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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2일 (금) 01:40 판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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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박홍구 |
한글표제 | 박홍구 |
한자표제 | 朴弘耈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명종~인조 |
집필자 | 박은화 |
자 | 응소(應邵) |
호 | 이호(梨湖)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52년(명종 7) |
사망 | 1624년(인조 2) |
본관 | 죽산(竹山) |
주거지 | 서울 |
증조부 | 박수륜(朴守綸) |
조부 | 박수(朴洙) |
부 | 박난영(朴蘭英) |
모_외조 | 고성 남씨(固城南氏):남대년(南大年)의 딸 |
형제 | (형)박홍수(朴弘壽) (동생)박홍복(朴弘福) |
처_장인 | 순창 설씨(淳昌薛氏) : 설순(薛珣)의 딸 →(자녀)4남 |
자녀 | (1자)박유장(朴有章) (2자)박지장(朴知章) (3자)박취장(朴就章) (4자)박내장(朴來章) |
저술문집 | 『황화집류(皇華集類)』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박홍구(朴弘耈) |
총론
[1552년(명종 7)~1624년(인조 2) = 73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병조 판서(判書)와 의정부(議政府)좌의정(左議政) 등을 지냈다. 자는 응소(應邵)이고, 호는 이호(梨湖)이다. 본관은 죽산(竹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초명은 박홍로(朴弘老)이다. 아버지는 도정(都正)박난영(朴蘭英)이고, 어머니 고성 남씨(固城南氏)는 남대년(南大年)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수(朴洙)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박수륜(朴守綸)이다.
선조 시대 활동
박홍구(朴弘耈)는 1576년(선조 9) 진사(進士)가 되었으며, 1582년(선조 15)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1583년(선조 16) 8월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는데, 이 때 김우옹(金宇顒) 등과 같이 김응남(金應南)의 제주목사(濟州牧使) 임명을 도로 회수하기를 요청하였다.[『선조실록』선조 16년 8월 20일] 1590년(선조 23) 12월에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23년 12월 27일] 1593년(선조 26) 5월에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가 되었고, 그 해 7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이 되었으며, 8월에는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26년 5월 29일, 선조 26년 7월 4일, 선조 26년 8월 19일] 1594년(선조 27) 1월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전라도에 조도어사(調度御史)로 파견되었고, 그 해 12월에는 사간원 헌납(獻納)을 거쳐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는데, 이 때 시독관(侍讀官)을 겸하였다.[『선조실록』선조 27년 1월 4일, 선조 27년 12월 1일, 선조 27년 12월 22일]
1595년(선조 28) 4월 홍문관 응교(應敎)가 되었고, 그 해 10월에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가 되었으며, 얼마 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28년 4월 8일, 선조 28년 10월 4일, 선조 28년 10월 14일] 1596년(선조 29) 6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부족한 군량미 확보에 진력하였으나, 전임 관찰사였던 홍세공(洪世恭)에 비해 군정이 크게 문란해져 백성들이 실망하였다.[『선조실록』선조 29년 6월 15일] 1597년(선조 30) 7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가 되었고, 그 해 10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으며, 11월에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와 병조 참판(參判)을 지냈다.[『선조실록』선조 30년 7월 14일, 선조 30년 10월 16일, 선조 30년 11월 8일, 선조 30년 11월 22일] 1598년(선조 31) 5월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599년(선조 32) 12월 다시 병조 참판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1년 5월 19일, 선조 32년 12월 6일] 1600년(선조 33) 승정원 도승지와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1601년(선조 34) 성균관 대사성과 호조 참판을 거쳐, 그해 8월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가 되고 가선대부(嘉義大夫)의 품계를 받았다.[『선조실록』선조 33년 5월 7일, 선조 33년 7월 10일, 선조 34년 1월 15일, 선조 34년 3월 23일, 선조 34년 8월 2일, 선조 34년 8월 13일] 10월에는 다시 호조 참판이 되었는데, 이 때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였다.[『선조실록』선조 34년 10월 13일] 그리고 그 해 11월 진하부사(進賀副使)로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다가 돌아와 그 다음해인 1602년(선조 35) 5월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10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4년 11월 24일, 선조 35년 5월 25일, 선조 35년 10월 4일]
1603년(선조 36) 1월 품계가 가자(加資)되었으며, 3월에는 편찬에 참여한 『황화집류(皇華集類)』가 완성되어 아마(兒馬) 1필을 하사받았다.[『선조실록』선조 36년 1월 13일, 선조 36년 3월 20일] 이후 사헌부 대사헌(大司憲)과 중추부 지중사(知事), 중추부 첨지사(僉知事), 중추부 동지사(同知事)를 돌아가며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605년(선조 38) 1월 예조 판서를 거쳐, 그 해 12월 형조 판서가 되었다.[『선조실록』선조 38년 1월 4일, 선조 38년 12월 10일] 이어 1606년(선조 39) 상호군(上護軍)이 되었는데, 그가 형조 판서로 있을 때의 문제들로 탄핵을 받았다 관노(館奴)를 추열(推閱)하다가 미처 끝마치지 않고 성급히 매듭지었고, 소명(召命)이 있었는데도 병을 핑계하고 달려오지 않았다고 사헌부에서 탄핵을 하였던 것이다.[『선조실록』선조 39년 6월 24일] 이후 그 해 12월 다시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병조 판서와 중추부 지사, 경연청(經筵廳) 동지사(同知事),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선조실록』선조 39년 12월 25일, 선조 40년 2월 25일, 선조 40년 8월 1일, 선조 40년 9월 27일]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2월 예조 판서가 되었고, 이어 빈전도감(殯殿都監)제조(提調)가 되었으며, 그 해 8월에는 경연청 지사(知事)를 겸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즉위년 2월 7일, 광해군 즉위년 8월 6일, 광해군 즉위년 8월 20일] 1609년(광해군 1) 7월 돈녕부(敦寧府)판사(判事)를 거쳐, 8월에는 호조 판서, 9월에는 병조 판서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7월 3일, 광해군 1년 8월 3일, 광해군 1년 9월 6일] 1610년(광해군 2) 3월 병조 판서로서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그 해 5월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이 되었으며, 그 해 12월 가례도감(嘉禮都監) 제조를 겸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3월 27일, 광해군 2년 5월 17일, 광해군 2년 12월 23일] 1612년(광해군 4) 1월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었고, 이듬해인 1613년(광해군 5) 12월 공성왕후(恭聖王后)책봉주청사(策封奏請使)로 갔다가 그 뒤에 돌아왔다.[『광해군일기』광해군 4년 1월 11일, 광해군 4년 1월 17일, 광해군 5년 12월 11일] 1616년(광해군 8) 9월에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고, 1617년(광해군 9) 3월에는 중추부 지사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8년 9월 5일, 광해군 9년 3월 26일] 그리고 이듬해인 1618년(광해군 10) 8월에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가, 1619년(광해군 11) 3월에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8월 5일, 광해군 11년 3월 13일] 이 때 시약청(侍藥廳) 도제조(都提調)도 겸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1년 12월 13일]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삭직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3월 17일]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亂)> 때 그는 광해군을 태상왕(太上王)으로 받들고, 선조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仁城君)을 왕으로 모신다는 복위 음모와 관련되어 역모죄로 사사(賜死)되었다. 재산은 적몰되었으며, 여러 아들 박유장(朴有章) · 박지장(朴知章) · 박내장(朴來章)과 조카 박윤장(朴允章) · 박성장(朴成章)들도 모두 죽어서 남은 후손이 없다.[『인조실록』인조 2년 11월 8일, 인조 2년 11월 17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9년 1월 16일]]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었다.
성품과 일화
박홍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몸가짐이 단정하고 일을 처리함에 주밀하고 자세하였다.[『선조실록』선조 33년 7월 13일] 반면에 성품이 빌붙기를 좋아하여 홍여순(洪汝諄)이 조정에 있을 때 그의 문하(門下)에 빌붙었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천하게 여겼다는 정반대의 평가도 있다.[『선조실록』선조 34년 10월 13일]
후손
부인 순창 설씨(淳昌薛氏)는 설순(薛珣)의 딸인데, 자녀는 4남을 두었다. 장남은 직장(直長)박유장(朴有章)이고, 차남은 박지장(朴知章)이고, 삼남은 박취장(朴就章)이며, 사남은 박내장(朴來章)이다. 그러나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역모에 연루되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