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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종친·문관·잡직의 임명과 증직(贈職) 등 인사 관련 업무를 담당하던 이조(吏曹)의 속사.

개설

문선사는 이조의 속사 중 하나로, 종친이나 문신의 임명, 녹패(祿牌)나 문과 급제자 등에 대한 교지(敎旨)의 발급, 관원의 취재(取才)개명(改名) 등 인사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다. 1405년(태종 5)에 설치되었고 1894년(고종 31)에 혁파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문선사는 1405년 3월 태종의 육조(六曹) 중심의 국정 운영 도모와 관련되어 이조 등 육조를 정3품아문에서 정2품아문으로 격상하여 정책기관으로 삼고 육조의 구체적인 업무와 속사 및 속아문(屬衙門) 규정을 정하면서 설치된 이조의 속사이다(『태종실록』 5년 3월 1일). 속사란 각 조에 부속된 하급 관청을 말한다. 이조의 속사로는 문선사와 함께 동시에 설치된 고훈사(考勳司), 고공사(考功司)가 있다.

조직 및 역할

문선사는 이조에 소속된 정5품의 정랑(正郞) 1명과 정6품의 좌랑(佐郞) 1명이 관장하였으며, 예하에 이속(吏屬)인 영사(令史)가 소속되었다(『문종실록』 2년 2월 6일). 문선사가 관직 제수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기에 이를 주관하는 정랑이나 좌랑의 임명에 신중을 기하였다. 혹시라도 문제점이 발견되면 대간(臺諫)이 탄핵하였고(『태종실록』 11년 4월 14일), 만약 정랑 등이 대간의 탄핵을 받으면 그 책임을 지고 이조의 당상관이 피혐(避嫌)하며 사직을 청하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7년 12월 9일).

문선사는 종친이나 문관·잡직(雜織)의 임명과 증직을 주 업무로 하였다. 종친과 관련해 왕손(王孫)은 10세에 봉작하며, 종친은 15세에 관직을 부여하였다. 이조 판서를 비롯해 참판의 인사를 주도하였고 승지의 차출이나 규장각 제학 또는 직제학과 부제학, 의금부나 춘추관·경연·성균관의 관원 등 주요 문신의 인사를 주관하였다.

증직은 종친이나 문·무관으로 실직(實職) 2품 이상의 관원에 대해서 부여하였으며, 의빈(儀賓)이나 종친, 국구(國舅) 등을 비롯해 효행이 특이한 자에게도 증직을 부여하였다.

문선사에서는 그 밖에 관원 임명장인 고신(告身) 발급을 주도하였고, 녹봉과 관련하여 매년 1월에 녹패(祿牌)를 발급하였으며, 문과 급제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고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발급했다. 또한 책례도감(冊禮都監)이나 가례도감(嘉禮都監)·존호도감(尊號都監) 등 각종 임시 관서인 도감이 설치되면 업무를 담당할 관원을 차출하였다. 과거시험이 시행될 때 시관(試官)을 차출하였고, 생원·진사시를 거치지 않은 사람을 관원으로 차출하거나 의례 진행을 주관하던 인의(引儀) 등의 취재도 담당하였다. 이 밖에도 문선사는 관원의 개명 관련 사무, 뇌물을 받았거나 윤리와 관련된 죄를 지은 관원의 명단인 장오패상인녹안(贓汚敗常人錄案)의 관리를 맡았다. 이는 모두 관직의 제수와 관련된 업무였다.

변천

1783년(정조 7) 12월 26일 왕은 자신이 주관하는 친향(親享) 때 참여하는 제관(祭官)의 명단 관리가 소홀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리고 차후에는 친향과 섭향(攝享)을 가리지 말고 속절제(俗節祭)와 삭망제(朔望祭) 등 모든 제사의 헌관(獻官)과 여러 집사(執事)의 명단을 문선사의 등록(謄錄)에 수록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1894년(고종 31) 이조가 혁파되면서 그 소속인 문선사 역시 폐지되었다.

참고문헌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육전조례(六典條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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