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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6일 (수) 14:33 판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향(宴享)과 조의(朝儀) 때 음악을 연주하는 자들이 입던 옷.

개설

『예기(禮記)』 「악기(樂記)」에 따르면 ‘악(樂)’은 호오(好惡)를 같이 하도록 하는 것이고, ‘예(禮)’는 귀천을 구별하도록 하는 것이라 하였다. 호오가 같을 때는 서로 친하고, 귀천의 구별이 있을 때는 서로 공경한다. 악이 지나치면 유만(流慢)해지고 예가 지나치면 친속이 이산(離散)되므로, 성정을 화합시키고 용모를 꾸미는 것은 예악의 일이라 하였다.

우리나라의 악무(樂舞)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제천 행사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음악과 무용이 따랐을 것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음악과 무용을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고, 백제금동대향로와 신라시대 사찰과 부도 등에서도 음악을 연주하는 주악상의 모습이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포구락(抛毬樂)을 비롯한 궁중정재(宮中呈才)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궁중에서 연향과 조의 때 연주하던 연례악(宴禮樂)이 있었다. 연례악은 악(樂)·가(歌)·무(舞)로 구성되면서 궁중의 연회의 목적에 따라 진연(進宴)·진찬(進饌)·진작(進爵)으로 불리면서 행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 연례악의 기본은 『악학궤범(樂學軌範)』을 중심으로 하여 왕조에 따라서 제도의 차이를 보이지만, 이를 연주하는 악공들의 악공복(樂工服)은 변하지 않았다. 악공복은 세종대에 정비된 복두(幞頭)에 홍단령(紅團領), 오정대(烏鞓帶), 오피화(烏皮靴)의 제도가 거의 모든 왕조를 거쳐 지켜졌다.

연원 및 변천

삼국시대 악인(樂人)의 복식에 대해서는 『통전(通典)』에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고구려의 악공은 새털로 장식한 자라모(紫羅帽)를 쓰고 황색 큰 옷소매[黃大袖] 옷에 자라대(紫羅帶)를 띠고, 대구고(大口袴)에 붉은 가죽신[赤皮鞾]를 신는다고 하였다. 백제의 음악에 대한 기록으로는, 음악을 맡은 공인(工人)이 죽은 뒤 없어졌다가 후에 다시 살아났으나 음기(音伎)가 많이 빠졌다고 되어 있을 뿐 자세한 것이 없다. 따라서 악인의 복식에 대한 것도 알기 어렵다.

신라의 악(樂)은 3죽(竹)·3현(絃)·박판(拍板)·대고(大鼓)·가무(歌舞)로 나뉘어 있다. 807년(신라 애장왕 8) 궁중에서 연행(演行)이 이루어졌을 때 처음으로 사내금(思內琴)이 연주되었다. 신라시대의 악공은 모두 척(尺)이라 하였는데, 사내금에서 춤[舞]을 담당하던 무척(舞尺) 4명은 푸른 옷[靑衣]을 입었고, 금척(琴尺) 1명은 붉은 옷[赤衣], 가척(歌尺) 5명은 채의(彩衣)를 입었으며, 수선(繡扇)을 들고 금루대(金縷帶)를 띠었다. 사내금에 이어 대금무(碓琴舞)를 연주할 때는 무척이 적의(赤衣)를 입고, 금척은 청의(靑衣)를 입었다고 전해진다. 신라의 복식 형태에 대해서도 이 이상 자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없다. 여기서 무척이 사내금에서는 청의를 입었으나 대금무에서는 적의를 입고, 금척 역시 사내금에서는 적의를 입었으나 대금무에서는 청의를 입었다는 내용은 주목할 만하다.

『고려도경(高麗圖經)』에 보면 고려의 음악은 한결같이 조화롭다고 표현하고 있다. 고려 음악은 당악과 향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악은 중국 음악이고 향악은 대체로 호악(胡樂)류이다. 고려시대 또한 사료가 부족하여 악공복에 대한 정확한 제도는 알 수 없다. 다만, 사절의 행렬과 관련하여 백희(百戱) 다음으로 악부(樂部)의 행렬이 이어졌는데, 악부의 가공(歌工)과 악색(樂色)들은 3등급의 복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음악을 천인 출신들이 담당해 오면서 그들을 악공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조선초기에도 음악 연주를 담당한 음악인을 통칭하여 악공이라고 하였다. 악공은 특히 아악서(雅樂署)·전악서(典樂署)·관습도감(慣習都鑑) 등에 소속된 음악인을 일컬었다. 악공을 비롯하여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을 일컫는 폭넓은 개념으로 ‘공인’이 있었는데, 공인은 지위와 역할에 따라 세분화되어 악사(樂師)·전악(典樂)·악생(樂生)·악공으로 구분되었다. 1457년(세조 3)에 장악서(掌樂署)가 설치되면서 음악인을 모두 이곳에 소속시키고 악공과 악생을 구분하여 향악과 당악의 연주자는 악공, 아악 연주자는 악생(樂生)이라 하였다(『세조실록』 3년 11월 27일).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악인의 복식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05년(태종 5) 9월 왕이 예조(禮曹)에 명하여 사알(司謁)·사약(司鑰)·서방색(書房色)·무대(舞隊)의 관복(冠服)을 상정하게 하였다는 내용이다. 무대는 궁중에서 무용과 고취악을 담당했던 잡직으로 사알·사약·서방색 등과 같은 체아직(遞兒職)이었는데, 예조에서 정한 무대의 복식을 보면 채화복두(綵畫幞頭)·청포(靑袍)·각대(角帶)·조화(皂靴)를 착용하고 홀(笏)은 없었다(『태종실록』 5년 9월 29일).

이어 1430년(세종 12) 2월에는 박연(朴堧)이 악공의 교육과 공인의 제복에 관한 상소를 올렸는데, 당시 악공복의 현황과 관련하여 개선해야 할 점 등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었다(『세종실록』 12년 2월 19일). 이 상소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현악(懸樂)의 악공복으로 닷새[五升]의 굵은 베를 붉게 물들인 포(袍)를 착용하였고, 중단(中單)은 입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일정한 재봉법이 없고, 옷자락 및 소매길이가 모두 달라 너무 짧거나 길고, 소매 폭 또한 너무 넓거나 좁아서 속에 입은 평상복을 가리지 못하였다고 나와 있다. 신은 쇠가죽과 말가죽에 검은 물을 들여 만들어 비를 맞으면 오그라져 신을 수 없었고, 포 또한 한 벌이어서 제사 때마다 수차례 착용하여 외관이 더럽고 보관 및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폐단에 대해 예조에서는 12월에 중국의 제도를 살펴 보고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당에서는 당하(堂下)의 고인(鼓人)·고취(鼓吹)·안공(按工)은 평건책(平巾幘)을 쓰되, 고인은 붉은 소창옷[朱褠衣]에 가죽띠[革帶]와 검정가죽신[烏皮履]을 신고, 고취와 안공은 백련포(白練布)로 지은 저고리[襠]를 더 입는다고 하였다. 송에서는 대조회(大朝會)에 악공은 흑개책(黑介幘)을 쓰고, 휘(麾)를 잡은 사람[執麾人]은 평건책(平巾幘)을 쓰며, 모두 비수난삼(緋綉鸞衫)과 백견(白絹)으로 지은 협고(裌袴)와 말대(抹帶)를 착용한다고 하였다.

또 악정(樂正)은 붉은 공복[絳公服]에 방심곡령(方心曲領), 비백대대(緋白大帶), 금동혁대(金同革帶), 검정가죽신[烏皮履]을 착용하므로, 조선에서도 조회(朝會)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공인의 관복을 중국의 제도에 따라 모두 난대(襴帶)를 만들어 사용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였다(『세종실록』 12년 12월 15일).

이어 1432년(세종 14) 12월에는 악학(樂學)에서 아악서전악(典樂)의 관복과 전악서전악의 관복에 차등을 두어, 부전악(副典樂)의 관복은 붉은 공복과 복두(幞頭)를 쓰고 비백색(緋白色) 대대(大帶)와 금동으로 장식한 혁대(革帶)를 띠고 검정가죽신을 신도록 하였다. 1433년(세종 15)에는 객사(客使)를 연회할 때 쓰는 남악의 복색에 대해 부용관(芙蓉冠)과 녹운관(綠雲冠)을 쓰게 하였고, 신에는 흰 실로 구름과 꽃무늬를 쓰도록 정하였다. 또한 중단은 여름에는 모시를 쓰고 겨울에는 명주를 쓰며, 혁대의 색은 삼록(三綠)을 쓰고 주석 장식을 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4년 12월 19일).

같은 해 5월에는 조회악(朝會樂)과는 달리 제향 때는 비와 눈을 피할 수 없어 악공의 난삼(鸞衫) 흉배가 더러워지기 쉬운 점을 고려하여 흉배를 흰 명주 바탕으로 하고 당진채(唐眞彩)를 쓰지 않으며, 단목괴화(丹木槐花)·청화면연지(靑花緜燕脂)로 물들이게 하였다(『세종실록』 15년 5월 21일). 7월에는 초하루 조하(朝賀)의 헌가악(軒架樂)을 베풀 때 악공의 의관을 중단 없이 난삼을 입고 개책(介幘)을 착용하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5년 7월 4일). 또 검정가죽신을 신되 여러 번 비와 이슬을 맞아 줄어들고 더렵혀졌을 경우, 허락을 받아 아일(衙日) 조참(朝參) 때 신던 것을 착용하도록 하였다.

이듬해 1434년(세종 16)에는 다시 종묘 영녕전의 제사에 착용하는 악공복을 한 벌씩 따로 만들게 하였다(『세종실록』16년 1월 19일). 악공복은 봉상시(奉常寺)에서 만들었는데, 봉상시에서 수납한 노비공포(奴婢貢布)를 이용하여 당상 공인들의 옷은 명주로, 당하 공인들의 옷은 베[綿布]로 만들도록 하였다. 또한 종묘와 영녕전의 옛 관복을 보수해서 비가 올 때는 헌옷을 입도록 하였다. 1448년(세종 30) 10월에는 악공은 일이 있을 때에만 단령을 착용하도록 허락하였고, 이듬해 의정부에서는 예조에서 올린 정문(呈文)에 따라 전악서의 악공은 평상시에는 직령액주음첩리(直領腋注音帖裏)를 입고, 차비(差備)할 때만 단령을 입으며, 그 색은 도홍색과 분홍색 등 간색을 입도록 하였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조선초기의 악공은 채화복두에 청포를 입고 각대와 검정색 신발을 착용하였다가 세종대에 들어서 크고 작은 변화를 거쳐 1430년에는 송나라의 제도에 따라 난삼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1432년에는 제향 시 난삼에 흉배를 달고 개책을 쓰도록 하였고, 1448년 10월에는 홍단령을 입게 하였는데 악공들의 홍색은 정색이 아닌 간색의 도홍색, 분홍색 등이었다. 이때 흉배는 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형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나와 있는 종묘 영녕전 등가악(登歌樂)에서 악공 복식은 세조대의 제도와 같다. 악사 1명은 복두에 초록생초삼[綠綃衫]을 입고, 오정대·흑피화(黑皮靴)를 착용했으며, 악공 36명은 모두 개책을 쓰고, 붉은 난삼[緋鸞衫]에 흰 명주중단[白紬中單]을 입었으며, 백초대(白綃帶)를 띠고 백포말(白布襪)에 검정가죽신을 신었다. 이는 헌가악을 행할 때 악공의 관복과도 같은 것이었다.

문소전 친행(親行) 시 전상악(殿上樂)에서 악사 1명은 복두에 녹초삼(綠綃衫)을 입고 오정대를 띠고 오피화를 신었다. 악공 39명은 모두 검은 관[烏冠]을 썼는데, 그 관에 붉은말액[紅抹額]을 동이고 관 앞에는 꽃을 꽂았다. 그리고 모란꽃[牧丹] 흉배를 단 홍주삼(紅紬衫)을 입었다. 전정헌가(殿庭軒架) 시에는 악사 2명은 복두를 쓰고 녹초삼·오정대·오피화를 착용했다. 악공 59명은 모두 꽃을 그린 채화복두를 쓰고, 작은 꽃을 그린 흉배를 단 홍색 명주삼을 입었으며 검은 가죽띠를 띠었다.

한편 악공복으로 단령이 아닌 융복(戎服)을 입었을 때도 있었는데, 이는 인조 초기 반정에 의해 세워진 왕조의 분위기로 인해 호조(戶曹)에서 악공에게 융복을 입힐 것을 청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후 다시 구제도를 따라 홍단령을 착용하였다. 이러한 홍단령의 착용은 1668년(현종 9) 현종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에게 지팡이와 의자를 하사하고 연회를 베푸는 장면을 그린 『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帖)』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악공들은 홍단령을 착용하고 집박(執拍)은 녹단령을 입고 있다.

1901년(광무 5) 거행된 헌종왕후의 칠순 진찬 행사 광경을 묘사한 10곡도병(曲圖屛)에는 명헌왕후의 송수(頌壽)를 기원하는 궁중정재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악사는 사모를 쓰고 흑단령을 입고 품대에 흑화를 착용하였다. 전악은 모라복두를 쓰고, 안은 남색주를 받친 녹초삼을 착용했으며, 야대(也帶)를 띠고 흑화를 신었다. 악공은 화화복두(畵花幞頭)와 홍단령에 오정대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었다. 따라서 조선중기 이후의 악공복은 1448년에 확정된 제도가 대한제국 말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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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도경(高麗圖經)』
  • 『순조기축진찬의궤(純祖己丑進饌儀軌)』
  • 『악학궤범(樂學軌範)』
  • 『예기(禮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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