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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 말기 김안로의 탄압'''== | =='''중종 말기 김안로의 탄압'''== | ||
− |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독서에 힘쓰다가, 1531년(중종26)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 이때 유배에서 풀려난 김안로( | + |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독서에 힘쓰다가, 1531년(중종26)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 이때 유배에서 풀려난 김안로(金安老)가 재기용되어 실권을 잡고, 세자(世子: 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여러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민기문은 성균관에서 유생(儒生) 진우(陳宇) · 유경인(柳敬仁) 등과 어울려 공부를 하였다. 그 중에서 민기문과 진우가 명성이 높았으므로, 김안로가 그들의 명성을 듣고 그 문하(門下)에 들어오게 하려고 아들을 보내어 종유(從遊)하기를 청했으나 그들이 거절하여 쫓아 보냈다. 진우 · 유경인 등이 김안로 일당의 죄악을 배척해 성토했던 적이 있는데, 1535년(중종30) 김안로가 이것을 가지고 국정을 비방했다고 논죄하며 그들을 잡아다가 대궐 뜰에서 문초하였다. 처음에 심문할 때 민기문은 진우 등과 서로 알기는 하나 모여서 역적질을 모의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형신(刑訊)을 더하자 진우 · 유경인을 만나게 된 경위와 유경인이 김안로 일파인 채무택(蔡無擇) · 이임(李任) · [[황기(黃琦)]] 등이 대간으로서 지나치게 논박한다고 비판하며 그들의 제거를 주장한 것 등을 말하였다. 진우는 비분강개하여 부책(簿責)하는 대로 대답하였다가 주모자로 몰려서 죽음을 당하였고, 나머지는 유배되었는데, 민기문도 홍산(鴻山)으로 귀양을 갔다. |
1537년(중종32) 좌의정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민기문은 즉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1538년(중종33) 중종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진강(進講)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는 [[전강(殿講)]]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게 되었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41년(중종36)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옮겼다가,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박사(博士)]] ·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43년(중종38)부터 대성(臺省)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이조의 낭관(郎官)에 여러 차례 추천되었으나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 1537년(중종32) 좌의정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민기문은 즉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1538년(중종33) 중종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진강(進講)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는 [[전강(殿講)]]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게 되었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41년(중종36)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옮겼다가,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박사(博士)]] ·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43년(중종38)부터 대성(臺省)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이조의 낭관(郎官)에 여러 차례 추천되었으나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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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명종 시대 을사사화'''== | =='''인종∼명종 시대 을사사화'''== | ||
− | 1545년 12세의 나이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 문정대비(文定大妃: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당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다투었는데, 윤임을 따르는 이들을 대윤파, 윤원형을 따르는 이들을 소윤파라 하였다. 윤원형은 중추부 지사정순붕(鄭順朋) · 병조 판서이기( | + | 1545년 12세의 나이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 문정대비(文定大妃: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당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다투었는데, 윤임을 따르는 이들을 대윤파, 윤원형을 따르는 이들을 소윤파라 하였다. 윤원형은 중추부 지사정순붕(鄭順朋) · 병조 판서이기(李芑) · 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 등과 결탁하여 옥사를 일으켜서, 윤임과 그가 등용한 사림파(士林派)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문정대비의 밀지로 [[대사헌(大司憲)]][[민제인(閔齊仁)]]과 [[대사간(大司諫)]]김광준(金光準)을 협박하여 양사(兩司)의 관원들을 모아 놓았다.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 · 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등이 봉성군(鳳城君)이완(李岏: 중종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하며 대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헌부 지평민기문을 비롯한 집의[[송희규(宋希奎)]] · 장령[[정희등(鄭希登)]] 등과 사간원 사간박광좌(朴光佐) · 헌납[[백인걸(白仁傑)]] 등 여러 대간들은 이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윤원형 일당을 탄핵하려 하였다. 윤원형 일당은 다음날 중신회의를 열어 그 자리에서 윤임과 유관 · 유인숙을 유배 보내고, 민기문을 비롯하여 송희규 · 정희등 · 박광좌 · 백인걸 등은 옥에 가두었다가 심문한 다음 파직시켰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윤임과 유관 · 유인숙은 인종의 장례 전에 처형당하였고, 대윤파의 정희등 · 나숙(羅淑) · [[박광우(朴光佑)]] 등 10여 명도 죽음을 당하였다. |
=='''양재역 벽서 사건'''== | =='''양재역 벽서 사건'''== | ||
− | 1546년(명종1) 그가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사화 때의 일로 탄핵을 당해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부제학(副提學)]]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의 벽 위에 쓰여 있던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姦臣)들이 아래에서 농권(弄權)한다.”라는 글을 고발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봉성군이완과 [[송인수(宋麟壽)]] · 이약빙(李若氷)은 처형하고, 이언적( | + | 1546년(명종1) 그가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사화 때의 일로 탄핵을 당해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부제학(副提學)]]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의 벽 위에 쓰여 있던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姦臣)들이 아래에서 농권(弄權)한다.”라는 글을 고발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봉성군이완과 [[송인수(宋麟壽)]] · 이약빙(李若氷)은 처형하고, 이언적(李彦迪) · [[노수신(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 [[권벌(權橃)]] · 백인걸 등 30여 명은 유배 보냈다. 민기문도 연루되어 임천(林川)으로 귀양갔다가 4년만인 1551년(명종6)에 백인걸 등과 함께 방환(放還)되었다. 그는 사면(赦免)을 받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면서 남과 교유하거나 벼슬하지 않았다. 당시 윤원형의 권세가 극성하였는데,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벼슬로써 유혹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
=='''명종∼선조 시대 활동'''== | =='''명종∼선조 시대 활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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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와 비문'''== | =='''묘소와 비문'''== | ||
− |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시흥) 백암리(白巖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증손자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청음(淸陰)김상헌( | + |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시흥) 백암리(白巖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증손자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과 민성휘의 친구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부인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성균관 생원 최흡(崔潝)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민이(閔涖)이고, 차남은 민계(閔洎)이며 3남은 민용(閔溶)이다. 장남 민이의 아들 [[민유부(閔有孚)]]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조 정랑을 지냈고, 손자 민유부의 아들 민성휘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판서를 지냈다. 3남 민용의 아들 [[민유경(閔有慶)]]은 문과에 급제하여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
=='''관력, 행적'''== | =='''관력, 행적'''== |
2018년 1월 9일 (화) 22:41 기준 최신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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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민기문 |
한글표제 | 민기문 |
한자표제 | 閔起文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선조 |
집필자 | 이기순 |
자 | 숙도(叔道) |
호 | 역암(櫟菴)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11년(중종6) |
사망 | 1574년(선조7) 9월 30일 |
본관 | 여흥(驪興)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금천(衿川) 백암리(白巖里)의 선영 |
증조부 | 민해(閔解) |
조부 | 민사건(閔師騫) |
부 | 민원(閔㥳) |
모_외조 | 봉화정씨(奉化鄭氏): 정숙돈(鄭叔潡)의 딸, 정문형(鄭文泂)의 손녀 |
형제 | (동생)민기정(閔起貞) |
처_장인 | 경주최씨(慶州崔氏): 최흡(崔潝)의 딸 →(자녀)3남 |
자녀 | (1자)민이(閔涖) (2자)민계(閔洎) (3자)민용(閔溶) (서자)민철(閔澈) (서자)민낙(閔洛) (서자)민달(閔澾) (서녀)한수신(韓守愼)의 첩(妾)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민기문(閔起文) |
총론
[1511년(중종6)∼1574년(선조7) = 64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문신. 자는 숙도(叔道), 호는 역암(櫟菴)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우부승지(右副承旨)민원(閔㥳)이고, 어머니 봉화정씨(奉化鄭氏)는 사직서(社稷署) 영(令)정숙돈(鄭叔潡)의 딸이며 영의정정문형(鄭文泂)의 손녀이다.
중종 말기 김안로의 탄압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으로 독서에 힘쓰다가, 1531년(중종26)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1세였다. 이때 유배에서 풀려난 김안로(金安老)가 재기용되어 실권을 잡고, 세자(世子: 인종)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여러 차례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반대파를 제거하였다. 민기문은 성균관에서 유생(儒生) 진우(陳宇) · 유경인(柳敬仁) 등과 어울려 공부를 하였다. 그 중에서 민기문과 진우가 명성이 높았으므로, 김안로가 그들의 명성을 듣고 그 문하(門下)에 들어오게 하려고 아들을 보내어 종유(從遊)하기를 청했으나 그들이 거절하여 쫓아 보냈다. 진우 · 유경인 등이 김안로 일당의 죄악을 배척해 성토했던 적이 있는데, 1535년(중종30) 김안로가 이것을 가지고 국정을 비방했다고 논죄하며 그들을 잡아다가 대궐 뜰에서 문초하였다. 처음에 심문할 때 민기문은 진우 등과 서로 알기는 하나 모여서 역적질을 모의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그러나 형신(刑訊)을 더하자 진우 · 유경인을 만나게 된 경위와 유경인이 김안로 일파인 채무택(蔡無擇) · 이임(李任) · 황기(黃琦) 등이 대간으로서 지나치게 논박한다고 비판하며 그들의 제거를 주장한 것 등을 말하였다. 진우는 비분강개하여 부책(簿責)하는 대로 대답하였다가 주모자로 몰려서 죽음을 당하였고, 나머지는 유배되었는데, 민기문도 홍산(鴻山)으로 귀양을 갔다.
1537년(중종32) 좌의정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를 폐위시키려고 하다가 실패하여 처형되자, 민기문은 즉시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1538년(중종33) 중종이 성균관에 거둥하여 진강(進講)을 실시하였는데, 당시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는 전강(殿講)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 회시(會試)에 바로 응시하게 되었고, 1540년(중종35) 식년 문과에서 을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1541년(중종36) 홍문관 저작(著作)으로 승진하였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옮겼다가, 홍문관으로 들어가서 박사(博士) ·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543년(중종38)부터 대성(臺省)과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이조의 낭관(郎官)에 여러 차례 추천되었으나 임명되지는 못하였다.
인종∼명종 시대 을사사화
1545년 12세의 나이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 문정대비(文定大妃: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당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과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이 정권을 다투었는데, 윤임을 따르는 이들을 대윤파, 윤원형을 따르는 이들을 소윤파라 하였다. 윤원형은 중추부 지사정순붕(鄭順朋) · 병조 판서이기(李芑) · 호조 판서임백령(林百齡) 등과 결탁하여 옥사를 일으켜서, 윤임과 그가 등용한 사림파(士林派)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문정대비의 밀지로 대사헌(大司憲)민제인(閔齊仁)과 대사간(大司諫)김광준(金光準)을 협박하여 양사(兩司)의 관원들을 모아 놓았다. 윤임과 좌의정유관(柳灌) · 이조 판서유인숙(柳仁淑) 등이 봉성군(鳳城君)이완(李岏: 중종의 아들)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고 하며 대간들에게 그들의 죄를 논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헌부 지평민기문을 비롯한 집의송희규(宋希奎) · 장령정희등(鄭希登) 등과 사간원 사간박광좌(朴光佐) · 헌납백인걸(白仁傑) 등 여러 대간들은 이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윤원형 일당을 탄핵하려 하였다. 윤원형 일당은 다음날 중신회의를 열어 그 자리에서 윤임과 유관 · 유인숙을 유배 보내고, 민기문을 비롯하여 송희규 · 정희등 · 박광좌 · 백인걸 등은 옥에 가두었다가 심문한 다음 파직시켰다. 이것이 바로 <을사사화(乙巳士禍)>이다. 윤임과 유관 · 유인숙은 인종의 장례 전에 처형당하였고, 대윤파의 정희등 · 나숙(羅淑) · 박광우(朴光佑) 등 10여 명도 죽음을 당하였다.
양재역 벽서 사건
1546년(명종1) 그가 병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을사사화 때의 일로 탄핵을 당해 개성부도사(開城府都事)로 좌천되었다. 1547년(명종2) <양재역(良才驛)의 벽서(壁書)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부제학(副提學)정언각(鄭彦慤)이 양재역의 벽 위에 쓰여 있던 “여주(女主: 문정왕후)가 위에서 집정하고 간신(姦臣)들이 아래에서 농권(弄權)한다.”라는 글을 고발하여 발생한 사건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하여, 봉성군이완과 송인수(宋麟壽) · 이약빙(李若氷)은 처형하고, 이언적(李彦迪) · 노수신(盧守愼) · 유희춘(柳希春) · 권벌(權橃) · 백인걸 등 30여 명은 유배 보냈다. 민기문도 연루되어 임천(林川)으로 귀양갔다가 4년만인 1551년(명종6)에 백인걸 등과 함께 방환(放還)되었다. 그는 사면(赦免)을 받아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왔으나, 문을 닫고 조용히 지내면서 남과 교유하거나 벼슬하지 않았다. 당시 윤원형의 권세가 극성하였는데, 사람을 보내어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벼슬로써 유혹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명종∼선조 시대 활동
1565년(명종20) 문정대비가 죽고 친정을 하게 된 명종은 사림파의 인재를 다시 등용하면서 민기문 등에게 직첩(職帖)을 되돌려주었다. 그리고 명종은 외삼촌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비)의 외삼촌 이량(李樑)의 세력을 키워 주었다. 이 때 이량은 민기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으나 그는 끝내 이에 응하지 않았다. 1566년(명종21) 민기문은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는데, <을사사화> 이후 20년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비로소 서용되었기에, 사람파에서 모두 기뻐하였다. 곧 연안부사(延安府使)로 나갔다가, 의정부로 들어가서 검상(檢詳) · 사인(舍人)으로 승진하였고, 이듬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었으며 홍문관 응교(應敎)를 거쳐, 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다.
1568년(선조1) 홍문관 전한(典翰)에 임명되었다가, 직제학(直提學)으로 승진하였고, 특별히 부제학에 임명되었다. 그때 중국 명(明)나라 사신이 왔는데, 윤근수(尹根壽) 등과 함께 임시 반관(伴館)에 임명되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또 춘추관(春秋館)에서 『명종실록(明宗實錄)』을 편찬하기 위하여 실록청(實錄廳)의 인원을 보충할 때 도청(都廳) 낭청(郞廳)이 되었다. 1569년(선조2)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부승지로 승진하였고, 대사간에 임명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으로 옮겼다. 이때 도목정사(都目政事)에서, <을사사화> 때 귀양갔다가 풀려나서 당상관(堂上官)에 오른 사람은 민기문을 비롯하여 백인걸 · 노수신 · 황박(黃博) · 김난상(金鸞祥) · 유희춘 · 이담(李湛) · 이진(李震) · 이원록(李元祿) 9명이었다. 그 뒤에 예조 · 형조의 참의로 옮겼고, 1573년(선조6)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좌부승지에 임명되었다. 조정의 부름을 받고 돌아오다가 1574년 9월 30일 개성(開城)에 이르러 지병으로 죽으니, 향년이 64세였다. 그는 오랜 귀양살이에서 풍토병을 얻어서 평생 고생하였다.
성품과 일화
민기문의 자질과 성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단아(端雅)하고 정숙하였으며, 사람됨은 자상하고 정성스러웠으나, 주장하는 논의는 꿋꿋하고 정직하였다. 그는 젊어서부터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났으므로, 누구보다 먼저 추천되어 간쟁(諫諍)하고 논사(論思)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할 사람이었다. 불행하게도 김안로나 윤원형 같은 권신이 집정하는 시기에 살면서, 여러 번 옥사에 연루되어 20년간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청렴한 명망과 곧은 절개를 변함없이 그대로 지켜 나갔다. 그 덕분에 평생 여러 차례 좌절되었으나 낙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윤원형이나 이량이 그를 회유하였어도 끝내 응하지 않을 수 있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시흥) 백암리(白巖里)의 선영에 있는데, 그의 증손자 민성휘(閔聖徽)의 부탁으로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갈명(墓碣銘)과 민성휘의 친구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부인 경주최씨(慶州崔氏)는 성균관 생원 최흡(崔潝)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장남은 민이(閔涖)이고, 차남은 민계(閔洎)이며 3남은 민용(閔溶)이다. 장남 민이의 아들 민유부(閔有孚)는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조 정랑을 지냈고, 손자 민유부의 아들 민성휘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판서를 지냈다. 3남 민용의 아들 민유경(閔有慶)은 문과에 급제하여 돈령부(敦寧府) 도정(都正)을 지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보감(國朝寶鑑)』
- 『청음집(淸陰集)』
- 『백헌집(白軒集)』
- 『퇴계집(退溪集)』
- 『미암집(眉巖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문소만록(聞韶漫錄)』
- 『백사집(白沙集)』
- 『상촌잡록(象村雜錄)』
- 『석담일기(石潭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학봉전집(鶴峯全集)』
- 『충재집(冲齋集)』
- 『충암집(冲庵集)』
- 『면앙집(俛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