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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6 판




총론

[1493년(성종 24)∼1549년(명종 4) = 57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군자감(軍資監)정(正)과 삼척부사(三陟府使) 등을 지냈고, 의정부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봉작(封爵)은 해징부원군(海澄府院君)이다. 자(字)는 구부(懼夫)이고, 호는 지족암(知足庵)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사용(副司勇)윤희림(尹希琳)이고, 어머니 죽산 박씨(竹山朴氏)는 수안군수(遂安郡守)박준산(朴峻山)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장원서(掌苑署)장원(掌苑)윤계정(尹繼丁)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진무부위(進武副尉)윤연령(尹延齡)이다. 좌의정윤두수(尹斗壽)와 좌찬성(左贊成)윤근수(尹根壽)의 아버지이고, 영의정윤방(尹昉)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처음에 항재(恒齋)유운(柳雲)에게 수학하다가, 나중에 정암(靜菴)조광조(趙光祖)에게 사사하였다.

중종~명종 시대 활동

1519년(중종 14)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그해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났다. 스승 조광조가 체포되어 투옥되자, 성균관의 유생(儒生)들과 함께 그의 무죄를 호소하였다.[『고봉집(高峯集)』 권3 「고군자감정증이조참판윤공묘갈명(故軍資監正贈吏曹參判尹公墓碣銘)」 이하 「윤변묘갈명」으로 약칭] 그러나 조광조는 능주(綾州)로 귀양을 가서 사사(賜死)되었고, 김정(金淨)김식(金湜) 등의 사림파(士林派)가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훈구파(勳舊派)의 홍경주(洪景舟)와 남곤(南袞) 등이 정권을 잡았다. 1522년(중종 17)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방목』] 이때 그를 조광조의 일파로 지목하여 ‘기묘당인(己卯黨人)’이라며 배척하는 자가 있어서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침내 성균관 학유(學諭)에 임명되었다. 그 뒤에 봉상시(奉常寺)참봉(參奉)을 거쳐서, 의정부 사록(司錄)으로 전임되었다.[「윤변묘갈명」]

1526년(중종 21) 성균관 전적(典籍)이 되었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 1527년(중종 22) 해남현감(海南縣監)으로 나갔다가, 임기가 만료되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에 임명되었다. 한편 1532년(중종 27) 사헌부에서 윤변이 해남현감으로 있을 때, 탐오하고 무례하였다고 탄핵하는 바람에 파직되었다.[『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27년 9월 9일]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달랐는데, 윤변은 해남현감으로 있을 때 정사를 공정하고 엄격하게 처리하면서 토호(土豪)들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만을 가졌던 토호들이 훈구파의 대관(臺官)에게 부탁해서 윤번을 중상 모략하였던 것이다.[「윤변묘갈명」]

1533년(중종 28) 형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 그때 김안로(金安老)가 우의정이 되고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명종(明宗)을 낳았다. 중종은 인종(仁宗)을 낳은 단경왕후(端敬王后)가 세상을 떠나자, 문정왕후를 왕비로 맞아들였다. 문정왕후의 세력이 점차 커지자, 중종은 세자 인종을 보호하기 위하여 인종의 누이인 효혜공주(孝惠公主)의 시아버지 김안로를 중용하였다. 김안로는 허항(許沆) 및 채무택(蔡無擇) 등과 손을 잡고 정적을 축출하는 옥사를 여러 차례 일으킨 인물이었다. 윤변이 형조 정랑이 되었을 때에는 허항과 관련된 노비 송사 사건이 있었다. 송사의 잘못은 분명히 허항에게 있었으나, 송사의 판결을 맡은 형조에서 허항의 눈치를 보면서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다. 이에 형조 정랑윤변이 그 소송을 사실대로 판결하려고 하자, 형조 판서(判書)가 허항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판결을 적극 만류하였다. 그러나 윤변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끝내 허항에게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

1535년(중종 30) 명(明)나라에 가는 사신(使臣)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으나, 사간원(司諫院)에서 탄핵하기를, “윤변은 탐오스러워 평소 물의가 많았으므로 사신 일행을 규찰하는 책임을 그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하자, 중종이 그를 결국 체직하였다.[『중종실록』중종 30년 4월 22일] 이어 사헌부에서 연달아 윤변을 탄핵하는 바람에, 그는 결국 형조 정랑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그때 사간원에서 윤변을 탄핵한 까닭은 평소부터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노비 사건으로 윤변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허항을 부추겼기 때문이었다.[「윤변묘갈명」] 그 뒤에 윤변은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을 거쳐서 다시 형조 정랑이 되었다.[「윤변묘갈명」] 이후 김안로 일파는 문정왕후를 폐위하려고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였다.

1536년(중종 31) 종부시(宗簿寺)첨정(僉正)을 거쳐서, 장악원(掌樂院) 첨정이 되었다.[「윤변묘갈명」] 1537년(중종 32) 숙천부사(肅川府使)로 나가서 임기를 두 번이나 채우고, 1542년(중종 37) 사섬시(司贍寺)를 거쳐, 사복시(司僕寺)부정(副正)으로 승진하였다. 이어 군자감(軍資監)정(正)이 되었으며, 1543년(중종 38)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중종실록』중종 38년 8월 3일, 「윤변묘갈명」] 1544년(중종 39)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동안 상례(喪禮)를 치르는 중에 그해 11월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그런데 8개월도 못되어, 1545년(명종 즉위년) 7월 인종이 세상을 떠나고, 그 동생 명종이 즉위하였다.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는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켰다. 그러자 명종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의 소윤(小尹)이 인종의 외삼촌 윤임(尹任)의 대윤(大尹)을 타도하였다. 이때 사림파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윤변은 상중에 있었기 때문에 무사할 수 있었다.

상을 마친 후, 1547년(명종 2) 성균관 사예(司藝)에 임명되었고, 사도시(司䆃寺) 부정으로 옮겼다.[「윤변묘갈명」] 이듬해인 1548년(명종 3) 삼척부사로 나갔는데, 1549년(명종 4) 7월 8일 삼척 임지에서 전염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57세였다.[「윤변묘갈명」]

문집으로는 1권의 『지족암집(知足庵集)』이 남아 있다. [「윤변묘갈명」]

성품과 일화

윤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성이 강직하고 엄격하였으며, 기국이 높고 단정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감히 그에게 옳지 않은 일을 가지고 청탁하지 못하였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여이고, 처음에 항재(恒齋)유운(柳雲)에게 수학하였는데, 항재가 항상 그의 자질을 칭찬하였다고 한다. 그 뒤에 정암조광조의 문인이 되었다.[「윤변묘갈명」]

그는 오로지 책 읽기만을 좋아하여, 큰 병에 걸리지 않는 한 항상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유운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스승 집안의 일을 항상 게을리 하지 않고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 윤변은 다섯 아들들을 키울 때 과실이 있으면 아들이 반드시 그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하여 고치도록 하였다. 그는 항상 훈계하기를, “삼강(三綱)은 인도(人道)의 큰 것이니, 사람으로서 충효(忠孝)에 힘쓰지 않으면, 비록 아름다운 재질이 있어도 하잘 것 없는 것이다.” 하였다. 또 “말은 선하게 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행동은 선하기 하기가 어려우니, 너희들은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라며 경계시켰다.

그는 관직에 있으면서 사건을 처리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시비(是非)를 철저히 분석하고, 일단 그 시비가 결정되면 의심하지 않고 처리하였다. 그가 형조에 있을 때에 죄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법으로는 사형될 만큼 무거운 죄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심문하던 옥관이 조작하여 사형을 받게 되었다. 윤변이 그를 불쌍하게 여겨서 그 억울한 사정을 변론하여 사형을 면하게 하였다. 1537년(중종 32) 윤변이 숙천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한 사람이 비를 무릅쓰고 말 앞에 와서 엎드려 절을 하자 윤변이 놀라서 “누구인가?” 하고 물었다. 그가 울면서, “공의 명찰한 판결에 힘입어 죽음을 면하게 되었는데, 공은 마땅히 음덕(陰德)의 보답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나중에 그의 두 아들이 정승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은 아버지의 음덕 덕분이라고 할 것이다.

윤변은 성품이 곧아서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굽혀서 남을 따르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이 높이 올라가지 못하고 낮은 관직에 머물렀다. 그러나 그는 이를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일생 한 번도 실권자의 문전에 가서 벼슬을 구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번 큰 고을을 맡았으나, 청렴하고 근신(謹愼)하여 고을 수령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행낭이 텅 비어 있었다. 그가 부사로 있던 평안도 숙천은 북경(北京)으로 사신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러므로 숙천 고을의 수령이 된 자들은 대부분 역관(譯官)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들에게 돈을 주어서 중국 물화(物貨)를 사오게 하여 부(富)를 축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6년 동안이나 숙천부사에 재직하면서도 한 번도 역관들과 상대하여 허튼 수작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윤변묘갈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동도(東道) 오음리(梧陰里)에 있고, 고봉(高峯)기대승(奇大升)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변묘갈명」]

첫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인 청안군(淸安君)이영(李嶸)의 딸인데, 자녀는 3남을 두었다. 장남 윤담수(尹聃壽)는 승사랑(承仕郞)으로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고, 차남 윤기수(尹期壽)도 일찍 죽었으며, 3남 윤춘수(尹春壽)는 예빈시(禮賓寺) 별좌(別坐)를 지냈다. 둘째 부인 성주 현씨(星州玄氏)는 부사직(副司直)현윤명(玄允明)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4남 윤두수는 좌의정을 지냈고, 5남 윤근수는 좌찬성(左贊成)을 지냈으며, 딸은 별좌(別坐)정순희(鄭純禧)의 처가 되었다.[「윤변묘갈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간이집(簡易集)』
  • 『정암집(靜菴集)』
  • 『호음잡고(湖陰雜稿)』
  • 『입암집(立巖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면앙집(俛仰集)』
  • 『추파집(秋坡集)』
  • 『이재유고(頤齋遺藁)』
  • 『오아재집(聱齖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