『경국대전』「형전(刑典)」 ‘공천(公賤)’조에 있다. 이에 따르면 정안은 속안(續案)을 토대로 작성하도록 되어있다. 즉 3년마다 소속 관서의 관원과 장례원 관원이 함께 해당 관서의 노비 중 출생자·사망자·도망자 등 변동 사항을 파악하여 명단을 작성하는데 이것이 속안이다. 이를 토대로 20년마다 명단을 재작성하여 의정부·형조·장례원·사섬시·소속 관서 및 본사(本司)·본도·본읍에 간직하는데 이를 정안이라 한다. 정안이나 속안 작성 시에 누락된 노비를 신고하는 사람에게는 노비 4명당 1명씩을 상으로 주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한 각 고을에도 노비안이 있어서 그중에서 관가의 역에 응하는 노비를 조달하였다(『광해군일기』 4년 12월 15일).
이 밖에 ‘노비형지안(奴婢形止案)’이라는 명칭의 문건 역시 천적이라 할 수 있다. 노비형지안은 내·사노비(內·寺奴婢) 등의 원적부를 작성한 후 3년에 한 번 이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상세히 기록한 보조 기록이다. 이처럼 천적은 공·사노비의 명단이 수록된 다양한 문서를 아우르는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변천
고려시대의 천적 개념은 만적(萬積)의 난과 관련하여 등장한다. 만적 등이 소유주를 격살(格殺)하고 천적을 불사르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인데, 이때 천적이란 자신들의 이름이 올라있는 소유주의 호적을 의미했다. 사노비의 경우 이러한 개념이 조선시대에 계승되었으나, 호적 이외에도 노비의 이름과 내력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문서가 천적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반면 공노비는 『경국대전』에 정안과 속안의 작성 규정이 수록되면서 체계적인 천적의 작성과 관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1801년(순조 1)에 공노비의 혁파를 단행하면서 1,209권에 달하는 노비안이 돈화문 밖에서 불태워졌고, 공노비안의 작성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순조실록』 1년 1월 28일).
참고문헌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안승준, 『조선 전기 사노비의 사회 경제적 성격』, 경인문화사, 2007.
- 홍승기, 「고려시대 사노비의 법제상 지위」, 『한국학보』 12, 1978.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