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균(朴弼均)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박필균 |
한글표제 | 박필균 |
한자표제 | 朴弼均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영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정보(正甫) |
시호 | 장간(章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85년(숙종 11) |
사망 | 1760년(영조 36) 8월 2일 |
본관 | 반남(潘南) |
증조부 | 박미(朴瀰) |
조부 | 박세교(朴世橋) |
부 | 박태길(朴泰吉) |
모_외조 | 칠원 윤씨(漆原尹氏): 윤선적(尹宣績)의 딸 |
처_장인 | 여주 이씨(驪州李氏) : 이응(李膺)의 딸 →(자녀)1남 |
자녀 | (1자)박사유(朴師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필균(朴弼均) |
총론
[1685년(숙종 11)~1760년(영조 36) = 76세]. 조선 후기 영조(英祖)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과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시호는 장간(章簡)이고, 자는 정보(正甫)이며, 초명은 박필현(朴弼賢)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태길(朴泰吉)이고, 어머니 칠원 윤씨(漆原尹氏)는 진사(進士)윤선적(尹宣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첨정(僉正)박세교(朴世橋)이며, 증조할아버지는 금양군(錦陽君)박미(朴瀰)이고, 증조할머니는 선조(宣祖)의 다섯째 딸 정안옹주(貞安翁主)이다. 박세채(朴世采)가 종숙부이다.
영조 시대 활동
그는 어려서부터 종숙부인 박세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1725년(영조 1)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며, 그 해 5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가 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1년 5월 17일, 『방목(榜目)』] 1729년(영조 5) 1월 예문관(藝文館)봉교(奉敎)가 되었다가, 그 해 12월에 삭직(削職)되어 별겸춘추(別兼春秋)에 차출(差出)되었다.[『영조실록』영조 5년 1월 1일, 영조 5년 12월 25일] 1730년(영조 6) 6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양조(兩朝)의 변무(辨誣)와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의 신원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다.[『영조실록』영조 6년 6월 23일, 영조 6년 8월 19일] 그러나 이것이 사당(私黨)을 옹호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그 해 8월에 파직되었으나, 다른 대간들의 비호에 힘입어 1731년(영조 7) 4월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6년 8월 20일, 영조 6년 8월 30일, 영조 7년 4월 20일]
1733년(영조 9) 4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을 시작으로, 홍문관 교리(校理)와 사헌부 지평(持平), 홍문관 수찬(修撰), 사간원 정언 등을 번갈아 하였다.[『영조실록』영조 9년 4월 4일, 영조 9년 5월 12일, 영조 9년 5월 16일, 영조 10년 1월 4일, 영조 14년 9월 21일] 그러다가 1740년(영조 16) 6월 승정원(承政院) 예방승지(禮房承旨)를 거쳐, 그 해 8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6년 8월 16일] 1741년(영조 17) 6월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고, 그 해 8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으며, 그 해 12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17년 6월 2일, 영조 17년 8월 15일, 영조 17년 12월 1일] 1744년(영조 20) 2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20년 2월 28일] 1748년(영조 24) 3월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고, 1750년(영조 26) 2월 호조 참판이 되었다.[『영조실록』영조 24년 3월 25일, 영조 26년 2월 25일]
1754년(영조 30) 3월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는데, 이 때 그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서연(書筵)을 중지한 잘못과 조정의 언로폐쇄, 과거제의 문란 및 백관들의 기강의 해이함을 진계(陳戒)하는 상소를 올려 인정을 받았다.[『영조실록』영조 30년 3월 22일, 영조 30년 4월 3일] 그는 그 뒤 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으며, 1758년(영조 34) 7월에는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가 되었다.[『영조실록』영조 34년 7월 24일] 1760년(영조 36) 8월 2일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는 76세였다.[『영조실록』영조 36년 8월 2일, 『연암집(燕巖集)』]
성품과 일화
박필균(朴弼均)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자못 한소(寒素)하여 벼슬에 있을 때 청백리로 알려졌으며, 깨끗한 선비라는 평을 받았다.[『영조실록』영조 36년 8월 2일] 영조는 그의 나이가 많은 것을 불쌍히 여기고 이어서 그의 마음이 편안하고 욕심이 없는 것을 칭찬한 다음, 후한(後漢) 탁무(卓茂)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특별히 중추원 지사에 제수하였다.[『영조실록』영조 34년 7월 24일]
후손
시호는 장간이다. 부인 여주 이씨(驪州李氏)는 이응(李膺)의 딸인데, 자녀는 1남 박사유(朴師愈)를 두었다. 손자는 연암(燕巖)박지원(朴趾源)이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암집(燕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