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생(樂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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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악원 소속으로 아악(雅樂) 연주와 일무(佾舞)를 담당한 악인(樂人).

개설

악생(樂生)은 조선시대에 각종 제례에서 아악을 담당했다. 이들의 직무는 평민들이 부담하는 국역(國役)의 일종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악생을 동원하였다. 향악과 당악을 담당한 악공은 우방(右坊)에 속하고 관노(官奴) 가운데서 뽑았다. 이에 반해, 악생은 좌방(左坊)에 속했고 양인(良人) 출신이었다.

담당 직무

악생은 사직(社稷)·각 산천(山川)·석전(釋奠) 등의 제향에서 아악기 연주와 일무를 담당했다. 유교 사상에 기초를 둔 조선시대에 조상을 받드는 일은 나라의 근본과 관련된 것이었다. 따라서 주로 제례에 사용하던 아악을 담당한 악생의 직무는 중요하게 여겨졌다. 악생들은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는 악공들과 함께 민간 잔치에 나가서 연주하기도 했다. 때로는 관원들이 이러한 악생들을 일반 악공들과 함께 노비나 심부름꾼 같은 추종(騶從)이나 사령(使令)으로 삼아 데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악생들이 맡았던 제례가 중요하게 여겨졌던 만큼 삼가야 할 일이 되었다.

『증보문헌비고』「악고(樂考) 16」에 의하면, 좌방에 속한 악생은 편종, 편경, 비파, 소(簫), 생(笙), 훈(塤), 지(篪), 약(籥), 적(笛)과 같은 아악기를 맡았다. 이들의 본업은 아악 14궁(宮)인 황종궁, 대려궁, 태주궁, 협종궁, 고선궁, 중려궁, 유빈궁, 임종궁, 이칙궁, 남려궁, 응종궁, 송신 황종궁, 송신 협종궁, 송신 임종궁의 연주였다. 노래 41장(章)인 황단 5장, 사직 4장, 풍운뇌우 5장, 문선왕묘 10장, 선농 4장, 선잠 3장, 우사 8장, 둑소 2장을 겸업으로 했다.

변천

조선초에는 악생이 주로 아악을 담당하는 아악서에 속했다. 후에 속악(俗樂) 즉,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는 전악서와 함께 장악서, 후에 장악원으로 합쳐지면서 악생은 장악서 내 좌방에 속하게 되었다.

악생의 수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297명으로 후보생이 100명인데, 임진왜란 이후 1604년(선조 37)에 144명으로 줄였다. 1629년(인조 7)에 장악원이 아뢴 내용에 따르면, 당시에는 출사하고 있는 악생의 수가 50명도 채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악생을 서울 사람으로 뽑아 제향이 없을 때는 자기 집에 물러가 있게 했는데 임진왜란 후에도 흩어진 악생들이 모이지 않았다. 빠진 악생을 채울 길이 없어 부득이 각 지방에 나누어 배정했으나 군(郡)이나 현(縣)에서 배정된 수를 채우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악생의 수는 턱없이 모자랐다. 따라서 지방 악생 가운데 출사하지 않는 자는 서울의 보병(步兵)으로 출사한 자를 보조하는 자로 바꾸어 정하여 출사한 자를 돕도록 했다. 이후 1778년(정조 2)에는 악생 90명과 후보생들이 있었다.

아악을 담당하는 악생은 속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구별되었지만 향악과 아악이 별개가 아니라는 관점에서 1458년(세조 4)에는 악생과 악공 가운데 나이가 어리고 장래가 있는 자에게 아악과 속악을 모두 가르쳤다. 그리고 실력을 평가하는 취재(取才) 때 아악과 속악에 모두 통달한 자를 체아직에 제수하게 하였다. 악생의 체아직에는 5품 가성랑령(嘉成郞令), 6품 순화랑부령(純和郞副令), 7품 사음랑(司音郞), 8품 화성랑승(和聲郞丞), 9품 화절랑부승(和節郞副丞) 등이 있었다. 그 수는 전체적인 악생의 수 감소와 함께 줄어들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국립국악원 편,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신라 음성서에서 국립국악원 개원까지』, 국립국악원, 2001.
  • 국립국악원 편, 『종묘제례악의 전승』, 국립국악원, 2003.
  • 송지원, 「조선시대 장악원의 악인과 음악교육 연구」, 『한국음악연구』 4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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