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회악(朝會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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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에서 왕과 신하가 조회할 때 수반되었던 음악.

개설

궁중에서 왕과 신하가 조회할 때 연주되었던 음악이다. 세종대에는 조회용 아악(雅樂)을 만들어 썼다. 왕이 등장하거나 퇴장할 때, 신하들이 절할 때 음악이 연주되었다.

연원 및 변천

조회악(朝會樂)은 조선초기부터 후기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세종대 이전에는 당악을 많이 사용하였으며, 세종대에는 아악을 별도로 제정하여 조회 때 썼다. 세종대 조회 아악은 세종대 당시에만 활용되었을 뿐 그 이후에는 연주되지 않았다. 다시 당악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세종대에 창작된 신악의 하나인 여민락도 번갈아가며 연주되었다.

절차 및 내용

조선은 유학(儒學)을 나라의 이념으로 채택했기 때문에 유학적 사유의 중요한 틀인 예악사상(禮樂思想)을 국가적 차원에서 구현하고 이를 제도적으로 시행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은 세종대에 펼쳐진 대규모 문물 정비 사업으로 현실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궁중음악도 정리되었으니, 궁중의 각종 의례에서 쓰이는 선율을 점검하여 새로 마련하고, 악기를 만들며, 춤을 창작하는 등의 일들로 이루어졌다. 이때 조회에서 사용하는 음악도 점검되었다. 세종 초기까지 조회악으로는 주로 당악이 쓰였다. 새롭게 아악을 써보고자 하는 세종의 의견이 더해져(『세종실록』 12년 9월 11일) 조회 아악을 만들게 되었다.

조회 아악에 관한 일은 박연(朴堧)이 주도하였고 남급(南汲)이 도왔다. 중국의 옛 제도[古制]를 세종대 음악 정리 사업의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박연 등은 송나라의 진연이 편찬한 『악서(樂書)』를 근거 자료로 활용하였다. 박연은 이때 헌가(軒架) 악대 하나만 쓸 것, 조회 아악용 악기를 별도로 제작할 것, 악기의 재료로는 강인하고 내구성 있는 목재를 쓸 것, 그 달에 해당되는 선율로 음악을 바꿔서 연주하는 선궁법(旋宮法)을 적용할 것 등을 건의하여 왕에게 허락을 받았다(『세종실록』 12년 9월 21일).

세종대에 만들어진 조회 아악의 악곡은 총 312곡으로, 26종의 기본 선율과 이를 조옮김하여 얻은 286곡을 합친 것이다. 즉 26종의 기본 선율은 황종궁(黃鍾宮)이고, 대려(大呂) 이하 응종(應鐘)까지 각각 11율로 조옮김하여 286곡을 산출한 것이었다. 이는 주희의『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학례(學禮)」에 수록된 「풍아십이시보(風雅十二詩譜)」 중 국풍(國風) 6편은 제외한 채 소아(小雅) 6편만을 선택하여 변용한 결과물이었다. 소아의 선율만 채택한 이유는 그것이 아악의 기초적인 형태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세종대 만든 조회 아악의 음악적 특징으로는 1자 1음식으로 가사 붙이는 법, 7음 음계의 선율 구성, 12율 4청성의 음역, 시작음과 끝음이 같은 기조필곡(起調畢曲)의 원칙 등이 있다.

조회 아악의 선율은 악보로 제작되었으며(『세종실록』 12년 윤12월 1일) 정월에는 태주궁의 선율을, 2월에는 협종궁의 선율을, 3월에는 고선궁의 선율을 사용하는 등 조회하는 달에 해당되는 악곡을 선별하여 연주하는 방식을 활용되었다.

새로 마련한 조회 아악을 연주할 악기도 별도로 제작되었다. 핵심 악기인 편종은 한강에서, 편경은 그 재료인 경석(磬石)이 나는 경기도 남양에서 만들어 공급하였다(『세종실록』 15년 1월 1일). 그리고 편종과 편경의 악기틀은 제사에 쓰는 악기와 구별되도록 하였다. 제사용은 검소하고 질박하게 만든 반면 조회용은 정교하게 제작하였다. 편종의 장식물인 유소(流蘇)·끈·채색 구슬[彩珠]의 경우 제사용은 무명실을 재료로 삼은 반면 조회용은 여러 가지 색깔의 실을 써서 차별화하였다.

조회 아악을 연주할 악인들의 관복도 새로 마련하였다. 중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예를 참조하여 난대(襴帶) 사용을 시도하기도 하였다(『세종실록』 12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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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림1_00015245_<세종대 조례 헌가(『世宗實錄五禮』권132「嘉禮序禮」>

세종대에 새로 만든 조회아악은 1431년(세종 13) 1월 1일에 처음 연주되었다. 세종은 박연과 남급을 비롯하여 조회 아악이 마련되기까지 힘쓴 관련자 모두의 공로를 인정하면서 상을 내렸고(『세종실록』 13년 1월 11일), 조회뿐 아니라 새해 아침 또는 동지 때 군신들이 함께하는 잔치였던 회례연(會禮宴)과 노인들을 초청해 열었던 연회인 양로연(養老宴) 등에서도 사용하도록 제도화하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기록된 성종대 조회악도 아악이 아니었으며 당악이 많았으니 악곡명은 다음과 같다. 왕이 출궁할 때 여민락만(與民樂慢) 또는 성수무강만(聖壽無疆慢), 신하들이 절할 때 낙양춘(洛陽春), 왕이 환궁할 때 여민락령(與民樂令)·보허자령(步虛子令)·환궁악(還宮樂)이 사용되었다. 이중 여민락만과 여민락령은 신악이었으며, 나머지는 당악이었다.

조선시대의 조회악은 왕과 신하가 모이는 공식적인 궁중 행사에서 장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청각적인 역할을 담당했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악서(樂書)』
  • 『악학궤범(樂學軌範)』
  • 『난계선생유고(蘭溪先生遺藁)』
  •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 송혜진, 『한국 아악사 연구』, 민속원, 2000.
  • 장사훈, 『세종조 음악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82.
  • 정화순, 『조선 세종대 조회아악 연구』, 민속원,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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