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룡포(袞龍袍)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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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곤룡포 |
한글표제 | 곤룡포 |
한자표제 | 袞龍袍 |
동의어 | 곤복(袞服), 곤의(袞衣), 곤포(袞袍), 망포(蝄袍), 어곤(御袞), 용포(龍袍) |
관련어 | 단령(團領), 원령(圓領), 자적용포(紫的龍袍), 황룡포(黃龍袍), 흑룡포(黑龍袍) |
분야 | 생활·풍속/의생활/의복 |
유형 | 의복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대한제국 |
왕대 | 태조~순종 |
집필자 | 이은주 |
용도 | 시무복(視務服)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곤룡포(袞龍袍)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6년 3월 26일 |
조선과 대한제국시기 왕이 시무복(視務服)으로 입던 정복(正服).
개설
곤룡포(袞龍袍)는 상복(常服)에 사용된 용보(龍補) 장식의 원령포(圓領袍)로, 용포(龍袍)·망포(蟒袍)·어곤(御袞)이라고도 한다. 관(冠), 포(袍), 대(帶), 화(靴)로 구성되었다. 신분에 따라 곤룡포의 색상에 차이가 있었으며 용보의 형태와 문양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포(袍)는 우리 고유의 기본 복제인 저고리와 바지 위에 입었던 겉옷을 말한다.
황제와 왕은 원형의 오조룡보(五爪龍補)를 등과 가슴, 양쪽 어깨에 각각 사용하였으며, 왕세자는 원형의 사조룡보(四爪龍補) 4장을, 왕세손은 방형의 삼조룡보(三爪龍補)를 가슴과 등에만 부착하였다.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서례(序例)에 따르면 곤룡포의 옷감은 계절에 따라 기후에 맞는 것을 사용하였는데, 겨울철에는 대홍단(大紅緞), 여름철에는 대홍사(大紅紗)를 사용하였으며, 무늬는 운문(雲紋)을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곤룡포는 명나라의 제도를 수용한 것이다. 『대명회전(大明會典)』에 따르면 1405년(명 영락 3)에 친왕(親王)의 상복(上服)을 제정하였는데, 황제의 상복을 상세히 살펴보면, 관(冠)은 절각(折角)이 위를 향한 오사모(烏紗帽)로 익선관(翼善冠)이라 하였으며, 포는 황색인데 깃은 둥글고 소매는 좁았다. 포의 앞뒤와 양 어깨에는 직금반룡(織金盤龍)을 장식하였다. 허리에는 옥대(玉帶)를 둘렀으며 피화(皮靴)를 신는다고 하였다. 황태자는 황제와 포의 색상만 다른 적색을 사용하였다.
1444년(세종 26) 3월 명나라에서 면복(冕服) 일습(一襲)과 함께 보내온 상복 일습 중에 저사대홍직금곤룡암골타운포(紵絲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와 사대홍직금곤룡암골타운포(紗大紅織金袞龍暗骨朶雲袍), 나대홍직금곤룡포(羅大紅織金袞龍袍)가 포함되어 있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친왕의 곤룡포에는 대홍색(帶紅色)과 홍색을 사용하였다(『세종실록』 26년 3월 26일).
한편 경기전(慶基殿) 등에 소장되어 있는 「태조어진」은 조선전기에 사용되었던 익선관과 곤룡포의 모습을 보여 준다. 태조는 청색의 곤룡포를 착용하고 있는데, 이를 우리나라의 방위인 동방(東方)의 청색과 연결 짓는 견해도 있으나 아직 곤룡포의 색상에 관한 규정이 정립되기 전의 상태인 것으로 짐작된다. 대한제국으로 이름을 바꾼 후 고종은 황제가 입는 황색 곤룡포를 착용하였다. 이를 황룡포(黃龍袍) 또는 황포(黃袍)라고 하였다.
곤룡포에 부착하는 용보(龍補)는 초기에는 직조된 것을 사용하였으나 후기에는 점차 수를 놓아 단령(團領)에 꿰매 붙이는 방식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보에 묘사된 용의 발가락 수는 신분을 구분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일반적으로 왕은 오조룡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존하는 경기전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 임신(壬申) 이모본(移模本)이기는 하지만 조선전기의 도상(圖像) 형식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태조의 어진에는 가슴과 등, 양 어깨에 오조룡의 금색 용보가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1449년(세종 31) 기록에 의하면, 세종은 일찍이 사조룡의(四爪龍衣)를 입었으나 1444년 명나라에서 오조룡보의 곤룡포를 하사한 후 오조룡보를 착용하였으며, 1449년경부터 세자가 사조룡보를 착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태
곤룡포는 문무백관이 입는 단령과 같은 형태이다. 둥근 깃을 오른섶, 즉 우임(右衽)으로 여며 입도록 만들어졌으며, 좌우 겨드랑이 아래로 트임이 있고 앞뒤 자락에 각각 무(武)를 달았다. 조선전기부터 단령 제도가 사라질 때까지 무는 여러 차례 변화하는데, 이 때문에 무의 형태만으로도 대략적인 시기를 알 수 있다. 소매통 역시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 초기에는 40㎝ 내외로 좁았으나 조선후기에는 60~70㎝가 되는 광수(廣袖)로 변하였다. 그러나 1884년(고종 21)에는 조선전기의 반령착수(盤領窄袖) 제도를 따르면서 점차 소매통이 좁아졌다.
용도
왕이 상시 정사(政事)를 볼 때, 그리고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의례, 곧 중국에서 보낸 칙서를 받을 때나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연향이나 상참의(常參儀) 때에 착용하였다. 왕세자 역시 평상시나 서연을 할 때, 그리고 면복과 원유관복(遠遊冠服), 공복을 입지 않는 각종 의례에서 곤룡포를 착용하였다.
참고문헌
- 『대명회전(大明會典)』
-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