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집(尹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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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7년(선조 40)∼1637년(인조 15) = 31세]. 조선 중기 인조 때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정랑(正郞)이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判書)이다. 본관은 남원(南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자는 성백(成伯)이고, 호는 임계(林溪)·고산(高山)이다. 아버지는 서흥현감(瑞興縣監)윤형갑(尹衡甲)이고, 어머니 창원황씨(昌原黃氏)는 관찰사황치경(黃致敬)의 딸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전사한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홍문관(弘文館) 교리(敎理)윤섬(尹暹)의 손자이고,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청(淸)나라 군사에게 사로잡혀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남양부사(南陽府使)윤계(尹棨)의 동생이다.

인조 시대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4년이 지나서, 1631년(인조 9)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방목』)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세자시강원에 들어가서, 설서(設書)·사서(司書)로 차례로 승진하였다. 그때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형 윤계와 동생 윤유(尹柔)와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35년(인조 13) 홍문관 수찬(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이조 정랑(正郞)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 윤집이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는데, 홍익한(洪翼漢)이 당시에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있어서, 대간(臺諫)에서 중요한 논의를 발의하려고 할 적에 함께 모여서 자주 의논을 하였다. 홍익한은 윤집보다 19년 선배였는데, 윤집은 항상 홍익한의 대의(大義)를 중시하는 주장에 깊이 찬동하였다. 그때 후금(後金)의 사신 용골대(龍骨大)와 마부대(馬夫大)가 와서, 후금을 ‘청(淸)’으로 바꾸고, 칸[汗: 임금]을 ‘황제(皇帝)’로 바꾸었다고 통보하고, 조선에 대하여 청나라 황제에게 칭신(稱臣)할 것을 요구하였으므로, 대간에서 이에 극력 반대하고 용골대 등의 목을 베자고 주장하였다. 사헌부 장령홍익한은 상소하기를, “후금의 칸[金汗]’이 스스로 ‘황제’라고 일컫는데, 내 귀로는 차마 그런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만약 우리가 오랑캐를 받들어 섬긴다면, 이것은 오랑캐가 스스로 황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그들로 하여금 황제가 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그들 사신들의 목을 베어 죽이기를 원합니다.” 하였는데, 이 상소문은 홍익한의 이름으로 나갔으나, 대간에서 윤집 등과 논의를 거쳐 만들어진 상소문이다. 인조는 대답하기를, “그대들의 나라를 위하는 충정은 가상하다. 그러나 사신을 죽이는 일은 너무 성급한 듯하다.” 하고, 청나라의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고, 사신 용골대와 마부대를 그대로 돌려보냈다.

그해 여름에 윤집이 홍문관 교리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오달제(吳達濟)가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있었다. 윤집은 나이가 비슷한 오달제와 뜻이 맞아서 두 사람이 함께 시국을 한탄하고, 번갈아 상소문을 올려서, 청나라를 배척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해 겨울에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지는 조선의 칭신을 거절한 데에 격분하여, 직접 10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와서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다. 청나라 칸 홍타지는 대군을 이끌고 의주와 평양 등을 일부러 피하여 바로 서울로 직행하였는데, 그 목적은 조선의 칭신을 받으려는 데에 있었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 가다가, 길이 청나라 군사에게 막혀서,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들어갔다. 남한 산성이 청나라 군사에게 포위되어 공격당하였는데,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서 화의(和議)를 맺고, 인조는 45일 만에 남한산성을 나와서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칭신하였다. 화의 조건은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어 막대한 세폐(歲幣)를 보내고, 척화파(斥和派)의 인물들을 잡아서 청나라에 보내는 것 등이었다. 그때 삼사(三司)가 한 자리에 모여서 주화파 최명길에게 죄를 주라고 소청(疏請)하는 논의를 하였는데, 교리윤집과 부교리오달제가 논의를 주도하였다. 윤집과 오달제는 함께 주화파의 최명길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는데, 삼사의 동료들로부터 너무 과격한 논의라고 배척을 당하였다. 심지어 대사간박황(朴潢)은 두 사람을 ‘외톨이 햇병아리와 비루먹은 쥐새끼’란 뜻인 “고추부서(孤雛腐鼠”라고 욕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화의조약을 맺은 직후에 척화파의 중심인물로 지목되던 김상헌(金尙憲)과 홍익한·윤집·오달제의 3학사(學士) 등이 체포되어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었다. 김상헌·홍익한은 청나라측에서 지목한 척화파의 핵심인물이었고, 윤집·오달제는 조선측에서 척화파의 인물을 선정할 적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인물이었다. 또 소현세자(昭顯世子) 내외와 봉림대군(鳳林大君) 내외도 질자(質子)로 심양에 보내져, 질자관(質子館)에 묵었는데, 세자시강원의 대신들과 관리 등이 따라가서 함께 심양관(瀋陽館)에 묵었다. 1637년(인조 15) 1월 윤집과 오달제는 청나라 군영으로 압송당하여, 홍타지 군사들에게 3개월 동안 끌려 다니다가, 그해 4월 두 사람이 청나라 군사와 함께 심양에 도착하였다. 용골대는 그들을 호부(戶部)의 건물에서 조선의 소현세자가 묵던 심양관의 대신들과 관리를 초청하여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혹독하게 심문하였으나, 윤집은 오달제와 함께 굴복하지 않았다. 그때 용골대는 홍타지 칸의 말을 전하면서 온갖 방법으로 회유하였으나, 두 사람은 그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충절을 굳게 지켰다. 1637년(인조 15) 4월 19일 심양성의 서문(西門) 밖 사형대에서 처형당하였는데, 향년이 겨우 32세였다.[<비문>]

<3학사>의 순절

홍익한·윤집·오달제를 ‘3학사(三學士)’라고 부르는 것은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세 사람의 집안의 기록인 가장(家狀)을 모아 가지고 「3학사전(三學士傳)」을 지어서 그 충절을 칭송하였기 때문에(『송자대전(宋子大全)』권 213 「3학사전(三學士傳)」)후세 사람들이그들을 ‘3학사’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세 사람이 붙잡혀 갈 때 각각 그 몸종들이 따라가서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와서 증언하거나, 또는 본인의 기록을 가지고 가장을 만들었으므로 그 기록은 비교적 자세하고 정확하였다. 윤집은 유서(遺書)와 기행(記行) 1책(册)을 써서 자기 옷가지 속에 감춰 두었으나, 죽을 때에 몸종들이 감금되고 청나라에서 그 옷을 수거하였기 때문에 고국에 전해지지 못하였다.

송시열의 「3학사전」을 보면, 윤집·오달제 두 사람은 1637년(인조 15) 4월 15일 심양에 도착하여, 4월 19일 처형당할 때까지 용골대의 심문을 받았다. 이보다 앞서 홍타지 칸이 직접 홍익한을 불러서 끈질기게 설득하다가 참혹하게 죽인 것과는 다르게, 용골대를 시켜서 두 사람을 회유하면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심문을 진행하였는데, 두 사람이 끝내 냉담하게 거절하자, 당일 사형대에서 교수형에 처하였다.

4월 15일 윤집·오달제 두 사람이 심양에 도착하자, 청나라에서는 예부 아문(禮部衙門)에 속한 작은 집 한 곳에 두 사람을 가두고, 4일 동안 매우 엄격하게 감시하였다. 19일 이른 아침에 용골대가 호부아문에 앉아서 사람을 시켜서 두 사람을 데려다가 놓고 태종홍타지의 말을 전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척화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수창자(首倡子)가 아닌 듯하므로,너희들을 반드시 죽이지는 않겠다. 너희들이 처자를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살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두 사람은 대답하기를, “이는 결코 따를 수 없다. 빨리 우리를 죽여 달라.” 하니, 용골대가 반복하여 설득하다가 위협하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두 사람이 끝내 굴복하지 않자, 용골대가 벌떡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 사람은 집밖으로 나와서 데리고 간 몸종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오랑캐들이 반드시 우리를 죽일 것이다.” 하니, 몸종들이 놀라서 울면서, “그의 말을 짐짓 따라 주는 체 하지 않고 그의 노여움을 돋우어, 왜 스스로 큰 화(禍)를 재촉하십니까.” 하니, 두 사람이 웃으면서, “몸을 굽히는 치욕이 도리어 죽음보다 심한 것이다. 이것은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윤증이 또 자기 몸종에게 말하기를, “오랑캐가 우리의 가족들까지 물었으니, 이는 바로 우리 여러 식구들까지 해치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내가 이미 난리 뒤에 생사를 모른다고 대답하였으니, 오랑캐가 만일 다시 그 일을 너희들에게 묻거든 너희들도 내가 대답한 것과 같이 말하도록 하라.” 하였다. 두 사람은 마침내 태연하게 서로 웃고 말하였다. 또 몸종들이 준비해간 밥을 먹을 때에도 평소처럼 잘 먹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만약 저들의 말을 따른다면, 끝내는 오랑캐가 되고 말 것이니, 어찌 따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한참 만에 용골대가 다시 나와서 두 사람을 끌고 안으로 들어가고, 또 두 사람을 따라갔던 종 3인을 잡아다가 담장 모퉁이에다 구치(拘置)하였다. 이때 용골대가 소현세자를 따라갔던 심양관의 조선 대신 6명과 세자시강원 관리 1명을 초청하여 용골대와 같은 좌석에 앉게 하여 심문에 참여시켰다. 용골대가 큰 소리를 지르면서 두 사람을 5, 6차례 심문하면서 협박하였으나, 두 사람도 또한 5, 6차례 항변하고 항복하기를 거절하였다. 조선의 재상들도 두세 번 두 사람에게 굴복하기를 권유하였으나 끝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용골대는 두 사람이 끝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마침내 자신의 종자(從者)를 시켜, 두 사람을 밧줄로써 매우 단단히 결박하여 바깥으로 끌고 나갔다. 그때 두 사람은 오히려 되돌아보면서 대신 박노(朴*)박황(朴潢) 등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박황은 대사간 때 그들을 ‘고추부서(孤雛腐鼠)’라고 욕했던 사람이다. 두 사람이 마침내 심양성 서문(西門) 밖으로 끌려가서 처형당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청나라 사람들이 죄인을 처형하던 곳이었다. 그때 조선의 대신들이 바깥으로 나와서 서로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만 마리의 소로써 끌더라도, 그 마음을 돌릴 수 없는 사람들이다.” 하였다.(『송자대전』 권213 참고.)

송시열이 3「학사전」을 지을 때 윤증의 가장을 참고하였는데, 그 기록에 보면, “심양관에 볼모로 갔던 재상 박노가 심양에서 돌아와서 친지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랑캐 땅에 있을 때 오랑캐들과 사이좋게 지냈던 것은 어찌 본심에서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렇게 했겠는가. 모든 일을 미봉(彌縫)하려는 뜻으로 그랬던 것인데, 윤증이 나의 마음을 모르고, 심양에서 나를 보자마자, 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가운데에서 나를 꾸짖고 욕하면서,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말로써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또 스스로 저들의 노여움을 샀으니, 그는 매우 생각이 모자란 사람이야.…(이하 생략)…” 하였는데, 송시열은 논평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윤증이 어느 곳에서 재상 박노가 오랑캐들과 사이좋게 지낸다고 꾸짖었겠는가. 만약에 ‘예부에서 호부로 끌려갈 때의 일이라.’고 한다면, 그때의 급박한 상황을 고려할 때, 아마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하였다.(『송자대전』 권72 참고.)

윤집·오달제의 죽음과 인조의 눈물

1637년(인조 15) 1월 최명길·이영달(李英達)이 국서(國書)를 가지고 청나라 진영으로 갈 때, 화친을 배척한 신하라고 지목된 윤집·오달제를 같이 데리고 가게 하였다. 윤집과 오달제가 인조에게 하직 인사를 하자, 인조가 인견하고, “사람들이 그대들의 식견을 얕다고 하지만, 그 원래 의도는 나라를 그르치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는데, 오늘날 마침내 이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열하였다. 윤집이 위로하기를, “이러한 시기를 당하여 진실로 국가에 이익이 된다면, 만번 죽더라도 목숨이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하니, 인조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나를 임금이라고 해서 외로운 남한산성에 따라 들어왔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내 마음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오달제가 다짐하기를, “신은 자결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는데, 이제 죽을 곳을 얻었으니 무슨 유감이 있겠습니까.” 하니, 인조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고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하고,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오달제가 위로하기를, “신들이 죽는 것이야 애석할 것이 없지만, 단지 전하께서 남한산성에서 나가게 된 것을 망극하게 여깁니다. 신하된 자들이 이런 때에 죽지 않고 장차 어느 때를 기다리겠습니까.” 하였다.

인조가 말하기를, “그대들의 뜻은 군상(君上)으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고 한 것인데, 일이 여기에 이르렀다. 그대들에게 부모와 처자가 있는가?” 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아들 셋이 있는데, 모두 남양(南陽)에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 남양 부사홍계가 신의 형인데, 오랑캐에게 붙잡혀 갔다고 하는데, 그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하고, 오달제가 아뢰기를, “신은 단지 70세 된 노모가 있고 아직 자녀가 없는데, 지금 임신 중인 뱃속의 아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니, 인조가 한탄하기를, “참혹하고 참혹하도다.” 하였다. 윤집이 아뢰기를, “신들은 떠나갑니다만, 전하께서 만약 소현세자와 함께 나간다면 남한산성 안의 사람들이 흩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전하는 세자를 이곳에 머물러 있게 하고 함께 나가지 마소서.” 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장차 죽을 곳에 가면서도 오히려 나라를 걱정하는 말을 하는가. 그대들이 죄 없이 죽을 곳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니, 내 마음이 찢어지는 듯하다. 어찌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남한산성에서 나간 뒤에 국가의 존망 역시 알 수는 없지만, 만약 온전하게 된다면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와 처자식을 반드시 돌보아 주겠다. 그대들의 늙은 어버이의 연세는 얼마이며, 그대들의 나이는 또 얼마인가.” 하였다. 오달제가 아뢰기를, “어머니의 나이는 무진생(1556년)이며 신의 나이는 무신생(1608년)입니다.” 하고, 윤집이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단지 조모가 계신데, 나이는 지금 77세입니다. 신의 나이는 정미생(1607년)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두 사람이 절하고 하직하니, 인조가 가로 막으면서, “앉아라.” 하고,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술을 대접하게 하였다. 승지가 아뢰기를, “사신이 벌써 문밖에 와서 재촉하고 있습니다.” 하니, 인조가 말하기를, “어찌 이와 같이 급박하게 제촉하는가.” 하였다. 두 사람이 술을 다 마시고 아뢰기를, “시간이 이미 늦었습니다. 하직하고 떠날까 합니다.” 하니, 인조가 눈물을 흘리며, “나라를 위하여 몸을 소중히 하도록 하라. 혹시라도 다행히 살아서 돌아온다면 그 기쁨이 얼마나 커겠는가.” 하자, 오달제가 나서면서, “신이 나라를 위하여 죽을 곳으로 나아가니 조금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 사신 최명길이 두 사람을 데리고 청나라 진영에 갔는데, 홍타지 칸이 두 사람의 결박을 풀어주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최명길 등을 불러서 크게 대접하고 초구(招裘) 1벌씩을 내려주었는데, 최명길 등이 이것을 입고 홍타지 칸에게 네 번 절하였다.(『인조실록(仁祖實錄)』 참고.)

그해 5월 24일 심양관의 대신 남이웅(南以雄)·박노·박황 등이 서장(書狀)을 작성하여 윤집과 오달제의 죽음을 인조에게 다음과 같이 장계(狀啓)하였다. “지난 4월 19일 용골대가 대신 6명과 겸보덕(兼輔德)이명웅(李命雄)을 초대하여 함께 좌정(坐定)한 자리에서, 윤집·오달제를 그 앞에 끌고 와서, 홍타지 칸의 말을 전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마땅히 죽어야 하나, 특별히 인명(人命)의 귀중함을 생각하여 온전히 살려서 처자를 데리고 들어와서 이곳에서 살도록 허락하려고 한다.’ 하였으나, 윤집은, ‘난리 뒤에 처자들의 생사도 모르겠다.’ 하고, 오달제는. ‘이제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에 온 내가 만약 살아서 돌아가면, 우리 임금님과 늙은 어머니를 다시 뵙게 될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사는 것이 도리어 죽는 것만 못하다.’ 하였습니다. 용골대가, ‘홍타지 칸의 온전하게 살리려는 은혜를 생각지 않고 이렇게 반항하니 이제는 더 이상 용서할 수가 없다.’ 하였으므로, 신등이 변명하기를 ‘이 사람들은 연소한 사람들이므로, 군친(君親)에 대한 생각만 간절하여 이처럼 망발하였지만, 만약 목숨만 온전히 살려준다면 어찌 천 년만에 한번 있는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두세 번이나 간청하였으나, 끝내 윤집·오달제는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하였다. 그해 6월 6일 그 장계가 도착하자, 인조가 이를 읽어보고 승정원에 전교하기를, “두 신하의 일은 매우 참담하고 측은하다. 그들의 집에 월름(月廩)을 주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이리하여 나라에서 <3학사>의 어머니와 아내에게 매달 쌀과 일용 물품을 죽을 때까지 지급하였다.

성품과 일화

윤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그의 묘갈명에 같이 전한다. 그는 자품이 맑고 고결하며, 성품이 곧고 엄정하였다.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서 눈에 한번 거치면 모두 기억하였다. 집에 있을 때 효도가 순수하고 우애가 독실하여, 어버이가 병중이 있으면 일찍이 허리띠를 풀지 않고 간호하였고, 집상(執喪)하면서 인정과 예절이 극진하였다. 형제 3명이 한 방에 거처하면서 학업에 힘쓰고 생업을 일삼지 않았으며, 해진 옷에 거친 밥을 먹고 살면서 조금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남의 일에는 급히 달려가 구원하였으나, 잘못을 보면 바른 말로 바로 꾸짖고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고 벼슬하면서 일을 논할 적에는 주견 없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1633년(인조 11)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여 형 윤계와 동생 윤유와 함께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1635년(인조 13),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그때 형 윤계는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형제가 서로 경계하기를, “우리들이 남보다 뛰어난 것이 없는데도 함께 청반(淸班)에 들었으니, 이것이 매우 두려운 것이다.” 하였다.

1636년(인조 14) 윤집이 사간원 헌납에 임명되었을 때 상소문을 초안하기를, “무슨 일이든지 뿌리를 단절시키지 않으면 반드시 그 잎이 무성하게 퍼져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지금 최명길이 아직도 묘당(廟堂)에 있는데, 끝내 반드시 사의(邪意)를 다시 일으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이다.” 하고, 또 “예로부터 적과 싸우면서 성을 지키는 계책을 실패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화의(和議)입니다. 화의를 거론하는 자가 있으면 군중(軍中)에서 효수(梟首)해서 중지(衆志)를 단합시켜야 합니다. 지금 화친을 주장하는 사람이 사람을 배척하는 것이 송나라 진회(秦檜)보다 심합니다.” 하였다. 형 윤계가 이를 읽어보고 말하기를, “상소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가.” 하니, 윤집이 말하기를, “국가가 장차 망하게 되었는데, 말을 가릴 수 없습니다.” 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9일 화친을 주장하던 자들이 윤집과 오달제를 압송하여 남한산성을 나가는데, 여러 친구들이 모두 성문에 모여서 영결하고 통곡하면서 작별하니, 보는 사람들도 모두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평소처럼 태연하고 늠름하게 행동하니,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였다. 압송하는 자들이 도중에서 두 사람에게 위로하기를, “주화에 반대한 사람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니, 죽음을 모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윤집이 귀속말로 오달제에게 속삭이기를, “이번 기회에 저들이 거리끼는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최명길이 적진에 도착하여 윤집·오달제의 두 손을 뒤로 합쳐서 묶고 그 머리를 흐트러뜨리게 하여,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니, 홍타지 칸이 사람을 시켜 힐문하기를, “너희들의 이름을 내가 전에 들은 바가 없다. 먼저 척화를 주창한 자가 홍익한 한 사람 뿐만이 아닐 것이니, 이제 만약 사실대로 자복하면 죽음을 모면할 것이다.” 하자, 윤집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이미 우리들을 수사하여 압송하였는데, 다시 어떤 사람이 더 있겠는가. 우리들은 한 번 죽기로 이미 작정하였으니,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다른 사람을 무고하여 끌어들이겠는가.” 하였다. 홍타지가 두세 번 되풀이하여 달래고 위협하기를, “지금 잘 생각하지 아니하면 뒤에 뉘우쳐도 소용없다.” 하자, 윤집이 말하기를, “우리가 머리를 달고 왔는데, 지금 목을 끊을 테면 끊고, 다시 더 묻지 말라.” 하였다. 청나라 오랑캐 군사가 마침내 북쪽으로 철수하였는데, 두 사람을 압송하는 오랑캐 장수가 두 사람의 훌륭한 행동을 보고 항상 존경하여, 침식을 챙겨주면서 위로하기를, “심양에 이르면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윤집이 중로(中路)에서 동생 윤유에게 편지를 부치기를, “처음으로 형님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나도 곧 따라 죽고자 하였으나,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고 억지로 밥을 먹으며 살고 있을 뿐이다. 이번 길은 대개 청나라에서 척화한 사람을 압송하라는 조약 때문에 내가 오달제와 함께 스스로 떠맡은 것이니, 남아(男兒)가 세상에 태어나서 몸을 바쳐 국가의 위급함을 구한다면, 그것도 또한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만 할머니가 노경에 계신데, 다시 뵙지 못하게 되는 것이 한이 될 뿐이다.” 하였다.

묘소와 비문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金浦)의 선영(先塋)에 있다. 윤집과 오달제가 심양에서 죽었을 때에 필선정뇌경(鄭雷卿)이 심양의 세자 심양관에 있었는데, 역관을 시켜서 시체를 조선 측에서 수습하겠다고 간곡히 요청하였으나, 청나라에서 끝내 이를 들어주지 않았다. 1665년(현종 6) 부인 김씨(金氏)가 돌아가자, 나라에서 장사를 도와주어서, 그의 의관(衣冠)과 함께 부부 합장(合葬)하였다. 송시열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송자대전』 권173 「교리증부제학 윤공집 묘갈명(校理贈副提學尹公集墓碣銘)」) 죽은 뒤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되었다.(『기원집(杞園集)』 참고)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 강화도의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고, 경기도 평택의 포의사(褒義祠), 경기도 광주(廣州)의 절현사(節顯祠), 충청도 홍산의 창렬서원(彰烈書院), 경상도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경상도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도정(都正)김상복(金尙宓)의 딸인데, 김상복은 청음(淸陰)김상헌의 아우이다. 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현감(縣監)윤이선(尹以宣)이고, 차남은 참봉(參奉)윤이징(尹以徵)이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철종실록(哲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 『문과방목(文科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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