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당(廟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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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 정책 결정 기관인 의정부를 다르게 이르던 말.

개설

본래 ‘나라의 정치를 다스리는 조정(朝廷)’이란 의미로, 의정부를 가키는 말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비변사 설치 이후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고 비변사가가 정치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면서 비변사도 묘당이라 불렀다. 조선의 정치는 왕권과 의정부, 육조(六曹), 삼사(三司) 등의 유기적인 기능이 표방되는 체제였으며, 최고의 정책 결정은 의정부를 통해 이루어져 왕의 재가를 받아 시행되었다. 그러므로 묘당은 정책을 협의·결정하는 최고의 기관이었으며, 권위와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비변사 설치 이후 의정대신들과 비변사당상들은 의정부가 아닌 비변사에 모여 인사를 천망(薦望)하기도 하고, 정무를 논의하여 왕의 재가를 받는 정치 운영을 하였다. 그 결과 의정부와 비변사를 모두 묘당이라고 칭했다. 고종 1년 비변사 폐지와 의정부의 기능 회복을 통해 다시 의정부만을 묘당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묘당은 조선시대 의정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비변사가 설치되고 의정부가 유명무실해지면서 비변사도 묘당이라고 하였다. ‘묘정(廟庭)’이라고도 불렀는데, 의정부에서 왕에게 아뢰어 일을 처리하는 것을 ‘묘당품처(廟堂稟處)’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뜻이다.

조선의 정치 체제는 왕권과 의정부·육조·삼사의 유기적인 기능이 표방되는 체제였으며, 의정부는 백관(百官)을 통솔하고 다방면의 정치를 총괄하던 최고의 행정 관청이었다. 의정부가 정치적 결정을 내리면 육조는 행정 실무를 집행하고, 삼사는 권력 행사에 대한 견제 작용을 했다.

정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1400년(정종 즉위)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하여 최고의 정치 기관이 되게 했다. 이듬해인 1401년 음양의 섭리와 나라 경영의 업무를 추가하였고, 이후 의정부서사제와 육조직계제 실시로 인해 묘당의 권위와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의정부는 정1품의 영의정·좌의정·우의정의 삼정승 합의제로 운영되었다. 종1품의 좌찬성과 우찬성, 정2품의 좌참찬과 우참찬 등은 정책 협의와 결정 과정에서 의정들을 보필하였다. 정4품의 사인(舍人) 2명과 정5품의 검상(檢詳) 1명 그리고 정8품의 사록(司錄) 2명은 각기 다른 기관과의 업무 연락을 담당하고 부내의 행정을 처리하였다. 의정은 물론이고 찬성과 참찬들은 1554년 비변사가 설치될 때까지는 정치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변천

1554년 비변사가 설치되고 중앙과 지방의 정치 전반을 맡으면서 의정부는 실권을 비변사에 빼앗겼고 형식적인 최고 기관으로만 존속하게 되었다. 물론 의정부의 의정들이 비변사의 도제조를 당연직(當然職)으로 겸하면서 비변사의 운영을 지휘했지만, 비변사 당상관들은 의정부의 빈청(賓廳)에 모이지 않았다. 그리고 『명종실록』에서 확인되듯이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비변사의 역할은 변방의 군사 문제를 중심으로 확대되었고, 정1품아문으로 법제화되었다. 비변사는 변방 군사 문제의 처리에서 의정부와 병조(兵曹)를 압도할 소지가 있어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그 기능상의 신축만 있었을 뿐 국방의 특이한 일을 헤아려 처리하게 했다.

비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을 계기로 국난 수습과 타개, 그리고 전쟁 수행을 위한 최고의 기관이 되었다. 그 기능은 확대·강화되어 군사는 물론이고 정치·경제·외교·문화 등 국가 경영 사무 전체를 처결하게 되었다. 광해군대에 비변사의 권한을 축소하고, 정부 각 기관의 기능을 환원시키자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후(戰後)의 복구와 국방력 재건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그대로 두었다.

인조 때에는 후금(後金)과의 항쟁 과정에서 새로운 군영들이 설치되었고, 이들 군영대장들이 비변사의 제조를 겸임하였다. 이것이 비변사 권한 강화와 의정부 역할의 축소로 나타났다. 효종, 현종, 숙종, 영조, 정조 연간 비변사의 정치적 지위는 변함이 없었으며, 명칭 변경을 요구하는 소극적 건의가 있었을 뿐이었다. 비변사의 인원과 관장 업무가 확장되었고, 일부 당파나 외척의 지도자인 의정은 더욱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면서 세도 정권의 기반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비변사는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의 관청이라는 의미로 묘당을 칭하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나타나는 묘당천의(廟堂薦擬)는 의정과 비변사 당상관이 의논하여 왕에게 천망(薦望)하는 일을 말하며, 묘당품처의 의미도 의정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이 모여서 의논한 정무를 왕에게 아뢰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1864년(고종 1) 신정왕후는 차대(次對)에서 의정부와 비변사가 모두 묘당을 칭하고 있으면서도 문부는 오직 비변사만 거행하고 있는 점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사무 한계를 규정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비변사는 폐지되었고, 이후 의정부 기능이 회복되었다. 이로써 묘당은 다시 의정부를 지칭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朝鮮王朝實錄』
  • 『續大典』
  • 『大典通編』
  • 『大典會通』
  • 김병우, 『대원군의 통치 정책』, 혜안, 2006.
  • 연갑수, 『대원군 집권기 부국강병 정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 이재철, 『조선 후기 비변사 연구』, 집문당, 2001.
  • 한국역사연구회 19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정치사: 1800~1863(상·하)』, 청년사, 1990.
  • 변윤홍, 「임란 이후 비변사의 변사 조치와 군사 정책의 의정」, 『역사학보』139, 1993.
  • 한충희, 「조선 초기 의정부 연구(하)」, 『한국사연구』,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