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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0:50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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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여관 |
한글표제 | 여관 |
한자표제 | 女官 |
동의어 | 궁관(宮官), 궁녀(宮女), 내관(內官), 내명부(內命婦) |
분야 | 정치/행정/관속 |
유형 | 직역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시대 |
왕대 | 조선시대 |
집필자 | 임혜련 |
관품 | 정일품∼종구품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여관(女官)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10년 3월 8일, 『세종실록』 12년 윤12월 16일, 『태조실록』 7년 윤5월 11일, 『태종실록』 1년 3월 9일, 『태종실록』 5년 1월 15일 |
조선시대 궁중에서 내명부(內命婦)의 품계(品階)를 받은 내관(內官)과 궁관(宮官).
개설
조선 왕조가 개창된 후 관계(官階)와 관직이 정비되면서 궁중의 여성들에게도 직제가 정비되었다. 궁중 여성들은 내명부의 품계를 받으며, 이는 크게 내관과 궁관으로 구분된다. 내관은 곧 왕과 세자의 후궁(後宮)인데 대전(大殿)과 세자궁(世子宮)으로 따로 규정되었다. 대전에는 정1품 빈(嬪)·종1품 귀인(貴人)·정2품 소의(昭儀)·종2품 숙의(淑儀)·정3품 소용(昭容)·종3품 숙용(淑容)·정4품 소원(昭媛)·종4품 숙원(淑媛)이 있었다. 세자궁에는 종2품 양제(良娣)·종3품 양원(良媛)·종4품 승휘(承徽)·종5품 소훈(昭訓)이 있었다.
한편 대전과 세자궁에서 각각 품계를 받고 담당 직무에 종사하는 궁녀 조직을 궁관이라고 한다. 궁관으로는 대전에 정5품 상궁(尙宮)·상의(尙儀)부터 종9품 주변궁(奏變宮)까지가 있었고, 세자궁에 종6품 수규(守閨)·수칙(守則)에서 종9품 장의(掌醫)까지가 있었다.
담당 직무
대전 내관의 직무는 빈·귀인은 비(妃)를 보좌하고 무녀의 예를 논하는 것, 소의·숙의는 왕비 의례의 인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소용·숙용은 제사와 빈객을 담당하였고, 소원·숙원은 연침(燕寢)과 명주, 모시 등 옷감을 다스려 헌공하게 하였다.
대전 궁관의 직무를 살펴보면, 상궁은 중궁(中宮)의 인도를 맡고 궁내 문부(文簿)의 출입을 담당하던 정6품 사기(司記)와 선전(宣傳), 계품(啓稟)을 담당하던 정7품 전언(典言)을 통솔하였다. 상의는 의례의 기거(起居)를 담당하고 빈객·조현(朝見)·연회(宴會)를 담당하던 정6품 사빈(司賓)과 정7품 전찬(典贊)을 통솔하였다. 상복(尙服)은 의복과 장식품의 수량과 공급을 담당하였고, 의복과 수식(首飾)을 담당하는 정6품 사의(司衣), 고목(膏木)과 건즐(巾櫛)을 담당했던 정7품 전식(典飾)을 통솔하였다. 상식(尙食)은 반찬과 음식의 공급을 담당하였고, 반찬을 만들던 정6품 사선(司膳), 약을 담당하던 정7품 전약(典藥)을 통솔하였다. 상침(尙寢)은 잠자리와 진어(進御)의 차례를 담당하였고, 장막 등의 설치를 담당하던 정6품 사설(司設), 등촉을 담당하였던 정7품 전등(典燈)을 통솔하였다. 상공(尙功)은 여공(女功)의 과정을 담당하였고, 의복과 재봉을 담당하던 정6품 사제(司製), 옷감을 담당하던 정7품 전채(典綵)를 통솔하였다. 이상의 각 궁관을 통솔하던 6명을 6상(尙)이라 하였다. 상정(尙正)은 궁관들의 규율과 금령, 적벌을 맡았다. 전정(典正)은 상정을 보좌하였다(『세종실록』 10년 3월 8일).
세자궁의 궁관이 담당하였던 직무로 수규는 세자빈을 인도하였고, 문서의 출납을 담당하던 장정(掌正), 서적과 교학을 담당하던 장서(掌書)를 통솔하였다. 수칙은 의례와 그 참견(參見)의 직무를 담당하였고 개봉(改封)과 길쌈을 맡은 장봉(掌縫), 재산을 관리하던 장장(掌藏)을 통솔하였다. 장식(掌食)은 음식과 술, 등불을 담당하였고, 장의는 약을 담당하였다(『세종실록』 12년 윤12월 16일).
변천
태조대에는 여관을 쓸데없는 관원이라 인식하여 제거하자는 건의가 있었다(『태조실록』 7년 윤5월 11일).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상전(太上殿)의 여관에게 월봉(月俸)을 지급하였으며, 현의(賢儀)·숙의(淑儀)·찬덕(贊德)·순덕(順德)·사의(司儀)·사침(司寢) 등의 여관을 두었다(『태종실록』 1년 3월 9일), (『태종실록』 5년 1월 15일). 여관을 내관과 궁관으로 체계적으로 정비한 것은 세종이 즉위한 후 당나라 제도를 참고하면서 이루어졌다.
1428년(세종 10)에 만들어진 내명부 직제는 관품과 명칭이 변하다가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세종 때 정5품이었던 상복·상식·상침은 종5품과 정6품으로 품계가 변경되었으며, 궁정(宮正)은 종6품으로 품계의 변화와 함께 명칭도 상정으로 바뀌었다. 사기·사빈·사의·사선·사설·사제는 명칭이 상기(尙記)·전빈(典賓)·전의(典衣)·전선(典膳)·전설(典設)·전제(典製)로 바뀌었고, 관품도 모두 정6품이었던 것이 종6품에서 종7품까지로 조정되었다. 전언·전찬·전식·전약·전등·전채·전정은 정7품이었던 것이 종7품부터 종8품까지 관품이 조정되어 법제화되었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정9품의 주궁(奏宮)·주상(奏商)·주각(奏角)과 종9품 주변징(奏變徵)·주징(奏徵)·주변궁의 궁관직도 추가로 설치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한우근 외 역;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인문연구실 편, 『(역주)경국대전: 주석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