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복(淡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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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喪期)를 마친 대상(大祥)부터 담제(禫祭)까지 착용하는 옷.

개설

초상이 난 지 25개월 만에 대상을 지내고 27개월이 되는 달 하순에 정일(丁日)이나 해일(亥日)을 정하여 담제를 지내기까지 입는 옷이다. 국왕의 담복은 심염옥색(深染玉色) 원령의(圓領衣)인 참포(黲袍), 익선관(翼善冠), 오서대(烏犀帶), 백피화(白皮靴)이다. 대군 이하 종친, 문무백관의 담복은 짙은 옥색 원령의인 참포, 오사모(烏紗帽), 흑각대(黑角帶), 백피화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옥색 옷을 입으며, 이 차림은 곧 제사 옷이 된다. 담제가 끝나면 일상복을 입었다.

연원 및 변천

조선왕실의 상례는 국부나 국모라는 개념으로 치렀다. 조선 사회에서는 모든 사회조직, 이를테면 가족이나 국가, 지역사회가 가(家)의 개념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왕을 정점으로 한 지배 계급, 즉 양반 계급은 유교적 가치체계를 스스로 엄격히 실천하고, 상례로 대표되는 의례를 통해 피지배계급인 백성들에게 전파하고 강제함으로써 조선의 사회체계를 견고히 유지해 왔다.

상중(喪中)이라도 국가에서는 업무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왕은 상에 관계되는 일에만 상복[衰服]을 입고, 졸곡(卒哭) 뒤 정사를 볼 때는 생포(生布)로 만든 포포(布袍), 생포로 싼 포과익선관(布裹翼善冠), 생포로 싼 포과오서대(布裹烏犀帶), 백피화를 착용했다. 13개월 만에 연제(練祭)를 지낸 다음에는 상복으로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벗으며, 시사복(視事服)으로는 백포(白袍)·백포과익선관(白布裹翼善冠)·백포과오서대(白布裹烏犀帶)·백피화를 착용한다. 25개월 만에 대상을 지내고 나서는 참포·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하고, 27개월 담제(禫祭)에는 현포(玄袍)·익선관·오서대·백피화를 착용하며, 담제를 지낸 후에는 곤룡포(袞龍袍)·옥대(玉帶)를 착용한다.

형태

왕의 담복은 참포·익선관·오서대·백피화이며, 대군 이하 종친과 문무백관들의 담복은 참포·오사모삭제·흑각대·백피화이다. 일반 가정에서는 옥색 옷을 입는다.

국상(國喪)이 있을 때 문무 신료(文武臣僚)들은 소상(小祥)에는 유각 백사모(有角白紗帽)를 쓰고, 대상에는 상복을 벗고 백의(白衣)·오사모를 쓰되, 요질(腰絰)은 그대로 띠고, 담사(禫祀) 뒤에 요질을 버리고 비로소 백의·백립(白笠)·오사모·흑각대를 착용하여 3년 상을 마쳤다. 내상(內喪)이면 종친과 백관은 최복(衰服) 차림으로 들어가 곡을 하고 나와서 천담복(淺淡服)을 입고 배제(陪祭)하고, 제사 뒤에 길복(吉服)을 입었다.

용도

상기를 마친 대상부터 담제까지 입었다. 담제를 지내고 상복을 벗는 날에는 길제(吉祭)를 지냈다. 상중이라 할지라도 종묘대제(宗廟大祭)를 왕이 친히 행하게 되면 흉(凶)을 피하고 길(吉)을 좇는 뜻으로 역시 천담복인 참포를 입었다. 또한 왕이 능(陵)에 친히 배례(拜禮)할 때 천담복을 입으며(『영조실록』 9년 9월 10일), 일식(日食)이나 월식(月食)이 있을 때 왕이 각사(各司)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기도하는 의례인 구식(求式)에 입었다.

참고문헌

  • 『오례의(五禮儀)』
  • 유희경, 『한국복식사연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 이영주, 「조선시대 國喪 服制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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